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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길과 오른쪽 길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풍요로운 초원에 도달하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7. 15:28

 

 

왼쪽 길과 오른쪽 길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풍요로운 초원에 도달하려면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중복되는 말이 많다. 특히 게송이 그렇다. 상윳따니까야 1권에는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에 대하여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상당수의 게송이 다른 경전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케마의 경(S2.22)에서

 

상윳따니까야 케마의 경(S2.22)에 실려 있는 몇 개의 게송을 보면 법구경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이를 번역비교표와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S2.22, Dhp66-68)

 

빠알리원문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Karontā pāpaka
kamma

ya hoti kaukapphala.

Na ta kamma kata sādhu

ya katvā anutappati,
Yassa assumukho roda

vipāka paisevati.

Tañca kamma kata sādhu

ya katvā nānutappati,
Yassa patīto sumano

vipāka paisevatīti.

amitteneva attanā

전재성님역

[케마]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

쓰디쓴 열매를 가져오는

사악한 행위를 지어 가네.

 

지은 행위가 착하지 않으면

지은 뒤에 후회하고

슬픈 얼굴로 울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지은 행위가 착하면

지은 뒤 후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그 열매를 거두리.”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

 

각묵스님역

어리석어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행동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악업을 지어서

[자신에게]쓰디쓴 결실 생기게 합니다.

 

저지르고 난 뒤에 후회하는 일은

잘 지은 바른 행위가 결코 아니니

눈물로 범벅이 되도록 슬피 울면서

그것의 과보를 경험할 것입니다.

 

저지르고 난 뒤에 후회 않는 일

그것이야말로 잘 지은 바른 행위

즐겁고 기쁜 마음 함께 일어나

그것의 과보를 경험할 것입니다.”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빅쿠보디역

"Foolish people devoid of wisdom

Behave like enemies towards themselves.

They go about doing evil deeds

Which yield only bitter fruit.

 

"That deed is not well performed

Which, having been done, is then repented,

The result of which one experiences

Weeping with a tearful face.

 

"But that deed is well performed

Which, having been done, is not repented,

The result of which one experiences

Joyfully with a happy mind."

like enemies towards themselves

中村元

あさはかな愚人どもは、自己にして仇敵(かたき)にするようにふるまう。い行いをして、苦い果(このみ)をむすぶ。

もしも或る行
をした後に、それを後悔して、顔にを流して泣きながら、その報いを受けるならば、その行をしたことは善くない

 

もしも或る行をしたのちに、それを後悔しないで、嬉しく喜んで、その報いを受けるならば、その行をしたことは善い。

 

법정스님역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동한다 고통스런 결과를 불러들일 몹쓸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저지른 뒤에야 뉘우치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그 대가를 치른다면 이런 행동은 옳지 않다

 

스스로 행동한 뒤에도 뉘우치지 않고 즐거워 웃으면서 그 보상을 받는다면 이런 행동은 잘한 것이다

 

한역

愚人施行 爲身招患. 快心作惡 自致重殃.

行爲不善 退見悔 致涕流面 報由熟習

行爲德善 進覩歡喜 應來受福 喜笑悅習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1케마의 경과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 함께 실려 있다. 행위를 하고 난 다음 후회를 하거나 눈물을 흘렸다면 이는 분명히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임을 말한다.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어리석은 자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행위를 한 다음 기쁨마음이 든다면 어떨까? 분명히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한 것임에 틀림 없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쁨과 함께 보시하였을 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담마(dhamma)와 깜마(kamma)

 

게송에서 키워드는 행위이다. 이는 빠알리어로 깜마(kamma)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이라 한다. 영어로는 ‘action’으로 번역된다.

 

깜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행위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행위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번역은 초불연의 번역방침에서 어긋난다. 초불연의 경우 담마(dhamma)에 대하여 초지일관 한자어 법()이라 번역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이 담마라고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말하며, 담마에 대하여 가르침, 원리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원칙은 빅쿠보디의 번역원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빅쿠보디 역시 담마에 대하여 빠알리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dhamma’라 하였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dhamma에 대하여 teaching(가르침) 등으로 의역하는 것은 바른 번역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빅쿠보디와 초불연의 번역에서 몇 가지 단어에 대하여 일관성을 보이는 단어가 있다. 담마와 깜마와 같은 단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경우 담마를 법이라고 번역하듯이 깜마에 대해서도 이라고 번역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경우 그런 원칙을 어기고 행위라 번역하였다.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으로 번역하고, 깜마에 대하여 역시 초지일관 으로 번역하면 번역이 경직 되기 쉽다. 번역문이 딱딱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어로서 맛이 없다. 그러나 담마와 업에 대하여 문장에 따라 또는 문맥에 따라 그 때 그 때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면 번역이 부드러워진다. 전재성님의 경우 담마에 대하여 진리, 가르침, 원리, 방법, 등으로 번역한 것이 좋은 예이다.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첫 번째 게송에서 amitteneva attanā”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라 번역하였다. 어리석은 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말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행동합니다.”라 하였다.  여기서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이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잘못된 번역이다. 왜 그런가? 이는 앞 구절에서 “Caranti bālā dummedhā”라 하였는데, 이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행위와 관련이 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행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로 놓고 보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먼저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화가 난다고 하여 함께 성을 내며, 맞았다고 하여 되받아 쳤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때 뉘우치고 후회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우발적 살인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어리석은 자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모르고 행동하기 때문에 쓰디쓴 결과를 가져왔을 때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기 쉽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의 행동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기자신을 자신의 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마구 저지른다. 그 결과 쓰디쓴 악행의 열매를 맛 본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쓰디쓴 과보를 가져 오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2014-04-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음속에 분노로 가득하다. 그리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렇게 분노가 가득한 자는 쉽게 성을 내고, 쉽게 성냄에 휩싸인다. 그래서 벗이여, 성냄으로 인해 분노하고, 성냄에 정복되고, 마음이 사로잡히면,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를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합니다. (A3.71)”라 하였다.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이 악행을 저지른다. 남을 해치는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abbā disā anuparigamma cetasā
Nevajjhag
ā piyataramattanā kvaci,
Eva
piyo puthu attā paresa
Tasm
ā na hise para attakāmoti.

 

[세존]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런 님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헤쳐서는 안되리.

 

(말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Eva piyo puthu attā paresa)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는 자가 남을 헤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자는 남도 친구로 여기게 때문에 결코 남을 헤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남을 헤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을 헤치는 행위가 된다. 쓰디쓴 악행의 열매를 맛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원수 대하듯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위해 남을 헤쳐서는 안되리(Tasmā na hise para attakāmoti, S3.8)라 말씀 하신 것이다.

 

자신을 적으로 삼았을 때

 

자신을 적으로 여기는 자들의 행위는 쓰디쓴 과보를 가져 온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든 신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언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며 정신적으로 나쁜 행위를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겠습니까?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Piyasutta-사랑스런 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4(1-4), 전재성님역)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tesa appiyo attā)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ya hi mahārāja, appiyo appiyassa kareyya)”라 하였다.

 

 미워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이다. 서로 미워 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악행을 저절러서 후회하며 눈물 흘릴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원수로 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Tasmā tesa appiyo attā)”라 하였다.

 

짤막한 문구에 심오한 가르침이

 

초불연 번역에서 amitteneva attanā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문구에 대하여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행동합니다라고 번역한 것은 선뜻 이해 하기 어렵다. “자신을 원수대하듯또는 자신을 적으로 여기듯이라 번역하면 무리가 없음에도 원수를 주어로 내세워서 원수가 스스로에게 하듯 행동합니다라고 난해하게 번역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Behave like enemies towards themselves”라 하였다. 직역하면 자신에게 적처럼 행동한다가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원수가 주어가 되어 스스로에게 하듯이라 하였는데 무엇을 스스로 한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나까무라하지메는 自己にして仇敵(かたき)にするようにふるまう라 하였다. “자기에 대하여 적으로 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나까무라하지메역을 중역한 법정스님은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동한다라고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케마의 경(S2.22)’과 법구경 Dhp66에 실려 있는 게송에서 amitteneva attanā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라는 구절에 대한 설명은 또 다른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앞서 언급된 말리까의 경(S3.8)’사랑스런 이의 경(S3:4)’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은 문구 하나라도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비록 짤막한 문구에 지나지 않지만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 개의 게송으로 답하였는데

 

케마의 경(S2.22)에서 하늘아들 케마가 부처님 면전에서 세 개의 게송을 읊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 역시 세 개의 게송으로 답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번역자

    (S2.22)

 

빠알리원문

Paigacceva ta kayirā

ya jaññā hitamattano,
Na s
ākaikacintāya

mantā dhīro parakkame.

Yathā sākaiko pattha

sama hitvā mahāpatha,
Visama
maggamāruyha

akkhacchinnova jhāyati.

Eva dhammā apakkamma

adhammamanuvattiya,
Mando maccumukha
patto

akkhacchinnova jhāyatīti.

Na sākaikacintāya

전재성님역

[세존]

슬기롭고 지혜로운 님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알아서

어리석은 마부를 본받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고 정진하네.

 

참으로 어리석은 마부는

평탄한 큰 길을 벗어나

평탄하지 않은 길을 가다가

차축을 망가뜨려 걱정하네.

 

어리석은 자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가르침 아닌 것을 따르니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

차축을 망가뜨려 걱정하듯이.”

어리석은 마부를 본받지 않고

 

각묵스님역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알아

즉시에 그것을 행해야 하리.

바르게 사유하는 현명한 자는

마부처럼 해서는 안되는니라.

 

[어리석은]마부는

평탄한 대로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길로 들어서서는

차축을 망가뜨려 근심하도다.

 

실로 어리석은 자 이와 같아서

법을 따르지 않고 비법을 따르다가

죽음의 아가리에 떨어져서는

차축 망친 것처럼 근심하도다.”

마부처럼 해서는 안되는니라.

 

빅쿠보디역

one should promptly do the deed

One knows leads to one's own welfare;

The thinker, the wise one, should not advance

With the reflection of the carter.

 

"As the carter who left the highway,

A road with an even surface,

And entered upon a rugged bypath

Broods mournfully with a broken axle-

 

"So the fool, having left the Dhamma

To follow a way opposed to Dhamma,

When he falls into the mouth of Death

Broods like the carter with a broken axle."

should not advance

With the reflection of the carter.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 개의 게송은 차축이 키워드이다. 길이 아닌 길로 들어 섰을 때 그 길은 험한 길이 되기 쉽다. 울퉁불퉁한 거친 길을 갈 때 차축이 망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대략난감한 경우

 

알고 지내는 법우님 중에 자건거타기를 즐기는 법우님이 있다. 자전거에 항상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 텐트 안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침낭은 기본이고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장비까지 모두 갖춘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길을 나서면 몇 날 몇 일을 길에서 보낸다고 하였다.

 

법우님 이야기에 따르면 요즘은 자전거 타기에 좋은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전국토가 자전거 길이라 볼 수 있는데 특히 사대강길을 즐겨 찾는 다고 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때로는 비포장 도로길을 만날 수 있고, 경사가 심한 산길을 만날 수 있어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주 난감한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전거가 고장 났을 때라 한다. 바퀴에 펑크가 났다면 이런 경우 매우 난감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마음 놓고 자전거타기를 즐길 수 없다고 하였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탄탄대로에서는 속도도 나고 빨리 이동한다. 그러나 탄탄하고 평탄한 길을 벗어나면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이 나타난다. 그런 길에 웅덩이가 있어서 빠지기라도 한다면 대략난감 하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로프를 걸어 빠져 나오는 수 밖에 없다. 부처님 당시도 마찬 가지 이었을 것이다. 마차가 길 아닌 길로 들어 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험한 길에서 차축이라도 고장난다면 매우 난감 할 것이다.

 

차축 망친 것처럼?

 

게송에서는 길 아닌 길로 들어 서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육사외도 등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외도의 가르침을 따랐을 때 그 과보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차축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어리석은 마부가 길 아닌 길로 들어 섰을 때 차축이 망가진 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어서 대략난감할 것이다. 차축을 망가뜨리는 다는 구절이“akkhacchinnova jhāyati”이다. 이는 akkha차축(axle’)을 의미하고, chinno망가진다(destroyed)’의 뜻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세 번째 게송에서 차축 망친 것처럼이라 하였다. 이는 적절치 못한 번역이고 일관성이 없다. 같은 단어에 대하여 두 번째 게송에서는 차축을 망가뜨려라 하였는데, 세 번째 게송에서는 차축 망친 것처럼이라 한 것은 어법에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길을 잘못 들어서 차축이 망가졌다면 마부는 난감해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른 것으로 설명된다. 육사외도와 같은 삿된 가르침을 따랐을 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게송에서는 “Mando maccumukha patto”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라 하였다. 누구나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삿된 견해에 집착하였을 때 악처에 난다고 하였다.

 

악행을 저지르고 길 아닌 길로 간 자는 죽음의 순간에 다음 생에 대한 표상을 접하게 될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임종순간에 보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이처럼 재생연결식이 일아나는 순간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Mando maccumukha patto(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라 하였다. 여기서 mando

‘Slow; stupid; dull; small; low, slight, weak’의 뜻이고, maccumukha‘the mouth of Death’의 뜻이고, patto‘Obtained, reached; having reached’의 뜻이다. 이를 직역하면 서서히 죽음의 입으로 들어 간다의 뜻이 된다. 이구절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falls into the mouth of Death”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죽음의 아가리에 떨어져서는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번역이 차이가 날까?

 

위 세 개의 게송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이 시들에 대한 해석은 난해해서 각 나라의 번역에 크게 차이가 난다(702번 각주)”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위 세 개의 번역도 차이가 난다. 특히 첫 번째 게송이 그렇다.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igacceva ta kayirā

ya jaññā hitamattano,
Na s
ākaikacintāya

mantā dhīro parakkame.

 

슬기롭고 지혜로운 님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알아서

어리석은 마부를 본받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고 정진하네. (전재성님역)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알아

즉시에 그것을 행해야 하리.

바르게 사유하는 현명한 자는

마부처럼 해서는 안되는니라.(각묵스님역)

 

One should promptly do the deed

One knows leads to one's own welfare;

The thinker, the wise one, should not advance

With the reflection of the carter.(빅쿠보디역)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차이가 난다. 각묵스님의 번역의 경우 빅쿠보디의 번역과 어순이 같고 또한 사용 용어도 유사하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에서 마부처럼 해서는 안되는니라라는 표현이 어색해 보인다. 이는 “Na sākaikacintāya”의 번역이다. sākaika가 마부(carter)을 뜻하고 cintāyacinteti형으로서 cinteti‘thinks; reflects; considers’의 뜻이다. 따라서 “Na sākaikacintāya”의 뜻은 마부를 본받지 말라는 뜻이 된다. 이는 빅쿠보디도 “the reflection of the carter”라 하여 마부의 반영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럼에도 마부처럼 해서는 안되는니라라고 번역한 것은 막연하고 어색한 표현이다.

 

왼쪽 길과 오른쪽 길

 

마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가르침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오른 쪽 길과 왼 쪽 길로 표현 된다. 이에 대하여 빠라마수카(parama sukha) 대하여(2014-01-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바른 길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띳사의 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Seyyathāpi tissa, dve purisā, eko puriso amaggakusalo eko puriso maggakusalo, tamena so amaggakusalo puriso amu maggakusala purisa magga puccheyya, so eva vadeyya: "ambho purisa, aya maggo. Tena muhutta gaccha. Tena muhutta. Gantvā dakkhissasi dvidhā patha. Tattha vāma muñcitvā dakkhia gahāhi. Tena muhutta gaccha, tena muhutta gantvā dakkhissasi tibba vanasaṇḍa. Tena muhutta gaccha. Tena muhutta gantvā dakkhissasi mahanta ninna pallala, tena muhutta gaccha, tena muhutta gantvā dakkhissasi sobbha papāta. Tena muhutta gaccha. Tena muhutta gantvā dakkhissasi sama bhumibhāga ramaīya.

 

 

띳사여,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남자가 있는데 한 남자는 길을 잘 알지 못하고 한 남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저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면,

 

여보시오, 그 길에 대하여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

 

라고 말할 것이다. 띳싸여, 이 비유를 설한 것은 그 의미를 시설하기 위한 것이다.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두 길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두 길은 왼쪽(vāma)과 오른쪽(dakkhia)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vāma muñcitvā dakkhia gahāhi)”라고 하였다. 왜 오른쪽 길로 가라고 하였을까? 그길은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드넓은 초원에

 

부처님은 길을 아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죽 가다 보면 도중에 우거진 숲도 보이고, 늪지대도 있고, 절벽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먼저 가 본 사람의 말을 믿고 바른길로 가다 보면 마침내 드넓은 초원, 풍요로운 평원에 당도하게 될 것이라 한다.

 

 

 

바리쿤초원

 

 

 

왼쪽길로 갔을 때

 

그런데 길을 가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왼쪽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vāmomaggo'ti kho tissa, aṭṭhagikasseta micchāmaggassa adhivacana seyyathīda: micchādiṭṭhiyā micchāsakappassa micchāvācāya micchākammantassa micchāājivassa vicchāvāyāmassa vicchāsatiyā micchāsamādhissa.

 

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곧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 말한다.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전재성님역)

 

 

두 개의 길에서 왼쪽길(vāmomaggo)은 길이 아닌 길을 말한다. 그래서 여덟 가지 잘못된 길이라 하였는데 이는 팔정도와 반대 되는 말이다. ,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을 말한다. 이렇게 잘못된 길로 들게 된 것은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가? 육사외도와 같은 삿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말한다.

 

오른쪽길로 갔을 때

 

하지만 길을 잘 아는 자의 말을 들으면 문제가 없다. 길을 가본 사람이 말한 대로 바른 길로 죽 가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Dakkhio maggoti kho tissa, ariyasseta aṭṭhagikassa maggassa adhivacana, seyyathīda: sammādiṭṭhiyā sammāsakappassa sammāvācāya sammākammantassa sammāājivassa sammāvāyāmassa sammāsatiyā sammāsamādhissa.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

 

 

이 문장에 대하여 성전협의 번역은 보이지 않는다. ‘탈역(脫譯)’된 것으로 본다. 초불연에서는 띳사여, ‘오른쪽 길은 곧,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을 가리키는 말이니, 그것은 바로, 올바른 견해...올바른 삼매이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빅쿠보디는 CDB에서는 'The right-hand branch': this is a designation for the Noble Eightfold Path; that is, right view . . . right concentration.”라 하였다. 이는 바른길이 바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임을 말한다. 

 

풍요로운 평원은 무엇을 뜻할까?

 

부처님은 오른쪽길, 즉 바른길(팔정도)로 갔을 때 잠깐만 가면 숲을 지나고 늪을 지나고 절벽을 지나면 풍요로운 평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이때 평원은 무엇을 뜻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Kho tissa, avijjāyeta adhivacana. 'Mahanta ninna pallalanti' kho tissa, kāmānameta adhivacana.'Sobebhā papātoti' kho tissa, kodhupāyāsasseta adhivacana. 'Samo bhumibhāgo ramaīyoti' kho tissa, nibbānasseta adhivacana.

 

띳사여, 커다란 우거진 숲이란 무명을 말하는 것이다. 커다란 깊은 늪지대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험준한 절벽이란 분노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평원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Tissa sutta-띳싸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4,전재성님역)

 

 

길을 아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오른쪽길로 갔을 때 궁극적으로 풍요로운 평원에 이른다. 그런데 이 풍요로운 평원은 바로 열반을 뜻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평원이라 번역된 빠알리어는 bhūmibhāga이다. 이는 ‘a piece of land’의 뜻으로 평화로운 곳즉 열반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 delightful expanse of l evel ground’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누릴만한 평지라 하였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지금 두 개의 가르침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는 ‘오른 길’로 가야 한다. 이때 오른 길은 오른쪽 방향의 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른쪽 길이 있다면 ‘왼쪽 길’도 있을 것이다. 진리의 길로 따졌을 때 왼쪽 길은 길이 아니다. 물론 왼쪽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마부가 들어 선 길은 길이 아닌 길로서 왼 쪽 길이라 볼 수 있다. 바른 길로 가야만 함에도 왼쪽 길로 들어 섰다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멀어짐을 뜻한다. 만일 두 갈래 길에서 왼 쪽으로만 죽 가게 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른 길로 들어서서 팔정도의 길로 간다면 죽지 않게 될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을 성취하였을 때 불사(不死: atama)가 되기 때문이다.

 

눈물의 기자회견을 보면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이나 연예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이 드러나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기자회견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인들이 눈물을 흘리면 대게 사람들은 동정심이 발동한다.

 

눈물의 기자회견을 보면 동정심을 유발한다. 특히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렇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모두 진심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악어의 눈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더욱 더 악행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악행은 왜 하는가? 그것은 초기경전에서 매우 명쾌 하게 설명되어 있다. 자기자신을 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적들이 서로 미워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것처럼, 악행을 서슴지 않는 자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눈물 흘리며 후회할 일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아들 케마는 부처님 면전에서 어리석어 지혜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적으로 만들며 쓰디쓴 열매를 가져오는 사악한 행위를 지어 가네(S2.22)”라고 노래 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마부의 비유를 들었다.

 

오온의 죽음

 

마차는 마부가 가자는데로 간다. 그런데 마부가 갑자기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 섰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오른 편은 길이지만, 왼편은 험하고 울퉁불퉁한 길임에도 기어이 이 길로 들어섰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못가서 마차는 서 버릴 것이다

 

부처님은 게송으로 어리석은 자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가르침 아닌 것을 따르니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 차축을 망가뜨려 걱정하듯이.(S2.22)”라 하였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마부에 해당되고 가르침 아닌 것을 따르는 것은 두 갈래 길에서 바른 길이 아닌 길로 들어 섰음을 뜻한다.

 

그런데 도중에 차축이 망가졌다고 하였다. 이는 오온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 바른 길이 아닌 왼 길(바르지 않은 길)로 들어 섰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닌 외도의 가르침을 따라 갔다는 말과 같다. 그 외도의 가르침을 따랐을 때 결국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이는 길을 잘못 들어 차축이 망가진 것과 같다. 그래서 오온의 죽음으로 결국 죽게 된다. 죽게 되면 행위가 남아 있는 한 다시태어남(再生)’을 유발한다.

 

다시태어남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죽음의 문턱에 떨어지네라 하였다. 죽음의 입속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외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원수로 여겨 막행막식을 하였다면 악처로 가기 쉽다. 그래서 육도를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오온의 집착을 놓아 버린 자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바른 길로 가는 것과 같다. 두 갈래의 길이 있을 때 바른길을 말한다. 이런 오른길이 팔정도의 길이다. 그래서 팔정도의 길은 탄탄대로이다. 그래서 도중에 차축이 망가져 오도가도 못할 염려는 없다. 그 바른 길로 죽 가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그 목적지에 다다랗을 때 죽어도 죽지 않는다. 더 이상 오온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의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오온의 집착을 놓아 버린 자는 불사(不死: atama)’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이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님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알아서

어리석은 마부를 본받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고 정진하네.”(S2.22)

 

 

 

2014-10-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