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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온통 불타고 있네, 부처님의 불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3. 21:32

 

세상은 온통 불타고 있네, 부처님의 불의 가르침

 

 

 

부처님의 세 번째 법문

 

세상은 불타고 있다이 말은 중학교 시절 접하였다. 종립중학교 불교시간에 불교책을 통해서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세상은 탐욕으로 불타고, 세상은 성냄으로 불타고, 세상은 어리석음으로 붙타고 있다라는 사실을 이해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왜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하였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런 의문은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풀렸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경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 불타고 있다!”비유와 방편 없는 아딧땅경(연소경, S34.3.6)(2012-04-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경의 이름은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Ādittapariyayasutta,S35.28)’이라 한다. ‘초전법륜경무아상경에 이어 부처님의 세 번째 법문으로 알려져 있다이 경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BBS무명을 밝히고에 출연하여 낭송하는 것을 들었다.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경이라 하였다.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

 

연소의 경과 유사한 내용의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S1)’에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세상을 핍박하고 무엇이 세상을 포위하고 어떤 화살이 세상을 꿰뚫으며 어떤 연기가 항상 휩싸이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답한다.

 

 

maccunā'bbhāhato loko

jarāya parivārito,
Ta
hāsallena otiṇṇo

icchādhūmāyito sadāti.

 

 

[세존]

죽음이 세상을 핍박하고

늙음이 세상을 포위하고

갈애의 화살이 세상을 꿰뚫으며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

 

(Abbhāhatasutta-핍박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6, 전재성님역)

 

 

[세존]

죽음에 의해 세상은 핍박받고

늙음에 의해 에워싸여 있느니라.

갈애의 쇠살에 꿰찔러져 있으며

욕구에 의해 항상 불타고 있느니라.”

 

(Abbhāhatasutta-핍박 경, 상윳따니까야 S1.66, 각묵스님역)

 

 

"The world is afflicted with death,

Enveloped by old age;

Wounded by the dart of craving,

It is always burning with desire."

 

(Aflicted, CDB S1.66, 빅쿠보디역)

 

 

 

 

burning

 

 

 

 

네 가지 질문과 답변을 보면

 

하늘사람은 네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역시 네 가지로 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사람 질문

부처님 답변

키워드

무엇이 세상을 핍박하는가?

죽음이 세상을 핍박한다.

죽음

maccu

무엇이 세상을 포위하는가?

늙음이 세상을 포위한다.

늙음

jarā

어떤 화살이 세상을 꿰뚫는가?

갈애의 화살이 세상을 꿰뚫는다.

갈애

tahā

어떤 연기가 항상 휩싸이는가?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인다.

욕망의 연기

icchādhūmāyita

 

 

게송의 키워드는 죽음(maccu), 늙음(jarā), 갈애(tahā), 욕망의 연기 (icchādhūmāyita)이다. 여기서 욕망의 연기는 어떤 뜻일까?

 

욕망의 연기라 번역된 빠알리어는 ‘icchādhūmāyito’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욕망에 불붙어서(icchāya āditto)”라 하였다.

 

Dhūmāyitodhūma+āya+ta’로서, dhūma‘smoke(연기); fumes(가스)’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icchādhūmāyito는 직역하면욕망의 연기가 된다. Icchā‘wishing; longing’의 뜻이고, dhūmāyita가 연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게송의 네 번째 구절 icchādhūmāyito sadāti에 대하여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라고 번역하였다. 연기를 뜻하는 Dhūmāyita에 대하여 직역한 것이다.

 

왜 초불연에서는 의역하였을까?

 

그런데 각묵스님은 욕구에 의해 항상 불타고 있느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연기를 뜻하는 Dhūmāyita에 대하여 직역하지 않고 붙타는뜻으로 의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왜 직역하지 않고 의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무엇에 의해서 불타고 있습니까?’ Ee2, SS, Se 주석서의 kissa dhūmāyito 대신에 Ee1, Se, Be, Be 주석서의 kissa dhūpāyito 로 읽어서 옮겼다. dhūpāyito장로게’(Thag) {448} 게송에도 나타난다. 노만(K.R. Norman)은 이 {448}을 옮기면서 dhūpāyita를 연기가 내뿜어지는 (perfumed, obscured by smoke)으로 옮기고 있지만 역자는 주석서를 참조해서 불타고 있는 (āditta-S.A.i.95)으로 옮겼다. 본서 우빠짤라 경’(S5:7) {542}에서도 padhūpito불타는, 달아오르는의 뜻이다.

 

(초불연 247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적 번역을 하였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Dhūpāyita의 원래의 의미가 연기를 뜻하는 임에도 주석서에서 불타는 뜻(āditta)’ 뜻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주석서의 의견을 존중하여 의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만의 번역을 거론 하며 연기의 뜻으로 번역한 것은 마치 오류가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우빠짤라 경’(S5:7)을 들고 있다.

 

초불연 각주와 일치하는 빅쿠보디 각주

 

각묵스님은 주석서 내용(S.A.i.95)를 근거로 하여 각주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만의 번역과 우빠짤라경 등의 예를 들어 연기 나는뜻이 아니라 불 타는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해당구절에 대한 CDB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I read with Be, Se, Eel, and Spk (Be) kissa dhūpāyito, as against kissa dhūmāyito in Ee2, SS, and Spk (Se).

 

The verse is also at Th 448 with dhūpāyito. Norman (at EV I, n. to 448) contends this word means "perfumed" or "obscured (by smoke)," but Spk glosses as āditto: see too v.542, where padhūpito must mean “burning.”

 

(cdb 124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놀라우리 만큼 초불연 각주와 일치한다. 순서는 물론 사용된 용어 또한 일치 한다. 첫 번째 문장에서 각묵스님은 “Ee2, SS, Se 주석서의 kissa dhūmāyito 대신에 Ee1, Se, Be, Be 주석서의 kissa dhūpāyito 로 읽어서 옮겼다.”라 하였다. 이는 빅쿠보디의 각주 첫번째 문장인 “I read with Be, Se, Eel, and Spk (Be) kissa dhūpāyito, as against kissa dhūmāyito in Ee2, SS, and Spk (Se).”라는 문구와 정확하게 일치 한다.

 

이어서 두 번째 문장에서 각묵스님은  노만이야기를 꺼냈다. 노만은 빠알어에 있어서 세계적인 석학이고,  1981 년부터 1994 년 까지 13 년간 빠알리성전협회 (Pali Text Society: PTS) 회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 각주를 보면 “dhūpāyita를 연기가 내뿜어지는 (perfumed, obscured by smoke)으로 옮기고 있지만이라 하였다. 이는 빅쿠보디의 각주 “Norman (at EV I, n. to 448) contends this word means "perfumed" or "obscured (by smoke)”와 정확하게 일치 한다.

 

또 각묵스님은 우빠짤라경의 예를 들면서 본서 우빠짤라 경’(S5:7) {542}에서도 padhūpito불타는, 달아오르는의 뜻이다.”라 하였다. 이 부분 역시 빅쿠보디의 “see too v.542, where padhūpito must mean “burning.”와 정확하게 일치 한다. 다만 빅쿠보디는 ‘v.542’라 하였지만 각묵스님은 우빠짤라 경’(S5:7) {542}’이라고 구체적으로 경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순서와 사용용어, 사용예 등에 있어서 빅쿠보디의 각주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연기가 나는 것과 불타는 것

 

게송에서 키워드는 ‘dhūmāyita’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연기 나는뜻으로 하였고, 각묵스님은 불타는(burning)’뜻으로 달리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burning(불타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달리 번역한 것은 직역의역의 차이이다. 전재성님은 dhūmāyita에 대하여 본래 의미대로 직역하여 연기라 하였고, 반면 빅쿠보디는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dhūpāyito’로 해석하여 ‘burning(타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각묵스님은 역시 주석의 견해를 중시하여 ‘burning(불타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연기가 나는 것과 불타는 것은 어쩌면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 연기라는 것은 불이 타올라야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icchādhūmāyito(탐욕의 연기)’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빅쿠보디는 “burning with desire”라 하여 욕망으로 불타고 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마찬가지로 욕구에 의해 항상 불타고 있느니라.”라 하여 불타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우빠짤라경에 실려 있는 542번 게송

 

이처럼 게송에서 연기라는 뜻의 dhūmāyita가 있음에도 굳이 불타는 뜻으로 의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우빠짤라경에 있는 542번 게송을 예로 들고 있다. 우빠짤라경에 실려 있는 542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bbo ādipito loko

sabbo loko padhūpito,
Sabbo pajjalito loko

sabbo loko pakampito,

 

 

세상은 모두 불이 붙었고

세상은 온통 연기에 휩싸였네.

세상은 모두 불길을 토하고

세상은 온통 뒤흔들리네.

 

(Upacālāsutta -우빠짤라의 경, 상윳따니까야 S5.7, 전재성님역)

 

 

모든 세상은 불타오르고

모든 세상은 달아오르며

모든 세상은 화염에 싸여 있고

모든 세상은 흔들리도다.

 

(Upacālāsutta -우빠짤라, 상윳따니까야 S5.7, 각묵스님역)

 

 

"All the world is on fire,

All the world is burning,

All the world is ablaze,

All the world is quaking.

 

(Upacālā, CDB S5.7, 빅쿠보디역)

 

 

우빠짤라경은 빅쿠니상윳따(S5)에 실려 있는 경의 제목이다. 우빠짤라빅쿠니가 마라 빠삐만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빠삐만이 그대는 어디에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가?”라고 묻자, 우빠짤라빅쿠니는 나는 어디에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빠삐만이 욕계천상에 태어나서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어떤지 묻는다. 그러나 빅쿠니는 세 개의 게송으로 거절하는 답송을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위 게송이다.

 

sabbo loko padhūpito”에 대하여

 

우빠짤라빅쿠니는 세상이 온통불타고 있다라고 마라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구절을 보면 ‘padhūpito’가 있다. 바로 이 단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burning’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 단어에 대한 번역이 문제가 되는가?

 

Padhūpitapadhūpeti의 과거분사형으로서 ‘fumigated(그을리다)’; ‘smoked(훈제한)’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타는 것과 크게 관련이 없는 단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빅쿠보디는 ‘burning’이라 하였다. Burning불타는, 연소, 화끈거리는, 현안, 뜨거운의 뜻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sabbo loko padhūpito”구절에 대하여 “All the world is burning”이라 하였다. 이는 모든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세상은 온통 연기에 휩싸였네.”라 하여 앞서 앞서 언급된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S1.66)”과 같이 연기의 뜻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각묵스님은 이 구절에 대하여 모든 세상은 달아오르며라 하였기 때문이다.

 

표로 비교해 보면

 

이와 같은 세 번역자의 번역에 대한 비교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핍박의 경(S1.66)

우빠짤라경(S5.7)

키워드

빠알리어

icchādhūmāyito sadāti

sabbo loko padhūpito

dhūmāyito,

padhūpito

전재성님역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

세상은 온통 연기에 휩싸였네

연기,

연기

각묵스님역

욕구에 의해 항상 불타고 있느니라

모든 세상은 달아오르며

불타고,

달아오르며

빅쿠보디역

It is always burning with desire

All the world is burning

Burning, burning

 

 

전재성님의 경우 직역을 하였다. 그래서 dhūmāyito에 대하여 원어 그대로 직역하여 연기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기조는 우빠짤라경에서도 유지 되어 ‘padhūpito’에 대하여 ‘fumigated(그을린)’의 뜻인 연기 나는의 뜻으로 번역하여 일관성을 유지 하고 있다.

 

빅쿠보디는 초지일관 ‘burning’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빅쿠보디가 각주에서 dhūmāyito에 대하여 dhūmāyito(연기)에 대하여 dhūpāyito라 읽는다고 밝혔고, 더구나 주석의 견해를 인용하여 āditta(blazing; burning)의 의미라 하였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단호하게 “padhūpito must mean “burning.”라 하여 “padhūpito 의 뜻은 반드시 burning의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일관되게 ‘burning’으로 번역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오락가락 하다. 왜 오락가락 하는가? 그것은 핍박의 경(S1.66)에서는 분명히 불타고 있느니라라 하여 ‘burning’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우빠짤라경(S5.7)에서는 달아오르며라 하여 열기로 뜨거워지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달리 번역하였을까? 그것은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우빠짤라경에서 fire, burning, ablaze, quaking 순으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fireādipita에 대응된다. 그래서 세 번역자 모두 불타는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구절의 padhūpita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빅쿠보디는 padhūpita burning의 뜻이라고 천명하였기 때문에 “All the world is burning”라 하여 온세상이 타오르고 있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주석서와 빅쿠보디의 견해를 중시하는 초불연에서는 모든 세상은 달아오르며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달아오르다라는 말은 ‘burning’의 뜻과 다르다는 것이다. Burning불타는또는  연소의뜻이 제일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용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가장 좋은 표현은 연기 나는의 뜻으로 해야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burning 이라고 천명(247번 각주)하였으므로 연기나는뜻으로 번역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세상은 달아오르며라 하여 앞뒤가 잘 연결 되지 않는 번역이 되어 버렸다.

 

불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불이 나면 진행과정이 . 가장 먼저 불이 나고, 연기가 나고, 그 다음에 불길이 치솟을 것이다. 그리고 불과 연기는 더욱더 커질 것이다. 그 다음에 불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한 것이 우빠짤라경(S5.7)에 실려 있는 상윳따니까야 542번 게송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ādipita

padhūpita

pajjalita

pakampita

PCED194

(빠알리사사전)

in flames; ablaze.

fumigated; smoked

blazed up; burnt forth.

trembled; quaked.

전재성님역

불이 붙었고

연기에 휩싸였네

불길을 토하고

뒤흔들리네

각묵스님역

불타오르고

달아오르며

화염에 싸여 있고

흔들리도다

빅쿠보디역

on fire

burning

ablaze

quaking

 

 

표를 보면 화재가 나는 과정이 순서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처음이 불이 붙고(ādipito),이어서 연기가 나고(padhūpito), 불이 더욱 더 커지고(pajjalito),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pakampito) 일련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단계인 ‘padhūpit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burning’이라 하였다. 이는 오역이라 본다. 불이 나는 과정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빠알리사전 PCED194 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다. 불이 붙은 다음에 연기를 낼 것이므로 전재성님의 번역처럼 연기에 휩싸였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각묵스님의 경우 달아오르며라 하였으나 이 역시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불타오르고 난 다음에는 연기가 나는 것이 순서인데, 달아오르다 하여 또 다시 불타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이중설명이라 보여진다. 아마 빅쿠보디의 ‘burning’을 의식하여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247번 각주에서 padhūpita에 대하여 burning의 뜻이라고 천명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바르게 번역한다면 연기가 나며라 해야 할 것이다.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

 

부처님은 세상이 온통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처음에 이 말을 접하였을 때 충격이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중학교 당시 이 말을 접하였을 때 하나의 화두와 같았다.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하는 의문을 말한다.

 

그러나 중학생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화두 아닌 화두를 지닌 채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러다 초기경전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경전에 답이 있었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Ādittapariyayasutta,S35.28)’이 그것이다. 이 경에 세상은 불타고 있다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인식하는 세상을 말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은 항상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고,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Ādittapariyayay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 전재성님역)

 

 

지금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있다면 시각도 불타고, 시각의식, 시각접촉도 불탄다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느낌인 것이다. 그런 느낌은 언제나 세 가지이다. 즉 즐거운 느낌(樂受), 괴로운 느낌(苦受),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다.

 

이런 느낌으로 인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발생한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겨나고, 괴로운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라 한다. 그래서 이 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세상은 매 순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바다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을 끌 수 있을까?

 

불은 땔감이 있어야 탄다

 

불은 땔감이 있어야 탄다. 땔감이 없으면 더 이상 불이 나지 않을 것이다. 땔감이 다 떨어졌을 때 불은 자연스럽게 꺼질 것이다. 그런 땔감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이다. 이 땔감으로 하여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Ādittapariyayay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시각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하여 싫어 하는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탐욕을 일으키는 즐거운 느낌, 성냄을 야기하는 괴로운 느낌, 어리석음의 근원이 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땔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매순간 탐욕이라는 땔감, 성냄이라는 땔감, 어리석음이라는 땔감을 만들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세상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불의 가르침

 

땔감이 없으면 불은 자연스럽게 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탐욕의 땔감, 성냄의 땔감, 어리석음의 땔감을 만들지 않으면 불이 계속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땔감은 외부에서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발전기 처럼 자기가 땔감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땔감은 늘어나고, 화를 내면 낼 수록 역시 땔감은 늘어만 간다.

 

그런데 땔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은 더욱 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탄다는 것이다. 이처럼 탐진치로 살아 갈 때 탐진치의 땔감으로 인하여 윤회는 아득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불을 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땔감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탐욕의 땔감, 성냄의 땔감, 어리석음의 땔감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았을 때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불이 꺼진 상태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되는 탐진치라는 땔감을 만들어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불의 가르침이라 본다.

 

 

 

2014-06-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