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미치는 범위는
부처님오신날 법요식 행사장면을 보면 늘 듣던 말이 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퍼지기를”이라는 말이다. TV로 중계 되는 조계사 법요식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 하던 말이다.
삼붓다(Sambuddha)의 지혜광명
자비광명은 부처님의 무한한 광명을 말한다. 그래서 그 광명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광명에 대한 게송이 있다.
Pajjotasuttaṃ
Sāvatthiyaṃ -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Kati lokasmiṃ pajjotā yehi loko pakāsati,
Bhagavantaṃ puṭṭhumāgamma kathaṃ jānemu taṃ mayaṃ.
Cattāro loke pajjotā pañcamettha na vijjati,
Divā tapati ādicco rattiṃ ābhāti candimā,
Atha aggi divārattiṃ tattha tattha pakāsati,
Sambuddho tapataṃ seṭṭho esā ābhā anuttarā'ti.
[천신]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광채가 있어
그것으로 세상은 빛이 납니까?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저희는 존자께 여쭈러 왔습니다.”
[세존]
“세상에는 네 가지 광채가 있나니
다섯 번째 광채란 존재하지 않느노라.
낮에는 저 태양이 빛나고 있고
밤에는 저 달 역시 비추고 있네.
불이 있어 밤낮없이 빛을 발하나
완전하게 깨달은 그 자야말로
빛나는 것 가운데 으뜸이로니
이 광명은 위없는 밝은 것이라.”
(광채 경, 상윳따니까야 S1.26,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세상에는 몇 종류의 불빛이 있어
그것으로 세상을 비추나?
세존께 여쭈러 왔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
[세존]
“세상에는 네 가지 불빛이 있으니
그 밖에 다섯 째 불빛은 없네.
낮에는 태양이 빛나고
밤으로는 달이 비추네.
타오르는 불은 밤낮으로
여기저기 두루 비추네.
깨달은 님은 빛 가운데 으뜸이니
그야말로 위없는 광명이네.”
(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 전재성님역)
“How many sources of light are in the world
By means of which the world is illumined?
We have come to ask the Blessed one this:
How are we to understand it?”
“There are four sources of light in the world;
A fifth one is not found here.
The sun shines by day,
The moon glows at night,
And fire flares up here and there
Both by day and at night.
But the Buddha is the best of those that shine.
He is the light unsurpassed.”
(Sources of Light, CDB S1.26, 빅쿠 보디)
하늘사람이 묻는다. 세상에는 몇 종류의 광명이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비추는지 부처님에게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종류의 광명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올바로 깨달은 자의 광명은 한량이 없음을 말한다. 이때 올바로 깨달은 자에 대하여 빠알리 게송에서는 ‘삼붓다(Sambuddha)’라 하였다.
각주를 보면
두 게송에 대한 빅쿠 보디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전재성님의 상세한 각주는 보이지 않고 다만 유사한 게송이 있음을 표기 하고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두 개의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각주를 하였다.
*‘앙굿따라 니까야’ 「광채경」(A4:145)에서도 달의 광채,
태양의 광채, 불의 광채, 통찰지의 광채의 넷을 들고 있다.
(첫번째 게송 각주, 각묵스님)
** “’이 광명(esa abha)’이란 부처님의 광명(Buddh-abha)을 말한다.
왜냐하면 지혜(nana)의 공명이건, 희열의 광명이건, 청정한 믿음
(pasada)의 광명이건, 설법(dhamma-katha)의 광명이건, 이 모든
광명은 부처님들이 출현(patubhava)하심으로서 생겼기 때문이다.” (SA.i.52)
(두번째 게송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첫 번째 게송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광채 경(A4:145)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게송에서는 부처님의 여러 가지 광명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각주에서 언급한 앙굿따라니까야 광채 경은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Cattārome bhikkhave pajjotā. Katame cattāro?
Candapajjoto, suriyapajjoto, aggipajjoto, paññāpajjoto.
Ime kho bhikkhave cattāro pajjotā. Etadaggaṃ bhikkhave imesaṃ catunnaṃ pajjotānaṃ yadidaṃ paññāpajjototi.
“비구들이여, 네 가지 광채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달의 광채, 태양의 광채, 불의 광채, 통찰지의 광채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광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가운데 통찰지의 광채가 최상이다.”
(Pajjotasutta-광채 경, 앙굿따라니까야 A.145, 대림스님역)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광채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달의 광채, 해의 광채, 불의 광채, 지혜의 광채가 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지혜의 광채가 최상이다.”
(Pajjotasutta0광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45, 전재성님역)
내용을 보면 상윳따니까야의 광채 경과 동일하다. 네 가지 광채에 대하여 달, 태양, 불, 지혜라 하였기 때문이다.
빛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
앙굿따라니까야 ‘빛의 품(Ābhāvagga)’에서는 빛과 관련하여 모두 다섯 개의 경이 소개 되고 있다. 그런데 각 경마다 빛이라는 용어가 달리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장은 정형구로 되어 있고 단지 빛에 대한 용어만 달리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
우리말 |
영어 |
비 고 |
Ābhā |
빛 |
Lustres |
A4:141 |
Pabhā |
밝음 |
Radiances |
A4:142 |
Āloka |
광명 |
Lights |
A4:143 |
Obhāsa |
광휘 |
Effulgences |
A4:144 |
Pajjota |
광채 |
Lamps |
A4:145 |
우리말로 된 두 종류의 번역서를 보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경의 제목이 똑 같다. 영역은 THE TIPITAKA 사이트를 참고 하였다.
게송을 보면 이 세상에는 달, 해, 불, 지혜 이렇게 오로지 네 가지 광채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외 다섯번째 광채는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게송을 보면 지혜에 대하여 ābhā라는 표현 되고 있다. 빛을 뜻하는 여러 빠일리어가 있지만 ‘빛’을 뜻하는 아바(ābhā)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올바로 깨달은 자(Sambuddha)’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이라 볼 수 있다.
아바(ābhā, 빛)와 오바사(obhāsa, 광휘)
상윳따니까야 광채 경에서는 빛에 대하여 아바(ābhā)라 하였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서는 빛에 대한 빠알리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Itiha tena khaṇ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ñchi. Ayañca dasasahassī lokadhātu saṅ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ṇo ca uḷ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ṃ devānubhāvanti.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리자 이 소식이 릴레이형식으로 전파 되어 마침내 범천까지 전달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온 우주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문구를 보면 ‘obhāsa’가 사용 되었다. 표에 따르면 ‘광휘’에 해당된다. 상윳따니까야 게송에서는 아바(ābhā)라 하였으나 초전법륜경에서는 ‘obhāsa (광휘)’가 사용 된 것이다. 아바(ābhā, 빛)와 오바사(obhāsa, 광휘)가 구별 없이 사용 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왜 신들의 위력을 넘었다고 하였을까?
초전법륜경에서는 부처님의 광휘가 얼마나 넓게 미치는 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다. 이를 달리 말하면 꼰단냐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순간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윤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력을 넘었다고 하였다. 특히 신들의 위력을 넘었다고 하였다. 브라흐마의 위력을 넘은 것을 말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청정범행을 닦에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최고의 바램이었으나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은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 넘었다고 하였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 세 가지
초전법륜경에서 보여지는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일반적으로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볼 수 있는 문구를 디가니까야의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D14)’과 맛지마니까야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M123)’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모태에 들었을 때와 부처님이 탄생하였을 때 두 가지에 대하여 언급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의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난다여, 보살이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었을 때에, 신들의 세계에, 악마들의 세계에, 하느님들의 세계에,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에,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M23)”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이라는 표현과 일치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는 광대한 빛이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서 부처님의 탄생에 대하여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퍼지기를” 하고 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신들을 능가하는 광대하고 무량한 빛은 1)부처님이 모태에 들 때, 2) 부처님이 태어날 때, 3)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릴 때 이렇게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이 미치는 범위는?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의 지혜광명 또는 자비광명이 미치는 범위를 구체적으로 표기 해 놓았다. 경을 보면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M23)”라 하였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우주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는데 저 밑바닥 심연의 세계에 까지 미친다고 하였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lokantarikā aghā asaṃvutā andhakārā andhakāratimisā: 세계 주변에서 수미산을 둘러 싸고 있는 철위산(cakkavala)이 있다. 세계의 철위산 사이에 하나의 아비지옥이 있다. 이 문구는 80,000km에 달하는 아비지옥을 묘사한 것이다. Smv. 433에 따르면, 칠흑 같은 암흑은 시각의식의 생기를 막는 암흑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 Sutta D14, 각주, 전재성박사)
아비지옥을 말한다. 부모를 죽이거나 올바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죽이거나 습관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무거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을 말한다. 그곳에서는 빛을 볼 수 없다. 아무리 빛나는 신들일지라도 거기에 빛이 미치지 못하고, 해와 달의 빛도 미치지 못한다. 오로지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 또는 자비의 광명만이 미친다. 그것도 부처님의 입태, 탄생, 초전법륜 이렇게 세 가지 경우에 미친다.
아비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라도
부모를 살해하는 등 감당할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오로지 어둠만 있는 아비지옥에 사는 존재들에게 어느날 광명이 비쳤을 때 어떤 느낌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bbhutta Sutta , 맛지마니까야 M12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아비지옥에 사는 존재들은 처음으로 빛을 접하였다. 그래서 그제서야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M123)”라고 서로가 서로를 비로소 알아 본 것이다.
경에서 설명된 아비지옥은 ‘빛의 사각지대’이다. 그래서 그 어떤 빛도 비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출현 할 때는 빛이 비친다. 그래서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지옥일지라도 부처님이 출현하면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지혜광명은 이제까지 한번도 빛이 도달하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이르기 까지 환하게 밝혔다. 이는 무엇일 말할까? 부모를 살해하는 등 중죄를 지어 비록 아비지옥에 고통받고 있는 존재라도 빛이 도달함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금을 채취하는 작업자의 처절한 삶
종종 EBS에서 제공되는 ‘극한직업’을 본다. 지난 번 본 것은 필리핀 수상가옥 주민들이 ‘금’을 채취하는 장면이었다. 깊이 6미터의 물속으로 들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끊임 없이 진흙을 퍼내는 일이다.
방송을 보면 간신히 사람 몸 하나 들어갈 공간에 수직으로 뚫려 있는 물속은 그야말로 진흙 투성이이다. 그래서 들어가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업자는 잠수 안경을 쓰고 귀마게를 하고 어두운 진흙탕 땅속 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밖에서는 고무호스로 산소를 공급해 준다.
작업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 6미터 아래에서 커다란 바구니에 진흙을 계속 퍼나른다. 그렇게 약 50분간 작업을 하고 진흙탕 물 밖으로 나온다. 지상으로 나온 작업자는 잠시 멍한 모습이다. 어둠속에서 작업을 하다 빛을 보니 잠시 정신을 못차린 것이다.
작업자의 모습을 보면 숙연해 진다. 삶을 위하여 지옥 같은 작업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가족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 작업자의 모습이 마치 지옥에 있다 잠시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잠수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진흙을 푸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하루 종일 진흙을 퍼 날라 보았자 고작 1그램 가량의 금이 채취된다. 1그램의 금을 채취하고자 칠흑 같은 진흙탕 속으로 잠수하여 고무호스에 산소를 의지한 채 목숨을 담보로 일한다. 그래서 매일 지옥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잠시 행복을
필리핀에서 금을 채취하는 작업자의 삶은 처절하다. 마치 지옥 같은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지옥 같은 진흙탕 속으로 잠수해야 한다. 이와 같은 지옥 같은 삶은 단지 필리핀 작업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삶 자체가 지옥 같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 때 느끼는 행복감일 뿐이다. 삶 그 자체는 언제나 괴로움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바다에서 잠시 행복을 맛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필리핀 작업자가 진흙탕 깊은 물속에서 작업을 하다 잠시 고개를 내민 것처럼.
지금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부처님이 모태에 들 때, 부처님이 태어날 때,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릴 때 일만 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하고 광대한 광명이 온누리를 비춘다고 하였다. 경에 따르면 수미산 사각지대에 있는 아비지옥까지 빛이 미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지혜의 빛, 자비의 광명은 정법이 살아 있는 한 온 우주에 미칠 것이다.
비록 지금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사람일지라도 가르침을 접하면 자비의 광명을 볼 수 있다. 마치 어두 컴컴한 방에 한줄기 빛처럼 희망을 준다. 그것은 괴로움을 끝내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희망이다. 그런 희망을 부처님이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이렇게 말씀하셧다.
타오르는 불은 밤낮으로
여기저기 두루 비추네.
깨달은 님은 빛 가운데 으뜸이니
그야말로 위없는 광명이네.(S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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