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을 왜 잘 지어야 하나? 내용무블로그와 비공개블로그
관악산으로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건만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그러나 관악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산일 뿐이다. 사람들이 관악산이라고 이름 붙여서 관악산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멀리 있는 관악산은 결코 관악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기 때문에 관악산이 된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과 이름을 가져야만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되어 산다면 이름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로린슨 크로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 간다면 이름이나 명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름이나 명칭이 필요하다. 무언가 구분하고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나 명칭은 한 두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이름 외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 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가면 아버지나 어머니로 불리고, 회사에 가면 과장이나 사장 등으로 불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접속을 하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아이디가 있고 필명이 있기 때문이다.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과 관련된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모든 것을 이기고 무엇이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가? 어떠한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답송으로 답한다.
nāmaṃ sabbaṃ anvabhavi
nāmā bhiyyo na vijjati,
Nāmassa ekadhammassa
sabbeva vasamanvagūti.
[세존]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명칭이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
(Nāma(anvabhavi)sutta-명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 전재성님역)
[세존]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르고
무엇보다 더 나은 것이 없노라.
명칭이라는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 하노라.”
(Nāma(anvabhavi)sutta-이름 경, 상윳따니까야 S1.61, 각묵스님역)
“Name has weighed down everything;
Nothing is more extensive than name.
Name is the one thing that has
All under its control.”121
(Name, CDB S1.61, 빅쿠보디역)
경의 제목이 Nāmasutta이다. 이에 대하여 번역자들은 ‘명칭 또는 이름, Name’ 등으로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나마(Nāma)가 이름이나 명칭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른다?
그런데 첫번째 구절을 보면 “nāmaṃ sabbaṃ anvabhavi”라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번역자마다 번역이 약간 다르다. 전재성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라 하여 ‘이긴다’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르고”라 하여 ‘짓누르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기다’와 ‘짓누르다’는 다른 말이다. ‘이기다’라는 말은 “싸움, 시합, 경기에서 우열이나 승부를 겨루어 앞서거나 꺾다”라는 뜻이지만, ‘짓누르다’는 말은 “물리적인 힘을 주어 마구 누르다”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르게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기다 또는 짓누르다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anvabhavi이다. 이는 ‘anvabhavati + I’로 분리될 수 있다. PCED194에서 Anvabhavati에 대한 영어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문자로 되어 있어서 알 수 없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짓누르다’에 해당되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른다(nāmaṃ sabbaṃ addhabhavi).’고 하였다. 자연적으로 생긴 것(opapatika)이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kittima)이든 명칭을 떠나서는 중생(satta)이든 현상(sankhara)이든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나무(rukkha)나 돌(pasana)을 두고 사람들은 ‘이름 없는 것(anamaka)’이라는 이름(명칭, nama)으로 그것을 부른다.”(SA.i.95)
‘짓누름’으로 옮긴 addha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짓눌림 경(S35:29) 3의 주해을 참조할 것.
(244번 각주, 초불연 각묵스님)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짓누른다’의 뜻은 빠알리어 addhabhavi를 번역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PTS 본에는 anvabhavi라 되어 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일체가 암흑이다” vs “일체는 짓눌려 있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짓누르다의 의미에 대하여 ‘짓누름 경(S35.29)’을 참조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3권이 없으므로 성전협상윳따 3권을 참조 하였다. 경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Sabbaṃ bhikkhave andhabhūtaṃ. kiñca bhikkhave sabbaṃ andhabhūtaṃ?
Cakkhuṃ bhikkhave andhabhūtaṃ, rūpā andhabhūtā, cakkhuviññāṇaṃ andhabhūtaṃ, cakkhusamphasso andhabhūto. 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tampi andhabhūtaṃ. Kena andhabhūtaṃ: andhabhūtaṃ jātiyā jarā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andhabhūtanti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암흑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암흑인가?
1)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암흑이고 형상도 암흑이고 시각의식도 암흑이고 시각접촉도 암흑이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암흑이다. 어떻게 암흑인가?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인해 암흑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Andhabhūtasutta-암흑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따라 발생되는 느낌에 대하여 ‘암흑’이라 하였다. 이 암흑이라는 말이 andhabhūtaṃ이다. 그러나 미얀마본에서는 addhabhūta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Srp.II.363에 따르면, addhabhūtaṃ은 ‘정복된, 극복된, 억압된’의 뜻으로 쓰인다. Cdb.114는 주석서에 따라 ‘짓눌렸다(weighed down)’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42번 각주)”라고 되어 있다.
경에서 일체가 암흑이다라고 하였을 때, ‘암흑이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 andhabhūtaṃ(mentally blind)이다. 이는 PTS 본에 실려 있다. 그런데 미얀마본에 는 addhabhūtaṃ로 되어 있으므로, 빅쿠보디는 미얀마본과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하여 ‘짓눌렸다’의 의미로 ‘weighed down’이라고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빅쿠보디의 견해를 중시하여 역시 ‘짓눌린다’의 의미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에 대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일체는 짓눌려 있다.”라는 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표현은 어색하고 부적절해 보인다. 일체가 짓눌려 있다는 것은 무언가 물리력으로 인하여 업압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차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게송에서 첫번째 구절에 대하여 차이를 표로 만들었다.
번역자 |
번 역 |
비 고 |
빠알리어 |
nāmaṃ sabbaṃ anvabhavi |
Anvabhavi(PTS본) |
전재성님역 |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
Anvabhavi(PTS본) |
각묵스님역 |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르고 |
Addhabhavi(미얀마본, 주석서) |
빅쿠보디역 |
Name has weighed down everything |
Addhabhavi(미얀마본, 주석서) |
첫구절에 대한 가장 큰 차이는 PTS본과 미얀마본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님은 PTS본을 적용하여 ‘이기다’의 뜻으로 번역하였고,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미얀마본을 적용하고 더구나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하여 ‘짓누르다(weighed down)’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나마경(S1.61)은 ‘명칭’이 키워드이다. ‘이름지어짐’으로 인하여 그 이름에 지배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른다”라고 번역하였다. 이긴다와 짓누른다라는 말이 비슷한 말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짓누르다’의 뜻은 ‘물리적 힘을 주어 마구 누르다’의 뜻이다. 완력을 행사하여 억압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짓누르다’에 대한 영어가 ‘weigh down’이다. 빅쿠보디가 “Name has weighed down everything”라고 번역하였는데 ‘weigh dow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weigh down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무겁게 짓누르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각주가 있다.
In pada, I read addhabhavi with Be and Eel & 2, as against anvabhavi in Se. Addhabhavi is aorist of adhibhavati, to overcome, to overpower; see CPD, S.V. addhabhavati.
Spk: There is no living being or entity that is free from a name, whether the name be natural or fabricated. Even a tree or stone with no known
(121번 각주, CDB,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PTS 본에 anvabhavi로 되어 있지만, 미얀마본(Be and Eel & 2)에 쓰여 있는 대로 addhabhavi를 사용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addhabhavi는 adhibhavati의 부정과거형으로서 ‘to overcome(극복하는 것) 또는 to overpower(압도하는 것)’의 뜻임을 말한다. 그래서 마치 완력을 행사하여 억누르는 듯한 표현인 ‘weighed down’이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빅쿠보디는 주석(Spk)의 견해를 인용하여 “이름이 자연적으로 붙여진 것이든 인위적으로 부여된 것이든 어느 것이든지 명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뜻으로 설명하였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a tree or stone with no known”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나무(rukkha)나 돌(pasana)”이라 설명하였다. 이름이 없는 나무는 ‘이름 없는 나무’라 불리운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언어습득능력
명칭은 단지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저 산이 관악산이라고 이름 붙여달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이 관악산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관악산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산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집앞에 있으면 ‘앞산’이라 하고 집뒤에 있으면 ‘뒷산’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산도 아니고 뒷산도 아닌 산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아마 ‘저산’이라 부를지 모른다. 그도 저도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할까? ‘이름 없는 산’이라 불러야할까?
이렇게 어떤 것이든지 명칭을 붙여야 대화가 된다. 그리고 사유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언어능력은 매우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언어습득하는 과정에 대하여 도올 김용옥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발성의 체계를 반복해서 그 발성의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키죠. 그 발성의 체계를 의미의 체계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하게 어린 영아가 서너살 때 이걸 다 해냅니다.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
김용옥교수에 따르면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동물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불과 서너살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매우 놀라워 한다. 어린 영아가 언어의 발성과 그 발성의 의미에 대하여 정확하게 매칭해 내는 능력에 대한 것이다.
언어의 의미체계를 안다는 것
그래서 김용옥 교수는 강좌에서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이게 도대체 DNA에 그 언어 습득 구조가 이미 내장 되어 있나? 딴 동물의 DNA와 다른 뭐가 있지 않은가? 나는 도저히 인간이 공통으로 해내는 이런 작업에 대해서 나는 가만히 생각하면서 이 경이를 풀길이 없다고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하였다.
아기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언어의 의미체계를 아는 것이다. 산이라고 하였을 때 산이라는 발음을 듣고 산의 이미지와 매칭 시켜 ‘산’이라 하는 것이다. 나무도 마찬가지고 바위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사물에는 온갖 이름이 부여 되어 있다. 그래서 이름이나 명칭을 듣고 보고서 그 의미를 알아낸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이나 명칭 없이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 간다면 모를까 사회생활을 하려면 언어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긴다(nāmaṃ sabbaṃ anvabhavi)”라고 하였을 것이다. 또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nāmā bhiyyo na vijjati)”라고 하였을 것이다.
우스꽝스런 필명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도 있을까?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래서 ‘홍길동’ 등으로 불린다. 옛날 천한 신분이라면 성도 없이 ‘개똥이’ ‘소똥이’ 등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부르기 위한 편리한 명칭이 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 이름을 떠 올렸을 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게송에서와 같이 “확실하게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또 명칭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을 잘 지을 필요가 있다. 특히 넷상에서 그렇다. 인터넷공간이 현실세계와 다르다고 하여 대충 이름을 짓거나 우스꽝스럽게 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 짓는 다는 말이 있듯이 이름이 그 사람의 이미지를 형성하여 이름에 걸맞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최악의 필명은?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사이트에 접속하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 그리고 필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최악의 필명’이 있다. 아무리 인터넷공간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익명으로 활동한다고 하지만 대단히 성의 없는 필명을 보게 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점’이다. 필명을 ‘.(점)’으로 하는 자이다.
점하나을 필명으로 하였을 때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행위라 볼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인터넷공간에서는 아이디와 비밀번호, 필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칭을 부여 해야 하는데 점하나의 경우 대단히 성의 없는 이름으로 본다.
대체로 좋은 이름이나 명칭을 가졌을 때 결과도 좋아 보인다. 방문한 사람들의 필명을 보면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필명도 보인다. 그래서 잘 이름 붙여진 필명을 보면 “안 봐도 비디오”라는 말이 있듯이 대체로 블로그가 잘 꾸며져 있다.
내용무블로그와 비공개블로그
그러나 거의 대부분 필명을 아무렇게나 짓는다. 마치 옛날에 ‘개똥이’ ‘소똥이’ 하듯이 성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해당블로그에 들어가 보면 ‘맹탕’이다. 내용물은 없고 단지 ‘로그인’용으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이른바 ‘냉무(내용무)블로그’이다.
또 어떤 경우는 “비공개 블로그입니다”라 하여 허탕치게 만든다. 어떤 비밀이 그렇게 많길래 비밀로 해 놓았는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방문하는 네티즌들의 상당수가 ‘비공개블로그’이다.
현실세계에서나 사이버세계에서난 이름이나 명칭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다. 그런데 이름이나 명칭을 지을 때 될 수 있으면 잘 짓자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필명이 그렇다.
왜 필명을 잘 지어야 하나?
인터넷필명은 자신이 짓는다. 이는 누군가 명칭을 붙여 주는 것과 다르다. 저 창문 밖에 있는 관악산은 누군가 명칭을 부여 하여 관악산인 줄 알고 있지만, 넷상에서 필명은 철저하게 자신이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필명을 잘 지을 필요가 있다.
점하나(.)와 같은 성의 없는 필명이 있다. 또 개똥이 소똥이 같은 우스꽝스런 이름도 있다. 이런 이름을 보면 ‘안봐도 비됴’이다. 그러나 고상한 필명을 보면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런데 헛탕 치는 경우도 있다. 비공개로 해 놓았을 때이다.
필명을 만들 때는 성의 있게 만들어야 하고 고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필명은 그 사람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넷상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알 수 없지만 써 놓은 글을 보면 인격을 파악할 수 있듯이, 필명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S1.61)”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은 “명칭이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1)”라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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