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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아닌 것은 아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23. 15:41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아닌 것은 아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잘난 자나 못난 자나 생존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벌기선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하여 살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노후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축적하고자 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돈벌기에 올인한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한시라도 세상을 떠나서는 살아 갈 수가 없다.

 

세상이 싸움을 걸어 와서

 

생존하기 위하여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과 싸우게 된다. 내가 세상과 싸우지 않지만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보았을 때이다. 누구나 공분하는 일을 겪었을 때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이다. ‘세월호사건이 대표적이다.

 

세월호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올렸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한 글이다. 때로 현장에 가서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여 글로서 기록을 남겼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세상과 싸우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누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가?

 

수행자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무관심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사는 곳에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판을 쳐도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하여 나 자신의 행복과 안락만 추구하면 되는 것일까? 심산유곡에서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와 함께 신선처럼 살아 가는 것이 수행자의 모습일까? 이런 의문에 대한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하늘사람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누구의 삶의 길이 부서지지 않으며,

누가 세상에서 욕망을 완전히 알고,

누가 항상 자유로운 사람인가?”

 

누가 계행이 확립되어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들이 예배하고,

세상에 비천하게 태어났지만,

누구를 왕족들이 존경하는가?”

 

(S1.8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답송하시기를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씀 하신다.

 

 

Samaīdha araā loke

samaāna vusita na nassati.
Sama
ā iccha parijānanti

samaāna bhojissiya sadā.

 

Samaa mātā pitā bhātā

vandanti na patiṭṭhita,
Sama
īdha jātihīna

abhivādenti khattiyāti.

(Araasutta, S1.51)

 

 

[세존]

수행자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수행자의 삶의 길은 부서지지 않고

수행자가 욕망을 완전하게 알고,

수행자야말로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네.

 

계행이 확립되어 있는 수행자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형제가 예배하며,

세상에 비천하게 태어났더라도

수행자를 왕족들이 존경하네.”

 

(Araasutta-싸우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1, 전재성님역)

 

 

[세존]

사문들이 세상에서 다투지 않고

사문들의 삶의 완성 파멸하지 않노라.

사문들이 욕구를 철저히 알고 있으며

사문들이 언제나 자유를 누리노라.

 

사문이 [계행에] 확고하게 머물면

부모와 형제들도 그에게 절하노라.

사문 있어 비록 낮은 태생이라 할지라도

끄샤뜨리야들이 예배하노라.”

 

(Araasutta -다투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1, 각묵스님역)

 

 

 "Ascetics are placid in the world;

The ascetic life is not squandered;

Ascetics fully understand desire;

They enjoy perpetual freedom.

 

 "Parents and brothers worship an ascetic

When he stands firmly established.

Though an ascetic be of humble birth

Even khattiyas here salute him."

 

(Without Conflict, CDB S1.81, 빅쿠보디역)

 

 

경의 제목은 아라나(araa)이다. araa‘peaceful; passionless’의 의미로서 평호로운또는 열정이 없는의 뜻이다. 이는 냉정한’ ‘침착한뜻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싸우지 않음의 경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다투지 않음의 경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Without Conflict’라 하여 충돌 없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사마나(samaa)의 의미는?

 

PCED194에 따르면 araa의 의미는 れたる, 林住라는 뜻도 있다. ‘멀리 떨어지다또는 숲에서 머무는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숲속의 경(S1.10)의 빠알리 제목이 아란냐(Arañña)’이다.

 

경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araa평화로운, 싸우지 않음에 대한 경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행자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다(Samaīdha araā loke)”라 하였다. ‘sama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수행자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사문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Ascetic’라 하여 금욕주의자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마나는 반드시 불교수행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수행하는 모든 자를 일컫는 말이 사마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서도 잘 나타난다.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만냐팔라경에 따르면 아자따삿뚜왕이 육사외도를 비롯하여 부처님과의 대화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본다면 고대인도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집에서 집을 떠나 수행하는 모든 자들을 일컫는 말이 사마나라 볼 수 있다. 이를 한자어로 사문(沙門)이라 한다. 초불연의 경우 한문용어를 답습하여 사문이라 번역하였고, 성전협의 경우 수행자라 하였다. 여기서 사마나는 빅쿠와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스님들이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사문이라는 말이 육사외도를 포함하여 모든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사문이라는 말 대신 빅쿠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빅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자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꽃의 경(S22.94)에서

 

게송에 따르면 수행자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집을 떠나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유행하는 수행자는 세상의 일과 무관하게 진리만 추구하면 된다는 말일까? 이 구절에 대하여 세 번역서에 특별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재성님은 araa에 대하여 무쟁의 뜻으로 번뇌없음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하여 놓았을 뿐이다.

 

수행자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S22.94)’에서도 볼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āha bhikkhave, lokena vivadāmi. Loko ca- kho bhikkhave, mayā vivadati. Na bhikkhave, dhammavādi kenaci lokasmi vivad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Nāha, lokena vivadāmi)”라 하였다. 이 말은 아라나경에서 수행자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다.(Samaīdha araā loke, S1.81)”이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단지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펑화롭다는 뜻의 araā가 논쟁을 뜻하는 ‘vivāda’로 바뀌어 논쟁을 하지 않는다 뜻으로 바뀐 것이다. 번역에서는 똑같이 싸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빠알리어는 araā(평화로운)vivāda(논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세상이 있는데

 

그런데 부처님은 세상이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 온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 나와 싸운다라 하였다. 여기서 세상은 주석에 따르면 중생의 세상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를 각주를 참고 하여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 세상

세 가지 세상

    

   

중생계

(Sattaloka)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함께 하지 않는다. (성전협각주)

 

- 수행자가 세상에서 싸우지 않고

수행자의 삶의 길은 부서지지 않고 수행자가 욕망을 완전하게 알고, 수행자야말로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네.(S1.81)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중생으로서의 세상

조건계

(Sakhāraloka)

-수행승들이여, 세상에는 세상의 원리가 있다.(성전협각주)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S2.26)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

-오취온의 세상

-형성된 세상

현상계(器世間)

(Cakkavālaloka)

-여래는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성장한다. (성전협각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눈에 보이는 세상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세상

-물질적 세상

 

 

 

 

표를 보면 세 가지 세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세 가지 세상 중에 부처님이 강조하신 것은 조건계로서의 세상이다. 이를 상카라로까(Sakhāraloka)’라 하는데 이는 이 몸과 마음에서 형성된 세상을 말한다. 이런 세상은 몸과 마음을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자아라고 보는 데서 기인한다. 그래서 오취온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경에서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S2.26)”라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계의 끝은 바로 이 몸과 마음에서 이루어진 세상으로서 상카라로까를 말한다.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취온의 세상으로서 인식하는 자의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세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꽃의 경에서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하였고,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라 하였다. 여기서 전자는 뭇삶들이 살아 가는 중생계(Sattaloka)’를 말하고, 후자는 산하대지산천초목 등 눈에 보이는 세상인 현상계(Cakkavālaloka, 器世間)’를 말한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세상이 나와 싸운다.(Loko ca- kho, mayā vivadati)”라 하였다. 여기서 싸운다는 말은 말을 걸어 온다라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논쟁을 말한다. Vivadati‘disputes; quarrels’의 뜻으로 논쟁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논쟁인가?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Ya bhikkhave, n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natthīti vadāmi. - Ya bhikkhave, 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atthīti vadāmi.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라고 말한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세상이 부처님에게 싸움을 걸어 오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이는 현자들이 보는 세상과 세상의 범부들이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초불연 번역을 보면 이와 다르다. 각묵스님은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고 말한다.”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

 

두 번역서의 가장 큰 차이는 앗티(atthī)와 낫티(natthi)에 대한 번역의 차이이다. 앗티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다라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있다라 번역하였다. 낫티에 대하여 ‘~아니다’ ‘~없다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차이는 왜 일어는 것일까? 이는 번역자가 현상에 대하여 인식론으로 보느냐 존재론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이다거나 아니다로 번역한다면 이는 인식론으로 본 것이고, 반면에 있다거나 없다로 번역한다면 이는 존재론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전재성님은 앗티와 낫티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특히 각묵스님이 존재론의 번역한 것은 빅쿠보디의 영역 CDB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초불연 각주에서 빅쿠보디의 견해에 대하여 수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빅쿠보디는 앗티와 낫티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빅쿠보디가 간과한 것이 있다.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세존은 모든 존재론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Cdb.1085)”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뿌쌩의 말을 인용하여 ‘현자들이(paṇḍitāna)’라는 단어가 빠진 것을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간화선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 사띠(sati)(2013-09-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본다면 빅쿠 보디의 존재론은 특수한 현상에 대한 설명에 대하여 일반화, 합리화, 정당화 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앗티와 낫티에 대한 번역차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앗티(atthī)

이다

있다

낫티(natthi)

아니다

없다

번역방식

인식론적 번역

존재론적 번역

번역예

세상에 현자들은 물질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말한다. (S22.94)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인 물질은 없다고 세상에서 현자들은 동의하며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S22.94)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부처님은 세상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올 뿐이라 하였다. 그럴 경우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의미에서 “~이다(atthi)”라 하였고, 반면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 아니다(natthi)”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라 볼 수 있다. “진실이면 진실인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이면 아닌 것이다라는 것이다. 특히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다(natthi)’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지는 말씀에 있다. 부처님은 아니면 아닌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Kiñca bhikkhave, natthisammata loke paṇḍitāna yamaha natthiti vadāmi.

 

rūpa bhikkhave, nicca dhuva sassata aviparināmadhamma natthi sammata loke paṇḍitāna ahampi ta natthiti vadāmi.

 

수행승들이여, 왜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1)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현자들은 물질에 대하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는데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말한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온 중에 물질(rūpa)’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있다. 우리 몸이라는 물질이 결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아님에도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분명하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함을 말씀 하신다. 그래서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말한다.(ahampi ta natthiti vadāmi)”라고 말씀 하셨다. 이후 느낌이나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즉 세상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항상하고 불변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이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존재론으로 번역하였을 때

 

위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비구들이여,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인 물질은 없다고 세상에서 현자들은 동의하며 나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S22.94)”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방식은 를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번역이다.

 

부처님은 깟짜야나곳따경(S12.15)에서 절대유와 절대무가 연기법적으로 성립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존재론을 부정한 것은 불교의 성립과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 이었던 브라만교의 영향이 크다.

 

부처님당시 브라만교는 존재의 근원이라는 브라흐마와 변치 않는 개아가 있다는 아뜨만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부정하였다.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면

 

부처님은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하였고, ‘이다라고 한 것에 대하여 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범부들이 아니다라 한 것에 대하여 이다라고 하였고 이다라 한 것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범부들은 이 세상을 존재론적으로 보아 --를 말하지만 현자들은 인식론적으로 보아 무상--무아를 말한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꾸 현상에 대하여 상--아로 말걸어 온다면 세상이 나와 싸운다(S22.94)”라 하였다. 이는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진리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처럼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천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여래는 그것을 올바로 꿰뚫고 나서,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통찰한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이 상--아라고 존재론적으로 말하더라도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상--무아이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는 취지의 말씀이다. 그래서 범부들이 진리를 이해 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힌다라고 천명하신 것이다.

 

연꽃이 오염되지 않는 이유는?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하여 심산유곡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함께 은둔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겠다는 말과 같다. 만일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부처님이 법을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라의 권유대로 열반에 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법을 펼치려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불쌍해서이다. 이는 어리석고, 어둡고, 눈이 없는 일반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보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S22.94)”라고 자문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uppala vā paduma vā puṇḍarīka vā udake jāta udake savaddha- udakā accuggamma hāti.

 

Anupalitta udakena, evameva kho bhikkhave, tathāgato loke jāto loke savaddho loka abhibhuyya viharati anupalitto lokenāti.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Puppha sutta-꽃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4, 전재성님역)

 

 

 

 

 

청련화 등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자라지만 물 밖에 나오면 깨끗한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역시 범부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태어났지만 연꽃처럼 오염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라 하였다. 여기서 세상을 극복한다고 하였다. 이는 세상을 떠나 심산유곡에 들어가 살기 보다 세상에서 싸움을 걸어 올 때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 말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정토회가 141만명의 서명을 받았다는데

 

최근 교계뉴스에서 두 건의 기사를 보았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조계종 노동위원인 도철스님의 광화문단식에 대하여 보도 하였다. 도철스님은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관련하여 광화문광장에서 유가족들과 8일 째 단식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정토회가 141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 그동안 우리 종단(조계종)은 몇 명이나 서명을 받았을까. 숫자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불교계, 특히 조계종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불교닷컴 2014-07-22)

 

 

이와 같이 말한 도철스님은 이런 때 왜 불교계가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다른 스님들의 참여가 없다.”고 꼬집었다.

 

기사에서 놀라운 사실은 정토회가 141만명의 서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월호유가족들이 350만명 서명을 받은 것의 반에 가깝다. 그래서 350만명에 141만명을 합하면 거의 5백만명에 가깝다.

 

정토회가 이처럼 나서게 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자비심의 발로라 본다. 평소 굶주린 북한동포돕기 운동에도 열심이었지만 한국사회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복합화 되어 있다고 보는 세월호참사에 대하여 모른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령님의 글에서

 

또 하나 기사를 보았다. 그것은 법보신문에서 본 이미령님의 원망도 못해 보고성실하게일만하는 당신, 안녕하신가요?’라는 부제가 붙은 글이다. 이 글에서 이미령님은 투명인간에 대하여 말하였다. 소설가 성석제님의 장편소설 투명인간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한 것이다.

 

성석제님은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성석제는 키가 작아 앞번호 이어서 앞에 앉았다. 앞번호친구들과 별로 대화가 없었지만 이름과 모습은 뚜렷이 기억한다. 작달막한 키에 검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볼살이 있어서 복스런 얼굴이었다. 더구나 공부도 잘 한 모범생이었다. 이렇게 오래 되어도 그 이미지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한마디로 존재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성석제라는 이름이 유명하게 되었다. 사진을 보니 고1 때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글에서 이미령님은 나는 어렸을 때 이 지구 위에 사계절이 있는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 밖에 없는 줄 알았고, 국가에 평생 충성을 다 바쳐도 모자라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가가 미령아, 너 좀 죽어줘야겠다라고 요구하면 당연히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 하였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든 세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이라 하여 외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령님은 이런 생각이 잘못 된 것이라 하였다. 왜 잘못된 것일까? 그것은 정부가 우리를 속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국가의 고급관리들은 하나 같이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그들은 선()과 정()의 기준도 아니요, 그저 제 밥그릇이나 챙기고, 밥 배부르게 먹은 뒤에 더 먹어서 체해도 계속 먹으려는 자들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사실 이런 시각은 상당수 국민들이 동의 하는 것이다.

 

왜 투명인간인가?

 

언젠가 사람들은 정부발표가 나오면 거꾸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부에서 말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틀림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정책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미령님은 글에서 미련 곰탱이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왜 미련곰탱이인가?  그것은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길들여왔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착한 국민이어야 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국민의 의무’가 뼛속까지 새겨져 있으니 말입니다.”라 하였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투명인간이라 하였다. 왜 투명인간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책임감만 턱없이 강한 사람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권력자들과 기회주의자들에게 이런 사람들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으되 그 존재감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이런 인간을 소설가는 ‘투명인간’이라 부릅니다.

 

(이미령의 보리살타서재, 14.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 법보신문 2014-07-21)

 

 

이미령님에 따르면 정부에서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책임감만 강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아마도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보수단체사람들일 것이다. 백발에 군복을 입고 때로는 가스통을 집어 들고 위협하는 할배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권력자들에게는 사람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미련곰탱이같다고 하였고, 존재감이 없다고 하여 투명인간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두 건의 교계뉴스를 보면 모두 현실문제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두 개의 다른 시각이 있는데, 한편은 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바로 잡아 제도화 하려는 집단이고, 또 한편은 기득권체제에 잘 순응되어 길들여져 있는 집단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이 광화문이나 청계광장, 시청에서 충돌하고 있다. 마치 서로 딴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무엇일까?

 

도철스님은 8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불교계에서도 참여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생각은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라는 말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불교방송 교리강좌에서는 불자라면 모두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남과 다투는 일을 삼가고 시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e-불교방송 > 불교강좌 > 교리강좌, 3.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일부만 아는 것이다.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세상이 나와 싸운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이 정의롭지 않게 돌아 가기 때문에 세상이 싸움을 거는 것이다. 이래도 가만 있을 것인가?

 

부처님은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라고 말한다.(S22.94)”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닌 것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스님네들은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무릉도원과 같은 곳에서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와 함께 세월아 네월아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러니 불자들 역시 현실에서 아무리 비리와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판을 쳐도 나몰라라 하는 것 같다. 이런 스님네들이나 불자들은 투명인간이나 다름 없다. 왜냐고? 존재감이 없으니까.

 

 

 

2014-07-23

진흙속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