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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9. 10:47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경춘가도를 차로 달리다 보면

 

평온한 일요일 아침이다. 여름도 중반에 접어 드는 이때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로 무더운 날씨이다. 비록 30도 안팍이지만 점차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느끼는 체감온도는 그 어느 때 보다 덥게 느껴진다.

 

더울 때마 항상 느끼는 것은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이나 가을 날씨에는 쾌적하여 그다지 좋은 줄 모르지만 막상 너무 더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런 느낌은 삶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경춘가도를 차로 달리다 보면 북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한다. 어떤 이는 스위스의 산과 호수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말한다. 이런 풍광을 대할 때 차를 멈추고 감상한다. 산과 강과 들꽃이 어우러진 경치는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차를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경춘가도의 아름다운 풍광은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낙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삼는 이에게는 단지 늘 보는 광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과 각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끊임없이 이동하는 차와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사는 도시인에게는 그저 한없이 바라만 보고픈 아름다운 광경이다.

 

경전을 접할 때 공감하는 이유는?

 

행복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인줄 모른다. 불행에 닥쳐 보아야 그제서야 행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 천상에서 오로지 즐거움만 누리고 사는 존재에게는 불행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의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불행을 겪지 않는 행복에 대하여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불행이라는 말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행복만 있는 천상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꽃이 만발한 곳에 있으면 마음이 평온하다. 그것은 삶에서 온갖 일을 겪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경전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경전을 접할 때 공감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삶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과 비교 해 보았을 때 경전상의 문구를 보고 틀림 없이 나에 대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법도 들어 있어서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일종의 치유효과도 있다.

 

세간적인 관심사

 

상윳따니까야에 비의 경이 있다. 비를 키워드로 한 경이다. 먼저 하늘사람이 무엇이 위로 솟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무엇이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며, 무엇이 돌아다니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무엇이 말하는 것 가운데 최상인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또 다른 하늘사람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다른 하늘사람]

종자가 위로 솟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비가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며,

소가 걸어 돌아다니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아들이 말하는 것 가운데 최상이네.”(S1.74,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세간적 관심사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농업이나 목축에 종사하던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종자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위로 자라는 식물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또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소가 있어야 논밭을 갈 수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최상이라 한 것은 노동력과 대를 잇기 때문일 것이다.

 

출세간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처럼 다른 하늘사람은 세간적 입장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달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Vijjā uppatata seṭṭhā

avijjā nipatata varā,
Sa
gho pavajamānāna

buddho pavadata varoti.

 

(S1.74)

 

 

[세존]

명지가 위로 솟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무명이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며,

수행승은 걸어 돌아다니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깨달은 님이 말하는 자 가운데 최상이네.”

 

(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4, 전재성님역)

 

[세존]

명지가 솟아오르는 것 가운데 으뜸이고

무명이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로다.

승가가 걸어 다니는 것 가운데 으뜸이고

깨달은 분(붓다)이 말하는 자 가운데 최상이로다.”

 

(비 경, 상윳따니까야 S1.74, 각묵스님역)

 

 

“Knowledge is the best of things that rise up;

Ignorance excels among things that fall down;

The Sangha is the best of things that go forth;

The most excellent of speakers is the Buddha.

 

(Rain, CDB 1.74, .빅쿠보디역)

 

 

부처님이 읊은 게송을 보면 완전히 다른 관점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출세간적 입장에서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로 명지, 무명, 수행승, 깨달은 님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이전 게송에서 종자, , , 아들과 대조된다.

 

다니야의 경(Sn1.2)에서

 

비의 경(S1.74)’에 대한 각주는 어느 번역서에서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은 숫따니빠따 다니야의 경(Sn1.2)’의 축소판이라 보여진다.

 

다니야경은 농부와 부처님과의 대화에 대하여 세간적 시각과 출세간적 시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니야가 농경생활을 유익함에 대하여 노래 하면 부처님은 유사한 유형으로 명상적 삶의 탁월성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런 다니야는 매우 자신만만하다.

 

다니야경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니야는 우기가 닥치자 침수 되지 않는 지역에 우사와 거처를 마련하였다. 더구나 보시하는 삶을 살며 아내와 아들들과 소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며 만족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우기에 아무리 비가 거세게 내려도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며 자신만만하게 삶을 살아 갔다.

 

이처럼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다니야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다름 아닌 세간적 행복이었다. 이에 부처님은 출세간적 삶이 훨씬 더 가치 있음을 게송으로 말하면서 역시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간적 행복과 출세간적 행복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표출 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kkodano duddhakhiro hamasmi (iti dhaniyo gopo)
Anut
īre mahiyā samānavāso,
Chann
ā kui āhito 'gini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소치는 다니야]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8)

 

 

Akkodhano vigatakhīlo hamasmi (iti bhagavā)
Anut
īre mahiyekarattivāso,
Viva
ā kui nibbuto 'gini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세존]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9)

 

 

다니야가 마히강변에서 사는 것으로 나온다. ‘마히(mahi)은 인도 오하(五河)’가운데 하나로서 갠지스강 북쪽에 있고 갠지스강으로 합류된다.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신만만한 삶을 살아 가는 다니야가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만족하는 노래 소리를 700요자나 떨어진 사왓티에서 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통으로 몸을 다니야의 처소에 몸을 나툰 것으로 되어 있다.

 

세 가지불(三火)이 있는데

 

게송을 보면 키워드가 서로 반대 되는 개념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말이 이다. 게송에서 다니야는 자신의 처소에 불이 켜져 있음을 안심하고 있다.

 

여기서 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DN.III.217의 주석을 인용하여세 가지 제화(tayo aggi)’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공양화, 가주화, 혜시화를 말한다. 인도의 힌두가정에서는 집안에 이 세 가지 제화를 켜 놓고 있다고 한다. 게송에서 다니야 역시 불을 켜 놓고 있다. 그래서 DN.III.217를 찾아 보았다.

 

DN.III.217의 의미는 디가니까야 3 218페이지를 말한다. 열어보니 합송의 경(D33)’이다. 합송의 경에서 세 가지 제화에 대한 것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33) 또 다른 세 가지 불 곧, 헌공의 불, 가장의 불, 보시의 불이 있습니다. (D33, 10)

 

 

경에서 셋 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60가지 설명 중의 하나이다. 이 세 가지 불에 대하여 한역으로 삼화(三火)’라 한다. 삼화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주석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표로 요약하였다.

 

 

 

   

참 고

헌공의 불

존경을 의미함.

부모는 자식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 오는 것에 의해서 공양의 가치가 있음

자따까

(Jat439)

가장의 불

가장은 가정의 소유자임.

가장은 여성에게 침구, 의복, 장식품을 주는 것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 오는 자임.

아귀사

보시의 불

보시는 네 가지 필수품이고 수행승의 승단이 보시에 알맞은 자임.

승단은 재가자들에게 선법을 권유하는 것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 오는 자임.

천궁사

 

 

삼화에 대한 것을 보면 공통적으로 태우는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삼화는 많은 이익을 가져 오기 때문에 조금도 불타지 않지만 태우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태운다는 의미에서 헌공의 불, 가장의 불, 보시의 불이라 한 것이다.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소치는 다니야가 마히 강변에 6개월 간 머물 처소를 마련하고 불을 밝힌 것은 삼화라 볼 수 있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더구나 보시를 생활하고 있어서 세 가지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인 불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라 하였다. 이는 모든 번뇌의 불이 꺼져 버렸음을 뜻한다. 세속에서는 불이 타올라야 하나 출세간에서는 불을 끄려 하는 것이다.

 

번뇌의 소멸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재생의 불꽃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폭우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다. 세간의 다니야에게는 삼화가 꺼지지 않게 할 지붕이 필요하지만, 더 이상 타야 할 불이 없는 부처님에게는 지붕이 필요 없다. 폭우가 쏟아져도 걱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게송에서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라 하였다. 이때 하늘이여하는 말이 ‘deva’이다. 그래서 직역한다면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이여라는 말 대신 하늘이여라 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여기서 deva신이여!’라는 뜻보다는 구름이여!’, ‘하늘이여!’라는 뜻이다. Prj.II.28에 따르면, deva는 구름(megha)을 뜻한다. God.3에서는 하늘이여라고 번역했고, Jst.18, Sst.3에서는 구름이여!’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비를 내린다는 의미에 관하여 다니야는 물리적 의미로 사용한 것이고 부처님은 Prj.II.31에 따르면, 상징적으로 탐욕 등의 번뇌의 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숫따니빠따 52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신을 뜻하는 데와(deva)에 대하여 신이라 직역하지 않고 왜 하늘 또는 비라 하였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비는 다니야가 이해하는 비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비와 의미가 다르다. 이는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이다.

 

비와 지붕의 관계

 

세간에서는 비가 온다고 하였을 때 단지 농사에 고마운 비이다. 그런 비는 막아야할 대상이어서 반드시 지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출세간적 입장에서 비는 단지 번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번뇌가 소멸되면 더 이상 비를 막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비와 지붕에 대한 가르침이 법구경에도 있다.  

 

 

Yathāgāra ducchanna           야타가랑 둣찬낭

vuṭṭhi samativijjhati,            윳티 사마띠윗자띠

Eva abhāvita citta          에왕 아바위땅 찟땅

rāgo samativijjhati.             라고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dhp13)

 

 

Yathāgāra succhanna           야타가랑 숯차낭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윳티 나 사마띠윗자띠
Eva
subhāvita citta         에왕 수바위땅 찟땅

rāgo na samativijjhati.          라고 나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 (dhp14)

 

 

서로 쌍으로 이루어진 게송을 보면 키워드는 (vuṭṭhi)’이다. 그래서 지붕이 잘못 역어지면 물이 새듯이 탐욕이 스민다고 하였다. 그러나 잘 엮어진 지붕은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게송에서는 비와 지붕이 마치 창과 방패처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깨달은 자의 조건은?

 

비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의 경(S1.74)’에서는 비가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이는 물리적 비를 뜻한다. 비가 와야 곡식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세간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는 번뇌를 상징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이 떨어지는 것 가운데 최상이라 하여 비와 무명을 대비시켰다.

 

이처럼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는 게송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세간적 삶과 출세간적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명지가 솟고 무명이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은 걸어 돌아다니는 것 가운데 최상이고 깨달은 님이 말하는 자 가운데 최상이네.(S1.74)”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은 님은 붓다를 말한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부처의 조건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붓다에 대하여 가장 잘 설명한 것이라 본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 pahīna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2014-06-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