생각하되 생각하지 않는다(於念而無念)? 목각인형과 분별론자
선가에서 흔히 하는 말중에
선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분별하지 말라’이다. 이 말뜻을 잘못이해하면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마치 ‘식물인간’처럼 ‘무분별’상태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또 선가에서는 무념을 이야기 한다. 이말 역시 ‘아무생각도 하지말라’는 뜻으로 오해 할 수 있다.
무념이라는 말은 육조 혜능에 따르면 “생각하되 그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於念而無念)”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애매하고 모호하고 암호문 같은 말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과 의미가 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선가에서 말하는 무분별, 무념, 무상, 무주 등 무자로 시작되는 말은 여러모로 혼란을 야기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무의식상태’나 ‘식물인간’이 생각나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정신에 대한 제어의 경(S1.24)
혼란스런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마치 무의식상태나 식물인간처럼 아예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할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데와따(하늘사람)와 부처님의 대화가 있다.
Manonivāraṇasuttaṃ
Sāvatthiyaṃ-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Yato yato mano nivāraye
Na dukkhameti naṃ tato tato,
Sa sabbato manonivāraye
Sa sabbato dukkhā pamuccatīti.
(Bhagavā:)
Na sabbato mano nivāraye
Mano yatattamāgataṃ,
Yato yato ca pāpakaṃ
Tato tato mano nivāraye'ti.
마음의 고삐 경
2. [천신]
“어떠한 마음[意]이건 고삐를 죄면
거기서 괴로움은 오지 않다네.
모든 곳에서 마음의 고삐를 죄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합니다.”
3. [세존]
“마음[意]이 이미 잘 제어되어 있다면
모든 곳에서 마음 고삐 죌 필요는 없으리.
그에게서 사악함이 생겨나올 때
그런 때에 마음 고삐 죄어야 하리.”
(마음의 고삐 경, 상윳따니까야 S1.24, 각묵스님역)
정신에 대한 제어의 경
1. [하늘사람] “정신을 길들이고 제어하여
괴로움의 길을 가지 않네.
모든 경우에 대하여 정신을 제어해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
2. [세존] “정신이 제어되었으면
일일이 정신을 제어할 필요가 없으리.
악한 것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마음을 제어하여야 하리.”
(정신에 대한 제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4, 전재성님역)
Reining in the Mind
“From whatever one reins in the mind,
From that no suffering comes to one.
Should one rein in the mind from everything,
One is freed from all suffering.”
“One need not rein in the mind from everything
When the mind has come under control.
From whatever it is that evil comes,
From this one should rein in the mind.”
(CDB, 빅쿠보디)
게송을 보면 하늘사람과 부처님의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늘사람은 마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마음에 대하여 제어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지 선심과 불선심을 구분하여 단지 악한 마음만 제어하면 된다고 말한다.
각주를 보면
게송에 대한 각주를 보았다. 먼저 빅쿠 보디의 영문 각주는 다음과 같다.
Readings of pada b differ. I follow Se and Ee2, manoyatattamm āgataṃ, as against Be na manosamyatattam āgataṃ.
Spk: This deva held the view that one should rein in every state of mind; whether wholesome or not, whether mundane or supramundane, the mind should be reined in, not aroused.
[Spk-pt: He believed that every state of mind brings suffering and that the unconscious state is better.] The Buddha spoke the rejoinder to show that a
distinction should be made between the mind to be reined in and the mind to be developed. See 35205 (IV 195,~-30), where the Buddha advises reining in the mind (tato cittam nivāraye) from objects that arouse the defilements.
(빅쿠 보디, CDB 259p 47번 각주)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b구절은 다르게 읽는다. 나는 Be의 na manosamyatattam āgataṃ 대신에 Se 와 Ee2의 manoyatattamm āgataṃ 을 따른다.
주석(Spk): 이 천신은 모든 마음의 상태를 억제하여만한다는 관점에 매달려 있다. 전체이건 아니건, 세간이건 출세간이건, 마음은 일어나지 않아야하고 억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복주석 (Spk-pt): 그는 매번 마음의 상태가 고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런이유로 차라리 무의식 상태가 낫다고 본다.]
부처님은 안으로 억제된 마음과 계발된 마음 사이에게 형성된 차이에 대하여 설명한다. 35:205 (IV 195,15-30)를 보라. 거기에서 부처님은 마음의 오염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어떻게 마음(tato cittam nivāraye)을 억제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진흙속의 연꽃 번역)
빅쿠 보디는 각주에서 Be, Se라는 용어가 보인다. Be는 ‘미얀마 6차 결집본’을 말하고, Se는 ‘스리랑카본’, Ee2는 ‘PTS 본’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Ee2의 PTS 본을 따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Be의 na manosamyatattam āgataṃ 대신에 Se 와 Ee2의 manoyatattamm āgataṃ 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이와 반대로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Mano yatattam āgataṃ : PTS본은 na manosamyatattam āgataṃ 으로 되어 있으나 미얀마본은 mano yatattam āgataṃ으로 되어 있고 Srp.I.51도 미얀마본과 같다. 그리고 하늘사람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든 착하고 건전한 것이든 세간적이고 출세간적이든 모든 마음의 상태를 억제해야 한다고 했으나 부처님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전협 각주, 전재성님)
mano yatattam āgataṃ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PTS본(Se)이라 하고, 전재성님은 미얀마본(Be)이라 한다. 대체 어는 것이 맞는 것일까?
빅쿠 보디가 틀렸다
THE TIPITAKA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PTS본에 따르면 ‘Na mano saṃyatattaṃ-machasaṃ, sayatattaṃ-[PTS]’이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빅쿠 보디가 틀렸다. 빅쿠보디는 “I follow Se and Ee2, manoyatattamm āgataṃ, as against Be na manosamyatattam āgataṃ.”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나는 Be(미얀마본)의 na manosamyatattam āgataṃ 대신에 Se(싱할라본) 와 Ee2(PTS본)의 manoyatattamm āgataṃ 을 따른다.”라가 된다. 따라서 빅쿠 보디는 미얀마본(Be)과 TPS본 (Ee)을 혼동하고 있는 듯 하다.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마음[意]’은 mano를 옮긴 것이다. 본서 전체에서 mano는 마노[意]로 옮기고 있지만 여기서처럼 문맥상 마음[意]으로 옮긴 곳도 있다. 마음[心]과 마노[意]의 차이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해제 §3-(2)-⑤를 참조할 것.
**주석서에 의하면 이 천신은 유익한(kusala) 마음이건, 세간적인(lokiya) 마음이건, 출세간적인(lokuttara) 마음이건, 모든 경우에 다 고삐를 죄어서(nivaretabba)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uppadetabba)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복주서는 여기에 대해서 이 천신은 어떤 마음이든 일어나면 그것은 다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무의식 상태(acittaka-bhava)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SA.i.50)
여기에 대해 세존께서는 ‘이 천신은 벗어남으로 인도하지 않는 말(aniyyanikakatha)을 하고 있다. 마음은 고삐를 죄어야 할 마음도 있고, 닦아야 할 (bhavetabba) 마음도 있다’라고 생각하시면서 이 두 번째 게송을 말씀하신 것이다.(Ibid) 마음의 고삐를 죄는 것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류트 비유 경」(S35:246) §3을 참조할 것.
(초불연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미얀마본(Be)과 TPS본(Ee)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음의 고삐를 죄는 것에 대해서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참고하라는 경이 소개 되어 있다. 그래서 ‘35:205 (IV 195,15-30)를 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거기에서 부처님은 마음의 오염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어떻게 마음(tato cittam nivāraye)을 억제하는지 설명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S35;205을 보면 전혀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 아마 ‘오타’로 보인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마음의 고삐를 죄는 것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류트 비유 경」(S35:246) §3을 참조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찾아 보니 ‘비파에 대한 비유의 경(S35:246)’이다. 경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승이나 수행녀들이라도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에 대하여 마음으로 욕망이나 탐욕이나 분노나 미혹이나 혐오를 일으킨다면 그것으로부터 이와 같이 ‘이 길은 두렵고 무섭고 가시밭이고 정글이고 잘못된 길이고 사악한 길이고 위험하다. 이 길은 선하지 못한 사람이 의지하는 길로서 참사람이 의지하는 길이 아니다. 그대는 여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으로부터 수호해야 한다’ 라고 마음을 수호해야 한다.
(Vīṇopamasutta- 비파에 대한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4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감각대상을 보았을 때 욕망, 분노, 혐오 등을 일으킨다면 알아차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게송에서 “악한 것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마음을 제어하여야 하리.(S1.24)”라고 말한 것과 일치 한다. 마음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라 두려워 하여 모든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불선한 것에 대해서만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충분히 익은 곡물과 게으르지 않은 밭지기가 있다면 곡물을 먹는 소가 그 밭에 들어가더라도 그 밭지기는 그의 고삐를 견고하게 잡아챌 것이고 고삐를 견고하게 잡아채고 이마의 상부를 꽉 붙잡아 맬 것이고 이마의 상부를 꽉 붙잡아 매고 몽둥이로 매섭게 때릴 것이고 몽둥이로 매섭게 때리고 놓아 줄 것이다.
(Vīṇopamasutta- 비파에 대한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46, 전재성님역)
소의 고삐풀린 망아지가 보리 밭에 들어가면 농사를 망칠 것이다. 이는 목동이 게으르기 때문이다. 근면한 목동이라면 우선 고삐를 단단히 맬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밭에 들어 가지 않더록 몽둥이질을 할 것이다. 이렇게 고삐가 단단하게 매인 망아지는 좋아하는 보리를 보아도 몽둥이로 맞은 경험이 생각나서 다시는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매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수행승에 대하여 “여섯 접촉영역에서 곧 승복받고 바로 승복받아 내심으로 확고하고 그치고 통일되고 집중 되어 있다.(S35:246)”라고 하였다.
마노(意), 윈냐나(識), 찟따(心)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마노(mano)에 대하여 마음이라고 옮겼다. 이는 초불연의 번역방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빠알리어 mano에 대하여 원음 그대로 ‘마노’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주를 통하여 예외적으로 ‘마음’으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마노에 대하여 초지일관 ‘정신’이라는 번역어를 유지하고 있다.
빠알리 게송을 보면 하늘사람과 부처님은 ‘mano nivāraye’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마노(man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정신’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마음’이라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기존의 ‘마노’라는 빠알리 원음 그대로 번역을 내버려 두고 ‘마음’이라 하였을까? 아마도 ‘마노’라는 말이 게송번역에서 적합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본다. 또 한편의 빅쿠 보디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빅쿠 보디는 mano에 대하여 ‘mind’라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노(意), 윈냐나(識), 찟따(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전재성님의 심의식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心, citta)과 정신(意, mano)과 의식(識, viññāṇa)은 초기불교의 주석적 전통이나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마음’은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유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인지적인 측면의 중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음은 인도철학에서 사유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의도-충동-기분-성격-마음의 상태-인상에 대한 반응을 대변한다.
그리고 마음은 ‘심장’으로 구체화된 요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서 ‘정신’은 우리의 이지적이고 추론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의 중심을 말하며, 우리의 의식의 지적-사유적 기능을 대변한다.
그 정신은 마음에 비해 보다 미세한 요소적 특성 즉, 보다 미세한 느낌이나 사유를 대변한다. 그리고 ‘의식’은 감각과 감각적 반응인 지각의 중심으로 순수한 알아차림을 대변한다.
(심의식에 대한 주석, 전재성님)
일반적으로 마음이라 부르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심, 의, 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로 분류 되는 마음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성전협회와 초불의 번역어를 함께 실었다.
구 분 |
심(心) |
의(意) |
식(識) |
빠알리어 |
citta |
mano |
viññāṇa |
성전협 |
마음 |
정신 |
의식 |
초불연 |
마음 |
마노 |
알음알이 |
CDB(빅쿠 보디) |
mind |
mentality |
consciousness |
설명 |
1) 정서적, 인지적 측면의 중심을 의미 2)의도-충동-기분-성격-마음의 상태-인상에 대한 반응을 대변 |
1)이지적이고 추론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의 중심을 말함 2) 마음에 비해 보다 미세한 요소적 특성 즉, 보다 미세한 느낌이나 사유를 대변 |
감각과 감각적 반응인 지각의 중심으로 순수한 알아차림을 대변 |
비고 |
마음일반 |
십이처 (마노가 육식을 모두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 |
오온 (분별하여 아는 것 또는 알아차리는 것) |
심(citta)이 일반적으로 넓게 쓰이는 용어임에 비하여 의(mano)는 좀더 세분화 되고 구체화된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마노(mano,意)에 대하여 ‘정신’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빠알리 원어 그 자체로 하여 ‘마노’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식(viññāṇa)의 경우 오감으로 받아 들이는 감각적 반응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한다. 이를 전재성님은‘의식’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라고 번역하였다.
게송에서는 ‘mano nivāraye’라 하였다. 마음에 대한 술어인 citta와 mano와 viññāṇa가 있지만 마노를 선택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표를 보면 마노는 ‘이지적이고 추론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 하였다. 또 미세한 측면을 대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마노는 십이처에서 사용되고 있다.
인간에게서 감각능력은 능력의 도움으로 대상세계의 힘을 부여하고 대상세계를 파악하고 대상세계를 향유하고 대상세계를 격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작용하는 여섯감각기관을 말한다. 따라서 시각능력(cakkhu), 청각능력(sota), 후각능력(ghāna), 미각능력(jivā), 촉각능력(kāyo), 정신능력(mano) 이렇게 여섯가지 감각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능력은 표층적 의미의 감각기관과 다른 것이다. 이를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섯가지 감각기관 (표층적 감각기관) |
여섯가지 감각능력 (Indriya) |
눈동자(akkhi, 眼) |
시각능력(cakkhu indriya, 眼根) |
귀(kanna, 耳) |
청각능력(sota indriya, 耳根) |
코(nāsā, 鼻) |
후각능력(ghāna indriya,鼻根 ) |
혓바닥(jivhā, 舌) |
미각능력(jivā, indriya 舌根) |
물질적 신체(sarira, 身) |
촉각능력(kāyo indriya, 身根) |
두뇌(matthaluṇga, 意) |
정신능력(mano indriya, 意根) |
이와 같이 마노는 여섯가지 감각능력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노는 정신능력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안식 등 전오식으로 받아 들인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노에 대하여 마치 ‘링커’ 역할 같다고도 한다. 축구시합할 때 그 링커를 말한다. 마치 링커를 담담한 선수가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듯이, 마노 역시 전오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노인드리야(정신능력)’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노(意)는 십이처에서 오로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에서만 사용되는 술어이다. 따라서 전오식과 마나식 모두를 가감 없이 모두 받아 들인다. 반면 오온에서 사용되는 술어인 윈냐나(識)는 대상이 있음을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다. 그래서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림 하여 식별하는 것이다. 찟따(心)는 의와 식을 아우르는 마음일반이다. 그래서 마음(mind)이라 번역된다.
무의식 상태가 낫다는 것인가?
게송에서는 마음을 뜻하는 술어 심의식 중에 마노(의)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mano nivāraye(정신을 제어하여)’라고 하였다. 이렇게 마노라는 술어를 사용한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여 진다. 하늘사람이 “Sa sabbato manonivāraye (모든 경우에 대하여 정신을 제어해야””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늘사람은 선심이든 불선심이든 무조건 제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십이처에서 일어나는 분별없이 들어 오는 것에 대하여 모두 통제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하늘사람의 입장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복주석을 인용하여 “그는 매번 마음의 상태가 고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런이유로 차라리 무의식 상태가 낫다고 본다.”라고 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어떤 마음이든 일어나면 그것은 다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무의식 상태(acittaka-bhava)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라 하였다. 마치 ‘식물인간’처럼, 마치 색계의 ‘무상유정천’의 중생처럼 아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무심의 상태가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게송을 보면 하늘사람과 다르다. 부처님은 “Yato yato ca pāpakaṃ (악한 것이 일어날 때마다)”라고 말씀 하심으로서 선심까지 일어나지 않게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음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라 하여 마음자체를 금기시 하는 것에 대한 ‘경종’이라 본다.
만일 하늘사람 주장처럼 마음이 만악의 근원이라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든 착하고 건전한 것이든 세간적이고 출세간적이든 모든 마음의 상태를 억제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Yato yato ca pāpakaṃ Tato tato mano nivāraye (악한 것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마음을 제어하여야 하리, S1.24)”라 하였다.
부처님은 분별론자
선종에서는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무념, 무상, 무주, 무심 등을 강조한다. 이런 용어는 자칫 마음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할 수 있다. 그래서 무념, 무심의 상태가 되는 것이 최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게송에서 하늘사람도 마음 내는 것 자체가 결국 괴로움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에 감각기관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제어할 필요가 있음을 노래한다.
하지만 무념, 무심 무분별만 강조하다 보면 ‘빈데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마음은 악한(pāpaka, akusala)마음도 있지만 선한(kusala)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또 세간적인 마음도 있지만 출세간적 마음도 있다.
제어해야할 대상은 불선한 마음이다. 수시로 일어나는 어리석음(moha), 양심 없음 (ahirika), 수치심 없음(anottappa), 들뜸(uddhacca) 같은 불선한 마음이다. 또 때때로 일어나는 탐욕(lobha), 자만(mana), 성냄(dosa), 질투(issa), 인색(macchariya), 후회(kukucca), 의심(vicikaccha) 등과 같은 불선한 마음이다. 이런 불선한 마음은 제어되고 억제 되어야 한다. 이는 분별하는 마음이다.
부처님이 응답하신 게송에서 “Tato tato mano nivāraye(그때그때 마음을 제어하여야 하리, s1.24)”라고 하였을 때 마노(mano)는 ‘윈냐나’에 가깝다. 선법과 불선법을 분별하고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부처님은 ‘분별론자 (vibhajja-vādin)’이다.
남방 테라와다에서는 불교에 대하여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 자신이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분별론이라는 것이 분석을 통한 통찰이 세계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올바른 방법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분별하지 않고 무분별 또는 무심, 무념 수행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상유정천에 태어나게 될지 모른다.
목각인형 같은 존재들
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색계 사선천에 무상유정천이 있다.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sañña-satta)은 용어가 암시 하듯이 산냐(지각)가 없는 중생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몸은 있으나 정신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그들은 왜 이런 곳에 태어나는 것일까? 무상유정천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상유정(無想有情)’으로 번역되는 아산냐삿따(asañña-satta)는 인식이 없는 중생이란 뜻이다. 이들은 마음(citta)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과정(vīthi-citta)도 없다. 전생에 인식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경지를 얻고자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태어나며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고 한다.
(무상유정천, 마하시 사야도 십이연기 주석)
그의 마음에는 죽음의 마음( 死心, cuticitta)의 소멸에 의해서 그것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때 물질의 다발(색온)만이 거기에 나타난다. 방금 활의 현의 힘으로 쏘아진 화살이 현의 힘에 의해서 허공을 나는 것처럼, 그들은 선정의 힘이 쇠퇴하면 그 때에 물질의 다발이 소실된다. 여기서 결생에 대한 지각(patisandhisañña)이 생겨난다. 그러나 여기에 생기한다는 지각에 의해서 죽음이 시설된다. 그래서 지각이 생겨나면 그들은 ‘그 신들의 무리에서 죽는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무상유정천,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중생은 살아 있을 때 인식하는 것 즉, 감각기관에 부딪친 대상을 아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은 문자 그대로 ‘상이 없는(無想, asañña) 중생’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생의 모습은 어떠할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르면 마치 ‘목각인형’과도 같다고 표현하였다. 오온 중에 ‘색’만 있을 뿐 ‘수상행식’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인형이나 동상처럼 물체만 있을 뿐 아무런 정신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무상유정천에 사는 중생들은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들이다. 무상유정천에서 살때는 죽은 듯이 살지만, 거기에서 죽으면 비로소 인식이 생겨난다. 마치 식물인간처럼, 목각인형처럼 전혀 인식이 없는 상태로 살았지만 죽음과 동시에 의식이 되살아 나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우리가 말하는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것이다. 그들은 죽어야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거꾸로 살아 가는 것은 지각(산냐, 인식)하는 것을 극도로 실어 하기 때문이다. 지각함으로 인하여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무분별, 무념, 무심의 선정수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과보로 색계 사선천에 있는 무상유정천에 태어나 500겁을 살게 된다.
어떻게 우연론자가 되는가?
무상유정천의 중생들은 수명이 끝나면 즉각 지각이 살아 난다. 그래서 다시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전 생에서 지각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바로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정수행을 닦아 전생을 보는 능력이 생겼을 때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자신이 우연히 발생되었다고 믿는다. 이른바 ‘우연론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브라흐마잘라경에(D1)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adhiccasamuppanno attā ca loko ca. Taṃ kissa hetu? Ahañhi pubbe nāhosiṃ, somhi etarahi ahutvā santatāya pariṇato.
‘자아와 세계는 우연히 생겨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내가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은 현존의 상태로 전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우연론자는 육사외도 중의 하나이다. 자신과 이세상은 ‘홀연히’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지각을 혐오하는 수행을 하여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여 우연론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연론자가 되는 것은 지각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라는 삿된 생각으로 무분별, 무념, 무심 수행을 한 결과에 대하여 과보이다. 자아와 이세상이 우연히 발생되었다고 믿는다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 할지 모른다.
분별을 설하신 부처님
정신에 대한 제어의 경(Manonivāraṇasutta, S1.24)를 보면 하늘사람은 “모든 경우에 대하여 정신을 제어해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S1.24)”라 하였다. 이는 지각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 보아서 지각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각하는 것에는 악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선법과 불선법을 분별하여 알아차릴 것을 말씀 하셨다. 분별을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정신이 제어되었으면
일일이 정신을 제어할 필요가 없으리.
악한 것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마음을 제어하여야 하리.(S1.24)
2013-11-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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