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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어리고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될 네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17. 16:15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어리고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될 네 가지

 

 

 

젊은사람 무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젊은사람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보잘 것 없고 별 볼일 없다하여 무시한다면 나중에 큰 코 다친다는 말이다. 어리다고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꼬살라모음(S3)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세존]

“대왕이여, 어리거나 작다고 깔보거나 어리거나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될 네 가지 존재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존재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왕족은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뱀은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불은 작다고 깔보거나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수행승은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이 네 가지 존재는 어리거나 작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Daharasutta-젊은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 전재성님역)

 

 

여기서 대왕은 꼬살라국의 빠세나디국왕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꼬살라모음은 꼬살라국의 국왕과 왕비와 관련된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주로 빠세나디국왕과 부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경에서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왕족과 뱀과 불과 수행승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공통적으로 어리다고 깔보거나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일까?

 

경에 따르면 빠세나디국왕은 부처님과 대화를 하면서 육사외도의 스승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뿌라나 깟사빠, 막칼리 고살라, 니간타 나타뿟따, 산자야 벨라뿟따, 빠꾸다 깟짜야나, 아지따 께사깜발린 이렇게 여섯 명의 외도 스승을 말한다.

 

외도 스승들은 부처님 보다 나이가 더 많았음에 틀림 없다. 이는 경에서 외도 스승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고 고따마께서는 나이도 젊고 출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의문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나이가 젊다고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말과 같다. 이에 부처님은 어리다고 무시해서는 안될 네 가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 하셨다.

 

왕족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

 

첫 번째가 왕족이다. 어리다고 왕족을 깔보거나 어리다고 왕족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번역 비교표를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어

hāna hi so manussindo

rajja laddhāna khattiyo
So kuddho r
ājadaṇḍena

tasmi pakkamate bhusa,
Tasm
ā ta parivajjeyya

rakkha jivitamattano.

khattiyo

전재성님역

귀족이 인간의 지배자로

왕의 지위에 오르고

그의 분노를 사면

처벌로써 맹렬히 공격당하리.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귀족

각묵스님역

끄샤뜨리야는 만인지상의 임금 되어

왕국을 통치하는 경우가 있으리니

그의 분노를 사면 왕의 형벌로

크게 벌 받을 것이로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 지키려거든

이런 그를 잘 알아 피해가야 하노라.”

끄샤뜨리야

빅쿠보디역

“For it may happen that this lord of men,

This khattiya, shall gain the throne,

And in his anger thrash one harshly

With a royal punishment.

Therefore guarding one's own life,

One should avoid him.”

khattiya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이 있었다. 바라문, 크샤트리아, 평민, 노예 이렇게 알려져 있다. 여기서 지배계급은 크샤트리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크샤트리아라 하는데 빠알리어로는 캇띠야(khattiya)라 한다.

 

캇띠야(khattiy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귀족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과 빅쿠 보디는 산스크리트어 명칭대로 끄샤뜨리야라 하였다. Khattiya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m.] a man of the warrior caste’로 되어 있다. 캇띠야에 대한 또 다른 뜻이 ‘a prince, nobleman, 帝利, 王族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귀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왕족에서 왕이 나온다. 여러 명의 왕자들이 있지만 누가 왕이 될지 알 수 없다. 비록 왕세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왕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주석에 따르면 어린 왕자를 만났는데도 길을 비켜 주지 않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를 깔 보는 것이라 하였다. 더구나 저래 가지고 어떻게 왕위를 이어 받을 수 있을까?”라고 얕잡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 그 어린 왕자가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족을 무시하였다고 큰코 다친 이야기는 많다. 연산군이나 대원군 이야기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왕족은 아무리 어려도 무시하거나 얕잡아 봐서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분노를 사면 맹렬히 공격당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뱀에는 독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어리다고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뱀이다. 왜 무시해서는 안될까?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Uccāvacehi vaṇṇehi

urago carati tejasī
So
āsajja ase bāla

nara nāriñca ekadā,
Tasm
ā ta parivajjeyya

rakkha jivitamattano.

육구게

전재성님역

여러 모양을 바꿔

맹독의 뱀은 돌아다니면서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

단번에 물어 버리리.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육구게

각묵스님역

맹독을 가진 뱀은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서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자 공격하여

단박에 물어버리도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 지키려거든

이런 그를 잘 알아 피해가야 하노라.”

오구게

빅쿠보디역

“For as that fierce snake glides along,

Manifesting in diverse shapes,

It may attack and bite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

Therefore guarding one's own life,

One should avoid it.”

육구게

 

 

 

 

게송에 따르면 뱀이 모양을 바꾼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주석에 따르면 뱀은 어떠한 형상을 하고라도 뱀의 모습이나 보석의 모습이나 심지어 다람쥐의 모습으로 변하여 먹이를 찾아 다닌다.(Srp.I.133)”라고 하였다. 이런 말은 신화적이다. 인도신화에서 뱀이 모양을 바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축생들에게 구족계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뱀이 모양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율장대품에도 나온다. 이에 대하여 궁극적 행복(parama sukha)이란? 무짤린다 용왕이야기(2014-10-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는 용(Nāga)이 인간의 몸으로 변신하여 출가한 후 구족계를 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자 부처님은 축생들에게 구족계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먼저 인간의 지위를 얻은 다음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야 됨을 말한다. 이후 승단에서는 모든 출가자들에 대하여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 받아야 했다.

 

부적절한 번역과 적절한 번역

 

번역에서 차이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라 하였으나, 각묵스님은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차이가 나는 것은 아이어리석은 자이다.

 

게송에서 bāla가 있다. 이말은 ‘young in years; ignorant; foolish. (m.) a child; a fool’의 뜻이다. 우리말에도 어리석다라 하였을 때 나이가 어린 자를 뜻하는 경우가 있듯이. 발라(bāla)라는 말 역시 어린아이어리석은 자두 가지 의미로 사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이 bāla에 대하여 아이로 번역한 것에 반하여 각묵스님은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빅쿠보디의 경우 ‘the fool’이라 하여 각묵스님과 같은 번역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뱀이 크건 작건 무서워 한다. 작은 뱀일지라도 독이 있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뱀은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물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빅쿠 보디는 bāla에 대하여 ‘the fool’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It may attack and bite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라 하였다. 이를 직역하면 그것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어리석은 자를 공격할지 모른다.”라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의 번역이 가장 잘 된 번역이라 본다.

 

뱀의 성질을 잘 알고 있는 자는 뱀에 물리지 않을 것이다. 뱀이 작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았을 때 뱀에 물린다. 그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 중에는 남자나 여자가 구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라 하였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번역이다. 또 각묵스님은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자 공격하여라 하였는데 역시 적절치 못한 번역이다. 빅쿠보디처럼 “It may attack and bite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라 번역해야 적절한 번역이 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평 가

비 고

빠알리어

So āsajja ase bāla

nara nāriñca ekadā

 

 

전재성님역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 단번에 물어 버리리.

아이를 남자와 여자와 한 묶음으로 봄

부적절한 번역

각묵스님역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자 공격하여 단박에 물어버리도다.

어리석은 자를 남자와 여자와 한 묶음으로 봄

부적절한 번역

빅쿠보디역

It may attack and bite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

(그것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어리석은 자를 공격할지 모른다)

the fool을 남자와 여자와 분리하여 설명함

적절한 번역

 

 

 

어리석은 자가 뱀에게 물린다. 남자나 여자, 그리고 아이라 하여 모두 뱀에 물리는 것은 아니다. 작다고 하여 얕잡아 보는 어리석은 자가 물리는 것이다.

 

왜 불을 무시하면 안되는가?

 

세 번째로 작다고 하여 무시해서 안되는 것이 불이다. 이에 대한 세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Laddhā hi so upādāna

mahā hutvāna pāvako,
So
āsajja ase bāla

nara nāriñca ekadā,
Tasm
ā ta parivajjeyya

rakkha jivitamattano.

bāla

전재성님역

태울 것을 만나면

불은 참으로 크게 타오르며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

단번에 태워 버리리.

자신의 목숨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아이

각묵스님역

그것이 만일 태울 것을 만나면

크나 큰 불무더기로 화하여서

남자건 여자건 어리석은 자 공격하여

순식간에 태워버리도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 지키려거든

이런 그를 잘 알아 피해가야 하노라.”

어리석은 자

빅쿠보디역

For if it gains a stock of fuel,

Having become a conflagration,

It may attack and burn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

Therefore guarding one's own life,

One should avoid it.

the fool

 

 

 

불이 붙으면 맹렬히 타오른다. 타고 남으면 검은 숯을 남긴다. 그렇다고 불이 다 꺼졌다고 볼 수 없다. 불씨가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씨가 튀어 태울 것을 만나면 맹렬하게 다시 타오를 것이다.

 

타고 난 불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담배꽁초를 쓰레기 통에 함부로 버리면 건물을 태워 버릴 수 있다. 누군가 산이나 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난 다음 담배꽁초의 불을 완전히 끄지 않은 채 집어 던졌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형산불이나 들불로 발전 될 수 있다. 이렇게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산불이나 들불이 나는 것은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발생한다. 불씨가 작다고 하여 무시하기 때문이다.

 

불을 내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는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 보디의 번역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전재성님이나 각묵스님의 경우 남자와 여자와 아이 또는 어리석은 자를 한묶음으로 번역하였으나 이는 적절치 않은 번역이다. 빅쿠 보디처럼 “It may attack and burn the fool, Whether a man or a woman(그것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어리석은 자를 태우고 공격할지 모른다)”라고 번역한 것이 적절해 보인다.

 

불을 젊다는 이유로?

 

불과 관련 하여 부적절한 번역이 하나 더 있다. 이전 게송에서 각묵스님은 “..저 불을 젊다는 이유로 멸시하면 안되나니라 하였다. 불을 젊다고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One should not despise as 'young' A blazing fire”라 하였다. 불을 젊다고 무시해서 안 될 것이라 하여  'yo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young'에 대하여 반드시 젊음이라고만 해석해야 할까?

 

각묵스님은“..저 불을 젊다는 이유로 멸시하면 안되나니라 하였다. 이 구절에해당되는 빠알리어가 “Daharoti nāvamaññeyya na na paribhave naro.”이다. 여기에서 Daharo‘young’의 뜻이다. ‘young’이라는 말은 젊은, 어린, 청년의, 새끼, 경험이 없는의 뜻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에 대하여 젊다고 번역한 것은 어색해 보인다.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키워드

비 고

빠알리어

Daharoti nāvamaññeyya na na paribhave naro

Daharo

 

전재성님역

“..불을 작다고 깔 보고 없신여겨서는 안되리.”

작다고

적절한 번역

각묵스님역

“..저 불을 젊다는 이유로 멸시하면 안되나니

젊다는

부적절한 번역

빅쿠보디역

“One should not despise as 'young' A blazing fire”

young

부적절한 번역

 

 

 

수행승이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된다

 

네 번째로 수행승이 어리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두 개의 게송으로 설명된다.

 

 

  

  

 

빠알리어

Vana yadaggi ahati

pāvako kahavattanī,
J
āyanti tattha pārohā

ahorattānamaccaye.


Ya
ca kho sīlasampanno

bhikkhu ahati tejasā
Na tassa putt
ā pasavo

dāyādā vindare dhana,
Anapacc
ā adāyādā

tālāvatthu bhavanti te.

tālāvatthu

전재성님역

불이 숲을 태우고

불이 꺼지면 검은 숯 자국이 되며

밤과 낮이 지나면

거기서 세 가지가 돋아나지만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알지 못하리.

자손이 없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들은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었네.”

잘린 종려나무처럼

각묵스님역

제 아무리 맹렬한 불이 숲을 태워 없애고

검은 흔적 폐허만을 자취로 남기더라도

낮과 밤이 지나가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곳에도 새싹들이 돋아나게 되도다.

 

그렇지만 계를 구족한 비구가 있어서

계행의 불꽃으로 어떤 사람을 태운다면

그에게는 아들들도 가축들도 멸망하여

그의 상속자들 재물 얻지 못하리니

후손도 끊어지고 상속자도 없어져서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 비어버리도다.”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

빅쿠보디역

“When a fire bums down a forest-

That conflagration with blackened trail

The shoots there spring to life once more

As the days and nights pass by.

 

But if a bhikkhu of perfect virtue

Burns one with [his virtue's] fire,

One does not gain sons and cattle,

Nor do one's heirs acquire wealth.

Childless and heirless they become,

Like stumps of palmyra trees.”

Like stumps of palmyra trees

 

 

 

계행의 불꽃으로 태운다

 

두 번째 게송에서 ahati tejasā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Burns one with [his virtue's] fire’라 하였다. aha‘burns’의 뜻이고, teja‘heat’의 뜻이다. 그래서 ahati tejasā불과 함께 탄다는 뜻이 된다. 이는 계행의 불로 탄다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계행의 불꽃으로 어떤 사람을 태운다면이라 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각주에서나 설명 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올라 온 것이나 같다. 빠알리 원문이 ahati tejasā이므로 빅쿠보디의 번역대로 ‘Burns one with [his virtue's] fire’가 적합하다고 본다.

 

“[계행의] 불꽃으로 태운다(ahati tejasā)”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hati tejasā: Srp.I.134에 따르면, 수행승이 복수를 하려해도, 자신의 계행의 불로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다. 수행승에게 죄를 범한 자는 수행승이 인내하여 참아낼 때에만 불태워진다.

 

(상윳따1 799번 각주, 전재성님)

 

 

수행승은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누군가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똑 같은 방식으로 저주를 한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계행은 강력한 복수의 수단

 

청정한 계행을 유지하였을 때 결국 저주의 기도는 무력화 된다. 그리고 저주를 한 자는 자신의 불선한 행위로 인하여 불선과보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선인]

안전을 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대가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그것을 돌려주니

그대에게 끝없는 위협이 되리니.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한 결과가 있으리.

사랑하는 이여, 씨앗이 뿌려지면

그대는 그 과보를 받으리라. (S11.10, 전재성님역)

 

 

누군가 화를 내며 위협하고 겁 주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복수를 해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욕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 (S11.25)” 라 하였다. 이렇게 인내하였을 때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S7:2)”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행의 불로 태워버리는 것을 말한다. 청정한 계행을 지키는 것 자체가 승리함을 말한다.

 

분노하며 위협하려 하는 것은 악행이다. 악행은 반드시 악과보를 생산해 낼 것이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그대로 그 열매를 거두나니라 하였다. 악행을 하면 반드시 악한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 헤치려 하였을 때 계행을 지키는 것이 가장 강력한 복수의 수단이라 볼 수 있다.

 

딸라(Tālā), 종려나무인가 야자수인가?

 

청정한 계행의 불꽃으로 번뇌를 소멸하였을 때 더 이상 윤회 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표현이 “tālāvatthu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잘린 종려나무처럼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Like stumps of palmyra trees(팔미라야자나무의 그루터기처럼)”이라 하였다. 종려나무와 야자나무 어느 것이 맞을까?

 

팔미라야자나무(palmyra)?

 

tālāvatthu에서 ‘Tāl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m.) the palmyra tree.多羅, 棕櫚라 되어 있다. ‘팔미라야자나무(palmyra), 종려의 뜻이다. Palmyra는 어떻게 생겼을까? palmyra tree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Borassus (Palmyra Palm) is a genus of six species of fan palms, native to tropical regions of Africa, Asia and New Guinea. They are tall palms, capable of growing up to 30 m high (98 ft). The leaves are long, fan-shaped, 2 to 3 m in length.위키백과에 따르면

 

(Borassus, 위키백과)

 

 

palmyra tree의 학명은 Borassus이다. 이 나무는 부채모양의 야자수로서 여섯 종이 있다. 주로 아프리카, 아시아, 뉴기아의 열대지방이 원산이다. 자라면 높이가 30미터에 달한다. 잎사귀는 넒고, 부채꼴 모양으로 길이가 2 내지 3미터 가량 된다. 이런 팔미라야자나무의 모양은 다음과 같다.

 

 

 

palmyra tree(Borassus flabellifer in Angkor Wat, 위키백과)

 

 

팔미라야자나무는 앙코르 왓트에서 보는 부채꼴 모양의 야자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이 번역한 종려는 어떤 나무일까?

 

종려(棕櫚)는 어떤 나무일까?

 

棕櫚(종려)를 키워드로 검색하니 중국어판 위키백과에 Trachycarpus fortunei又名唐棕扇棕榈属植物라 소개 되어 있다. 학명이 Trachycarpus fortunei라 하는데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Trachycarpus fortunei (Chusan palm, windmill palm or Chinese windmill palm) is a palm native to central China (Hubei southwards), south to northern Burma and northern India, growing at altitudes of 100–2,400 m (328–7,874 ft).[1][2][3] It is a fan palm, placed in the family Arecaceae, subfamily Coryphoideae, tribe Trachycarpeae.[1]

 

(Trachycarpus fortunei, 위키백과)

 

 

주산야자 또는 풍차야자라 한다. 중국 중부, 미얀마 북서부, 인도북부가 원산이다. 자라면 높이가 10-20미터가 된다. 이를 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棕櫚(Trachycarpus fortunei, 위키백과)

 

 

 

‘Tāl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palmyra tree’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야자나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종려라 하였다. 검색하여 보니 종은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하다. 분명한 사실은 모두 야자나무라는 것이다. 이는 심재가 없는 파초(까달리)와 다른 것이다.

 

야자나무속은 텅텅 비었을까?

 

야자나무는 심재가 있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비어버리도다라 하였다. 여기서 등걸이라는 말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고 남은 밑동을 말한다. 우리말로 나무밑동을 말한다. 나무를 베고 나면 밑부분만 남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밑동에 대하여 텅텅비어버리도다라 하였다. 이는 오역이다. 왜 오역인가? 이에 대하여 파초인가 야자수인가, 포말경(S22:95) 까달리(kadali)나무(2013-04-0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sakhārā kadalūpamā(S22.95)”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형성은 파초와 같고(전재성님역)라 번역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라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kadali에 대하여 야자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오역이다. 까달리는 파초가 맞다. 왜냐하면 파초에는 심재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양파껍질 까듯이 되어 있는 것이 파초이다. 그러나 야자는 심재를 가지고 있는 목재나 다름 없다. 그래서 kadali에 대하여 각묵스님이 야자나무로 번역한 것을 오역으로 본 것이다.

 

야자나무가 심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각묵스님은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비어버리도다라 하였다. 야자수 밑둥을 잘라 보니 심재 부위가 텅텅 비어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palm tree cut’키워드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Cut palm-tree

 

 

 

 

Felling of 8 Royal Palm Trees remains mystery

Two workers engaged in sawing a felled Royal Palm Tree

 

 

두 번째 사진은 ‘The Daily Star’라는 신문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두 명의 작업자가 야자수(Palm Tree)를 자르고 있는 모습이다. 나무 속 그 어디에도 텅 비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각묵스님의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비어버리도다라고 번역된 것은 오역이라 본다.

 

뿌리가 잘린 종려로 설명 되는 열반

 

빅쿠보디는 “Like stumps of palmyra trees”라 하여 팔미라나무의 그루터기처럼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잘린 종려나무처럼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를 말한다. 이런 표현은 초기경전에서 뿌리가 잘린 종려나무처럼 만들어 사라지게 하여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M140, 전재성님역)”라는 정형구로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상윳따니까에 실려 있는 표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 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된다. (S12.35, 전재성님역)

 

2)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된다. (S12.35, 각묵스님역)

 

 

상윳따니까야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S12.35)’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똑 같은 빠알리어에 대한 두 번역자의 번역을 보면 차이는 종려와 야자수이다. 종려와 야자수 모두 야자나무과에 속한다.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다. 그런 야자나무의 뿌리가 뽑히면 더 이상 성장 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번뇌의 뿌리가 뽑혔을 때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아 윤회가 멈춘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꺼진 불이나 뿌리가 잘린 종려로서 열반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역비교

비고

빠알리어

tālāvatthu bhavanti te

 

전재성님역

잘린 종려나무처럼 되었네

 

각묵스님역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 비어버리도다

1)텅텅비어 있다라는 말은 원문에 없음.

2) 텅텅비어 있다라는 말은 열반을 설명하기에 부적절(오온에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텅텅비었다는 뜻으로 사용됨).

3) 야자수심재는 텅텅비어 있지 않으므로 오역.

빅쿠보디역

Like stumps of palmyra trees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

 

게송에서 줄기가 잘린 종려 또는 야자수가 언급 된 것은 번뇌의 소멸과 관련이 있다. 뿌리가 뽑히고 줄기가 잘린 나무는 다시 성장할 수 없듯이, 번뇌가 소멸되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이 실현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잘린 종려 나무 또는 잘린 팔미라야자나무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문을 보면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이라 하였다. 이런 번역은 생뚱맞다. 원문에 텅텅 비었다는 표현도 없을 뿐더러, 야자나무 속은 텅텅비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속이 비었다는 것은 심재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껍질로 둘러 싸인 파초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오온을 설명할 때 파초가 등장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형성은 파초와 같고(S22.95, 전재성님역)”라 하였는데 형성(행온)에는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S22.95, 각묵스님역)”라 하여  야자수나무는 텅빈 것처럼 번역하였다. 이는 오역이다. 까달리는 속이 꽉찬 야자수가 아니라 껍질로 덥혀 있는 파초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역이 또 한번 등장한다. 이번에는 열반을 설명을 할 때 예를 든 야자수에 대하여 생뚱맞게도 속이 텅텅 비어 있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원문에도 없는 말이고 문맥에도 맞지도 않다텅텅 비어 있다라는 말은 오온에서 실체가 없음을 표현을 할 때 적합하다. 야자수 속은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꽉 차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야자수 등걸처럼 텅텅”이라는 표현은 오역으로 본다.

 

 

 

2014-10-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