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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마음의 해탈,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과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2. 11:36

 

 

네 가지 마음의 해탈,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과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

 

 

부처님의 두 번째 게송

 

나산띠경(S1.34)에서 부처님은 세개의 게송을 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Kodha jahe vippajaheyya māna

sayojana sabbamatikkameyya,
Ta
nāmarūpasmimasajjamāna

akiñcana nānupatanti dukkhā.

 

(Nasantisutta, S1.34)

 

 

[세존]

분노를 버리고 자만을 내던져야 하고

 모든 족쇄 남김없이 건너야 하노라.

 정신ㆍ물질 집착 않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160)

 괴로움은 그를 결코 덮치지 못하노라. 

 

(있는 것이 아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각묵스님역)

 

 

[세존]

분노를 떠나고 또한 망상도 버려

일체의 결박을 뒤어넘어야 하리.

정신-신체적 과정에 집착하지 않아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264) 괴로움이 따르지 않네.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4, 전재성님역)

 

 

[The Blessed one:]

 

one should discard anger, cast off conceit,

Transcend all the fetters.

No sufferings torment one who has nothing,

Who does not adhere to name-and-form. (*73)

 

(There Are No, CDB 1.34, 빅쿠 보디)

 

 

이 게송은 하늘사람(Devata) 사뚤라빠 무리 중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덧없음을 노래 하자 부처님이 시로서 읊은 것이다.

 

각주를 보면

 

게송에 대한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60)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akincana)’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라는 그 무엇이 없는 자(raga-kincanadi-virahita)이다.”(SA.i.63) 이것은

아라한의 동의어이다. 본서 제4권 「고닷따 경」(S41:7) §12와 주해를 참

조할 것.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264)  akiñcana : Srp.I.63에 따르면, 탐욕등의 번뇌를 떠난 자(rāgakiñcanadi virahita)를 이른다. 즉, 탐진치(--)가 없는 아라한을 이른다.

(각주, 성전협 전재성님)

 

 

(*73) akiñcana in pada c is a common epithet of the arahant. Spk explains it as devoid of the "something" (or impediments) of lust, hatred, and delusion (see 41:7; IV 297,18-19 = MN I 298,~-15).

(각주, CDB, 빅쿠 보디)

 

 

c구절에서 akiñcana는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별칭이다. 이를 주석에서는  갈망, 증오, 망상 등의 “어떤 것(something, 또는 장애들)”이 없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41:7; IV 297,18-19 = MN I 298,~-15을 보라).

(빅쿠 보디 각주 번역)

 

 

번역서의 각주를 보면 아낀짜나(akiñcana)’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아낀짜나는 탐진치가 소멸된 자라는 뜻으로 아라한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lust, hatred, delusion의 어떤 것이 없는 자가 아라한이라 하였다. 갈망의 뜻인 Lust가 탐욕에 해당되고, 증오의 뜻인 hatred가 성냄에 해당되고, 망상의 뜻인 delusion이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빅쿠 보디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delusion(망상, 현혹, 기만)이라 하였는데 41:7을 보라고 하였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S41:7을 보라는 것이다. 초불연 각주에서도 S41:7을 보라고 하였는데 고닷따경(S41:7)’이라 한다. 고닷따경에서는 아낀짜나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이 되어 있을까? 그래서 S41:7을 찾아 보았다.

 

세가지 마음의 해탈이 있는데

 

고닷따의 경은 마음의 해탈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 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 텅 비어 있는 마음의 해탈 이렇게 세 가지가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마음에 해탈에 대한 이야기는 맛지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3)’에도 병행적으로 설명 되어 있다.

 

경에서 세가지 마음의 해탈이 언급 되어 있다. 경을 참고 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비고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

(appamāā cetovimutti,

무량심해탈)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채우고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채웁니다. (S41.7)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

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

(ākiñcaññā cetovimutti,

무소유심해탈)

수행승이 한량없는 의식을 뛰어넘어 이와 같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듭니다. (S41.7)

 

텅 비어 있는 마음의 해탈

(suññatā cetovimutti,

공심해탈)

수행승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텅 빈 집으로 가서 이와 같이 이것은 나로 보나 나의 것으로 보나 텅 빈 것이다.’라고 사유합니다. (S41.7)

 

 

 

 

Vimutti

 

 

세 가지 마음의 해탈에 대한 빠알리어는 appamāā cetovimutti, ākiñcaññā cetovimutti, suññatā cetovimutti 이다. 이 중 두 번째인 ākiñcaññā cetovimutti가 위 게송에서 언급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 괴로움이 따르지 않네. (akiñcana nānupatanti dukkhā, S1.34)”라 하였디.  이때 akiñcana’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ākiñcaññā cetovimutti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로 번역되고 한자어로는 무소유심해탈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닷따경에 설명되어 있는 세 가지 마음의 해탈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각주 설명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

(appamāā cetovimutti,

무량심해탈)

12가지 한량없는 마음의 해탈이 있다. 네가지 청정한 삶(사범주)과 참사람의 길과 경지(사향사과)이다. 네 가지 청정한 삶은 무량하게 퍼져 나가기 때문이고 참사람의 길과 경지는 오염을 제거하여 한계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마음의 해탈

(ākiñcaññā cetovimutti,

무소유심해탈)

아홉가지 종류의 해탈이 있다. 무소유처 해탈과 사향사과해탈이다. ‘무소유처는 대상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고, 사향사과는 무언가 고통을 주거나 방해하는 오염원이 없기 때문에 무소유이다.’

텅 비어 있는 마음의 해탈

(suññatā cetovimutti,

공심해탈)

문맥상으로는 사실의 무실체성을 통찰을 통한 해탈을 말한다. 그러나 숲이나 나무 밑이나 빈 집에서 명상이라는 실천적 수행과 결합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각주를 보면 무소유심해탈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이는 무소유처에 대한 설명으로서 아무것도 대상으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아무것도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심을 닦으면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들어감을 말한다.

 

그런데 경의 각주를 보면 아홉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 아홉가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소유처 해탈과 사향사과해탈이라 한다. 무소유처해탈 한가지와 사향사과해탈 여덟 가지를 말한다. 여기서 사향사과해탈은 오염원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탐진치와 같은 오염원이 소멸 되었을 때 더 이상 소유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그런자를 아라한이라 하였다. 그래서 게송에서 ‘akiñcana’라 하였는데, 이는 아무것도 없는 자라는 뜻으로 아라한과 동의어라 한다.

 

마음의 해탈이 하나 더 있는데

 

고닷따 경에서는 세 가지 마음의 해탈과 더불어 하나 더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이라 한다. 이를 ‘animitta cetovimutti’라 하고 한자어로 무상심해탈이라 하였다. 이렇게 경에서는 총 네 개의 마음의 해탈이 언급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찟따]

존자여,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존자여, 세상에 수행승이 모든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삼매를 성취합니다. 존자여, 그것을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Godattasutta-고닷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7, 전재성님역)

 

 

고닷따경은 고닷따찟따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고닷따가 물어 보면 찟따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을 보면 놀랍게도 고닷따는 존자라 되어 있고, 찟따는 장자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무슨뜻일까? 빅쿠가 의문나는 것에 대하여 물의면 재가의 장자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경의 각주에 찟따장자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경의 초반을 보면 한 때 존자 고닷따는 맛치까산다 마을에 있는 암바따까 숲에 있었다.(S41.7)”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찟따가 맛치가산다 마을의 장자, 즉 그 마을의 촌장이자 존경받는 재가불자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병행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3)’에서는 대화자가 다르다. ‘꼿띠따사리뿟따의 대화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똑 같은 내용이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장자가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고,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사리뿟따존자가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상상으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려 즐길 때

 

경에서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에 대하여 모든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삼매를 성취합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지금 어떤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빠알리어로  니미따(nimitta)’라 하였다. 이를 전재성님은 인상이라 번역하였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표상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니미따를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 (amanasikārā)’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개념화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보았을 때 저것은 여자다” “저것은 남자다” “저것은 아름답다등 대상에 대하여 순간포착하여 한눈에 전체적으로 보면서 개념화 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래서 보는 것으로 그쳐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개념화 하였을 때 대상이 사라졌을 지라도 니미따(인상 또는 표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니미따를 떠 올려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아 표상(니미따)을 취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 될까? 앙굿따라니까야 성적교섭의 경(A7.50)’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가 완전히 청정한 삶을 선언하여 여인과 함께 서로 교합하지 않고, 여인의 맛사지, 지압, 세욕, 안마를 즐기지 않고, 여인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담장 너머나 성벽 너머 들려오는, 웃거나, 이야기 하거나, 노래하거나, 우는 여인의 소리를 듣지 않더라도, 예전에 여인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유희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는 그것에 유혹되고 그것을 욕망하고 마침내 쾌락에 빠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이 파괴되고 균열되고 잡되고 더럽혀지고 때묻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적교섭의 굴레에 묶인, 청정하지 못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불만,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Methuna sutta- 성적교섭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7.50, 전재성님역)

 

 

성적교섭의 경(A7.50)’에는 모두 일곱 가지 사례가 소개 되어 있다. 여인과 직접적인 접촉, 엿보는 것, 몰래 상상하는 것 등 모두 일곱가지에 대한 것을 보면 공통적으로 청정하지 못한 행위라 하였다. 특히 여인과의 과거 경험을 떠 올리면서 상상하면서 즐기는 것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 유희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라 하였다.  이는 신체적, 언어적 행위만이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행위 역시 업을 짓는 것을 말한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정신적 업을 짓는 것이 더 업을 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행위는 의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왜 번뇌가 일어나는가?

 

상상으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니미따를 취하는 것과 같다. 이는 개념화 된 것이다.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 표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단지 마음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토끼뿔, 거북털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실재하지 않는 여인의 얼굴을 떠 올려 이를 즐기는 것은 경에 따르면 정신활동을 올바로 기울이지 않는 것에 해당된다.

 

올바른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번뇌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의 '모든번뇌의 경(M2)'에서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ara)’라 한다. 그래서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생겨난 번뇌는 더욱 증가한다.(M2)” 라고 하였다. 생각이 생각을 유발하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 일어남이 결국 번뇌를 유발하고 말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 어떤 여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번뇌가 치성하여 더욱 더 괴로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는 생겨나지 않고 생겨난 번뇌는 끊어진다. (M2)”라고 하셨다.

 

그런데 고닷따경에서는 모든 인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S41.7)”라 하였다. 어떤 표상(니미따)도 취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어떤 대상에도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록 그것이 선법에 해당되는 것일지라도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않을 때 인상을 여읜 삼매를 성취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해탈(animitta cetovimutti, 무상심해탈)’이라 하였다.

 

네 가지 마음의 해탈의 교집합은?

 

고닷따경에 따르면 총 네 가지 마음의 해탈이 설명되어 있다. 이를 한자식으로 표현 하면, 무량심해탈, 무소유심해탈, 공심해탈, 무상심해탈 이렇게 네 가지가 된다. 그런데 경에서는 이 네 가지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이라 하였다. 모두 마음의 해탈에 대한 것이지만 각기 고유한 특성이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표현 하는 것으로 본다면 네 가지 마음의 해탈에는 공통집합이 없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이 있다고 한다. 네 가지의 교집합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찟따]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의한 해탈에는 탐욕이 텅 비고 미움이 텅비고 어리석음이 텅 비어 있습니다.

 

(Godattasutta-고닷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네 가지 마음에 대한 해탈에 대하여 각기 최상이라 하였다. 모두 다 훌륭함을 말한다. 그러나 네 가지 해탈을 보면 모두 공통적인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이라는 세 가지 오염원이 텅비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가지 마음의 해탈에 대한 교집합은 탐진치가 모두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마음의 해탈을 이룬 것으로 본다. 설령 그 마음의 해탈이 무량심해탈, 무소유심해탈, 공심해탈, 무상심해탈 등 다른 표현으로 불리우지만 탐진치가 소멸되었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네 가지 마음의 해탈에 대하여 이 개념들이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이유는 이러한 것입니다. (S41.7)”이라 하였다. 따라서 네 가지 해탈 중에 어느 것 하나를 성취하더라도 모두 마음의 해탈로 보는 것이다.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였을 때

 

그렇다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부처님이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은 아라한 송을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S56.11)

 

 

 

2014-0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