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요니소마나시까라(如理作意)’와 오장애의 극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29. 18:47

 

요니소마나시까라(如理作意)’와 오장애의 극복

 

 

 

올가미

 

부처님의 전도선언으로 유명한 경이 있다. ‘빠사경(pāsasutta)’이라 한다. 여기서 빠사(pāsa)라는 말은 올가미를 뜻한다. 영어로는 ‘a sling; a snare; a button hole’의 뜻이다. 빅쿠보디는 ‘Māra's Snare’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마라의 올가미 경이라 하였다.

 

올가미는 새끼나 노, 철선 따위로 고를 맺어 짐승을 잡는 기구를 말한다. 사냥꾼이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올가미를 설치 해 놓았을 때 이를 모르고 지나다니는 짐승이 걸려 들면 빠져 나가지 못한다. 꼼짝 없이 잡히게 되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들어 있는 경에서 제목을 왜 올가미라 하였을까?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상윳따니까야에는 빠사경(pāsasutta)이 두 개가 있다. 빠사경1과 빠사경2를 말한다. 그런데 빠사경1에 따르면 한때 세존 께서는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S4.4)”라고 경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사빠따나(isipatana)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지이다. 오늘날 불교의 사대성지 중의 하나인 사르나트를 말한다. 그런데 이시빠따나에서도 미가다야(migadāya)라 하였다. 미가다야는 한역으로 녹야원이라 한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장소에 세워진 승원을 말한다.

 

 

 

 

 

빠사경에서는 부처님이 계셨던 장소가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경에 따르면 그 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S4.4)”라고 되어 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āsasutta 1(S4.4)

  

빠알리어

Mayha kho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yoniso sammappadhānā anuttarā vimutti anuppattā, anuttarā vimutti sacchikatā. Tumhepi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yoniso sammappadhānā anuttara vimutti anupāpuātha. Anuttara vimutti sacchikarothāti.

yoniso manasikārā

전재성님역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여 위없는 해탈에 이르렀으며 최상의 해탈을 증득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여 위없는 해탈을 이르러야 하며 최상의 해탈을 증득해야 한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각묵스님역

비구들이여, 나는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지혜롭고 바르게 노력하여 위없는 해탈을 증득하였고 위없는 해탈을 실현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지혜롭고 바르게 노력하여 위없는 해탈을 증득하 위없는 해탈을 실현하도록 하라.”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빅쿠보디역

“Bhikkhus,  by careful  attention,  by careful right  striving,  I have  arrived at unsurpassed liberation, I have  realized unsurpassed liberation. You too,  bhikkhus, by  careful  attention, by careful  right striving,  must arrive  at unsurpassed  liberation, must realize unsurpassed liberation.”

careful  attention

 

 

 

 

 

빅쿠보디는 왜 “it seems”라 하였을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해탈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is discourse is  also  at Vin I  22,24-36,  set  soon  after  the

Buddha's first  rains  residence  at the  Deer Park in  Isipatana.

 

The  Buddha had  already  sent out his first sixty arahant disciples to  spread  the  Dhamma.  The  present admonition, it seems, is addressed to the newly ordained bhikkhus who had come to the Buddha in response to the

missionary work of the first disciples.

 

(CDB 269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이 교설은 율장1 22페이지와 24-36페이지에도 실려 있는 것이라 한다. 경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율장에도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설이 부처님의 첫번째 우기가 끝난 후 말씀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은 부처님이 담마를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이미 60명의 아라한을 내 보내고 난 후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새로 들어 온 새내기 수행승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it seems(~로 보인다)”라 하여 추측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세존께서는 그 안거에서 이미 60명의 아라한을 배출하셔서 법을 전파하도록 내 보내셨다. 본경은 이들 60명의 비구들에 교화되어서 세존을 친견하러 온 신참 비구들에게 설하신 것인 듯하다.(초불상윳따1, 451번 각주)”라 하였다. 빅쿠보디의 설명과 거의 같다. 더구나 설하신 것인 듯하다.”라 하였는데 이는 빅쿠보디가 “it seems(~로 보인다)”와 일치한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육십명의 아라한을 처음 파견한 뒤에 새로 입문한 수행승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 것이다라 하였다.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이 “~인듯하다라고 한 것과 대조적이다.

 

율장대품과 비교해 보니

 

상윳따니까야 빠사경1의 각주에 따르면 새내기 수행승들에 대한 교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빠사경2에서는 유명한 전도선언이 나온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60명의 아라한에게 전도할 것을 명한 것이 빠사경1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빠사경 2에 전도선언이 있고, 빠사경1에서는 새내기 수행승을 대상으로 한 교설이다. 왜 이렇게 구성되어 있을까?

 

율장대품에도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빠사경과 거의 유사한  두 개의 경이 있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Marakatha1)’악마에 대한 이야기 2(Marakatha2)’이다. 그런데 순서를 보면 상윳따니까야와 반대로 되어 있다. 율장대품에서는 전도선언이 실려 있는 경이 앞서 나오고, 후에 새내기 수행승에 대한 교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까야 번역서에는 이런 사실이 각주에 표기 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율장대품의 순서가 맞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60명의 아라한에게 전도선언을 하여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라고 내 보내고 난 다음, 새로 입문한 수행승들을 대상으로 설한 것이 율장대품에서 악마에 대한 이야기 2(Marakatha2)’이다.

 

 

악마 빠삐만이 게송으로 말하기를

 

상윳따니까야에서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1(Pathamamarapasasutta, S4.4)’은 율장대품에서는 두 번째 경에 해당된다. 새내기 수행승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이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해탈해야 함을 말씀 하시자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 면전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pāsasutta 1(S4.4)

  

빠알리어

Baddho'si mārapāsena

ye dibbā ye ca mānusā,
Mārabandhanabaddhosi

na me samaa mokkhasīti.

samaa

전재성님역

[빠삐만]

그대 악마의 올가미에 묶였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그대 악마의 올가미에 묶였네.

수행자여, 그대 내게서 벗어나지 못했네.”

수행자여

각묵스님역

그대는 인간과 천상에 있는

마라의 올가미에 걸렸도다.

사문이여, 그대는 마라의 속박에 걸렸나니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다.”

사문이여

빅쿠보디역

“You are bound by Mara's snare

Both celestial and human;

You are bound by Mara's bondage:

You won't escape me, ascetic!”

You

 

 

 

 

 

내가 그를 막아야겠다?

 

빠삐만이 부처님 면전에서 왜 이 게송을 읊었을까?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pk: Mara approached and spoke, thinking:  “He won't be satisfied that he himself put forth energy and attained arahantship. Now he is eager to get others to attain it. Let me stop him!”

 

(CDB 271번 각주, 빅쿠보디)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의 각주의 내용과 거의 같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마라는 이 사문은 자기 혼자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증득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를 막아야겠다.’라고 생각하여 세존께 다가가서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S.A.i.171)

(초불 상윳따1 454번 각주, 각묵스님)

 

 

빠삐만이 게송을 읊기 전에 부처님 면전에 나타났다. 그 때 부처님은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여리작의하여 해탈해야 함을 강조 하였다. 그런데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수행자여(samaa)”라고 말하며 자신의 올가미에서 빠져 나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Let me stop him! (내가 그를 막아야겠다)”라 하여 빠삐만의 생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각주는 경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각주 하지도 않았다.

 

빠삐만이 부처님에게 사문이여라 하였다. 이는 일개 수행자로 간주 하여 낮추어 본 것이다. 그러면서 악마의 올가미에 걸렸으므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빠삐만이 착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이미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여 아라한이 되었고, 60명의 수행승들도 아라한이 되어 널리 법을 펼치려고 떠났다. 그런데 뜬금 없이 빠삐만이 수행자여, 그대 내게서 벗어나지 못했네(na me samaa mokkhasī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마라는 이 사문은 자기 혼자 정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증득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를 막아야겠다.’라고 생각하여 세존께 다가가서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S.A.i.171)하였는데, 이는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이다.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

 

빠삐만이 수행자여, 그대 내게서 벗어나지 못했네(na me samaa mokkhasīti.)”라 한 것은 부처님이 해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를 말한다. 이는 해탈을 뜻하는 mokkha 앞에 부정어 ‘na’‘na mokkhasīti’가 되면 해탈하지 못하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빠삐만의 착각일 수도 있고 상황파악이 덜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려 준다.

 

 

  

pāsasutta 1(S4.4)

  

빠알리어

Muttoha mārapāsena

ye dibbā ye ca mānusā,
Mārabandhanamuttomhi

nihato tvamasi antakāti.

antakā

전재성님역

[세존]

나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나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네.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

죽음의 신이여

각묵스님역

나는 인간과 천상에 있는

마라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도다.

나는 마라의 속박에서 벗어났나니

끝장을 내는 자여, 그대가 패했도다.”

끝장을 내는 자여

빅쿠보디역

“I am freed from Mara's snare

Both celestial and human;

I am freed from Mara's bondage:

You're defeated, End-maker!”

End-maker!

 

 

 

 

죽음의 신과 끝장 내는 자

 

부처님은 빠삐만에게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nihato tvamasi antakāti)”라 하였다. 여기서  안따까(antakā)‘[m.] the Death’의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 ‘being at the end’ 또는 ‘making an end’의 뜻이다. ‘끝을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End-maker’라 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빅쿠보디와 같이 끝장을 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죽음의 신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게송에서 마라는 말이 있음에도 끝을 만드는 자의 뜻인 ‘antakā’라 하였을까? 이는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라 본다. 먼저 게송에서 빠삐만이 부처님에 대하여 사마나(samaa)’라 불렀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깨달은 자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일부러 낮추어 부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에 대하여 여러 수행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여 수행자(samaa)”라 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게송에서 ‘antakā’라 하였다.

 

게송에서는 악마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인 마라라 하지 않고 끝장을 내는 자의 뜻인 ‘antakā’라 한 것이다. 마치 장군멍군 하는 식이다. 그래서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빠삐만이 수행자라 한 것에 대응하여 끝장을 내는 자의 뜻으로 번역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비록 빠삐만이 부처님을 낮추어서 수행자여라 했을 지라도 격식을 갖추어 품위 있게 죽음의 신이여라 번역한 것으로 본다.

 

올가미란 어떤 뜻일까?

 

부처님은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올가미란 어떤 뜻일까?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Mara's snare (mārap pāsa) is the snare of the defilements(cdb 272번 각주)”라 하였다. ‘오염원에 대하여 올가미로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the celestial and human cords of sensual pleasure(하늘과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줄)”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천상이나 인간에 있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guna‘virtue; quality; a cord or string; a bow-string’의 뜻이다. 여러 가지 뜻 중에서 ‘cord’‘string’의 뜻에 가깝다. 마치 기타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kama-guna에 대하여 ‘cords of sensual pleasure(감각적 쾌락의 줄들)’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전재성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종류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라 하였다. 눈과 귀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즐기는 오욕락을 말한다.

 

그러나 주석에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라고 풀이 해 놓은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올가미를 뜻하는 pāsen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 snare of the defilements’라 하여 오염원들의 올가미의 뜻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오염원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탐욕, 성냄, 해태, 혼침, 의심 등을 말한다. 빅쿠보디가 참고하라는 경에 따르면 오장애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는 눈, , 코 등의 오욕락에 대하여 올가미로 본 것이다. 더구나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라 하였다.

 

여기서 대괄호로 설명한 것은 주석의 원문에 없는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kama-guna 에 대괄호를 빼 버리면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 된다. 이는 어법에 맞지 않는 어색한 말이 된다.

 

각묵스님이 말하는 가닥은 아마 스트링이나 코드 개념일 것이다. 마치 현악기에 다섯 개의 줄이 있다면 이를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으로 보아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kama-guna에 대하여 오욕락의 뜻으로 설명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 그런가?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ā)

 

부처님은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 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여 위없는 해탈을 이르러야 하며 최상의 해탈을 증득해야 한다.(S4.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는 말이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ā)’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Spk: Careful attention (yoniso manasikārā) is attention that is the right means  (upāya manasikārā). Careful right striving (yoniso sammappadhāna) is  energy that is the right means, energy that  is  the  causal basis  (upāyaviriya  kāraaviriya).

 

Unsurpassed liberation  (anuttaravimutti) is liberation  of the fruit  of  arahantship.  On the  role  of  careful attention,  see 46:51.  Right  striving is  the fourfold  right  effort;  see  45:8, 49:1.

 

(CDB 270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주석을 인용하여 ‘yoniso manasikārā’에 대하여 Careful attention’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라 하였다.

 

잡도리한다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선가에서 선승들이 화두를 들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번역서에서 선가에서만 통용되는 말을 번역어로 채택한다는 것은 사전을 다시 한번 열어 보게 하는 불편을 초래 하게 만든다.

 

참고하라는 경을 보니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개인적인 견해를 실었다, 그것은 “Unsurpassed liberation  (anuttaravimutti) is liberation  of the fruit  of  arahantship”라는 말이다. 최상의 해방은 아라한과의 증득에 따른 해방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yoniso manasikārā),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는 것(yoniso sammappadhāna) 으로부터 최상의 해탈(anuttaravimutti) 이 성취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46:5145:8, 49:1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빅쿠보디의 설명대로 46:5145:8, 49:1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는 것(yoniso sammappadhāna)’에 대한 경은 S46:51이 아니라 S49:1이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yoniso manasikārā)’S49:1이 아니라 S46:51이다.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는 것(yoniso sammappadhāna)

 

먼저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는 것(yoniso sammappadhāna)’에 대한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승이

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하고 불건전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

2)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

3) 아직 생겨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

4)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은 이와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갠지스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나아가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이 수행승은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고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을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간다.

 

(동쪽으로의 경1, 상윳따니까야 S49.1, 전재성님역)

 

 

사정근에 대한 것이다.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사정근에 해당된다. 이렇게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마치 갠지스강이 동쪽으로 흘라가 바다에 도달하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올바로 노력하면 마침내 열반에 도달할 것이라 하였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yoniso manasikārā)

 

다음으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yoniso manasikārā)’에 대한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가 자양분인가 자양분이 아닌가에 대하여 설할 것이니 그것을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1)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매혹적인 인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자주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생겨나게 하거나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증가시키고 확대시키는 자양분이다.

 

(자양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1, 전재성님역)

 

 

요니소 마나시까라의 대상에 대하여 오장애칠각지를 들고 있다. 여기서 오장는 감각적 쾌락, 악의,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회의적 의심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오장애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경을 근거로 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다섯가지 장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

1

감각적 쾌락

부정의 인상

2

악의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

3

해태와 혼침

시작의 요소, 노력의 요소, 용맹의 요소

4

흥분과 회한

마음의 안정

5

회의적 의심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

비난 받아야 할 것과 비난 받을 수 없는 것,

열등한 것과 수승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첫 번째 항의 감각적 쾌락에 대하여 부정의 인상(asubhanimitta)’에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면 극복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정의 인상은 십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등 열 가지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부정상 학습, 부정에 대한 수행에 몰두, 감각능력에 대한 감관의 수호, 음식의 양을 아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을 포기 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두 번째 항의 악의에 대한 것을 보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라 하였다. 성냄이나 악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자애의 마음을 개발로 가능함을 말한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자비상의 학습, 자비에 대한 수행에 몰두, 행위에 대한 책임의 관찰, 자주 성찰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세 번째 항의 해태와 혼침에 대하여 시작의 요소, 노력의 요소, 용맹의 요소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과식을 하지 말 것, 자세를 변화시킬 것, 빛에 대한 자각의 정신활동, 야외에서 지내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서 야외에서 지내는 것이 있다. 이는 방에서 지내는 것 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방에서 참선만 하면 졸음으로 인하여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럴 때 야외에 있다면 해태나 혼침은 사라질 것이다.

 

네 번째 항을 보면 흥분과 회한에 대하여 마음의 안정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성숙한 사람을 섬김,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 흥분과 회한에 효과적이라 하였다.

 

다섯 번째 항의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는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 비난 받아야 할 것과 비난 받을 수 없는 것, 열등한 것과 수승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자주 결정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면 회의적 의심이 버려 질 수 있다고 하였다.

 

오장애를 극복 하는 방법

 

이와 같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여 오장애를 극복 하는 방법이다. 이를 다시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No

다섯가지 장애

극복 하는 방법

1

감각적 쾌락

부정상 학습, 부정에 대한 수행에 몰두, 감각능력에 대한 감관의 수호, 음식의 양을 아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

2

악의

자비상의 학습, 자비에 대한 수행에 몰두, 행위에 대한 책임의 관찰, 자주 성찰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

3

해태와 혼침

과식을 하지 말 것, 자세를 변화시킬 것, 빛에 대한 자각의 정신활동, 야외에서 지내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

4

흥분과 회한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성숙한 사람을 섬김,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

5

회의적 의심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자주 결정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

 

 

 

표를 보면 다섯 가지 오장애를 극복하는 항목중에서 공통적으로 들어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좋은 친구를 갖는 것과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S3.18)”라 하였다.

 

죽음의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빅쿠보디가 요니소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참고하라는 경을 찾아 보았다. 오장애 극복에 대한 것이다. 물론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요니소마나시까라 함에 따라 수호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등 일곱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수호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는 시각,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요니소 마나시까라의 대상은 각묵스님이 각주한대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kama-guna)’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한정적이다. 오장애에 따르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포함하여 악의,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회의적 의심 등 다섯 가지 오염원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것(yoniso manasikārā)’의 대상은 사실상 모든 오염원이 된다.

 

부처님은 올가미의 경에서 입문한 수행승들에게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게 노력을 기울여 위없는 해탈을 이르러야 하며 최상의 해탈을 증득해야 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하였을 때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때 악마의 올가미는 다름 아닌 오장애와 같은 오염원이다. 오염원에서 벗어 났을 때 끝장을 내는 자, 즉 죽음의 신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2014-12-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