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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늙지 않는다,그러나 진리로서의 가르침은 확실히 쇠퇴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5. 11:35

 

진실은 늙지 않는다,그러나 진리로서의 가르침은 확실히 쇠퇴한다

 

 

 

쌓이고 쌓이면

 

쓰레기가 쌓이면 치워 주어야 한다. 그대로 방치하면 파리나 모기 등이 들끓고 악취가 날 것이다. 이렇게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정보통신의 시대에 컴퓨터는 일상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들락날락 할 뿐마 아니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악화 된다. 생각지도 않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속도가 느려진다. 그럴 경우 조치를 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 컴퓨터를 수리하는 기사를 불러 보지만 고쳐 주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흔히 하는 말은 밀어 버리죠?”라고 말한다. 속도가 느린 원인을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아예 포멧을 해버리는 저승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컴퓨터기사에 따르면 컴퓨터는 주기적으로 포멧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래 두면 데이터가 쌓여서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컴퓨터찌꺼기라 말할 수 있다. 행위에는 족적을 남기듯이 컴퓨터 역시 작업을 하고 나면 데이터찌꺼기가 남는다. 그런 찌꺼기가 쌓이고 쌓이면 속도가 느려지고 고장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컴퓨터를 포멧하고 나면 새롭다. 새로 프로그램을 다시 까는 등 세팅이 완료 되었을 때 마치 아이가 탄생하듯이 컴퓨터 역시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마음의 찌꺼기를 제거 하였을 때 새롭게 태어남을 느낄 것이다.

 

동창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얼굴이 변형된다. 이런 변화는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를 비교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런 예로 동창사이트를 들 수 있다.

 

수 년 전 검색으로 동창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말한다. 학교가 서울의 공동학군에 있다 보니 그 넓은 서울 각지에서 모여 들었다. 인구 천만의 서울에서 모여 들었으니 사는 곳에 친구가 없었다. 더구나 고등학교의 경우 입시위주의 교육을 하는 곳이라 폭넓게 친구를 사귈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고등학교 동창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모두 나이 든 자들이다.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일부는 기억한다. 그런데 그 때 당시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을 비교해 보니 강산이 세 번 바뀌어서일까 완전히 딴 얼굴이다. 어떤 이는 그 당시의 윤곽이 남아 있어 희미하게나마 알아 볼 수 있지만 대부분 딴 얼굴들이다.

 

탐욕스런 얼굴, 성내는 듯한 얼굴

 

나이 든 자의 얼굴을 보면 삶의 역정이 보인다.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진다는 말이 있듯이 세월에 따라 모두 얼굴이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매우 탐욕스럽게 생긴 얼굴이 있는 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매우 성질 급하게 생긴 얼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자만에 가득 찬 얼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을 포기한듯한 절망스런 표정도 있다. 이렇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각자 살아 온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래서 탐욕스런 얼굴, 성내는 얼굴 등을 특징으로 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얼굴은 지난 날의 삶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한평생 탐욕으로 산 자는 탐욕스런 얼굴 모습일 것이고, 한평생 화만 내며 산 자는 성내는 얼굴일 것이다. 인색하여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산 자는 심술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얼굴 모습일 것이다.

 

불법이든 탈법이든 불로소득이든 돈을 많이 벌어 호의호식하며 한평생을 산 자는 얼굴에 오만함이 넘쳐 날 것이다. 그런 얼굴 모습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아이 시절이나 청소년시절의 그 순수한 얼굴은 간데 없고 마치 먹을 것에만 관심을 두는 돼지 얼굴, 한평생 싸움만 하고 살았을 아수라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삶의 흔적대로 내생 역시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사람은 세월에 따라 점차 늙어 간다. 그러다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죽음을 말한다. 이렇게 늙고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차별은 없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늙음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늙음과 죽음에 가장 억울해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살아 온 사람들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왕족, 바라문, 장자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곳 국왕 빠세나디가 태어나는 자 가운데 늙고 죽음을 면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대왕이여, 늙고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존]

대왕이여, 왕족들이 부유하고 돈이 많고 호화롭고 금과 은이 많고 재산이 많고 재물과 곡식이 풍부한 권세 있더라도 그들 태어나는 자들 가운데 늙고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

 

(늙고 죽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3, 전재성님역)

 

 

왕족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산다. 이는 금과 은 등 재산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에 바라문장자들이 포함 되어 있다. 여기서 바라문은 성직자 계급으로서 초기경에 따르면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으로 부를 축적한 타락한 바라문이다. 또 장자는 오늘날의 재벌에 준하는 부자들이라 볼 수 있다.

 

대왕이나 바라문, 장자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기를 바란다.  심지어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늙음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나는 자들 가운데 늙고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태어나면 죽기 마련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들은 죽기 마련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도 그대로 표현 되어 있다. 그것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ambhavanti.)(S12.2)”라는 정형구이다. 이처럼 태어난 자는 늙음과 죽음 (jarāmaraa)을 운명처럼 맞이 해야 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성립된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늙음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역관은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Jātinirodh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S12.2)”라는 정형구가 성립된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산 자들은 이 삶이 오래 지속 되고 영원하기를 바란다. 특히 어렵게 재산을 모아 놓은 자들의 바램은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살만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평생 모아 놓은 재산을 암투병등으로 거의 날려 버린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다. 또 평생모아 놓은 재산을 사기나 투기 등으로 한 순간에 모두 놓쳐 버리는 수도 있다.

 

재산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마의 땀과 팔뚝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든, 아니면 불법과 탈법 그리고 불로소득으로 형성 된 것이든 그 재산의 형성에 투자한 시간이 노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태어난 자라면 누구나 예외 할 것 없이 늙고 죽어 가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재산은 무력하다.

 

왕족, 바라문, 장자들이 많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지만 세월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늙어 가고 병들어 가고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는 슬픔이고 절망이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라 하였다. 어떤 존재이든지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으로 귀결 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마치 죽음으로 귀결되는 절망(ūpāyāsā)’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가는 것 같다.

 

죽음을 극복하는 이들

 

죽음은 절망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라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다. 그러나 죽음을 극복하는 이들도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Yepi te mahārāja bhikkhå arahanto khīāsavā vusitavanto katakaraīyā ohitabhārā anuppattasadatthā parikkhīabhavasaññojanā sammadaññāvimuttā. Tesampāya kāyo bhedanadhammo nikkhepanadhammoti.

 

[세존]

대왕이여, 수행승들이 거룩한 님으로서 번뇌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을 이루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부수고 올바른 궁극의 앎으로 해탈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이 몸은 부서져야 하고 버려져야 합니다.”

 

(늙고 죽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3, 전재성님역)

 

 

여기서 거룩한 님아라한(arahanta)’을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번뇌 다한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아라한에 대하여 늙고 죽는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이는 왕족과 바라문, 장자 에게는 늙고 죽음을 면하는 자는 없습니다.(natthi aññatra jarāmaraā.)”라고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서 아라한에 대하여는 몸은 부서져야 하고 버려져야 합니다. (kāyo bhedanadhammo nikkhepanadhammoti)”라 하였다. 늙음과 죽음에 대하여 부서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죽는 것이 두려운 자들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아무리 재산을 많이 가진 자라도 결국 늙고 죽음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런데 삶의 과정에서 지은 행위가 많다면 당연히 그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다시 태어남(재생)’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부자로서 산 자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마의 땀으로, 자신의 팔뚝의 힘으로 축적하였다면 칭찬 받을 만하다. 그러나 어느 영화 대사와 같이 “요트를 타는 사람은 모두 사기꾼이야. 그들이 착한 일을 해서 그 많은 돈을 벌었을 것 같아 ? ”라는 말이 있듯이, 부의 축적이 불법과 탈법 그리고 불로소득에 따른 것이라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남으로 인하여 어느 곳에 태어날 지 알 수 없지만 대게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호의호식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자들은 전전긍긍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늙어 가는 것을 멈추고자 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극복하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성직자들에게 시주를 하고 헌금을 하여 천국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아라한에게 죽음은 축복

 

번뇌 다한 자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일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은 축복과도 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유아견을 가지고 있는 범부에게 있어서 죽음은 오온의 죽음을 의미한다. 오온의 죽음은 진짜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atama)를 말한다. 아라한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오온의 죽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유아견을 가진 범부의 죽음은 오온의 죽음으로서 죽음이라 불리우지만, 무아견을 가진 아라한의 죽음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고 몸이 부서지고 버려졌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테라가타에 인상적인 게송이 있다. 그것은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Thag.654)라는 게송이다. 이에 대하여 아라한의 인생관(2012-11-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죽음이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나의 것, 나의 자아라 여기는 유신견을 가진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neta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S22.59)”라는 무아의 가르침을 실천한 자들이다. 그래서 번뇌 다하여 청정한 삶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오온의 죽음이 아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몸은 부서져야 하고 버려져야 합니다. (kāyo bhedanadhammo nikkhepanadhammoti)”라 한 것이다.

 

진실은 늙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도 늙어 죽기 마련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범부들에게나 해당되는 늙음과 죽음이라는 말 대신에 몸은 부서지는 것 (Bhedanadhamma)’ 이고 죽을 때 내려 놓는 것(nikkhepanadhamma)’이라 하였다. 이렇게 부서지는 것, 내려 놓는 것이 아라한의 죽음이다. 그런 아라한의 죽음은 부귀영화를 누린 왕족이나 바라문, 장자의 죽음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Jīranti ve rāja rathā sucittā

atho sarīrampi jara upeti,
Satañca dhammo na jara
upeti

santo have sabbhi pavedayanti.

 

[세존]

아름다운 대왕의 수레도 낡아가고

신체도 점점 늙어가지만,

참사람에게 진실은 늙지 않는다고

참사람들은 참사람들과 함께 선언하네.”(S3.3, 전재성님역)

 

 

왕의 멋진 마차도 풍진 속에 낡아가고

그 몸마저 세월 따라 이제 늙어가지만

참된 자들의 법이란 결코 늙지 않나니

참된 자들은 참된 자과 [이렇게] 선언하노라.” (S3.3, 각묵스님역)

 

 

“The beautiful chariots of kings wear out,

This body too undergoes decay.

But the Dhamma of the good does not decay:

So the good proclaim along with the good.” (S3.3, 빅쿠보디역)

 

 

 

 

Dhammacakka

 

 

개송에서 진실은 늙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진실을 추구하는 자들 역시 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란?

 

게송에서 세 번째 구절에  “Satañca dhammo”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참사람에게 진실은이라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참된 자들의 법이란이라 하였다. 여기서 satasanto(Being; good; wise)의 뜻으로  라 설명되는데 선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한 자들의 법(Satañca dhamma)’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열반을 뜻한다. 각주에 따르면 법구경 151번 게송에도 동일한 시가 있다.

 

법구경 늙음의 품(Jaravagga, 11)에서 151번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실려 있는 게송과 동일하다. ‘Satañca dhamma’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담마에 대하여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를 지칭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네 가지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 즉 사향사과와 열반이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이고, 이 원리에 대하여 참된 자들의 법(Satañca dhamma)’이라 하였다.

 

참된 자들의 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열반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늙지 않는다(na jara upeti)’고 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늙지 않는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지위와 재산, 명에는 무상한 것이고, 이런 무상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 역시 무상하여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무상하지 않다. 그리고 늙지도 않는다. 따라서 죽지도 않는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nto have sabbhi pavedayanti. Spk offers three interpretations, of which only the first, which I follow, sounds plausible:

 

"The good, together with the good, declare: 'The Dhamma of the good does not decay.' The Dhamma of the good is Nibbana; since that does not decay they call it unaging, deathless."

 

The verse = Dhp 151, on which Dhp-a III 123,2-5 comments: "The nine fold Dhamma of the good of the Buddhas, etc.-does not decay, does not undergo destruction. so the good-the Buddhas, etc.-proclaim this, declare it, along with the good, with the wise."

 

The ninefold supramundane Dhamma is the four paths, their fruits, and Nibbana. Brough argues that sabbhi here must be understood to bear the sense of a dative, and he takes the point to be that "the doctrine does not wear out 'because good men teach it to other good men,' their disciples and successors" (p. 228, n. 160).

 

I do not find his interpretation convincing, for the Dhamma-as-teaching must certainly decay, and only the supramundane Dhamma remains immune to aging and death.

 

(CDB 400p, 20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게송의 세 번째 구절 ‘Satañca dhammo na jara upeti’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게송에서 말하는 담마가 열반을 뜻하고, 주석에 따르면 사향사과와 열반으로 이루어진 아홉 가지 출세간의 진리를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가르침으로서 담마는 확실히 쇠퇴한다

 

빅쿠보디의 각주에서 마지막 문단을 보면 매우 의미 있는 문구가 보인다. 그것은 빅쿠보디의 개인적인 견해로서 the Dhamma-as-teaching must certainly decay”라는 문구이다. 이는 가르침으로서 담마는 확실히 쇠퇴한다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진리로서 가르침을 펼쳤지만 그런 가르침이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과거에 수 많은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만일 부처가 출현하여 그 진리가 지금까지 존속해 왔다면 또 다른 부처가 출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칠불 또는 과거 이십오불 등 수 많은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진리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초기에는 잘 전승되었을지 몰라도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가르침이 변질 되어 마침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부처님이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무아의 가르침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가서는 이를 정반대로 해석하여 --라 하였을 때 가르침이 변질 된 것이다. 그리고 선정()과 통찰()을 강조하였건만 오로지 선정만 남았을 때 가르침이 실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선종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과거에 부처가 여럿 출현한 이유는?

 

부처가 과거에 여럿 출현한 것은 가르침으로서 진리가 단절 된 것을 의미한다. 가르침이 변질 되어 마침내 사라져 버렸을 때 오로지 선정수행만 남게 된다. 그런 상태가 한량 없이 지속되다가 또 다시 부처가 출현한다. 그런데 그때 깨달은 진리가 과거에 출현하였던 부처가 깨달은 진리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과거칠불이 깨달은 진리가 모두 연기법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부처님은 고대도시의 아름다운 비유(S12.65)를 들어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과거에 출현하였던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같음을 말씀 하셨다. 항상하고 안정적이고 불변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조건을 하는 것이다.(S12.20)”

 

 

이런 이유로 빅쿠보디는 “only the supramundane Dhamma remains immune to aging and death.”라 하였다. 이는 오직 출세간적 진리만이 늙음과 죽음에 면제되어 남아 있다라는 뜻이다.

 

지금도 법의 바퀴는 굴러간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항상 원리로서 남아 있다. 부처가 출현하여 가르침을 펼치지만 가르침으로서 법은 변질되고 사라져 버릴 수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결코 늙어 죽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실천하였을 때 열반에 이르게 되는데, 열반이 쇠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이 참사람이 참사람게 전하는 진리 역시 쇠퇴하여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참사람에게 진실은 늙지 않는다고 참사람들은 참사람들과 함께 선언하네 (Satañca dhammo na jara upeti santo have sabbhi pavedayanti (S3.3)”이라 말씀 하신 것이다.

 

게송에서  참사람들은 참사람들과라 하였을 때 앞의 참사람들(santo)은 깨달은 자를 말하고, 뒤의 참사람들(sabbhi)은 슬기로운 자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은 자들이 현명한 자들을 이끌어 가르침이 전승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깨달은 자의 의하여 진리가 전승되어 갈 때 법의 바퀴는 굴러 간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최초로 꼰단냐에게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열렸다. 이는 대사건이다.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법의 바퀴가 굴러 간 이래 지금까지 끊임 없이 법의 바퀴가 굴러가고 있다. 이런 법의 바퀴가 언제 까지 굴러갈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멈추고 말 것이다. 그때는 오로지 선정수행만 남아 있게 되어서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삶을 살아 가게 될 것이다.

 

늙어 병들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진리(담마)이다. 그런 진리는 오로지 참사람에 의하여 전승된다. 이처럼 전승된 가르침으로서 진리는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어떠한 위험도 초래케 하지 않고 세대를 초월해 전해진다는 의미에서 늙거나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4-10-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