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돌이표 인생, 지금 여기에서 무르익은 과보(Ditthe dhamme savipako, S1.49)
“차한잔 하러 가도 될까요?”
종종 문자를 받는다. “차한잔 하러 내려가도 될까요?”라는 문자이다. 같은 빌딩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인데 그는 현재 직원 두명과 함께 보안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늘 쩔쩔맨다. 일로 인하여 알게 된지 벌써 사오년 된다.
그 사장이 내려 오면 늘 커피를 제공한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요즘은 주로 불교관련 이야기를 한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종종 글을 본다고 한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살기가 팍팍해요”
그 사장이 최근 이전에 세들어 있었던 빌딩 주인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서로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이전 빌딩주인은 “요즘 살기가 팍팍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 “부자가 엄살부린다”라고 하였다. 빌딩을 소유하여 임대수입으로 살아가는 부자가 서민들이나 쓰는“팍팍하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가당치도 않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팍팍하다’는 말은 ‘물기나 끈기가 적어 목이 멜 정도로 매마르고 부드럽지 못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주로 서민들의 삶에 대한 표현을 팍팍하다라고 표현 한다. 그런데 부자가 팍팍하다는 말을 하였을 때 “아마도 임대수입이 반으로 줄어서 팍팍하다고 말 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임대수입자에게 있어서 수입이 많거나 적거나 간에 여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빌딩소유자는 매우 근검절약하는 사람이라 한다. 심지어 자신의 빌딩에 입주한 회사에서 나오는 폐지를 직접 모아 팔 정도라 한다. 일반적으로 폐지가 나오면 폐지만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가나하고 불쌍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돌아 간다. 그럼에도 이를 가로채기라도 하듯이 주인이 사무실을 돌아 다니며 폐지를 수거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그 빌딩임대사업자는 절대 기부나 자선행위 같은 것을 할리 없다고 단언하였다. “팍팍하다”라고 말하는 부자에 대하여 구두쇠의 엄살로 보았던 것이다.
임대사업자의 “살기가 팍팍하다”라는 말은 누구나 엄살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 되었다. 왜냐하면 빌딩을 소유하느라 빚이 많이 졌을 경우 임대수입이 절반으로 줄어 들었다면 당연히 팍팍한 삶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깡통아파트이다. 부동산 거품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분양받은 아파트 가격이 곤두박질침에 따라 수입의 대부분을 이자비용으로 지불하는 소위 ‘하우스푸어’가 탄생하였다. 이런 하우스푸어의 삶은 팍팍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빌딩을 소유한 자 역시 은행에서 대출받아 지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임대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면 역시 “사는 것이 팍팍하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빌딩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입주 사무실의 폐지를 수거하여 파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삶이 팍팍하였을 때 자선이나 기부, 보시 등 돕고 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 여겨 진다.
인색한 자의 경, 맛차리경(Maccharisutta, S1.49)
초기경전에서는 보시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보시하는 삶 자체가 선한 행위로서 공덕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덕행을 많이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라 보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르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맛차리경(Maccharisutta, S1.49)’이 있다. 이를 ‘인색함의 경’, 또는 ‘인색 경’이라 한다. 인색한 자의 과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다.
경에서 하늘사람이 세상에 인색하여 제물을 아끼고 걸식자를 꾸짖는 자가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인색한 자의 과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부처님에게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Ye'dha maccharino loke kadariyā paribhāsakā,
Aññesaṃ dadamānānaṃ antarāyakarā narā.
Nirayaṃ tiracchānayoniṃ yamalokañcupapajjare,
Sace enti manussattaṃ daḷidde jāyare kule,
Coḷaṃ piṇḍo ratī khiḍḍā yattha kicchena labbhati.
Parato āsiṃsare bālā tampi tesaṃ nalabbhati,
Diṭṭhe dhamme savipāko samparāye ca duggatīti.
(Maccharisuttaṃ, S1.49)
[세존]
“이 세상에서 인색하여
재물을 아끼고 걸식자를 꾸짖으며
베풀고자 하는 다른 이를
베풀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
지옥과 축생과
아귀의 세계에 떨어지며
인간의 세계에 이르더라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네.
먹고 입고 즐기고 노는 그와 같은 것은 구하기 어렵고,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에게 얻어지지 않네.
현세에도 그 과보를 받으며
내생에는 나쁜 곳으로 간다네.”
(Maccharisutta-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9, 전재성님역)
[세존]
이 세상에서 인색하고 쩨쩨하기도 하고
[걸식하는 자에게] 욕설까지 퍼붓고
저들 다른 사람들이 보시하여 베풀려면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지옥과 축생의 모태와
죽음의 세상에 태어나리로다.
그들이 다시 만일 인간 세상 온다면
가난한 가문에 태어나게 되리니
의복과 음식과 즐거움과 오락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일세.
어리석은 자들조차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조차도 그들은 얻지 못하리니
이것이 인간세상 현재의 과보이며
미래에는 악처에 [태어날 것이로다.]"
(Maccharisutta-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49, 각묵스님역)
[The Blessed one:]
“Those who are stingy here in the world,
Niggardly folk, revilers,
People who create obstacles
For others engaged in giving alms:
They might be reborn in hell,
In the animal realm or Yama's world.
If they come back to the human state
They are born in a poor family
Where clothes, food, pleasures, and sport
Are obtained only with difficulty.
Whatever the fools may expect from others,
I Even that they do not obtain.
I This is the result in this very life;
And in the future a bad destination.”
(Maccharisutta- Stingy, 상윳따니까야 S1.49, 빅쿠보디역)
걸식자를 꾸짖는 자
첫번째 게송을 보면 ‘걸식자를 꾸짖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paribhāsakā에 대한 번역어이다. Paribhāsakā는 ‘[adj.] one who abuses or reviles; abusive, 悪口の, 誹謗の’의 뜻이다. 학대하거나 욕설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인색한자에 대하여 걸식자를 욕하는 자와 동급으로 놓았다.
인색한 자는 자신의 수중에 들어 오면 절대 나가는 법이 없다. 그래서 걸식수행자가 밥을 빌어 먹으로 올 때 ‘귀찮아’ 하는 것이다. 욕설과 함께 쫓아 내어 버리는데 이런 장면이 초기경전 몇 곳에 등장한다.
초기경전에 걸식수행자를 천대하는 장면이 있다. 부처님이 어느 날 탁발을 나갔는데 바라문 악기까 바라문이 저 멀리서 오는 부처님을 보고서 “까까중아, 거기 섯거라. 가짜 수행자여, 거기 섰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Sn1.7)”라 말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고대 인도에서 걸식수행자는 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처럼 ‘천한놈’이라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교단에 천민도 수행승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계급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교단에 대하여 ‘천민집단’으로 본 것이다.
걸식수행자는 얻어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 걸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청정한 삶을 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교단 뿐만 아니라 육사외도 등도 걸식에 의존하며 살았다. 이런 걸식 전통은 정통바라문 시절에도 있었다. 인생사주기라 하여 할일을 다 해 마친 바라문이 손자가 태어날 때쯤 해서 집을 나가 유행하며 보낸다. 그리고 걸식에 의존한다. 그래서 걸식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인색한 자는 보시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보다 더 아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보시는 커녕 욕설을 퍼붓고 내 쫓기도 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다른 사람을 꼬드겨 보시하지 말도록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걸식자를 학대하는 자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스쿠루지 못지 않은 아딘나뿌바까(Adinnapubaka)
첫 번째 게송에서 각묵스님은 ‘쩨쩨하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 말은 ‘속어’에 가깝다. 이는 빠알리어 kadariyā에 대한 해석인데, kadariyā는 ‘[adj.] miserly; stingy,. 卑鄙的’의 뜻이다. 인색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재물을 아끼고”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Niggardly folk’라 하였는데 ‘인색한 족속’이라 하였다.
게송에서 인색한 자의 특징에 대하여 1) macchari(구두쇠), 2) kadariyā(인색한자), 3) paribhāsakā(비난하는자), 4) antarāyakarā narā(방해하는 자)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구두쇠는 ‘돈이나 재물 따위를 쓰는 데에 지나치게 인색한 사람’을 말한다. 동화속에 나오는 스쿠루지 영감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스쿠루지 영감 못지 않게 인색한 자에 대한 이야기가 불교에도 있다. 법구경 2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인 ‘맛타꾼달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바라문 학생 맛타꾼달리(Matthakundali)의 아버지 아딘나뿌바까(Adinnapubaka)는 아주 인색하여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주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외아들에게 줄 금 장식품조차도 일꾼에게 줄 세공비를 절약하려고 자신이 손수 만들어 주었다.
그 아들이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에 황달병에 걸렸다. 그의 아내는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서두르라고 하였으나 돈이 아까워서 손수 의사를 찾아 다니며 황달의 치료법을 배워 여러가지 약을 손수 지어서 아들에게 먹였다. 그러나 약효가 나지 않고 아들의 병이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러자 인색한 아딘나뿌바까는 이들을 데리고 의사를 찾았으나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
아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들이 죽게 되면 조문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이 많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문밖 난간에 내어 놓았다. 아들이 죽게 되면 닌간에서 바로 화장시켜버릴셈이었다.
(법구경 2번 인연담 맛타꾼달리(Matthakundali)이야기,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인색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인색한 자의 이름을 보면 인색한자라 쓰여 있다. 아딘나뿌바까(Adinnapubaka)라는 이름에서 ‘Adinna’가 바로 ‘인색’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Dinna는 ‘given; granted’의 뜻으로 ‘보시한 것’을 말한다. 거기에 부정을 뜻하는 A가 붙어서 Adinna가 되는데 이는 ‘베푼적이 없는자’가 되어 ‘인색한 자’의 뜻이 된다. 따라서 맛타꾼달리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 이름 아딘나뿌바까(Adinnapubaka)는 ‘이름 자체가 인색한 자’가 된다.
근검절약이 미덕이긴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근검절약은 미덕이다. 그래서 칭찬하고 권장한다. 그러나 이 것이 지나쳐서 한번 들어 온 것은 빠져 나가는 법이 없다고 하였을 때 인색한자, 심하게는 ‘구두쇠’라 한다. 이에 대한 대명사가 서양에서는 ‘스쿠루지’가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아딘나뿌바까’라 볼 수 있다.
근검하고 절약하는 것에 대하여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인색하다고 하여 비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비난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인색한 자가 걸식자에 대하여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보시하지 못하다록 방해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1) macchari(구두쇠), 2) kadariyā(인색한자), 3) paribhāsakā(비난하는자), 4) antarāyakarā narā(방해하는 자) 이렇게 네 가지로 말하였다. 이렇게 네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 과보는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에 나는 것이고,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궁핍하게 살 것이라 하였다.
공덕행에 대한 과보
세번째 게송 마지막 구절에 ‘Diṭṭhe dhamme savipāko samparāye ca duggatīti’가 있다. 이에 대하여 “현세에도 그 과보를 받으며 내생에는 나쁜 곳으로 간다네.”라고 번역 되어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지금 여기서(Diṭṭhe dhamme) 가난한 자는 이전 생에서 인색함에 대한 과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쁜 곳으로 가는 것은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에 태어남을 말한다. 이처럼 인과응보로 설명된 것은 초기경전의 특징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이 사람의 몸을 얻어 자비심이 깊고 인색함을 떠나 삼보에 귀의한 자의 과보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Ye'dha laddhā manussattaṃ vadaññū vītamaccharā,
Buddhe pasannā dhamme ca saṅghe ca tibbagāravā,
Ete sagge pakāsenti yattha te upapajjare.
Sace enti manussattaṃ aḍḍhe ājāyare kule,
Coḷaṃ piṇḍo ratī khiḍḍā yatthākicchena labbhati.
Parasambhatesu bhogesu vasavattīva modare,
Diṭṭhe dhamme savipāko samparāye va suggatīti.
(Maccharisutta- 인색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9, 전재성님역)
[세존]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얻어
자비심이 깊고 인색함을 떠나며
부처님을 믿어 기뻐하고
가르침과 참모임을 깊이 존중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밝히며 거기에 태어난다네.
인간의 세계에 이르더라도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먹고 입고 즐기고 노는
그와 같은 것을 얻기 쉽다네.
다른 사람이 모아놓은 재물을
자유로운 하늘사람처럼 즐기며
현세에서 그 공덕을 받고
내생에는 좋은 길로 간다네”
(Maccharisutta-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49, 각묵스님역)
[세존]
“여기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인색함을 건넜고 항상 두루 친절하며
부처님과 법에 대한 청정한 믿음 있고
승가를 지극하게 존중한다면
그들은 천상을 밝히는 자 되리니
분명히 그들은 그곳(천상)에 태어나리.
그들이 다시 만일 인간 세상 온다면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게 되리니
의복과 음식과 즐거움과 오락을
구하는데 어려움 없을 것일세.
그들은 자재천의 신들과 같이
남들이 모은 재물 즐길 것이니
이것이 인간세상 현재의 과보이며
미래에는 선처에 [태어날 것이로다.]”
(Maccharisutta- 인색 경, 상윳따니까야 S1.49, 각묵스님역)
[The Blessed one:]
“Those here who, on gaining the human state,
Are amiable and generous,
Confident in the Buddha and the Dhamma
And deeply respectful towards the Sangha,
These brighten up the heavens
Where they've been rebom.
If they come back to the human state
They are reborn in a rich family
Where clothes, food, pleasures, and sport
Are obtained without difficulty.
They rejoice like the devas who control
The goods amassed by others. (*108)
This is the result in this very life;
And in the future a good destination.”
(Maccharisutta- Stingy, 상윳따니까야 S1.49, 빅쿠보디역)
이 게송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베푸는 삶을 살았을 때 그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데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 안락하게 살 것이라 한다. 이처럼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자들은 이미 공덕행에 대한 과보로 본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무르익은 과보(Ditthe dhamme savipako)
게송에서는 ‘Diṭṭhe dhamme savipāko’라 하여 “현세에서 그 공덕을 받고”라고 번역 되어 있다. 여기서 savipāka는 ‘異熟ある, 有異熟, 報果ある’의 뜻으로 ‘업에 대한 과보가 익는 것’을 말한다.
이 savipāka에서 vipāka는 ‘kamma-result’라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업에 대한 과보’의 뜻이다. 따라서‘Diṭṭhe dhamme savipāko’에서 Diṭṭhe dhamme는 ‘지금 여기’라 번역 되므로 이문장은 “지금여기에서 과보가 무르익는다”는 뜻이 된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라는 말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Diṭṭhe dhamme’라 한다. Diṭṭhe는 ‘Diṭṭha+e’로서, Diṭṭha는 ‘[pp. of passati] seen; found; understood. (nt.), vision. 見られたる, 見’의 뜻이다. 과거분사형으로 보여진, 발견된, 이해된의 뜻이다. 그리고 dhamme는 ‘dhamma+e’로서, dhamma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법, 진리, 사실 등으로 번역 된다. 그래서 ‘Diṭṭhe dhamme’는 ‘보여진 법’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무슨말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서 보여진 것’이라는 말이다.
현재 이 모습이 바로 ‘Diṭṭhe dhamme’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지금 여기’라 하고, 영어로는 ‘here and now’라 하고, 한자어로는 ‘現法(현법)’이라 한다. 이처럼 ‘Diṭṭhe dhamme’는 초기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지금 나의 이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런데 지금 나의 이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이전의 나의 모습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전에 내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의도적 행위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어 지금 나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kamma vipāka, 즉 업보라 볼 수 있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게송에서 표현 된 것처럼 ‘Diṭṭhe dhamme savipāko (S1.49)’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에서 그 공덕을 받고”라 하였다. 이는 선업공덕에 대한 것이다. 각묵스님은 “이것이 인간세상 현재의 과보이며”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is is the result in this very life”라 하였는데 이를 번역하면 “이것이 바로 이 인생에서 받는 과보이다”라 할 수 있다.
이렇게 ‘Diṭṭhe dhamme savipāko (S1.49)’문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모습을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고통받고 있다면 이전에 행한 의도적 행위가 익은 것이고, 또한 지금 여기에서 안락하다면 역시 이전 행위에 대하여 열매가 익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게송에서 인색하고 더구나 걸식자를 욕하고 베푸는 것을 방해 하는 자가 받는 과보를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사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지금 여기에서 부귀를 누리고 있다면 이전에 삼보에 귀의 하여 베푸는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게송에서 이런 설명이 부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것이 무슨죄냐?”고 항변할 지 모른다. 그러나 원인과 조건과 결과의 연기법에 따르면 가난한 것은 업에 대한 과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계를 준수하고 십선행을 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정하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하였듯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왜 항상 지금 여기에서인가?
살다보면 항상 어려움속에만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뜨거운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괴로운데 그때 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추위와 맞닥뜨렸을 때 역시 결국 지금 여기에 있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플 때 결국 ‘지금 여기’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런데 괴로움으로 인하여 ‘지금 여기를 실감’하는 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 꼬깔리야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bhi nassati kassaci kammaṃ
Iti ha taṃ labhate va suvāmi,
Dukkhaṃ mando paraloke
Attani passati kibbisakāri.
결코 어떤 행위도 없어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그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죄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내세에 자신 안에서 그 괴로움을 발견한다. (stn665)
(Kokālik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마지막 구절에서 ‘Attani passati kibbisakāri’가 있다, 이는 Attani는 ‘Oneself, himself’의 뜻이고, passati는 ‘sees; finds; understands.’의 뜻이고, kibbisakāri는 ‘a criminal’의 뜻이다. 따라서 ‘Attani passati kibbisakāri’에 대하여 직역을 하면 “범죄행위를 내가 스스로 본다”의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나까무라하지메는 “来世にあってはその身に苦しみを受ける(내세에 그 몸의 괴로음 받는다)”라 하였다. 법정스님은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짓고 내세에서 그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라 하였다. 나까무라하지메역과 법정스님역을 보면 단지 내세에서 과보를 ‘받는다’라고 만 되어 있을 뿐 자신이 괴로움을 ‘발견한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받는다’와 ‘발견한다’는 그의 의미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도돌이표 인생
어느 개그맨이 늦게 결혼하였다. 식장에서 하는 말이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라고 하며 미소짓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개그맨의 그 말이 이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그 개그맨은 몇 년 지나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에도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라고 말을 했을까?
누군가 술을 마시고 그 다음날 고통스러워 하며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아파서 중병에 걸린자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며 자조 섞인 말을 할 수 있다. 또 누군가 임종을 맞이 하면서 “내 이날이 올 줄 알았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울 때 보다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느낄 때 “내 이날이 올 줄 알았다”라는 말이 더 실감 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내 이럴 줄 알았다” 라거나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라고 느낀다면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 늘 고통스런 것이 본질임에도 잠시 외출 갔다가 되돌아 온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만 결국 원점으로 회귀 하기를 되풀이 하는 ‘도돌이표 인생’과 같은 것이다.
도돌이표인생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지금 여기서 고통을 맛볼 때라 볼 수 있다. 술을 마시고 그 다음날 고통스러워 할 때, 병에 걸려 괴로워 할 때, 임종직전에 이르렀을 때,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때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때 항상 ‘지금 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경에서는 죄악을 짓는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내세에 자신 안에서 그 괴로움을 발견한다. (Attani passati kibbisakāri,stn655)”라 하였을 것이다.
인정사정없이 표현된 초기경전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자기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Attani passati kibbisakāri’라 하여 passati가 ‘sees’의 뜻으로 ‘본다’는 뜻이다. 고통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일이다.
만일 고통이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태양으로 인하여 매년 여름마다 ‘열대야’의 고통을 받았다면 그 고통 받는 순간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서 가난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면 그 가난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 가난이라는 고통을 보게 된 것은 이전에 행위에 대한 과보가 무르익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경에서는 “Diṭṭhe dhamme savipāko(S1.49)”라 하여 직역하면 “지금 여기에서 과보를 받는다”가 된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는 직설적으로 ‘인정사정없이’ 표현 되어 있다. 가난한 원인이나 장애의 원인등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의 법칙에 어느 것 하나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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