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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를 위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11. 19:27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를 위하여

 

 

 

기대수명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근 발표된 뉴스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1.9세이다. 이런 추세라면 백세시대도 머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오래 산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수명을 백세로 한 이야기가 종종 보인다.

 

할머니의 죽음

 

상윳따니까야 꼬살라상윳따 할머니의 경에 따르면, 빠세나디 왕의 할머니는 120세 죽었다. 이에 대하여 빠세나디는 부처님에게 할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비통해 하는 말을 한다.

 

 

[빠세나디]

 

세존이시여, 나의 할머니는 대단히 나이가 많은 노부인으로 인생의 여정을 지나서 그 종착에 이르러 나이 백 이십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나에게 할머니는 몹시 사랑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내가 값비싼 코끼리를 주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게 할 수 있었다면 나는 값비싼 코끼리를 주어서 할머니를 돌아가시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Ayyakāsutta-할머니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2, 전재성님역)

 

 

 

빠세나디 왕이 할머니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어머니가 죽은 후 할머니가 빠세나디 왕을 키웠다.(Srp.I.1630”라 되어 있다. 낳은 정 보다 기른 정이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므로 할머니를 마치 어머니처럼 여긴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더 오래 살기를 바랐으나 120세에 죽은 것이다.

 

할머니는 살 만큼 살다가 죽은 것이다. 수명대로 산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의 행복이 궁극적으로 ()’()’이라 할 때 할머니는 수와 복을 모두 누린 것이다. 어쩌면 천상과도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당위성에 대하여

 

수와 복을 누린 빠세나디의 할머니는 사실상 행복한 죽음을 맞이 한 것이다. 그럼에도 빠세나디왕이 값 비싼 코끼리를 주어서라도, 아니 성을 하나 통째로 주는 한이 있더라도 살리고 싶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빠알리어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Sabbe sattā mahārāja, maraadhammā maraapariyosānā maraa anatītāti.

 

[세존]

대왕이여,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중생은 죽기마련인 법이고 죽음으로 끝이 나며 죽음을 건너지는 못합니다.”

"All beings, great king, are subject to death, terminate in

death, and cannot escape death."

(Ayyakāsutta-할머니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죽음의 당위성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어떤 존재도 한번 태어난 이상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번역어 뭇삶에 대하여

 

빠알리어 삽베삿따(sabbe sattā)’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뭇삶이라 번역하였다. 뭇삶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수효가 매우 많다는 이라는 말과, 사는 일 또는 목숨, 생명이라는 뜻의 이 결합되어 뭇삶이라 하였는데, 이는 전재성님이 빠알리니까야 번역을 위하여 만든 신조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이 번역한 번역서에서는 초지일관 삽베삿따에 대하여 뭇삶이라 번역하여 놓았다.

 

sabbe sattā모든 생명이 있는 것의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모든 중생이라 번역하였다. Sattā에 대하여 한자문화권에서는 중생이라 번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빅쿠보디는 ‘All beings’라 하여 모든 존재들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네 갈래 태어남 ---

 

초기불교에서는 sabbe sattā에 대하여 삼계에 있는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초목에 대하여 삿따로 보지는 않는다.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물을 삿따로 보는 것이다. 이는 태생, 난생, 습생, 화생으로 요약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제도할 대상으로서 삼계의 ---를 들고 있다. 그런데 태란습화이야기는 빠알리니까야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생명의 경이로움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화생(化生: opapatika yoni)(2014-11-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에서 태란습화에 대한 것을 보면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sedajā yoni, opapātikā yoni, M12)”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금강경에서 보는 태란습화 이야기의 오리지널 버전은 빠알리니까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담마(dhammā)의 번역어에 대하여

 

할머니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빠세나디 왕에게, 부처님은 “Sabbe sattā maraadhammā”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라 하였다. ‘maraadhammā’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라 번역한 것이다. maraadhammāmaraa+dhammā이기 때문에 담마(dhammā)’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모든 중생은 죽기마련인 법이고라 하여, ‘담마(dhammā)’에 대하여 이라 번역하였다. 죽어야 하는 것도 으로 본 것이다.

 

빅쿠보디는 All beings are subject to death”라 하여 모든 존재들은 죽음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빅쿠보디의 번역원칙에 벗어난다. 빅쿠보디는 ‘cdb’ 해제글에서 담마에 대해서는 ‘dhamma’로 번역함을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담마라고 하였을 때 그만한 충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teaching(가르침)’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인  ‘dhamma’로 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빅쿠보디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초불연에서도 청정도론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이 담마라고 한 것은 그만한 충분한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함부로 바꾸어 번역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래서 담마에 관해서는 한자어 으로만 번역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을 보면 모든 중생은 죽기마련인 법이고라고 하여 담마에 대하여 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담마라는 단어에 대하여 문맥에 맞게 탄력적으로 적용하여 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라 하였다.

 

이렇게 담마에 대하여 여러 의미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담마라는 말이 매우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아스님의 글에 따르면 담마의 넓은 의미로는 바른행동, 도덕적 행위, 도덕적 가르침, 우주적인 법칙, 교리, 상태, 도덕적 행위, 현상, 정의, 대상, 개념, 진리, 바른 길, 교훈, 성질, 조건, 요소, 본성 등 다양하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부록)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저~ 거시기, 거시기 말여~”담마(dhamma) 법(法)(2012-12-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담마라는 말에 대하여 단지 한자어 법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모든 번역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옹기의 비유

 

할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빠세나디 왕에게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죽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대왕이여,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Seyyathāpi mahārāja, yāni kāni ci kumbhakārabhājanāni āmakāni ceva pakkāni ca, sabbāni tāni bhedanadhammāni bhedanapariyosānāni bhedana anatītāni.

 

[세존]

대왕이여, 마치 옹기장이가 만든 옹기는 구워지지 않은 것이든 구워진 것이든 어떤 것일지라도 그 모두가 부서져야 하는 것이고 부서짐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부서짐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Ayyakāsutta-할머니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옹기의 비유를 들고 있다. 도공이 옹기를 흙을 빚어 옹기를 만들 때 정성을 다 한다. 물레를 돌려 만든 옹기는 도중에 잘 못 되면 버려 진다. 가마에 들어 갔다 나왔다고 하더라도 도공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뜨려진다. 옹기가 설령 상품화 되어 팔려 나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부서지게 되어 있다.

 

숫따니빠따에도 옹기의 비유가

 

옹기는 만들어질 때부터 언젠가는 부서질 운명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뭇삶 역시 언젠가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도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stn577)”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은 옹기의 비유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는 옹기의 비유 뿐만 아니라 과일의 비유도 있다. 그래서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stn576)”라 하였다.

 

번역비교를 보면

 

할머니의 경에서는 두 개의 게송이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뭇삶의 운명에 대하여 게송으로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번역비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bbe sattā marissanti

maraanta hi jivita,

Yathākamma gamissanti

puññapāpaphalūpagā,

Niraya pāpakammantā

puññakammā ca suggati.

 

Tasmā kareyya kalyāa

nicaya samparāyika,

Puññāni paralokasmi

patiṭṭhā honti pāinanti.

 

 

[세존]

모든 삶은 죽음에 이르네.

삶은 그 끝을 죽음으로 삼으니

행위를 하는 그대로 좋고

나쁜 과보를 받으니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가네.

 

오로지 착한 일을 해서

미래를 위해 공덕을 쌓아라.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

 

(전재성님역)

 

 

모든 중생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목숨이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

업에 따라 중생들은 제각각 갈 것이니

공덕과 사악함의 결실대로 가리라.

악업 지은 중생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고

공덕 지은 중생들은 선처로 가리로다.

 

그러므로 유익함[]을 지어야 하나니

이것이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어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 모든 존재에게는

공덕이 저 세상에서의 기반이로다.”

 

(각묵스님역)

 

 

"All beings will die,

For life ends in death.

They will fare according to their deeds,

Reaping the fruits of their merit and evil:

The doers of evil go to hell,

The doers of merit to a happy realm.”

 

"Therefore one should do what is good

As a collection for the future life.

Merits are the support for living beings

[When they arise] in the other world."

 

(빅쿠보디역)

 

(Ayyakāsutta-할머니의 경, 상윳따니까야 S3.22)

 

 

 

부처님은 옹기의 비유를 들면서 선행공덕을 쌓을 것을 말씀 하셨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야 함을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공덕행을 강조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빠세나디가 재가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차제설법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근기에 맞추어 차례대로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한다. 재가자나 초심자에게는 믿음과 지계와 보시를 강조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가르침을 편 것도 차제설법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빠세나디 왕에게 어려운 법문 보다 선행공덕을 쌓으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가네. (Niraya pāpakammantā  puññakammā ca suggati)라 한 것이다.

 

빠빠(papa)와 뿐냐(puñña)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빠빠(papa)와 뿐냐(puñña)가 보인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나쁜 일좋은 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악업공덕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evil’‘merit’로 번역하였다.

 

빠빠(papa)와 뿐냐(puñña)라는 용어는 빠알리니까야에 수 없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악행공덕행으로 번역 된다. 이에 대하여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가(2014-12-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초기경전에서 악행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고, 공덕행을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 (sukho puññassa uccayo, Dhp118)”악이 쌓이면 고통스럽다. (dukkho pāpassa uccayo, Dhp117)”라는 문구에서도 확인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재가자나 초심자에게 차제설법을 할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가 빠빠와 뿐냐이다.

 

뿐냐(puñña)와 꾸살라 (Kusala)

 

공덕행을 뜻하는 뿐냐와 함께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선()을 뜻하는 꾸살라 (Kusala)’가 있다. 그러나 뿐냐와 꾸살라는 뉘앙스가 다르다. 뿐냐가 천상에 나기를 바라면서 스님에게 공양을 하는 등 모종의 장기적 기대를 하는 선행이라면, 꾸살라는 깨달은 사람의 건전하고 지혜로운 행동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꾸살라가 뿐냐 보다 더 수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난해한 번역

 

두 번째 게송은 뿐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번째 구절을 보면 “Tasmā kareyya kalyāa nicaya samparāyika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오로지 착한 일을 해서 미래를 위해 공덕을 쌓아라.”라고 번역하였다. 착한 일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kalyāa이다. 이는 ‘charming; morally good. (nt.), goodness; merit; virtue; welfare’의 뜻이다. 도덕적 삶을 뜻한다. 그래서 “Tasmā kareyya kalyāa구절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한다라는 뜻이 된다. 다음 구절을 보면 “nicaya samparāyika라 하였는데 이는 저 세상에 속하기 위하여 쌓는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Tasmā kareyya kalyāa nicaya samparāyika의 의미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며, 저 세상에 가기 위하여 쌓으면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그러므로 유익함[]을 지어야 하나니 이것이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어라라 되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특히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어라라고 번역한 것은 어떤 근거로 번역하였는지 알 수 없다. 빠알리 원어에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Tasmā kareyya kalyāa nicaya samparāyika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Therefore one should do what is good As a collection for the future life.”라 번역하였다. 이를 직역하면 그러므로 그는 미래를 위한 더미로서 선을 행해야만 한다가 된다. 여기서 ‘a collection’이라 한 것은 빠알리어  ‘nicaya(accumulation; heaping up)’에 대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저 세상을 위한 무더기를 말한다. 그것을 공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의 번역은 비교적 빠알리원어에 충실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그러므로 유익함[]을 지어야 하나니 이것이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어라라 한 것은 원어에 없는 말로서 대단히 난해하다.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라 하였을 때 어떤 근거로 번역하였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번역어 중에 그러므로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용어는 시어로서 적합하지 않다. 시어는 고도의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라든가 이것이라는 접속어는 부적합하다. 아마 빅쿠보디의 영역에서 ‘Therefore’를 참고하여 그러므로라고 번역한 듯 하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가지 않은 말은 이것이 존재들의 미래의 자신이어라라는 번역이다. 대체 이 번역은 어떤 근거로 번역하였으며 그 뜻은 무엇일까? 아무리 보아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난해한 번역이다.

 

죽음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

 

부처님은 빠세나디 왕에게 공덕행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왕에게 옹기의 비유를 들며 결국 부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상기시켜 주면서, 살아 있을 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여 천상에 나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초심자나 재가자 등에게 적합한 가르침이다.

 

옹기의 비유는 숫따니빠따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슬픔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해법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숫따니빠따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stn581)”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할머니를 잃어 슬퍼하는 빠세나디 왕에게는 공덕행을 닦아 천상에 나는 가르침을 설하였다. 그러나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에서는 천상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옹기의 비유를 하였지만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왜 엇박자가 날까?

 

세월호사건이 일어난지 8개월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다. 이에 학생측의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혀 내고자 한다. 그러나 같은 유가족이라도 일반유가족은 태도가 다르다. 오히려 학생유가족의 활동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이는 죽음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는다고 한다. 이런 원리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도 그대로 들어 맞는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엄마 아빠 들은 진실규명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이다. 그래서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모나 형제를 잃은 유가족들은 학생유가족과는 달리 엇박자를 낸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가슴에 묻었기 때문에 죽을 때 까지 안고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식이 죽는 순간 부모도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매우 비통해 하는 것이다.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재가신자가 아들이 죽어서 슬픈 나머지 일주일간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부처님은 그 재가신자의 집으로 가서 이 경을 설했다.(Prj.II.457)”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빠세나디 왕과는 다른 케이스임을 알 수 있다.

 

빠세나디 왕은 할머니가 죽었다. 그래서 옹기의 비유를 들며 공덕행을 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법문을 하였다. 그러나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에서는 자식이 죽어 비통해 하는 재가신자를 위하여 법문하였다. 이렇게 죽음의 성격이 다르다 보니 법문 역시 전혀 다른 법문이 되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를 위하여

 

이런 차이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자식을 가슴에 묻은 자와 부모를 산에 묻은 자의 차이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을 가슴에 묻은 자에 대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1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2.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3.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4.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5.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6.

죽음에 패배 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지들도 그가 아는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7.

친지들이 지켜보지만,

보라 매우 애통해하는 자들을!

죽어야 하는 자들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갑니다.

 

8.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9.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10.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1.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12.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죽은 자들을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비탄해 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13.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14.

또한 스스로 지은 업으로 인해

태어날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죽음에 정복당해

전율하고 있는 뭇 삶들을 보십시오.

 

15,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그 생각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떠남도 이와 같으니,

저 자연의 이치를 보십시오.

 

16.

가령 사람이 백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을 떠나

이 세상의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17.

그러므로 거룩한 님에게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18.

보금자리에 불난 것을 물로 꺼버리듯이,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사람이라면,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19.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탐욕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20.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자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2014-12-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