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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友情)에 대하여, 깔라야나밋따(善友)란 무엇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21. 22:08

 

 

우정(友情)에 대하여, 깔라야나밋따(善友)란 무엇일까?

 

 

 

코믹한 번역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우정에 관한 가르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좋은 친구는 어떤 친구를 말하는 것일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자네의 친구>라고 말로는 곧잘 지껄여대지만

그러나 친구를 위해서 실제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진실한 친구가 아니다. (stn253)

 

친구들에게 허풍이나 떨면서

전혀 그 말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말만 많고 행동이 없는 자>이니라. (stn254)

 

기회만 있으면 절교할 것을 생각하며

상대의 결점만을 노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참된 친구가 아니니라.

그러나 자식이 어머니에게 의지하듯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이니

이런 우정은 누구도 그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stn255)

 

(석지현스님역)

 

 

석지현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약간 코믹하다.  그것은 지껄여대지만또는 허풍이나 떨면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경전으로서 품위가 손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의미의 전달은 잘 되어 보인다. 말로만 떠들어 대며 실천을 하지 않는 친구는 진실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는 친구 또한 참된 친구가 아니라 하였다. 참된 친구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의지하듯 서로 의지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 하였다.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이번에는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Hiri taranta vijigucchamāna
Sakh
ā hamasmi iti bhāsamāna,
Sayah
āni kammāni anādiyanta
Ne so mamanti iti ta
vijaññā.

 

[세존]

“부끄러워 할 줄 알지 못하고 혐오하여

‘나는 당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도맡아 도와주지 않는 사람,

그는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stn253)

 

 

Ananvaya piya vāca yo mittesu pakubbati,
Akaronta
bhāsamāna parijānanti paṇḍitā.

 

친구들에게 실천 없이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

현명한 자들은 그를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라고 알아야 합니다. (stn254)

 

 

Na  so vitto yo sadā appamatto
Bhed
ā sakirandhameyānupassī,
Yasmiñca seti uras
īva putto
Sa ve mitto so parehi abhejjo.

 

항상 전전긍긍하며, 금이 갈까 염려하면서도,

벗의 결점만을 보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 의지하고,

타인 때문에 금가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친구입니다. (stn255)

 

(Hirisutta -부끄러움의 경, 숫따니빠따 Sn2.3, 전재성님역)

 

 

두 번역을 비교해 보면

 

석지현스님의 지껄여대지만에 해당되는 문구가 hamasmi”이다. Hamasmi‘ham+asmi’형태로서 내가 말한다의 뜻이다. Ham의 뜻이 “I say”의 뜻으로 我說, 라고도 설명 되어 있다. 그럼에도 지껄여대지만이라고 번역한 것은 지나치게 비속어를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허풍이나 떨면서에 해당하는 말이 piya vāca이다. 전재성님은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으로 번역하였다. Piya‘dear; amiable; beloved’의 뜻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실천 없이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piya vāca에 대하여 허풍이나 떨면서라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여진다.

 

말만 앞세우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친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고라 하여 직역하였다. 그러나 석지현스님은  허풍이나 떨면서라 하여 원문과는 무관하게 동떨어진 번역을 하였다.

 

엄마의 품, 아빠의 품, 부모의 품

 

세 번째 게송을 보면 석지현스님의 자식이 어머니에게 의지하듯라는 번역이 있다. 이는 “urasīva putto”에 대한 것이다. urasīva에서 ura‘the breast; chest’를 의미한다. Siva‘he God Siva’를 뜻하기도 하고, 자칼(승냥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길상(행복)의 뜻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들이 신의 품에 안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이라 하였다. 이는 석지현 스님의 자식이 어머니에게 의지하듯이라는 말과 비교 하였을 때 사용언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타닛사로빅쿠는 like a child on its parent's breast”라 하여 아이가 부모의 가슴에 의지 하는 것처럼이라 번역하였다. ‘urasīva’에 대하여 부모의 품으로 본 것이다. 법정스님은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기듯이라 하여 어머니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신의 품의 뜻하는 ‘urasīva’에 대하여 엄마의 품’, 아빠의 품, 부모의 품이라고 달리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urasīva putto”에 대하여 왜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이라 번역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Prj.II.255에 따르면,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pitu urasi putto)’의 의미로 쓰였다.(734번 각주)”라고 설명하였다.

 

좋은 친구는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친구이어야 한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번역자들은 엄마의 품, 아빠의 품, 부모의 품 이라고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의 경우 아빠의 품이라 한 것은 주석을 근거로 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마의 품이라 번역한 것은 근거가 없는 개인적 견해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았을 때 타닛사로빅쿠의  parent's breast(부모의 품)”이 가장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친구인가 동업자인가?

 

숫따니빠따에서 친구라는 말에 대하여 두 가지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Sakhā(friend)mitta(friend)가 그것이다. 똑 같이 친구라는 말이지만 Sakhā의 경우 약간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 Sakhā의 뜻이 friend의 뜻도 있지만 branch의 뜻도 있어서 ‘Companion(동료)’의 뜻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Sakhā의 뜻은 이해관계로 만나서 사귀는 동료 내지는 동업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해관계를 따진다면 결코 좋은 친구라 볼 수 없다. 지금 저 친구와 만나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를 따져서 만나려 한다면 비즈니스 관계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과 다름 없을 것이다. 진정한 친구는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들이 아빠의 품에 안기듯 의지하고라 하였다. 이런 친구에 대하여 밋따(mitta)’라 한 것이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친구를 뜻하는 밋따(mitta)’와 유사한 말이 있다. 그것은 멧따(mettā)’이다. 멧따는 ‘loving-kindness(자애)’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래서 자애경에 따르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n1.8)”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자애라는 말은 멧따(metta)의 번역어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부모처럼, 심지어 신처럼 의지할 수 있는 친구는 매우 좋은 친구라 볼 수 있다. 멧따를 뜻하는 말에는 ‘loving-kindness(자애)’이외에도 ‘amity(친선, 친목, 우호),  benevolence(자비심, 선행, 선의)’의 뜻도 있다.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의지할 수 있는 친구사이에 이해관계가 있을 수 없다. 어머니가 하나 뿐인 외아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듯이, 좋은 친구는 부모처럼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다. 이렇게 좋은 친구를 사귀어 놓으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 때 수행승 아난다가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수행승 아난다는 다가와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서 나에게 이와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Kalyāamittasutta-좋은 친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8, 전재성님역)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빠세나디왕에게 한 말이다. 아난다가 한 말을 들려 주며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한다라고 말하였다.

 

좋은 친구란?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말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빠세나디왕이 명상하다 좋은 생각이 떠 올라 부처님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친구에 대한 생각이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잘 설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가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나쁜 친구를 가진 자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나는 가르침을 잘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벗, 좋은 친구, 좋은 동료들을 위한 것이지 나쁜 벗, 나쁜 친구, 나쁜 동료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S3.18)”라고 추인하듯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Srp.I.156에 따르면, 가르침은 모두를 위하여 잘 설해졌지만, 약과 같아서 그것을 복용하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듯이 가르침은 좋은 친구를 가진 충고를 받아 들이고 믿음이 이는 사람에게만 실현된다.

(상윳따1 903번 각주, 전재성님)

 

 

약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약발이 잘 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게는 전혀 들지 않은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약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약을 먹었을 때

 

약의 비유가 앙굿따라니까야 환자경(gilānā Sutta, A3:22)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차별 없는 평등사상, 환자의 비유와 ‘환자의 경(A3:22)’(2013-07-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약의 비유를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둘째,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

셋째,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은 약발이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 어떤 가르침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 사람에 해당된다. 오염될 대로 오염된 사람이다. 마치 노자 도덕경에서 하사문도 대소지(下士聞道 大笑之)’를 연상케 한다. 도를 대하는 일반사람 중에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람은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 중에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가르침을 알려 주어도 따르지 않는 하근기의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이 있다. 이는 상근기에 해당된다. 노자 도덕경에 따르면 상사문도 권이행지(上士聞道 勤而行之)’와 유사하다. 이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한다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상근기의 수행자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이 있다. 중간층에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노자 도덕경으로 따진다면 중사문도 약존약망(中士聞道 若存若亡)’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한다.”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연이 있으면 따르지만, 인연이 없을 경우 따를 수 없음을 말한다. 중근기의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 청소년포교에 올인해야 하는가?

 

중근기의 사람들은 청소년층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청소년에게 가르침을 알려 주었을 때 받아 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가르침 자체가 있는지 조차 모를 경우 가르침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층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해당된다. 그래서 청소년과 군인들을 포교의 황금어장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타종교에서는 청소년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올인한다. 이는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 사람처럼 중간층에 있기 때문이다.

 

약의 비유로 보았을 때 포교의 대상은 명백하다. 그것은 중간층이다. 약을 주면 곧바로 약효가 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약 자체가 없을 때 효과 역시 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한구절이라도 알려 주면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하여 알려 주지 않는다면 불교라는 종교가 있는지 조차 모를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 그렇다.

 

중간의 위치에 있는 청소년과 군인들에 대하여 불교를 알려 주어야 하나 타종교에 비하여 한참 뒤진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의 스님들과 지도자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약의 비유로 보았을 때 약발이 들지 않는 사람 보다 약을 투여 하면 즉각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포교 역시 청소년과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청소년포교에 올인하는 사람들은 드믈다. 왜 그럴까?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 포교는 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이 더 들어 간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노보살에 올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돈 많은 노보살이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절에 보시하라고 말한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 주어 보았자 서로 싸우기만 할 뿐이라 한다. 서로 싸울 뿐만 아니라 제사도 모시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재산을 절에 맡기면 매번 천도재를 올려 주고 법당에서 영가에게 좋은 법문을 들려 주기 때문에 절에 재산을 맡기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한국불교에는 노보살이 많고 스님들 역시 돈 많은 노보살에 올인 하는 것 같다.

 

노보살에 올인하는 한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다. 약을 투여 하면 즉각 약발이 먹히는 청소년과 청년층에 올인해야 한다. 돈도 되지 않는 청소년 포교이지만 가르침과 인연을 맺어 놓으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오염될대로 오염이 되어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은 나이 먹은 자 보다 오염이 덜 된 청소년에 포교에 올인 하는 것이 휠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일까?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 설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셨듯이 그것은 좋은 벗, 좋은 친구, 좋은 동료들을 위한 것이지 나쁜 벗, 나쁜 친구, 나쁜 동료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S3.18)”라 하셨다.

 

이처럼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가르침은 모두를 위하여 잘 설해졌지만, 약과 같아서 그것을 복용하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듯이 가르침은 좋은 친구를 가진 충고를 받아 들이고 믿음이 이는 사람에게만 실현된다. (Srp.I.156)”라는 주석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믿고 의지할 수 있기도 하지만 충고도 해당된다. 불건전한 행위를 하였을 때 좋은 친구가 있다면 충고 해 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래서 아난다는 세존이시여, 이러한 착한 벗, 착한 친구, 착한 동료를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S3.18)”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전부론

 

그런데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였다. 좋은 친구를 가지면 절반이나 성공한 것 같다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히 부정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mā heva ānanda, mā heva ānanda, sakalameva hida ānanda brahmacariya yadida kalyāamittatā Kalyāasahāyatā kalyāasampavakatā. Kalyāamittasseta ānanda bhikkhuno pāikakha kalyāasahāyassa kalyāasampavakassa ariya aṭṭhagika magga bhāvessati2 ariya aṭṭhagika magga bahulīkarissatīti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 아난다여,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이 있는 수행승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수행승은 여덟 가지의 고귀한 길을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의 고귀한 길을 넓힐 것이다.

 

(Kalyāamittasutta-좋은 친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8, 전재성님역)

 

 

 

kalyāamitta

 

 

 

부처님이 아난다의 절반론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그것은 착한 동료를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전부라는 말은 sakalameva’를 뜻한다. sakala라는 말이 ‘whole; entire’를 의미한다. 그래서 착한 벗(kalyāamittatā), 착한 친구(Kalyāasahāyatā), 착한 동료(Kalyāamittasseta)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반이 아니라 전부라 한 것이다. 아난다의 절반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전부론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좋은 친구

 

좋은 친구는 청정한 삶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sakala)’라 하였다.이는 팔정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면 결국 팔정도의 실천의 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씀 하신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왜냐하면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 태어나야 하는 존재가 태어남에서 벗어나고 늙어야 하는 존재가 늙음에서 벗어나며 병들어야 하는 존재가 병듦에서 벗어나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에서 벗어나며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져야 하는 존재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Kalyāamittasutta-좋은 친구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라 하였다. 친구로서의 부처님을 말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하려면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살려면 가르침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좋은 친구라 볼 수 있다.

 

좋은 친구를 가지면 절반의 성공이 아니라 사실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다. 죽 그 길로 나아가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의 길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가지는 것이 인생의 절반의 성공이 아닌 인생의 전부와도 같다고 하였다.

 

깔라야나밋따(Kalyāamitta)의 의미는?

 

경의 제목은 Kalyāamittasutta’이다. 여기서 ‘Kalyāamitta’라는 빠알리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좋은 친구라 번역하였다. 초불연 각묵스님 역시 좋은 친구라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좋은 친구라는 뜻의 Kalyāamitta는 어떤 의미일까?

 

좋은 친구의 경(S3.18)’과 유사한 경이 있다. 절반의 경(S45.2)이다. ‘좋은 친구의 경(S3.18)’에서는 대화상대가 빠세나디왕이지만, 절반의 경(S45.2)에서는 아난다이다. 경의 내용은 거의 같다. 절반의 경에서 Kalyāamitta에 대하여 설명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lyāamittatā Kalyāasahāyatā kalyāasampavakatā : 세 가지는 동의어이다. Cdb.1890에 따르면 ‘kalyāamito bhikkhu’를 리스 데이비즈는 정의로운 친구인 수행승’, 우즈워드의 사랑스런 친구인 수행승’, 이어랜드는 선한친구의 수행승으로 각각 번역했는데, 모두 복합어애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kalyāamito’는 독립적인 단어로서 충고와 인내와 용기를 주는 영적인 친구를 말한다. 한역에서는 선우라고 번역한다.

 

(상윳따5 9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 따르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kalyāamittatā Kalyāasahāyatā kalyāasampavakatā”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모두 같은 말이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벗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말이 그 말처럼 보인다. 그래서 세 가지 단어에 대하여 동의어라 하였다.

 

충고와 인내와 용기를 주는 영적인 친구

 

세 단어어 공통으로 들어 가 있는 ‘Kalyāa’의 뜻은 ‘charming; morally good. (nt.), goodness; merit; virtue; welfare’의 의미이다. kalyāamitta‘a good companion; honest friend’라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충고와 인내와 용기를 주는 영적인 친구라고 정의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경에서 언급된 좋은 친구는 친구이상이라 볼 수 있다.

 

친구도 친구나름일 것이다. 어떤 친구는 노는데 도움이 되는 친구가 있을 수 있고, 일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다방면에 친구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분야에 아는 사람이 많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친구가 많다고 모두 다 좋은 친구일까? 이해관계를 따진다면 친구라 볼 수 없다. 대게 사회친구는 이득을 목적으로 사귀기 때문에 이득이 되지 않으면 더 이상 친구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친구는 만날 때 뿐이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친구는 오래 지속된다. 학교친구가 대표적이다. 또 종교로 만난 친구도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친구는 부모처럼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가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수십명, 수백명의 친구를 가진 것 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를 갖는 것에 대하여 인생의 전부라 하였다.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처님은 이에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서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 하셨다. 좋은 친구는 인생의 전부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청정한 삶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 없다. 좋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 길은 팔정도의 길이다. 팔정도의 길로 죽 가다 보면 청정한 삶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좋은 친구(kalyāamitta)충고와 인내와 용기를 주는 영적인 친구라 한다.

 

 

 

 

2014-11-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