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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30. 15:39

 

 

정법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원룸이 유행인데

 

요즘 원룸이 유행이다. 빈터나 허름한 건물을 밀어 버리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갖춘 원룸빌딩붐이 일고 있다. 핵가족을 넘어 이제 일인가구 시대에 접어서일까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되리라 본다.

 

주변에도 원룸빌딩이 여럿 들어 섰다. 지나 다닐 때 마다 공사진척상황을 보게 되는데 불과 6개월 이내에 모든 것이 완료 되는 것 같다. 땅파기 작업부터 시작하여 기반을 다지고 건물의 뼈대가 올라 간다. 이 때 한층 한층 올라 갈 때 마다 발판이 마련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판을 딛고 더 높은 단계로

 

발판은 건물지을 때만 마련 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수행과정에서도 역시 발판이 마련된다. 단계적으로 수행이 올라 갈 때마다 발판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발판을 딛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이처럼 발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먼저 하늘아들 다말리가 부처님 앞에서 부지런히 피곤을 모르고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없애 버리는, 거룩한 님은 어떠한 존재도 기대하지 않는다네.(S2.5)”라고 게송을 읊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한다.

 

 

Natthi kicca brāhmaassa

(dāmalīti bhagavā) katakicco hi brāhmao,
Y
āva na gādha labhati

Nadīsu āyūhati sabbagattehi jantu
G
ādhañca laddhāna thale hito so

nāyūhati pāragato hi soti

 

(Dāmalisutta, S2.5)

 

 

[세존]

거룩한 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없고

거룩한 님은 참으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네.

사람이 발판을 딛지 못하는 한,

발버둥 치며 강물에서 애써야 하리.

마른 땅을 발판으로 삼아 서면,

저 언덕으로 건너갔으므로 애쓰지 않아도 되리.”

 

(Dāmalisutta -다말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2.5, 전재성님역)

 

 

바라문은 더 이상 해야 할 일 없으니

바라문은 해야 할 바를 모두 했기 때문이니라.

발판을 얻기 전에는 [격류 따라 흘러가며]

강에서 사지를 아등바등하지만

발판 얻어 땅위에 이미 올라선 자는

더 이상 아등바등하지 않게 되나니

그는 이미 저 언덕에 도달했기 때문이니라.”

 

(Dāmalisutta -다말리 경, 상윳따니까야 S2.5, 각묵스님역)

 

 

For the brahmin has done what should be done.

While he has not gained a footing in the river,

A man will strain with all his limbs;

But a footing gained, standing on the ground,

He need not strain for he has gone beyond.

 

(Damali, CDB S2.5, 빅쿠보디역)

 

 

 

 

a scaffold

 

 

 

빠알리 원문을 보면 6구게로 이루어져 있다. 전재성님은 6구게이고,  빅쿠보디는 5구게, 각묵스님은 7구게로 모두 다르다. 이런 경우 빠알리원문의 구문구분대로 맞추어 주는 것이 시어의 운율상 맞을 것이라 본다

 

용어의 선택에 대하여

 

두 개의 한글 번역을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같은 빠알리어 번역에 대하여 전혀 다른 번역처럼 느껴진다. 특히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 그렇다. 대표적으로 브라흐마나(brāhmaa)’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거룩한 님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바라문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브라흐민(brahmin)’이라 하였다.

 

브라흐마나(brāhmaa)는 무슨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m.] a man of the Brahman caste’라고 설명되어 있다. 남성명사로서 브라흐만 카스트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대인도의 사성계급에서 최정점에 있는 브라만계급을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 바라문(婆羅門)’이라 한다. 영어로는 브라흐민(brahmin)이라 한다.

 

브라흐마(brahmā)와 브라흐마나(brāhmaa)는 어떻게 다른가?

 

브라흐마나(brāhmaa)와 비슷한 말로 브라흐마(brahmā)가 있다. 그렇다면 브라흐마는 무엇인가? 브라흐마는 ‘the Creator’의 뜻으로 창조자이다. 고대인도에서 최고신을 뜻한다.

 

최고신을 뜻하는 브라흐마에 대한 극존칭이 초기경전에서 보인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따르면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Eso hi bhikkhu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jitā2 vasī pitā bhūtabhavyāna. D1)”라고 표현 되어 있다.

 

고대인도에서 브라흐마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으로 숭배되는 최고신으로 지칭된다. 한자어로는 범천(梵天)’으로 번역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니까야 번역서에서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한역경전 그대로 범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브라흐마나와 브라흐마는 다른 것이다. 브라흐마나는 일반적으로 바라문이라 번역 되어 있는데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의 정점 일 뿐만 아니라 브라만교 사제이었다. 브라흐마는 고대인도의 창조주이자 최고신으로 불리웠다. 이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흐마(brahmā)

브라흐마나(brāhmaa)

한역

범천(梵天)

바라문(婆羅門)

지위

최고신(창조자)

사성계급, 사제

전재성님역

하느님

바라문(계급), 성직자(사제)

각묵스님역(초불연)

범천

바라문(구분없이 사용)

빅쿠보디역

브라흐마(brahmā)

브라흐민(brahmin)

 

 

 

표를 보면 브라흐마나(brāhmaa)에 대하여 두 개의 한글번역이 달리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의 경우 계급으로서 바라문과 사제로서 성직자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초불연의 경우 구분 없이 모두 바라문이라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에서 “samaena vā brāhmaena”라는 구절이 있는데, 전재성님은 수행자나 성직자라 번역 하였고, 각묵스님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brāhmaena’는 사제로서의 바라문을 말한다. 사제로서의 바라문은 수행자를 뜻하는 사만냐와 함께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브라흐마나(brāhmaa)가 사성계급으로서 가문에 속하는 자들로 사용 될 때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브라흐마나상윳따(Brāhmaasayutta, S7)’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악꼬사까의 경(S7.2)’에서 바라문 악꼬사까 바라드자와는 바라와드자와 가문의 한 바라문(akkosakabhāradvājo brāhmao bhāradvājagotto kira brāhmao)”라는 구문이 있다. 이럴 경우 브라흐마나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바라문이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가문 소속으로서 브라흐마나를 뜻한다. 그래서 브라흐마나(brāhmaa)에 대하여 사제로서의 브라흐라마나(성직자)와 계급으로서 브라흐마나(브라만)로 나눌 수 있다.

 

아라한과 동일시한 이유는?

 

다말리의 경(S2.5)에서도 브라흐마나가 등장한다. 이 브라흐마나는 어떤 뜻일까? 게송의 내용을 보면 아라한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브라흐마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법구경에서 찾을 수 있다.

 

법구경 26품 중에 ‘Brāhmaavagga’가 있다. 왜 하필이면 브라흐마나(Brāhmaa)’라 하였을까? 이를 바라문품이라 이름 하였는데, 41개의 게송 중에 상당수가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tam-aha brūmi brāhmaa)”라는 정형구가 마치 후렴처럼 붙어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인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는데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마치 바라문교를 용인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법구경에서 바라문이여, 감각적욕망을 제거하라(kāme panuda brāhmaa,  Dhp383)”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바라문이여(brāhmaa)”라 한 것은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은 번뇌를 부순 자인 거룩한 님[아라한]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 것이다.(DhpA.IV.139, 1865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브라흐마나와 아라한을 동일시 한 것이다.

 

부처님이 브라만에 대하여 아라한과 동일시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당시 극도로 타락한 성직자로서의 브라흐마나를 말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브라흐마나는 원래의 바라문을 말한다. 이는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잘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이 이상으로 삼은 바라문은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극도로 타락한 사제로서의 바라문이 아니라 청정범행(brahmacariya)을 닦았던 옛날의 바라문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옛날에 살던 선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해 유행하였습니다.(stn284)”라 하였다. 이처럼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고 살았었던 옛날 바라문과 아라한을 동일시 한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브라흐마나왁가에서는 후렴구처럼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 brūmi brāhmaa)”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

 

이처럼 부처님이 청정한 삶을 살았던 옛날바라문과 아라한을 동급에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바라문모음(S7)’과 관련된 해제글에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이 품에서 부처님은 바라문은 출생에 기초하여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는 자이라기 보다는 바라문이라 그 근원적 의미에서 거룩한 자라고 해석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바라문은 아라한이라고 다시 정의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1 S7해제, 전재성님)

 

 

부처님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흐마나에 대하여 다시 해석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극도로 타락하였던 사제로서의 바라문은 본래의 바라문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스님들이 천도재등으로 사제처럼 보이는 현상과도 같다.

 

세 가지 뜻이 있는 브라흐마나(brāhmaa)

 

본래 빅쿠들은 걸식하며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았으나 요즘 스님들은 직업화 되어 있어서 재산을 소유하고 더구나 산자와 죽은자의 교량 역할을 하며 마치 제사장처럼 지낸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대규모동물희생제등으로 제사장또는 사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상세하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이전의 바라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바라문의 삶은 아라한의 삶의 방식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 brūmi brāhmaa)”라 한 것이다. 따라서 brāhmaa라는 말에는 모두 세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흐마나

전재성님역

초불연역

사제

성직자

 

수행자나 성직자는

(samaena vā brāhmaena, (S56.11)”

바라문

가문

바라문

 

바라문 악꼬사까 바라드자와

(akkosakabhāradvājo brāhmao, S7.2)”

바라문

아라한

거룩한 님

 

거룩한 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없고(Natthi kicca brāhmaassa, S2.5)”

바라문

 

 

 

표를 보면 브라흐마나(brāhmaa)는 크게 사제, 가문, 아라한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문맥에 맞게 성직자, 바라문, 거룩한 님 으로 의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초불연에서는 시종일관 바라문으로 직역하였다.

 

성전협 번역에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뜻한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바라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각주에서 별도로 설명하지 않는 한 사성계급으로서의 바라문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법구경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 brūmi brāhmaa)”라고 번역한 것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 바라문과 아라한이 동급이라면 나는 그를 거룩한 님이라고 부른다.(tam-aha brūmi brāhmaa)”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무학(無學)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다말리의 경(S2.5)에서 키워드는 발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gādha’이다. Gādha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연(深淵)’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발판 (足場)’이라는 뜻이다. 게송에서는 발판의 뜻으로 쓰였다.

 

마른 땅을 발판으로 삼은 자에 대하여 브라흐마나(brāhmaa)라 하였다. 이는 해야 할일 다 마친 자를 말한다. 더구나 게송에서는 저 언덕에 도달한 자라 하였다. 바로 아라한을 말한다.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 요지는 이렇다. 하늘아들 다말리는 아라한이 되어서도 해야 할 일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서 교정시켜 준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다말리여, 모든 번뇌가 다하고

슬기롭게 선정을 닦는 님, 거룩한 님은

태어남과 죽음의 끝에 이르러

저 언덕으로 건너갔으므로 애쓰지 않아도 되리.”(S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번뇌가 다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무학(無學)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발버둥 치며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아등바등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마치 도를 닦아 깨달은 자가 할 일이 없이 노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아들 다말리는 아라한일지라도 무언가 바삐 움직여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물에 빠진 자와 같은 경(A7.15)’에서

 

아등바등하며 발버둥 치는 자들은 폭류를 건너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마치 건물이 한층 한층 올라가면 그에 따라 발판이 마련 되듯이, 발판을 딛고 다음 단계로 올라 가는 것이다. 이처럼 발판을 마련하여 윤회의 폭류에서 빠져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발견하였다. ‘물에 빠진 자와 같은 경(A7.15)’이 그것이다.

 

뭇삶들은 물에 빠진 것과 같다. 더구나 폭류에 휩쓸려 마구 떠내려 가는 것과 같다. 이럴때 폭류에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한번 빠져서 가라앉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 있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다.

 

(Udakūpamapuggala sutta- 물에 빠진 자와 같은 경, 앙굿따라니까야 A7.15,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모두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물에 빠져 가라 앉는 사람은 일반 범부라 볼 수 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사람들이다. 탐진치의 세상에서 탐진치의 흐름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의 흐름에서 빠져 나오려는 자들이 있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자들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려는 자들이다. 특히 여섯 번째 사람에 대하여 발판을 마련한 자라 하여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라 하였다. 

 

저 언덕에 올라 간 거룩한 님

 

경에 따르면 완전히 탐진치의 세상흐름에서 벗어난 자가 있다. 일고 번째의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다라는 구절이다. 탐진치의 폭류에서 건너나와 육지에 마른 땅에 선 것이다. 아라한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저 언덕으로 올라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saki nimuggo nimuggova ho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nimujja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hito ho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vipassati. Viloke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patara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patigādhappatto hoti. Idha pana bhikkhave ekacco puggalo ummujjitvā tiṇṇo hoti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믿음도 좋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 부끄러움을 아는 것도 좋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비추어 창피함을 아는 것도 좋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정진도 좋고,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지혜도 좋다.’라고 생각하며 올라왔다가, 번뇌를 부수고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이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다.”

 

(Udakūpamapuggala sutta- 물에 빠진 자와 같은 경, 앙굿따라니까야 A7.15, 전재성님역)

 

번역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구문이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이다. 그런데 빠알리 구문을 보면 ‘brāhmaa’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거룩한 님으로 번역하였다. 아라한과 동급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대림스님은 저 언덕에 도달하여 맨땅에 서있는 바라문이다.(A7.15)”라 하였다. brāhmaa에 대하여 바라문이라고 직역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거룩한 님(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닦아야 함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멈춤()’통찰()’이다. 선정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함께 해야 함을 말한다. 그 결과 저 언덕에 올라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일곱종류의 사람들

 

일곱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일곱 종류의 사람들

      

비 고

한번 빠져서 가라앉음

어두운, 악하고 불건전한 성품을 결정적으로 갖춤

 

올라왔다가 가라앉음

착하고 건전하지만 성장하지 않고 퇴전함

 

올라왔다가 서 있음

착하고 건전하지만 성장하지 않고 멈추어 있음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봄

착하고 건전하며 세 가지 결박을 부순자

수다원

올라왔다가 앞으로 나아감

착하고 건전하며 세 가지 결박을 부수고 탐진치가 옅어짐

사다함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함

착하고 건전하며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부숨

아나함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섬

착하고 건전하며 번뇌를 부수고 저 언덕에 올라 간 거룩한 님

아라한

 

출처: A7.15

 

표에서 발판은 아나함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다섯가지 낮은 단계를 부순 아나함에 대하여 돌아 오지 않는 자(불환자)’라 한다. 색계 정거천에 태어나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가장 확고한 발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말리의 경에서 마른 땅을 발판으로 삼아 서면(S2.5)”이라는 구문과, ‘물에 빠진 자와 같은 경에서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A7.15)”라는 구문은 내용이 일치한다. 이처럼 초기경전은 서로 얽혀 있어서 다시 한번 니까야가 부처님의 친설임을 확신하게 해 준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일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한꺼번에 한다고 생각하면 일의 양에 압도되어 엄두가 나지 않지만 각개 격파식으로 차근차근 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 그래서 일을 나누어 한다. 오늘 처리 해야 할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도록한다. 이렇게 해 놓으면 그 다음날 부담이 없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일하는 것은 단계마다 발판을 마련해 놓는 것과 같다.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딛고 올라 갈 수 있는 발판과도 같은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처음부터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벽돌쌓듯이 단계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하는 것이나 수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일하는 것이나 수행하는 것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라는 사실이다. 한단계 오를 때 마다 발판을 마련하고, 그 발판을 딛고 또 한단계 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은 망상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오돈수라 하여 한꺼번에 몰록 깨닫는 것은 망상이다. 아마 전생에 돈오점수하여 이번 생에 아라한이 되었다면 돈오돈수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돈오점수에 가깝다.

 

돈오점수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말이 발판이라 본다. 이는 경에서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ekacco puggalo ummujjitvā patigādhappatto hoti, A7.15)”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발판(gādha)’은 확고한 발판이다. 다섯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부순자로서 불환자를 말한다.

 

불환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발판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들 이상이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은 돈오돈수라 볼 수 있고, 돈오돈수는 돈오점수의 과정에 따른 최종 결과라 볼 수 있다. 

 

정법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청정도론에서도 발판이야기가 나온다. 다음과 같이 장로와 젊은 빅쿠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장로는 마을에서 걸식을 마치고 절로 가서 젊은 비구에게 말했다. ‘수좌여, 그대는 이 교단에서 발판을 얻었는가?’ ‘그렇습니다. 존자시여. 저는 예류자입니다.’ ‘수좌여, 그렇다면 나머지 높은 도를 위해 정진하지 말게나. 그대는 번뇌 다한 자를 비방했다네.’ 그는 그에게 참회했다. 그리하여 그는 본래대로 [청정하게] 되었다.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84, 대림스님역)

 

 

장로와 젊은 빅쿠가 탁발을 나갔다. 첫 번째 집에서 한 숟갈 정도의 뜨거운 죽을 얻었는데 장로는 배속에 통증을 느끼고 이 뜨거운 죽이 이롭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쪽 켠에 쭈구리고 앉아 먹었다. 이를 본 젊은 비구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자 장로가 수좌여, 그대는 이 교단에서 발판을 얻었는가?”라고 물어 본 것이다. 그러자 젊은 빅쿠는 저는 예류자입니다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발판을 얻었다는 것은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다는 말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성자의 흐름(수다원)에 들어 가면 일곱생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수다원이 되면 어느 존재로 태어나든지 열반이 보장 되어 있다. 그러나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신심있는 불자라도 어떤 국토에서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또한 정법을 만날 기약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정법이 살아 있는 현세에서 수다원이라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2014-07-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