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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 부처님 말씀에 언하대오(言下大悟)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30. 16:36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 부처님 말씀에 언하대오(言下大悟)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혼합된 퓨전법문

 

불교TV에서 종종 법문을 듣는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주로 대승불교에 대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금강경의 경우 법문이 너무 많아서 이름 있는 스님들의 경우 누구나 한번쯤 강의를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대승경전 위주의 방송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것을 찾아 보기 힘들다. 설령 초기불교 강좌가 있다고 할지라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를 혼합한 퓨전형태이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강의하다 갑자기 반야지혜가 등장하는가 하면 삼매가 강조되기도 한다. 최근 본 강좌도 그러하였다.

 

최근 초기불교강좌를 보고 있다. 현재 불교TV에서 방송하고 있는 유일한 초기불교 강좌이다. 그렇다고 하여 빨강가사나 노랑가사를 입은 빅쿠가 법문하는 것은 아니다. 회색가사를 입은 스님이 강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퓨전형식의 강의가 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강의를 진행한 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영원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열반은 다름 아닌 반야라 하였다. 이렇게 열반에 대하여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것은 상락아정의 연장선상이라 보여지고, 또 반야지혜라 칭하는 것은 법신상주의 개념으로 보아서 일 것이다.

 

이와 같이 변형된 열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스님은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여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강좌가 횡성수설하는듯 보이고 들어도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왜 이와 같은 오리무중강좌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위주로 이야기 하다 보니 횡설수설 오리무중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초기경전에 따르면 대체로 꺼진 불로 묘사 되고 있다. 그래서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어지므로 꺼져 버렸다고 여겨집니다.(M72)”라고 열반이 묘사 되어 있다. 부처님의 질문에 왓차곳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열반은 꺼진 불로 묘사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열반은 인과성에 본질적으로 시간적-공간적 근접성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열반은 서술될 수 없다는 초월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열반에 대하여 영원한 그 무엇으로 묘사 하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혼합된 퓨전법문이다.

 

열반은 어디에 있는가?

 

초기경전에서 열반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있다. 열반이라는 것이 설명할 수 없는 것임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는 것은 열반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 상윳따니까야 사라경(Sarasutta)에서도 열반에 대한 설명이 게송형식으로 되어 있다.

 

 

Sarasutta

 

Sāvatthiya-

Ekamanta 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 gāthāya ajjhabhāsi.

 

Kuto sarā nivattanti kattha vaṭṭa na vattati,
Kattha n
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īti.

 

(Bhagavā:)

Yattha āpo ca pahavī tejo vāyo na gādhati,
Ato sar
ā nivattanti ettha vaṭṭa na vattati,
Ettha n
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ī'ti.

 

 

[천신]

흐름은 어디에서 자취 감추고

회전은 어디에서 멈추어 서며

정신과 물질 또한 어느 곳에서

그것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세존]

물과 땅, 불과 바람, 굳게 확립 못하는 곳

거기에서 흐름은 자취 감추고

거기에서 회전은 멈추어 서며

거기에서 정신ㆍ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네.

 

(Sarasutta-흐름 경, 상윳따니까야 S1.27,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흐름은 어디에서 사라지고

소용돌이는 어디에서 멈추는가?

어디에서 정신-신체적 과정이

남김없이 부서지는 것인가?”

 

[세존]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거기에서 흐름은 사라지고

거기에서 소용돌이는 멈추니

그곳에서 정신-신체적 과정이 남김없이 부서지네.”

 

(Sarasutta-흐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7, 전재성님역)

 

 

 "From where do the streams turn back?

Where does the round no longer revolve?

Where does name-and-form cease,

Stop without remainder?"

 

 "Where water, earth, fire, and air,

Do not gain a footing:

It is from here that the streams turn back,

Here that the round no longer revolves;

Here name-and-form ceases,

Stops without remainder."

 

(27 Streams, CDB, 빅쿠 보디역)

 

 

하늘사람이 묻는다. 윤회는 어디서 멈추고 또 몸과 마음은 어느 곳에서 사라지는가에 대해서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하늘사람이 어디서(Kuto, where from?)’어느 곳(kattha, where?)’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열반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건 아닌지 물어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은 어디서어느 곳이라는 표현을 일체 쓰지  않고 다만 거기에서 회전은 멈추어 서며 거기에서 정신ㆍ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네.(S1.27)”라고 말씀 하신다. 정신-물질이 소멸하는 바로 거기에서 (ettha, here)’  에서 회전이 멈춘다고 하였다. 열반은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각주를 보면

 

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물과 땅, 불과 바람, 굳게 확립 못하는 곳 (Yattha āpo ca pahavī tejo vāyo na gādhati, S1.27)이라 하였다. 바로 거기에서지수화풍 사대가 흩어지는 것을 열반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k: The question refers to the "streams" of samsara, the answer to Nibbana. Portions of the reply can be found at DN I 223,13-15 and Ud 9,4. On the stopping of the streams, see Sn 1034-37, and on the round not revolving see the expression vatta . . . natthi paññāpanāya at 2256-57 and 44:6 (IV 391,9).

 

(빅쿠보디 각주, CDB, S1.27)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석: 질문은 삼사라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닙바나로 답하였다.  대답에 대한 일부는 디가니까야 DN I 223,13-15 와 우다나 Ud 9,4에서도 보여진다. 흐름을 멈추는 것은 상윳따니까야 Sn 1034-37을 보라. 그리고 돌고돌지 않는 것에 대한 표현 vatta . . . natthi paññāpanāya2256-5744:6 (IV 391,9)에 있다.

 

(빅쿠보디 각주 번역)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흐름이 멈추는 것에 대하여 닙바나(열반)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흐름(sara)이란 윤회의 흐름(samsara-sara)이다.

이 윤회의 흐름은 어디에 이르러, 즉 어떤 원인으로 사라지고

그 자취를 감추는지를 묻고 있다.(SA.i.52)

 

** “’거기에서란 열반(nibana)을 말한다.(SA.i.52)

본경의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은 『디가 니까야』「깨왓다 경」(D11)

§85에 나타나는 다음 질문과 대답과 유사하다.

 

[질문] 어디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어디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대답]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여기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자세한 것은 「깨왓다 경」(D11) §67 이하와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각묵스님 각주)

 

 

게송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sara’는 호수나 흐름의 뜻인데, 여기서는 윤회(samsara)의 흐름을 말한다. ‘vatta’역시 윤회의 소용돌이를 의미한다.

 

**(첫번째 게송) 이시 68 69 Ybhus.8:1-3 SHT.4, no 50a, 25-27에도 나온다.

 

*** āpo ca pahavī tejo vāyo : 지수화풍(---)의 네 가지가 우리의 육신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다.

 

(전재성님 각주)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디가니까야 깨왓다 경(D11)’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특히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경의 일부가 소개 되어 있다.

 

깨왓다 경(D11)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깨왓다 경(D11)에는 우다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게송이 있다. 이를 각묵스님과 전재성님의 각주를 비교해 보았다.

 

 

Kattha āpo ca pahavī tejo vāyo na gādhati.
Kattha d
īghañca rassañca au thūla subhāsubha,
Katta n
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īti.
Tatra veyyākaraa bhavatī:

 

 

[질문] 어디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어디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어디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Kevaḍḍha sutta-깨왓다 경, 디가니까야 D11, 각묵스님역)

 

 

수행승이여, 이와 같이 질문해야 한다.

 

[세존]

어디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잃어버립니까?

어디서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

어디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Kevaḍḍha sutta-께밧따의 경, 디가니까야 D11,전재성님역)

 

 

깨왓다경에서 질문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질문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묻는 장면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 하늘사람이 질문한 것과 똑 같은 내용이다. 이렇게 스스로 묻고 또 스스로 답을 하고 있는데 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Viññāa anidassana ananta sabbato paha
Ettha
āpo ca pahavī tejo vāyo na gādhati
Ettha d
īghañca rassañca au thūla subhāsubha
Ettha n
āmañca rūpañca asesa uparujjhati.
Viññ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īti.

 

 

 [대답]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 무한하며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

여기서 물과 땅과 불과 바람은 굳건히 서지 못하며

여기서 길고 짧고 미세하고 크고 아름답고 더러운 것과,

여기서 정신과 물질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

 

(Kevaḍḍha sutta-깨왓다 경, 디가니까야 D11, 각묵스님역)

 

 

[세존]

의식은 불가견이고 무한이고 모든 것에서 빛난다.

여기서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기반을 잃어버린다.

여기서 길거나 짧고 미세하거나 거칠고

깨끗하거나 더러운 것이

여기서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여기서 그것이 소멸합니다.’

 

(Kevaḍḍha sutta-께밧다의 경, 디가니까야 D11,전재성님역)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괄호치기를 이용하여 anidassana에 대하여  ‘[열반이라는] 특별한 경지는 볼 수 없고라 하여 문장만 보고서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주석적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의식은 불가견이고라고 하여 직역을 하였다. 이런 번역은 각주를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anidassana 에 대한 각주를 보면 열반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불가견(不可見)이다라 하였다.

 

또 한가지 크게 차이나는 번역이 있다. 그것은 sabbato paha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모든 곳으로부터 [도달하게 되는] 성소의 계단을 가졌다.”라 하여 각주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주석적번역을 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님은 모든 것에서 빛난다.”라 하여 직역을 하였다.

 

열반에 이르기 위한 서른 여덟 게이트

 

sabbato paha의 뜻은 모든 것에서 빛난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양 번역의 내용을 보면 마치 다른 번역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주석적번역과 직역에 대한 차이이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그 뜻을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각주를 참고해야 한다. 직역을 한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해당 구절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bbato paha: 모든 곳에서 빛난다에 해당하는 빠알리어의 다른 읽는 방법은 sabbato paba이다. ‘pabha’빛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paba’는 나루터(渡場)나 욕장(浴場)을 의미한다. Smv.393에서는 후자의 의미를 취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대해는 그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이 그 때 그 때 들어가는 나루터가 있어, 나루터가 없는 곳이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열반에는 서른여덟 가지의 명상주제(業處: kammatthana)의 입구로부터 열반에 들고자 하는 자들이 그 때 그 때 들어가는 나루터가 있다. 열반에는 나루터가 아닌 명상주제는 없다.

 

(sabbato paha , D11 각주, D11, 전재성님)

 

 

빠알리어 sabbato paha(모든 곳에서 빛난다)”에 대한 각주이다. 각주를 보면 열반에 이르기 위한 다영한 게이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38가지 명상 주제라 한다. 이런 38가지 명상주제에 대하여 큰바다(열반)로 진입하기 위한 나루터로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큰 바다로 들어 가면 지수화풍 이렇게 사대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기반을 잃어 버리고, 그 몸과 마음 역시 남김없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여기서 그것이 소멸합니다

 

그런데 깨왓다경에서 마지막 문구를 보면 Viññ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īti라는 문구가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알음알이가 소멸하면 남김없이 소멸한다.”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여기서 그것이 소멸합니다.”라 하였다. 빠알리어 윈냐나(Viññāa)에 대하여 알음알이의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게송에서 왜 윈냐나를 가장 마지막에 두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재생연결식이기 때문이다.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는 십이연기에 있어서 윈냐나(Viññāa, )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된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지은 업이 없기 때문에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연료의 공급을 조건으로 불타오르는 불이 연료가 떨어짐에 따라 꺼지는 불로 묘사된 된 것과 같다.

 

더 이상 연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불이 꺼지듯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재생의 원인이 되는 윈냐나()가 일어 나지 않을 때 연기의 회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여기서 그것이 소멸합니다. (Viññāassa nirodhena ettheta uparujjhatīti, D11)”라 한 것이다.

 

우다나에서

 

각주를 보면 친절하게도 어느 경을 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 되어 있다. 이번 사라경(S1.27) 역시 여러 개의 경을 참조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특히 빅쿠보디는 디가니까야 DN I 223,13-15 와 우다나 Ud 9,4에서도 보여진다.”라 하였다. 우다나에도 유사한 게송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우다나를 열어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ttha āpo ca pahavī ~ tejo vāyo na gādhati,
Na tattha sukk
ā jotanti ~ ādicco nappakāsati,
Na tattha candim
ā bhāti ~ tamo tattha na vijjati.

Yadā ca attanā vedī ~ muni monena brāhmao,
Atha r
ūpā arūpā ca ~ sukhadukkhā pamuccatī"

 

[세존]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우다나를 보니 앞서 언급된 디가니까야의 께왓다 경에 실려 있는 게송과 유사하다. 지수화풍 사대를 언급하며 열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 게송과 달리 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열반)에는 별도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어두운 곳도 아니라 하였다.

 

그런데 후반 게송을 보면 자신의 체험으로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번뇌가 소멸된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인도 변방에 한수행자가 살았는데

 

우다나에서는 이 게송과 관련하여 인연담식 이야기가 있다. 우다나는 산문과 운문으로 되어 있어서, 먼저 인연담식 이야기가 나오고 이를 강조하기 위한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우다나는 산문과 게송 복합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다나의 게송을 설명하기 위한 산문을 보면 경의 줄거리가 모두 실려 있다. 바히야의 경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게송이 나오게 되었는지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바히야 다루찌리야가 쑵바리까의 해안에 살았다. 그는 존경받고 존중받고 섬김받고 공양받고 존승받으며 의복과 음식과 처소와 필수의약품을 보시받았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바히야의경  도입부에 대한 설명이다. 바히야가 살고 있는 곳은 바다가 있는 인도 변방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바히야는 존경받고 공양받는 수행자로 묘사 되어 있다. 그리고 수행의 경지가 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간 것은 아니다. 이는 이어지는 설명에서 알 수 있다.

 

 

[하늘사람]

바히야여, 그대는 거룩한 님도 아니고, 또한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도 아닙니다.  그대는 거룩한 님이 될 수 있거나 거룩한 길에 들어서는 수행을 닦지 않았습니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홀로 수행하여 스스로 거룩한 경지에 올라섰다고 자부하고 있는 바히야에 대한 하늘사람의 충고이다. 이는 예전의 친지이었던 하늘사람이 불쌍히 여겨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은 사왓티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 뵈라고 말하면서 부처님이 거룩한 경지에 대한 가르침을 설해 줄 것이라 하였다.

 

성질 급한 바히야

 

이와 같은 하늘사람의 충고에 감동을 받은 바히야는 그 즉시 그곳을 떠났다. 그래서 단 하루만에 부처님이 계신 사왓티에 도착하였다. 마침 탁발을 나가시는 부처님 일행을 본 바히야는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바히야여, 지금은 알맞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도시로 탁발하러 가는 길이다.( Ud1.10)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절차와 예법을 무시하였음을 말한다. 탁발하러 가는 길에 행렬을 세워 놓고 대뜸 가르침을 청하는 무례를 범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그것도 세 번이다.

 

이렇게 성질 급한 바히야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럴 때 마다지금은 알맞은 시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늘어지듯이 막무가내로 계속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마침내 그 자리에 서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내린다.

 

 

[세존]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시작되는 문구이다.

 

오역을 인정한 전재성님

 

이런 문구는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S35:95)”로 시작되는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경(S35:95)에서도 보여진다. 이는 빠알리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
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ī

 

 

대체 이말뜻은 무엇일까? 말룽끼야뿟따경에 실려 있는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았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는 구절은 역자의 구역에서는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했다. 그것은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번연했으나 비구 보디의 신역을 통해 오역임을 알았다.

 

(각주, S35:95,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초판본의 번역에 실수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각주를 보면 종종 오역에 대한 것을 밝히고 있는 글을 본다. 참으로 솔직한 표현이라 본다. 이는 초불연의 대응방식과 대응된다.

 

초불연의 경우 사함빠띠의 청원에 대하여 부처님이 pamuñcantu saddha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각 니까야의 번역이 다르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최신판(2013)에 따르면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되어 있으나 맛지마니까와 디가니까야에서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되어 있어 정반대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각주 역시 정반대로 설명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초불연에서는 이런 차이에 대하여 그 어떤 설명도 볼 수 없다. 그래서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없다”갈팡질팡 번역을 보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비판한 바 있다.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에서 자신의 오역을 인정하였다. 그것도 빅쿠 보디의 신역을 보다가 발견한 것이라 하였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

 

그렇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라는 말은 어떤 내용일까? 전재성님의 각주를 계속 보면 다음과 같다.

 

 

Srp.II.383에 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 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의식 가운데도 보여진 것만이 있을 뿐이다. 보여진 것 가운데 보여진 것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형상을 형상속에서 인식하는 시각의식이다. 

 

이라는 말은 한계를 말한다. 단지 보여진 것 뿐이다. 마음의 속성으로 단지 보여진 것뿐이다. 그 의미는 나의 마음은 지금 단지 시각의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각의식이 시야에 들어온 형상에 관한 탐욕이나 증오나 어리석음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순간포착(자와나)은 탐욕 등이 없는 시각의식 뿐이고, 이 경계를 지나치지 않고 탐욕 등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각주, S35:95, 전재성님)

 

 

우리들이 매일 눈으로 보는 것은 보고 싶어서 보는 것 보다 보여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눈이 떠 있는 한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은 모두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보여지는 것에 대하여 시각의식이 일어나는데 이런 시각의식은 아직 분별되지 않는다. 단지 시각의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각의식이 일어남에 따라 좋고 싫음에 대하여 분별하게 된다. 이런 분별이 일어날 때 느낌이 일어나서 갈애희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이 시작 된다.

 

그렇다면 이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번역에서는 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신역에 따르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 수동태로 번역하였다. 수동태로 하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더 이상 생각을 확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삼사화합에 따라 시각의식이 생겨 났을 때 내버려 두면 사념의 확장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내돈 떼어 먹고 달아난 자의 사진을 보았을 때 그로 인하여 과거에 발생하였던 좋지 않았던 일들이 연속적으로 생각날 것이다. 그래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일어날 때 연쇄반응을 일으켜 죽일놈!”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본 것은 본 것을 그치라는 것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후회와 근심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념의 구조물(Papañca, 희론)’을 짓기 쉽다. 그래서 종종하는 말중에 ‘현재에 열중하라’고 한다. “밥먹을 때는 밥먹을 뿐, 운전할 때는 운전할 뿐”과 같은 말이다.  

 

 

 

 

 

Thinking

 

 

 

편집상의 실수?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말룽끼야뿟따경(S35.95)의 구역과 신역을 비교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
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ī

 

 

구역: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신역: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 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된 것 만이 있을 뿐이다.

 

(전재성님 역)

 

 

이렇게 번역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에 대하여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번역한 것은 주관과 객관의 일치를 염두에 둔 번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처음 보자마자 주관관 객관이 일치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므로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라 수정번역하였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뜻으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각 번역자의 문구를 비교해 보면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로 시작되는 문구에 대하여 각 번역자의 문구를 비교해 보았다.

 

 

  

    

 

빠알리어

“diṭṭhe diṭṭhamatta bhavissati,
sute sutamatta
bhavissati,
mute mutamatta
bhavissati,
viññ
āte viññātamatta bhavissatī

 

각묵스님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다.(S35. 95)

단지

전재성님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 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된 것 만이 있을 뿐이다. (S35. 95)

뿐이며

빅쿠 보디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ly the seen;

in the heard there will be merely the heard;

in the sensed there will be merely the sensed;

in the cognized there will be merely the cognized. (S35. 95, CDB 2권 1175페이지,)

merely

 

 

 

초불연의 오역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과 빅쿠 보디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전재성님역)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ly the seen(보여지는 것은 단지 보여지는 것만 있을 뿐이다, 빅쿠보디역)”라고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역을 보면 능동태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각묵스님역)”이라 하였다.하지만 이런 번역은 전재성님에 따르면 오역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초판본에서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오역임을 스스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능동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스타일의 번역은 맛지마니까야 뮬라빠리야야경(M1)에서도 볼 수 있다.

 

뮬라빠리야야경(M1)에서 ‘Diṭṭha diṭṭhato sañjānāti’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보여진 것을 보여진 것으로 여기고라 하여 수동태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대림스님은 본 것을 본 것이라 인식한다.”라 하여 능동태로 번역하였다. 빅쿠 냐나몰리와 빅쿠 보디가 공동번역한 MDB에서는 “He perceives the seen as the seen”라 되어 있어서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삼사화합으로 시각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단지 보여질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능동으로 해석하여 본 것을 본 것이라 인식한다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 보여진다.

 

바히야의 언하대오(言下大悟)

 

부처님은 끈질기게 따라 붙는 바히야에게 짤막하면서도 핵심적인 법문을 해 주었다. 본래 수행이 깊었던 바히야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짤막한 법문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이해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세존으로부터 이 간략한 가르침을 듣고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Ud1.10)”이라 하였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언하대오(言下大悟)’라 할 것이다. 말이 떨어지자 마자 크게 깨우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말 한마디에 바히야는 크게 깨달았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었다는 말이 없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아라한이 되었을 경우 거룩한 님이 되었다라고 하여 아라한에 대하여 거룩한 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히야의 경에 따르면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였다.(Ud1.10)”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해탈(심해탈)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번뇌다한 아라한이 아닌 것이다.

 

암소에 받쳐 죽은 바히야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히야는 그곳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암소에 받혀 죽고 말았다. 마치 뿍꾸사띠의 이야기(M140)’을 보는 것 같다. 뿍꾸사띠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구족계를 받기 위하여 가사와 바루를 찾아 돌아 다니다 돌아다니던 황소에 목숨을 잃었다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 급한 바히야는 탁발중인 부처님에게 달라 붙어 끈질기게 가르침을 요구한 결과 마침내 크게 깨달았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암소에 받혀 죽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보고 하고 어느 제자가 부처님에게 그의 운명은 어떻고 그의 미래는 어떠합니까? (Ud1.10)”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현자 다루찌리야는 진리에 따라 가르침을 실천했으며, 가르침을 이유로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수행승들이여,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부처님에 따르면 바히야는 부처님을 괴롭히지 않았음을 말하였다. 탁발중인 부처님을 뒤쫒아 가서 그것도 세 번에 걸쳐 가르침을 청한 것에 대하여 괴롭힌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걸쳐셔 물었을 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르침을 청할 때는 일반적으로 삼세번이다. 세 번에 걸쳐서 가르침을 청해야 법을 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가르쳐 주려 한다면 상대방은 피곤해 할 것이다. 그래서 법은 청하는 자에게만 배푸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도 세 번이다. 그래서 삼세번 법을 청해야 법을 설하는 것이다.

 

사마시시(samasisi)일까?

 

경에서 부처님이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바히야가 가르침을 접하고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뿐 아라한의 경지에 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암소에 쳐 받쳐 죽을 때 죽어 가는 과정에서 알아차렸다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임종 순간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든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감흥어

 

부처님은 바히야가 완전한 열반에 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감흥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물도 없고 땅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거기에는 별도 반짝이지 않고

태양도 비추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달도 빛나지 않고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자인 바라문이 스스로

자신의 체험으로 알면

그는 물질계와 비물질계,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리.”(Ud1.10)

 

 

 

2013-1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