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행복추구의 종교인가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종교인가?
에니장가경(Eṇijaṅghasutta, S1.30)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에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많은 해법을 제시한다. 수 많은 해법 중의 하나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에니장가경(Eṇijaṅghasutta, S1.30)이 있다. 하늘사람이 묻고 부처님이 답한다.
Eṇijaṅghasuttaṃ
30. Sāvatthiyaṃ-
(Devatā:)
Eṇijaṅghaṃ kisaṃ vīraṃ appāhāraṃ alolupaṃ,
Sīhaṃ vekacaraṃ nāgaṃ kāmesu anapekkhinaṃ,
Upasaṅkamma pucchāma kathaṃ dukkhā pamuccatīti.
(Bhagavā:)
Pañcakāmaguṇā loke manochaṭṭhā paveditā,
Ettha chandaṃ virājetvā evaṃ dukkhā pamuccatīti.
Sattivaggo tatiyo.
Tatruddānaṃ:
Sattiyā phusati ceva jaṭā mano nivāraṇā,
Arahantena pajjoto sarā mahaddhanena ca,
Catucakkena navamaṃ eṇijaṅghena te dasāti.
[천신]
“사슴 장딴지를 가졌고134) 날씬하고 용감하며
음식을 적게 먹고 탐욕이 없고
사자나 코끼리처럼 혼자 다니고
감각적 욕망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
그 분을 친견하여 저희들은 여쭙니다.
어떻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합니까?”
[세존]
“세상에는 다섯 가닥 감각적 욕망이 있고
마음[意]이 여섯 번째라 알려졌나니
여기에 대한135) 욕구136)를 빛바래버리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하노라.”
(사슴 장딴지 경, 상윳따니까야 S1:30,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다리는 사슴처럼 야위었지만 강건하고 200)
소식을 하고 맛을 탐하지 않네.
사자와 코끼리처럼 홀로 걸으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난 님,
그 분께 다가가 우리가 여쭈니,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리?”
[세존]
“세상에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이 202) 있고
정신은 여섯 번째로 알려져 있으니, 203)
이것들에 대한 욕망을 떠나면,
참으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사슴과 같은 다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0, 전재성님역)
"Having approached you, we ask a question
Of the slender hero with antelope calves,
Greedless, subsisting on little food,
Wandering alone like a lion or naga,
Without concern for sensual pleasures:
How is one released from suffering?"(57)
"Five cords of sensual pleasure in the world,
With mind declared to be the sixth:
Having expunged desire here,
One is thus released from suffering."ss
(Antelope Calves, S1:30, Bhikkhu Bodhi,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날씬한 부처님
먼저 하늘사람이 묻는다.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으면서 부처님의 특징을 언급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32가지 신체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사슴다리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어 Eṇijaṅgha는 사전에 따르면 ‘limbed like the antelope’라 되어 있는데, 이는 팔다리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영양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날씬하다’고 표현하였고, 전재성님은 ‘야위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32상 중에 ‘사슴과 같은 다리’를 표현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에 따르면 32상의 일곱 번째 항목에 “수행승들이여, 위대한 사람은 사슴과 같은 장딴지를 가지고 있다.(D30)”라고 표현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왜 이와 같이 표현 하였을까? 그것은 부처님이 살찌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탁발에 의존하며 하루 한끼 밖에 먹지 않은 출가자가 살이 쪄서 장딴지가 넓적한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는 게송에서 “소식을 하고 맛을 탐하지 않네.(S1.3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게 마른 형태로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Eṇijaṅghaṃ kisaṃ’라 하였다. 여기서 ‘kisa’는 ‘haggard(말라빠진); emaciated(여윈)’의 뜻이다. 따라서 사슴의 다리처럼 말라빠져 보인 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야위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slender’라 하여 ‘호리호리하다, 날씬하다’ 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날씬하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탐욕도 빛 바랠 수 있을까?
하늘사람이 “kathaṃ dukkhā pamuccatīti”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어떻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합니까?”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번역하였다. 그리고 빅쿠 보디는 “How is one released from suffering?(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납니까?)”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pamuccatīti는 ‘is delivered or freed.’의 뜻이다. ‘벗어나다, 해방되다’의 뜻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해탈하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해탈하다라는 뜻이 되는데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왜 과도한 의역인가? 이는 이어지는 게송에 따르면 오욕락 (Pañcakāmaguṇā)을 떠나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욕락을 떠나는 것 자체가 해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초기경전에서는 해탈에 대하여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적용 되기 때문이다. 청정범행을 닦아 모든 번뇌가 소멸 되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해탈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단지 오욕락에서 벗어 났음에도 해탈이라고 번역한 것은 과도한 의역으로 본다. 영역에서도 ‘released’라는 말을 사용하여 벗어남으로 표현하였다.
각묵스님의 과도한 의욕과 주석적 번역은 또 보인다. 빠알리어 ‘chandaṃ virājetvā’문구가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욕구를 빛바래 버리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구가 빛바랠 수 있을까? 천의 색깔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빛 바랠 수 있지만 욕구가 빛바랜다는 것은 낭만적 표현이라 본다. 이런 낭만적 표현은 ‘탐욕이 빛바랜다’는 형태로 초불연의 번역에서 자주 보인다. 이는 ‘virājetvā(having discarded’에 대하여 빛바래는 것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욕망을 떠나면”이라 번역하여 앞 게송에서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리?”에 대응하고 있다. 이렇게 해탈이나 빛바램이라는 표현은 과도한 의욕이고 낭만적이고 주석적 표현이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문) 어떻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합니까? 답)욕구를 빛바래 버리면. (초불연)
2) 문)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리? 답) 욕망을 떠나면. (성전협)
이렇게 ‘빛바램’과 ‘떠남’이라는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는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반면 성전협에서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가 ‘위라가(virāgā)’에 대한 것이다. 이는 ‘탐욕이 빛바래고’와 ‘사라지고’가 된다. 탐욕이 빛 바랜다는 것은 주석적 번역의 전형이다. 마치 옷감의 물감이 바래지는 것처럼 탐욕도 서서히 사라진다는 표현을 ‘탐욕이 빛바랜다’는 식으로 낭만적이고 주석적으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각주를 보면
경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빅쿠 보디의 영문 각주이다.
This verse of inquiry occurs at Sn 165-66, though with an additional couplet and with a variant line in place of the actual question. The inquirers there are the two yakkhas, Hemavata and Satagira. The question (or rather, string of questions) is posed only at Sn 168 and the reply given at Sn 169;
they are identical with the question and reply at vv. 221-22. It is only after receiving this reply that the yakkhas pose the present question, katham dukkhā pamuccatīti?, and the answer given is identical. Having antelope calves (Eṇijaṅgha) is one of the thirty-two marks of a great man (see DN I11 156,5-12; MN I1 136,14). On nāga, see below n. 84.
(Note57 363p, S1:30, Bhikkhu Bodhi,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질문에 대한 게송을 보면 이 게송은 본격적 질문 전에 2행연구 형태로 숫따니빠따 stn165-166에서 발견된다. 질문자는 두 명의 야차인 헤마와따와 사따기라이다. 질문(이라기 보다 일련의 질문들)은 오직 stn168에서 제기되고 답은 stn169에서 주어진다.
질문에 대한 이상적인 대답은 vv. 221-22에 있다. 이것은 지금 야차들이 ‘kathaṃ dukkhā pamuccatīti?( 어떻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답은 이상적인 답변이 주어졌다. 사슴의 종아리(Eṇijaṅgha)는 위대한 사람의 서른 두 가지 특징중의 하나이다. (디가니까야 DN I11 156,5-12와 맛지마니까야 MN I1 136,14를 보라). 나가(nāga)에 대해서는 아래 n. 84를 보라.
(빅쿠 보디 각주 57번 번역)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133) 본경의 두 게송은 『숫따니빠따』(Sn.30) {165~166}으로도 나타난다.
134) ‘사슴 장딴지를 가짐(eni-jangha)’은 서른두 가지 대인상[三十二相, dvattimsa-mahapunsa-lakkhanani] 가운데 11번째 상이다. 32상에 대해서는 『디가 니까야』 「삼십이상경」(D30)을 참조할 것.
135) “’여기에 대한(ettha)’이란 이 정신ㆍ물질[名色, nama-rupa]에 대한이라는 말이다. 즉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panca-kama-guna)을 통해서 물질(색, rupa)을 설하셨고 마음[意, mano]으로 정신(명, nama= 수ㆍ상ㆍ행ㆍ식의 4온)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합하여 [욕구, chanda]의 토대(bhumma)는 바로 오온이라고 적용시켜야 한다.”(SA.I.54)
136) ‘욕구’는 chanda를 옮긴 것이다. 역자는 chand를 문맥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옮기고 있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iddhi-pada)과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sammap-padhana]에서는 열의로 그 외는 대부분 욕구로 옮긴다.(네 가지 성취수단에 대해서는 본서 제6권 「이 언덕 경」
(S51:1)과 §3의 주해를, 네 가지 바른 노력에 대해서는 제5권 「동쪽으로 흐름 경」(S49:1) §3과 주해를 창조할 것) chanda의 번역에 대해서는 본서 제5권 「분석 경」2(S48:10) §5의 주해를 참조할 것.
(각주, 각묵스님)
전재성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200) Eṇijaṅghaṃ : 사슴과 같은 다리는 부처님의 삼십이상 가운데 하나이다. DN.II.17, MN.II.136 참조.
202) Pañcakāmaguṇā :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 즉 형상, 소리, 향기, 맛, 감촉의 오욕락을 뜻한다.
203) manochaṭṭhā paveditā : 여기서 정신은 ‘정신의 대상’이나 정신현상을 뜻한다.
(각주, 전재성님)
숫따니빠따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세 개의 각주를 보았다. 각주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번역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숫따니빠따’이다. 숫따니빠따에 유사한 게송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야차 헤마바따]
사슴 같은 정강이에 여위었으나 강건하고
적게 드시고 탐욕 없이 숲 속에서 조용히 선정에 드시는 님,
자, 고따마를 뵈러가자. (stn165)
(헤마와따의 경, 숫따니빠따 Sn1.8,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사슴 같은 정강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의 게송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화자는 야차 헤마와따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단지 하늘사람이라 하였으나 숫따니빠따의 내용을 보아 하늘사람이 야차 헤마와따임을 알 수 있다.
야차 헤마와따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야차 헤마와따]
“그것 때문에 세상이 해를 입는다는 집착이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stn170)
(헤마와따의 경, 숫따니빠따 Sn1.8, 전재성님역)
야차의 질문을 보면 상윳따 게송과는 약간 다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로 되어 있어 동일하다.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세존]
“세상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과
그 여섯 번째인 정신의 대상,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stn171)
(헤마와따의 경, 숫따니빠따 Sn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욕락과 정신의 대상을 제거하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핵심어는 ‘정신의 대상(manochatta)’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Manochatta : Prj.II. 212에 따르면,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오욕락)은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고 유혹적인, 시각에 인식되는 형상, 청각에 인식되는 소리, 후각에 인식되는 냄새, 미각에 인식되는 맛, 촉각에 인식되는 감촉을 말하고, 여기서 여섯 번째로 정신이라고 한 것은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고 유혹적인,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실’을 여기서 ‘정신의 대상’으로 축약한 것이다.
(stn171 각주, 전재성님)
오욕락과 정신에 대한 설명이다. 오욕락은 누구에게나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정신에 의하여 ‘분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실’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사실이라는 것은 ‘법(담마)’를 말한다. 이렇게 오욕락과 정신의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괴로움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왜 부정적 언표로 말씀 하셨을까?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원리는 오욕락을 포기 하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는 오욕락이지만 이를 포기 하였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오욕락을 포기하거나 소멸시킨다고 하여 ‘행복이 온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면 매우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긍정적 언표 보다 부정적 언표가 더 많이 사용된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이고득락’과 같은 긍정적인 언표를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만일 괴로움 끝에 행복(낙)이 온다고 하면 마치 가르침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처럼 한정 되어 버린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사라진다’ 등의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는 정형구인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라는 뜻이다. 대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보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부정적 언표로서 가르침을 펼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라’라고 주로 말씀 하셨지 반대로 ‘행복을 추구해라라’라는 뜻으로는 많이 말씀 하지 않았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라고 긍정적 언표로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정시키는 것이 되고 끝내 상락아정 등으로 왜곡되고 말 것이다.
간혹 초기경전에서 "그대들이 행복하기를!" 이라고 말씀 하신 경우가 있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그대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며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자비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3-1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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