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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없으면 이 세상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2. 14:55

 

 

마음이 없으면 이 세상도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가 되면 우주선을 타고 우주지평선에 이를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을 말할까?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으로 세상이 생겨났고 무엇으로 사귐이 이루어지고 무엇 때문에 세상이 집착하며 무엇으로 세상이 괴로워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chassu loko samuppanno

chassu kubbati santhava,
Channameva up
ādāya

chassu loko vihaññatīti.

 

(Lokasutta. S1.70)

 

 

[세존]

여섯으로 세상이 생겨났고

여섯으로 사귐이 이루어지며

여섯 때문에 세상이 집착하고

여섯으로 세상이 괴로워하네.”

 

(세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0, 전재성님역)

 

 

[세존]

여섯에서 세상은 생겨났고

여섯 때문에 친교를 맺느니라.

여섯을 취착하여 세상은 전개 되고

여섯에 세상은 시달니느니라.”

 

(세상 경, 상윳따니까야 S1.70, 각묵스님역)

 

 

"In six has the world arisen;

In six it forms intimacy;

By clinging to six the world

Is harassed in regard to six."

 

(World, CDB S1.70, 빅쿠보디역)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을 보면 세상의 발생원리가 매우 짤막하게 설명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여섯감역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무엇이 세계의 발생인가?”

 

세상은 여섯감각능력(육경)과 여섯감각대상(육경)의 접촉에 따라 생겨난다. 예를 들어 이라는 감각기관이 형상이라는 감각대상과 접촉 하였을 때 시각의식이 생겨남으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 된다. 이는 세계의 경(S12.44)에서 자세히 설명 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세계의 발생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이 세계의 발생이다.

 

(세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44, 전재성님역)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발생원리는 접촉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석에서는 이에 대하여 형성의 세계(Sakhāraloka)’라 하였다. 그렇다면 형성의 세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에서는 로히땃사경(S2.26)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로히땃사경(S2.26)에서

 

로히땃사경에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 있다. 청정도론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에 대하여 정의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Na kho panāha āvuso, appatvā lokassa anta dukkhassa antakiriya vadāmi. Api cāha āvuso imasmiññeva byāmamatte kalebare sasaññimhi samanake lokañca paññāpemi. Lokasamudayañca lokanirodhañca lokanirodhagāminiñca paipadanti.

(Rohitassasutta, S2.26)

 

 

[세존]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

 

(로히땃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6, 전재성님역)

 

 

[세존]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로히땃사 경, 상윳따니까야 S2.26, 각묵스님역)

 

 

However, friend, I say that without having reached the end of the world there is no making an end to suffering. It is, friend, in just this fathom-high carcass endowed with perception and mind that I make known the world, the origin of the world, the cessation of the world, and the way leading to the cessation of the world.

 

(Rohitassa, CDB S2.26, 빅쿠보디역)

 

 

이 말은 하늘사람이 세계의 끝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세계의 끝이란 어떤 것일까? 경의 초반부에 하늘사람은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느냐?(S2.26)”라고 물어 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일종의 이상향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꿈꾸는 세상이다. 괴로움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극락같은 곳이다. 그런 이상향이  저 지평선 너머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삶이 고단할 때

 

삶이 고달프면 누구나 현실을 떠나 싶어 한다. 지금 당장 고통스런 현실을 떠날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곳에 태어나고자 한다. 그곳이 바로 극락(極樂)’이라 볼 수 있다. 극락은 문자 그대로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곳이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수카와띠(sukhāvatī)라 한다. 수카(Sukhā)가 즐거움이나 행복을 뜻하고, 와띠(vatī)fence(울타리)를 뜻하기 때문에 수카와띠는 행복만 있는 곳 또는 즐거움만 있는 곳의 의미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수카바띠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승불교가 함께 나타난 용어이다.

 

그런데 수카바띠라는 말은 아미타여래의 국토라는 뜻이다. 이는 서방정토라고 한다. 영어로는 Western Paradise’이다. 극락은 파라다이스인 것이다. 그런데 불교용어사전에 따르면 서방정토는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 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방향과 거리가 표현 되어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원만하고, 생사, 춥고 더움, 근심 걱정 등의 모든 괴로움이 전혀 없는 세계(극락, 불교용어사전)”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극락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대목이 하늘사람이 말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S2.26)”라는 구절이다. 더구나 하늘사람은 세상 끝까지 걸어가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극락 또는 서방정토라는 말이 훨씬 이전에 이미 초기경전에서 개념정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후대에 가르침과 다른 개념이 등장할 것을 미리 예측한 듯 보인다. 그래서 경계의 가르침으로 설한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은 있기나 한 것일까?

 

양관에서 본 지평선

 

지평선이 있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본 적이 있다. 2013실크로드여행지에서이다. 돈황에서 양관으로 가는 길에 본 지평선은 땅과 하늘이 맞닿아 있었다. 마치 바다에서 수평선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평선을 넘어가면

 

누군가 세상의 끝을 향해 여행한다고 하였을 때 또 다른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그런 기대가 요즘은  SF영화로도 나타난다. 세상의 끝 저 너머에 가면 놀라운 세상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SF영화를 보면 그 지평선 너머에 당도한 사람은 망설인다. 지평선을 넘을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지평선을 넘게 만든다. 지평선을 넘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과거로 이동해 버린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램된 시간의 지평선을 넘어서자 과거 어느 시점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Event Horizon

 

 

사람들은 지금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지금 행복한 이들은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 시켜 주는 곳이 천국또는 극락이라 볼 수 있다.

 

주로 죽어서 가는 곳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생노병사가 없는 곳이다. 오로지 행복만 있는 곳이다. 로히땃사경에서 하늘사람도 그런 곳이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부처님에게 묻는다. 하지만 부처님은 세계의 끝을 걸어서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S2.26)”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부정하였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은 생노병사가 없는 극락 또는 서방정토와 같은 세상을 왜 걸어서 도달할수 없다고 하였을까? 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을 근거로 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신의 아들은 세계로서의 세상(cakkavala-loka,즉 기세간)의 끝(anta)을 질문하였고 세존께서는 형성된 세상(Sakhāra-loka)의 끝으로 답을 하고 계신다.(SA.i116)

 

(초불연 329번 각주, 각묵스님)

 

 

주석에 따르면 하늘사람이 생각하는 세상과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늘사람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상 개념인 세계로서의 세상(cakkavala-loka,즉 기세간)’으로 보았고, 부처님은 우리의 감각능력 따른 조건에 따라 발생된 형성된 세상(Sakhāra-loka)’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관점이 다르니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무한소급하다 보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있어서 내가 있다고 보는 객관적 세상이다. 또 하나는 내가 있어서 세상이 있다는 주관적 세상이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맞을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전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이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은 계속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지만 남겨진 자손이 있기 때문에 계속 세상을 살아 가는 것으로도 본다. 비록 반쪽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DNA가 전승된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 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손을 남기고자 하는가 보다.

 

이처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존재하였고 내가 죽고 나서도 세상이 존재할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사람들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면 하나의 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계속 올라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한소급하다 보면 어디에 이를까? 거의 대부분 이 세상을 있게 만든 하나의 원인에 귀결 될 것이다. 그 시초에 대하여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 브라흐마, 자재천, 그리스도, 하나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모두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 된 것이라 본다.

 

이렇게 객관적인 세상은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창조된 것이라 본다. 그래서 피조물은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서 태어나 살다 갈 뿐이다. 이처럼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 보는 시각이 있다.

 

피라미드식 가계도를 만들었을 때

 

하지만 부처님은 객관적 세계관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을 초기경전에서 볼 수 없다. 오히려 부정하는 듯한 경이 있다. ‘풀과 나뭇가지의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까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버릴 것이다.

 

(풀과 나뭇가지의 경, S15.1, 전재성님역)

 

 

나뭇가지를 꺽어 나뭇잎으로 가계도를 만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하며 피라미드식 가계도를 만들었을 때 과연 잠부디까(인도)의 나뭇잎이 남아 나겠느냐는 것이다.

 

창조론과 종말론

 

가계에 대하여 무한소급하다 보면 인도 뿐만 아니라 지구전체의 잎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시초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찾는 도중에 죽고 말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 우주는 시작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게 된 것은 무명갈애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무명에 덮힌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 하였다.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시작을 알 수 없다면 종착점도 역시 알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명과 갈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끊임 없이 윤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식으로 무한소급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식으로 무한 소급하여 최초의 시작점을 알아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하나의 원인에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세상을 있게 한 그 분으로 귀결 된다. 그분이 창조주이다. 그런데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하여 영원히 이 세상이 계속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창조가 있으면 종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신교를 보면 창조론과 함께 종말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무한소급으로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 식으로 따져 나간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다. 그래서 무시무종이라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창조론이나 종말론은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존재함으로 인하여

 

세상을 주관적으로 바라 보는 시각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내가 존재함으로 인하여 세상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없다고 역시 세상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주관적인 세계관은 불교적 세계관에 가깝다. 이는 세상의 경(S12.44)’에서 세상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S12.44)”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건 발생하는 세상이 바로 형성된 세상(Sakhāra-loka)’이다. 이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라 볼 수 있는데, 접촉함에 따라 시각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시각의식이 생겨난 것은 마음()이 일어났다는 말과 같다.

 

대상을 지각하여만 마음이 일어난다. 따라서 마음이 생겨 났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은 모두 조건 발생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라 하여 반드시 조건(pattica)라는 말이 들어 간다. 이처럼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세상의 발생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초불연 각주에서 언급된 두 개의 세계는 세계로서의 세상(cakkavala-loka,즉 기세간)’형성된 세상(Sakhāra-loka)’이다. 전자는 물리적세상이라 볼 수 있고, 후자는 인식된세상이라 볼 수 있다. 전자는 기세간으로도 설명되기 때문에 객관적세상이라 볼 수 있고, 후자는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인식할 수 있가 때문에 주관적세상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인식차이가 난다. 그래서 하늘사람은 걸어서 끝까지 가면 생노병사가 없는 세상이 나타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생노병사가 없는 궁극에 이를 것으로 말씀 하셨다.

 

하늘사람은 자신이 전생에 로히땃사라 불리는 선인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생노병사가 없는 영원히 즐거움만 있는 파라다이스를 찾아 가기로 한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저 지평선 너머 세상 끝까지 이르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마치 전속력으로 달려 가듯이 큰 걸음걸이로 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저는 걸음걸이가 커서 동쪽의 바다에서 서쪽의 바다를 한걸음으로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S2.26)”라 한 것이다. 그러나 도착하지 못하였다. 가는 도중에 수명이 다 되어서 죽어 버린 것이다.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세간(器世間)이라 한다. 기세간이란 우리가 머물러 사는 산하대지 따위의 세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기세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의 끝에 도달하면 생노병사가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세계가 있을까?

 

마하야나에서는 서방정토라 하여 서쪽방향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하야나에서는 반드시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쪽으로 끝까지 가면 파라다이스가 나올지 모른 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마치 전속력으로 달려 가면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만일 빛 보다 더 빠르게 달린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시간역전이 일어나 과거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SF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디. 물리법칙상 빛 보다 더 빠른 로케트를 만들어 우주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빛의 속도에 근접한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 끝 까지 도달하고 할지라도 가는 도중에 멈추고 말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으로 여행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질 없는 짓이다. 부처님은 로히땃사경에서 분명히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S2.26)”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세상 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을까? 이는 이미 언급된 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이라 하였다 육척단신의 몸(byāmamatte kalebare)’을 관찰하면 궁극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궁극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소멸이다. 그래서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말씀 하신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세상의 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하면 생노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상사에서 심오한 의미

 

로히땃사경에서 부처님은 우리의 몸안에서 세상의 끝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세상의 끝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로케트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괴로움을 끝 냈을 때, 그리고 윤회를 종식하였을 때 궁극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이 간결한 말은 인류사상사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너무도 유명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Srp.I.117-118에 따르면, 부처님은 풀이나 나무와 같은 외적인 것과 관련해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네 가지 광대한 존재[四大: 地水火風]로 이루어진 바로 여기의 몸과 관련해서 설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고싸의 이러한 해석보다 더욱 심오한 의미는 우리 몸은 바로 여섯 감각의 장, 즉 시각의 장, 청각의 장, 후각의 장, 미각의 장, 촉각의 장, 정신의 장과 관련 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 몸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전체라는 것이다.

 

(성전협 783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로히땃사경에서 거론된 몸과 마음에 관찰에 따른 궁극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인류사상사에서 심오한 의미를 지니는 너무도 유명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이라는 것이 산하대지나 산천초목을 뜻 하는 기세간이 아니라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이런 세상은 안이비설신의라는 감각영역의 접촉에 따른 것이다. 더구나 우리 몸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전체라 하였는데, 이는 주관적인 세상을 의미한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 가는 세상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인식해야만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세상은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눈을 감아 죽었다면 더 이상 세상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신구의 삼업에 따른 행위가 남아 있는 한 마음이 일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세상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디.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괴로움을 소멸하면 궁극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궁극이 바로 열반이다.

 

그런데 열반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생겨 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 역시 생겨 나지 않았음을 말하기 때문에 열반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생불사가 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런 세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다름 아닌 세상의 끝이라 볼 수 있고, 바로 그것이 열반이라 볼 수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세상의 끝과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CDB 182번 각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편의상 문단을 나누고 번호를 붙였다.

 

 

1.

Spk glosses loka with dukkhasacca and each of the other terms by way of the other three noble truths. Thus the Buddha shows: "I do not make known these four truths in external things like grass and wood, but right here in this body composed of the four great elements."

 

2.

This pithy utterance of the Buddha, which may well be the most profound proposition in the history of human thought, is elucidated at 35:116 by the Venerable Ananda, who explains that in the Noble one's Discipline "the world" is "that in the world by which one is a perceiver and conceiver of the world," i.e., the six sense bases.

 

3.

From Ananda's explanation we can draw out the following I. The Book with Verses (Sagrith~vagga) implications: The world with which the Buddha's teaching is principally concerned is "the world of experience," and even the objective world is of interest only to the extent that it serves as the necessary external condition for experience.

 

4.

The world is identified with the six sense bases because the latter are the necessary internal condition for experience and thus for the presence of a world. As long as the six sense bases persist, a world will always be spread out before us as the objective range of perception and cognition.

 

5.

Thus one cannot reach the end of the world by travelling, for wherever one goes one inevitably brings along the six sense bases, which necessarily disclose a world extended on all sides. Nevertheless, by reversing the direction of the search it is possible to reach the end of the world.

 

6.

For if the world ultimately stems from the six sense bases, then by bringing an end to the sense bases it is possible to arrive at the end of the world.

 

7.

Now the six sense bases are themselves conditioned, having arisen from a chain of conditions rooted in one's own ignorance and craving (see 12:44 = 35:107). Thus by removing ignorance and craving the re-arising of the six sense bases can be prevented, and therewith the manifestation of the world is terminated.

 

8.

This end of the world cannot be reached by travelling, but it can be arrived at by cultivating the Noble Eightfold Path. Perfect development of the path brings about the eradication of ignorance and craving, and with their removal the underlying ground is removed for the renewed emergence of the six senses, and therewith for the reappearance of a world. For a long philosophical commentary on this sutta by Ananda

 

(CDB 182번 각주, 빅쿠보디)

 

 

꽤 긴길이의 각주이다. 빅쿠보디가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인 견해가 대부분이다. 특히 관련 경을 참고하라고 하였고, 관련 경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번역비교를 해 보면

 

1번 문단에서 빠알리어 둑카삿짜(dukkhasacca)’가 있다. 이는 괴로움의 진리라는 뜻이다. 이는 경에서 ‘dukkhassa antakiriya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세상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해야 하는데, 괴로움의 끝에 도달한다는 말이 바로 ‘dukkhassa antakiriya이다. 그런데 이 구문에 대한 세 번역자의 번역이 다르다. 특히 각묵스님의 번역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구 분

  

 

빠알리어

appatvā lokassa anta dukkhassa antakiriya vadāmi

dukkhassa antakiriya

전재성님역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괴로움의 끝

빅쿠보디역

I say that without having reached the end of the world there is no making an end to suffering.

he end of the world

각묵스님역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문장을 보면 키워드는 세계의 끝(lokassa anta)괴로움의 끝(dukkhassa anta)두 가지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dukkhassa anta에 대하여 매우 길게 번역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이라 하였다. 하지만 빠알리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다. 원문에는 단지 ‘dukkhassa antakiriya라 하였을 쁜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괴로움의 끝에라 하였고, 빅쿠보디는 end to suffering”이라 하여  역시 괴로움의 끝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원문에도 없는 말을 집어 과도 하게 번역하였을까?

 

과도한 의역과 주석적 번역

 

각묵스님의 주석적 번역에 대하여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각주에서 본경은 앙굿따라 니까야2로히땃사 경’1 (A4:45)과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대림스님이 번역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출간한 앙굿따라 니까야2로히땃사 경’1 (A4:45)을 그대로 옮겨 실었고 주해를 조금 보충하였다. (328번 각주)”라 하였다. 빠알리 원문에도 없는 긴 길이의 주석적 번역은 대림스님이 번역한 앙굿따라니까야에 실려 있는 로히땃사경(A4.45)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인 것이다.

 

독자들은 원문 훼손 없이 직역된 번역을 좋아 한다. 그럼에도 각주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이른바 주석적 번역을 보면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다. 본문에서는 원문그대로 직역을 하고, 설명할 것이 있다면 각주에서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괴로움의 끝이라는  ‘dukkhassa antakiriya라는 문구에 대하여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식으로 번역한 것은 과도한 의역이자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라 본다.

 

각주의 내용이 동일한데

 

CDB 182번 각주의 두 번째 문단은 참고할 수 있는 경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빅쿠보디의 각주스타일이다. 그래서 관련된 구절이나 단어에 대하여 어느 경을 참고할지에 대하여 친절하게 소개 되어 있다.

 

로히땃사경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is elucidated at 35:116 by the Venerable Ananda”라 하여 상윳따니까야 S35.116을 참고하였다. 세상의 끝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존경하는 아난다존자가 35:116에서 명쾌하게 밝혀 놓았음을 뜻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도 동일하게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불연 331번 각주에서 각묵스님은 세존의 이 가르침은 이미 세존 당시에도 유명하였던 명제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본서 제4세상의 끝에 도달함 경(S35:116)에서 비구들은 아난다존자를 찾아가서~”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두 번째 문단을 보면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This pithy utterance of the Buddha, which may well be the most profound proposition in the history of human thought, is elucidated at 35:116 by the Venerable Ananda~(CDB 182번 각주)”라는 내용이다. 이를 번역하면 이처럼 부처님의 뜻깊은 발언은 그 시대 사람들의 사상에 있어서 매우 심오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S35.116에서 존경하는 아난다 존자에 의하여 명료하게 밝혀졌다가 된다. 이렇게 내용이 유사하다 심지어 빅쿠보디는 ‘may well’이라는 일종의 추측성 문구를 사용하였는데, 각묵스님 역시 이었던 것 같다라여 역시 추측성 표현을 하였다.

 

이처럼 빅쿠보디의 각주와 초불연각주는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에서 “~having arisen from a chain of conditions rooted in one's own ignorance and craving (see 12:44 = 35:107)”가 있다. 여기서 ‘(see 12:44 = 35:107)’라 하여 상윳따니까야 S12:44 S35:107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 경은 같은 경이다. 그래서 같다는 표시로 ‘=’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불연 각주에서도 ‘(S12:44)=S35:107’로 되어 있어서 똑 같은 ‘=’가 보인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빅쿠보디가 소개한 S35.116에서는 세상의 끝과 관련하여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부처님이 정의하신 세계는?

 

세상의 끝에 관한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1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동일한 경(A4:45)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4권에는 세상의 끝에 대하여 세계 끝까지의 경(S35.116)’이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벗들이여, 시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청각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후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미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촉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정신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

 

벗들이여,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할 때에 그것을 고귀한 님의 정의에 따라 세계라고 부릅니다.

 

(세계 끝까지의 경 S35.1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정의하신 세계는 명백하다. 여섯 감역에 따라 지각하고 사유할 때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할 때에 그것을 고귀한 님의 정의에 따라 세계라고 부릅니다.”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불교의 세계관은 인식하는 자의 세계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두 가지가 더 있다.

 

세 가지 세상이 있는데

 

초기불교에서는 세상에 대하여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첫 째는 보이는 세상(okasa-loka)’이다. 산하대지산천초목이 있는 기세간을 말한다. 두 번째는 중생으로서 세상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S22.94)”라고 하였을 때, 이 때 세상이 중생세상(satta-loka)’이다. 세 번째는 형성된 세상(sankata-loka)’을 말한다. 이는 조건지어진 세상이다. 그래서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세상이다. 부처님이 강조한 세상이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 세상

  

  

보이는 세상

(okasa-loka)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세상

-눈에 보이는 물질적세상

기세간(器世間)

중생세상

(satta-loka)

중생으로서의 세상

-중생세간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S22.94)

형성된 세상

(sankata-loka)

모든 유위법으로 이루어진 세상

오취온

 

 

 

위 세 가지 세상 중에 부처님이 강조하신 세상은 세 번째인 형성된 세상이다. 이는 경에서 주로 여섯감역으로 설명된다.

 

윤회세계의 종말을 위하여

 

그렇다면 부처님이 세상에 대하여 여섯감역으로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능력(육근)과 감각대상(육경)접촉에 따라 발생되는 세상을 말한다. 조건에 따라 접촉이 되면 의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게 되어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할 때에 그것을 고귀한 님의 정의에 따라 세계라고 부릅니다.”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경험된 세상이다. 경험되었다는 것은 지각 또는인식 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끝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일까? 세상의 끝으로 가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었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세상의 끝이란 일반사람들에게는 우주의 끝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말씀 하신 세상의 끝이란 다름 아닌 윤회세계의 종말을 말한다.

 

세상의 끝, 윤회종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182번각주 여덟 번째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This end of the world cannot be reached by travelling, but it can be arrived at by cultivating the Noble Eightfold Path.

 

(CDB 182번 각주, 빅쿠보디)

 

 

세상의 끝에 이르기 위해서, 윤회의 종식을 이루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닦아야 함을 말한다. 이 각주에 대한 유사한 문구가 초불연 각주에도 있다. 초불연 331번 각주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방법은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서 경험된 세상일 뿐인 세상의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초불연 331번 각주, 각묵스님)

 

 

세상 끝으로 가는 여행은 빛의 속도로 달려 가는 로케트를 타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의 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극락과 천국은 번지수가 없다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누구나 떠나고 싶어 한다. 영원한 즐거움만 있는 곳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극락이고 천국일 것이다. 그런데 극락과 천국은 번지수가 없다는 것이다. 육도윤회하는 천상은 존재할지 몰라도 영원히 행복만 계속 되는 극락과 천국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삼법인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항상 하지 않아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원한 극락이 있다는 것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또 극락이라 하여 즐거움만 가득한 곳이라 하였는데 삼법인에 따르면 일체개고라 하였기 때문에 이 역시 맞지 않는다. 더구나 극락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를 상정하고 있으나 이는 제법무아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 지평선 너머에 행복이 가득한 곳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마치 무지개가 떠 있는 저 산너머에 파랑새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서쪽 방향으로 세상이 끝날 때 까지 걸어가면 깨끗한 세상이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시대에 세상의 끝은?

 

사람들은 무지개를 찾아 파랑새를 찾아 세상 끝까지 가 보지만 결국 가 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만다. 그렇다면 과학의 시대에 세상의 끝은 무엇일까? 최근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보았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가 나레이션 하며 세상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동영상을 보면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심지어  M이론 등 존재의 근원을 밝히기 위한 온갖 이론을 소개 하고 있다. 이런 것 역시 세상의 끝에 도달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동영상 말미에 물리학자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홀로그램 같은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라 하였다.  우주의 끝에 이르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로 가는 로케트를 이용해야 하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시세계를 탐구한 것이다. 그래서 갖가지 과학적 이론을 적용하여 연구 하여 보니 우리가 사는 세계가 허상이 아닌가?” 하고 의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랙홀 안에 있는 물체를 블랙홀 표면에 있는 정보로 묘사 할 수 있다면 은하계와 항성에서 부터 우리들을 비롯한 공간자체까지 모든 물체가 우리를 둘러싼 이차원 표면에 저장된 정보의 투영물일지도 모릅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무한의 우주공간)

 

 

키워드는 정보의 투영물이다. 우리를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마치 홀로그램 처럼 정보가 투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너무 새로워서 아직까지 물리학자들까지 이해 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한다. 그래서 나레이터 교수는 이 개념이 옳다면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우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이, 우리는 보다 극단적인 변화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끝을 맺는다.

 

과학은 항상 존재론적 관점에서 관찰된다. 그리고 증명함으로써 이론이 입증된다. 우리의 우주가 정보의 투영물이고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이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장은 초기불교 가르침과 유사하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세상(okasa-loka), 중생세상(satta-loka), 형성된 세상(sankata-loka) 이렇게 세 가지 세상이 있을 때 부처님이 강조하신 형성된 세상에 가깝다.

 

이 세상은 정보의 투영물이고 환영

 

물리적 세상에서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없다. 또 지금 괴롭다고 하여 생노병사가 없는 극락 역시 걸어서 끝까지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로케트도 아니고 물리학도 아니다. 팔정도라는 길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세상은 여섯 감역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세상은 여섯 감역의 접촉에 따라 발생된다. 그래서 지각하고 사유함으로서 새로운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물리학자가 말한 이 세상은 정보의 투영물이고 환영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다.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도

 

그러나 부처님은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끝에 간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이 생겨 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세상을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있게 되는데 마음이 없다면 세상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의 끝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이 세상을 보라고 하셨다.

 

 

걸어서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상을 알고 슬기롭고

세상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리지 않네.” (S2.26, 전재성님역)

 

 

 

2014-06-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