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의 목적
인터넷 사경
두 종류의 빠알리 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그러나 넷상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초불연 번역서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는 인터넷 사경에서도 알 수 있다. 어느 스님의 블로그에서 인터넷 사경을 보았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를 한글자도 놓치지 않고 옮겨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만일 잘못된 번역이 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런 내용이 있다.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법을 청해 줄 것을 요청하자 어느 번역서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되어 있다. 이런 번역서를 백프로 신뢰하는 불자라면 그대로 사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바다에 둥둥 떠다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부처님이 아직 법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믿음을 보여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믿고 있는 낡은 사상부터 먼저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처음 법을 펼치실 때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는 것,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등을 먼저 버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함빠띠의 청원에 가장 첫 번째 조건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해피스님의 경우
두 종류의 번역서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인터넷 강좌를 보면 한쪽의 것을 편애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해피스님’의 경우도 그런 케이스라 보여진다.
유튜브에는 해피스님의 동영상강의가 많이 올려져 있다. 조회수는 많지 않지만 인터넷 시대에 누구나 부처님의 원음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스님이 강좌에서 번역서 선택에 대한 것을 보았다. 스님은 초불연의 번역을 더 선호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스님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스님이 초불연 번역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자료에 따르면 매우 단순하다. 하나는 ‘호칭’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그래서 “비구들이여”로 시작 되는 번역서를 선호 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스님의 동영상 강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스님들은 일반적으로 수행승 보다 비구라고 호칭하는 것에 대하여 더 호감을 가지고 있고 또한 “비구들이여”로 시작되는 번역서를 더 중시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번역용어에 대한 것이다. 해피스님은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일부 번역용어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번역어 ‘사유’에 대하여 비판하였는데 이는 위딱까에 대해서도 사유라 번역하였고, 상깝빠에 대해서도 사유라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깝빠라고 해가지고 사유인데, 그런데 전재성박사님은 ‘두 갈래 사유의 경’이래 가지고 좋은 쪽 사유와 안좋은 쪽 사유 두 갈래 사유가 진행 되는 이런 맛지마니까야 경전을 번역을 하셨는데, ‘두 갈래 사유의 경’ 이러니까 상깝빠인 것 같잖아요. 그런데 원문은 위딱까로 되어 있어요.
( 건강이란 - 4부니까야 완역법회 소회[해피설법회 대구 1-12 낮], 해피스님)
해피스님의 이야기는 이렇다. 위딱까(vitakka)에 대하여 ‘사유’라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에 등장하는 상깝빠(saṅkappa)에 대하여 사유라 번역해 놓은 것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또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두 갈래 사유의 경’을 예로 들고 있다. 이 경은 빠알리어 제목이 ‘Dvedhāvitakkasutta(M19)’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이 경의 제목에 들어 있는 상깝빠(saṅkappa)에 대하여 ‘사유’라고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깝빠가 ‘사유’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딱까(vitakka)에 대하여 또 ‘사유’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성전협 번역서 보다 초불연 번역서를 주교재로 채택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다. 해피스님이 강의한 때가 초불연의 맛지마니까야가 출간 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Dvedhāvitakkasutta(M19)’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제목을 달았을까? 해피스님의 바램과는 반대로 ‘두 가지 사유 경’이라 되어 있다. 전재성님의 ‘두 갈래 사유의 경’과 차이가 없다. 똑 같이 위딱까(vitakka)에 대하여 ‘사유’라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인터넷에 잘못된 정보가 유포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큰 ‘구업’을 짓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묵스님의 경우
유튜브에는 또 하나 잘못된 정보가 보인다. 그것은 ‘일묵스님’의 법문이다. 제따와나 선원의 일요법회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는데 조회수는 천 단위가 넘어 간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일묵스님의 법문이 꽤 조회수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법문에서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것이 번역됨으로서 1700년 불교역사에서 처음으로 빠알리어로 된 경전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글화 작업이 가장중요한 경전인 사부니까야가 한글화 되는 거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자는 11월 18일 인가.
( 일요법회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번뇌의 매듭을 끊어라, 일묵스님)
일묵스님은 법회에서 사부니까야가 초불연에서 최초로 한글로 번역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초불연의 맛지마니까야가 완역 됨으로서 사부니까야 봉헌법회를 앞두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로 사부니까야가 완역 된 것은 ‘성전협’이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가 2011년 디가니까를 완역함으로서 사부니까야가 우리나라 최초로 완역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사부니까야가 완역되었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 본다. 참고로 사부니까야 완역된 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부니까야 |
성전협 |
초불연 |
디가니까야 완역 |
2011년(전재성님) |
2006년(각묵스님) |
맛지마니까야 완역 |
2003년 (전재성님) |
2012년(대림스님) |
상윳따니까야 완역 |
1999년 초간(전재성님) 2002년 완간(전재성님) |
2009년(각묵스님) |
앙굿따라니까야 완역 |
2008년(전재성님) |
20007년(대림스님) |
199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성전협 전재성남이 상윳따니까를 번역출간 하였다. 이후 2003년 전재성님의 맛지마니까야, 2006년 각묵스님의 디가니까야, 2007년 대림스님의 앙굿따라니까야, 2008년 전재성님의 앙굿따라니까야, 2009년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2011년 전재성님의 디가니까야, 2012년 대림스님의 맛지마니까야 순으로 출간 되었다. 그리고 전재성님의 사부니까야 봉헌법회가 2011년 4월 조계사에서 열렸고,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사부니까야 봉헌법회가 2012년 11월 코엑스에서 열렸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사부니까야 완역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가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번역한 사부니까야가 우리나라 최초라고 한 것은 잘못말한 것이다. 이렇게 잘못 말한 것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면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두 번역서에 대한 두 가지 예를 보았다. 대체적으로 스님들은 “비구들이여”로 사작 되는 번역서를 선호 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비구를 비구라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한 ‘비호감’도 작용하였음이라 본다.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한쪽 번역서에서 의존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번역이 잘 되어 있으면 문제 없지만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경우 가르침을 크게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두 개의 번역서를 비교해서 보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영문번역서도 참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빠알리원문과 함께 대조해 가며’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장단점이 금새 드러난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잘된 번역인지 아닌지는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우리나라에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는 것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번역비교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 본다.
삽비경(Sabbhisutta, S1.31)에서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S1)에서 사뚤라빠 무리의 품이 있다. 첫 번째의 경이 삽비경(Sabbhisutta, S1.31)이다. 이 경의 특징은 등장인물이 많다는 것이다. 모두 여섯 명의 하늘사람(데와따)가 등장한다. 그래서 각자 자신을 삼십삼천으로 인도한 리더들에 대한 칭찬을 부처님 앞에서 하고 있다. 그런데 여섯 번째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Sabhireva samāsetha sabhi kubbetha santhavaṃ,
Sataṃ saddhammamaññāya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
(Sabbhisutta, S1.31)
“참된 자들과 교제해야 하고
참된 자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참된 자들의 정법을 원만하게 알면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
(참된 자들과 함께 경, 상윳따니까야 S1.31, 각묵스님역)
[다른 하늘사람]
“참사람과 함께 지내며
참사람과 함께 사귀어라.
참사람의 참다운 가르침을 알면,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 속에 산다네.”
(참사람과 함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1, 각묵스님역)
“One should associate only with the good;
With the good one should foster intimacy.
Having l learnt the true Dhamma of the good,
Beings abide comfortably.”
(With the Good, CDB S1.31, 빅쿠 보디역)
참사람(Sataṃ)이란?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참사람(the good)’ 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Sataṃ’를 말한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Sataṃ’은 sant, sat, sappurisa 와 같은 의미라 한다. 그래서 ‘참사람’이라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해제에 따르면 “참사람에는 고귀한 제자들이 모두 포함 되며,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무리(사쌍팔배)를 모두 지칭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아라한과 부처님 자신도 참사람에 해당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참사람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번역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사뚤라빠무리들은 참사람에 대하여 찬탄의 게송을 읊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각묵스님역)”와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 속에 산다네.(전재성님역)”으로 되어 있어서 번역이 확연하게 다르다. 특히 다른 것은 ‘불사(不死)’에 대한 것이다. 각묵스님역에는 불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먼저 빅쿠 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61.
I take sātataṃ to be an accusative adverb from the abstract
noun of sāta. Spk, however, takes it as an adverb from
satata, "continually," which seems less satisfactory.
(61번 각주, CDB, 빅쿠 보디)
빅쿠 보디의 61번 각주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Sāta의 명사형에서 추출된 대격 부사인 sātataṃ을 취한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지속적으로(continually)’ 의 뜻이 있는 satata로 부터 부사의 뜻로서 이것을 취한다. 그러나 이것은 덜 만족스러워 보인다.
(빅쿠 보디 각주 번역)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주석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의 해석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rp.I.57에 따라 sātataṁ sukhaṁ vā ciraṁ sukhaṁ vā의 뜻으로 해석했다. 가이거는 Gga.I.29 에서 영원한 행복(ewiges Heil)이라고 표현했는데 불교교리로 보아 영원하다는 것은 영원주의(常見)을 일으키므로 역자는 불사로 표현한다.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하여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빅쿠보디와 대조적이다. 빅쿠 보디는 각주에서 주석서의 견해에 대하여 불만을 표현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쿠 보디는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에 대하여 “Beings abide comfortably.”라고 번역하였다. 이를 번역해석하면 “존재는 안락하게 머문다”라는 뜻이 된다.
주석서 중시를 천명하였는데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라고 되어 있어서 빅쿠 보디의 번역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문제의 빠알리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초불연의 번역방침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초기불전연구원은 경을 옮김에 있어서 항상 몇 가지 원칙을 중시하고 있다. 이들 원칙에 대해서는 이미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역출한 다른 책들의 역자 서문 등에서 밝혔다. 번역의 원칙에 대한 제목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 둘째,『청정도론』을 중시하였다. 셋째,『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 넷째, 술어를 한글화하려 노력하였다.
( 『니까야 강독I』들어가는 말 3. 4부 니까야와『니까야 강독』 )
이것이 초불연의 번역방침이다. 각권 니까야 머리말에 있는 말이다. 방침을 보면 가장 크게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주석서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첫 번째로 전통적인 주석에 근거한 번역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구문 번역을 보면 주석서를 존중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대신 빅쿠 보디의 견해를 중시하는 듯이 보인다. 빅쿠 보디는 기존 주석서의 설명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구문의 경우 오히려 전재성님이 전통적인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번역히였다. 그래서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각묵스님역)”와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 속에 산다네.(전재성님역)”로 되어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다.
마치 재롱잔치하듯 누가 잘했느냐고
그렇다면 빅쿠 보디는 전통적인 주석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였을까? 이는 이어지는 문구에 대한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섯 명의 사뚤라빠 무리들의 참사람에 대한 찬탄 게송이 끝나자 그 중에 하나가 “세존이시여, 누구의 것이 잘 말한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재롱잔치를 하고 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누가 잘했느냐고 물어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섯 명의 사뚤라따 무리들은 어떤 말을 하였기에 부처님에게 누가 잘했느냐고 물어 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었다.
No |
빠알리어 |
각묵스님 |
전재성님 |
1 |
seyyo hoti na pāpiyoti. |
항상하고 나빠지지 않게 됩니다. |
보다 착해지고 악함이 없어지네. |
2 |
paññā labbhati nāññatoti. |
통찰지를 얻나니 다른 사람에게서는 얻지 못합니다. |
남에게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네. |
3 |
sokamajjhe na socatīti. |
슬퍼하는 자들 가운데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
슬픔 가운데 슬퍼하지 않네. |
4 |
ñātimajjhe virocatīti. |
친척들 가운데서 빛이 납니다. |
친지들 가운데 빛나네. |
5 |
sattā gacchanti suggatinti. |
중생들은 선처에 태어납니다. |
뭇삶들은 행복한 곳으로 가네. |
6 |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 |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 |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속에 산다네. |
여섯 명의 게송을 보면 참사람에 대한 찬탄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참사람을 따르면 착해지고, 지혜를 얻고, 슬픔이 없고, 빛나는 존재가 되고, 선처에 태어나고 행복해진다고 한다. 과연 어느 것이 으뜸일까?
빅쿠 보디는 왜 주석서를 무시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를 달았다. 각묵스님이나 전재성님의 각주는 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62.
Pariyāyena. Spk glosses karanena, "for a reason," which
does not help much. I understand the purport to be that
their verses are only provisionally correct, acceptable
from a mundane point of view. The Buddha's verse is
definitive (nippariyāyena) because it points to the ultimate
goal. See the contrast of Pariyāyena and nippariyāyena at
AN IV 449-54.
빅쿠 보디에 따르면 여섯 가지 찬탄게송은 ‘세속적 관점(a mundane point of view)’에서 본 것이라 한다. 그래서 ‘방편(pariyāyena)’ 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처님의 게송이 최종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방편 없이 곧바로 진리를 설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방편 없이 있는 그대로 설한 것을 ‘아비담마’라 한다. 이를 빅쿠 보디는 ‘nippariyāyena’ 라 하였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관점에서 게송을 읊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사뚤라빠 무리들이 읊은 여섯 게송은 세간적인 관점에서 본 것으로서 방편임을 말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주석을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 대로 ‘sattā tiṭṭhanti sātatanti(82)’ 에 대하여 “Beings abide comfortably. 존재들(중생들)이 안락하게 머문다”라고 번역한 것이라 본다.
하지만 여섯 게송을 보면 반드시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비록 삼심삼천에 태어난 하늘사람이 읊은 게송일지라도 부처님을 포함한 사쌍팔배의 참사람에 대하여 찬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주석에서 ‘불사’를 언급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속에 산다네.”라고 주석의 견해를 따랐다. 반면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중생들은 안락하게 지냅니다.”라고 번역함으로서 빅쿠 보디의 번역을 따름으로서 주석을 중시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그렇다면 부처님은 여섯 게송을 듣고 누구 손을 들어 주었을까? 이에 대하여 경을 보면 “차례로 잘 읊었는데, 내 것도 들어보게.”라고 말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손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여섯 게송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모두 인정하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가르침을 따르는 목적이 되고, 또 불교의 목적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Sabhireva samāsetha
sabhi kubbetha santhavaṃ,
Sataṃ saddhammamaññāya
sabbadukkhā pamuccatīti.
“참된 자들과 교제해야 하고
참된 자들과 어울려야 하리.
참된 자들의 정법을 원만하게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리라.”
(참된 자들과 함께 경, 상윳따니까야 S1.31, 각묵스님역)
“참사람과 함께 지내며
참사람과 함께 사귀어라.
참사람의 참다운 가르침을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
(참사람과 함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1, 전재성님역)
one should associate only with the good;
With the good one should foster intimacy.
Having learnt the true Dhamma of the good,
One is released from all suffering."
(With the Good, CDB S1.31, 빅쿠 보디역)
이 게송이 부처님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이다. 마차 재롱잔치 하듯이 “누구의 것이 잘 말한 것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부처님은 “sabbadukkhā pamuccatīti.”라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가르침 목적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음을 말한다.
누군가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거나, 불교는 자비의 종교, 불교는 지혜의 종교, 이고득락 등으로 말하지만 장님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식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불교란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이 결론 내린 것과 같이 “sabbadukkhā pamuccatīti.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 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그런데 스님들은 초불연 것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비구들이여”로 시작 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이는 해피스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어에 대한 것이다. 우리말로 풀어 쓴 것 보다 한문경전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한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 와 닿아서 일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한문을 써가며 이야기하면 고상하고 품위가 있듯이 문자를 쓰면 더 심오해 보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법문 자료를 보면 잘못된 내용이 많다. 인터넷 시대에 누구나 글이나 동영상을 올려서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지만 잘못된 것을 올려 놓으면 ‘구업’을 짓게 된다. 인터넷의 바다에 떠다녀서 누구에게 영향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못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잘못된 정보가 들어가 있는 동영상이라면 삭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불자들이 믿고 따르는 경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본다. 번역된 경전을 인용하기도 하고 수행의 방편으로 사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경우 ‘주석’을 중시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비교를 해보면 이와 다르다. 이번 경에서는 주석을 따르지 않고 빅쿠 보디의 견해를 따른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야 책의 머리말이나 각종 기고문에서 “첫째, 주석서를 중시하였다.”라고 천명한 것은 삭제해야 되지 않을까?
20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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