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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때도 알아 차리면서, 붓다(Buddha)의 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3. 22:04

 

 

잠을 잘 때도 알아 차리면서, 붓다(Buddha)의 수면

 

 

 

부처님은 어떻게 잠을 잤을까?

 

부처님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잤다. 돌에 맞으면 아픔을 느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으로서 부처님은 어떻게 잠을 잤을까? 이에 대하여 최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Atha kho bhagavā bahudevaratti ajjhokāse cakamitvā rattiyā paccūsasamaya pāde pakkhāletvā vihāra pavisitvā dakkhiena passena sīhaseyya kappesi, pāde pāda accādhāya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 manasi karitvā.

 

그 때 세존께서는 한밤중에 기나긴 밤을 바깥에서 산책한 뒤에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승원으로 오셨다. 발을 씻은 뒤에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oppasisutta-잠을 자는가의 경, 상윳따니까야 S4.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자는 모습은 마치 사자가 자는 것 같다. 옆으로 잠을 자는 것을 말한다.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한다는 것으로 보아 오른쪽으로 기울어 잠을 잔 것이다. 일반사람들처럼 큰 ()’자 모양으로 잠을 자지 않고 옆으로 잠을 자는 것이다.

 

알아차리면서 잠을 잔다

 

그런데 잠을 잘 때 알아차리며 잤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sato sampajāno)”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正念正知]”라 하였다.

 

또 부처님은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uṭṭhānasañña manasi karitvā)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dakkhiena passena sīhaseyya kappesi, pāde pāda accādhāya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 manasi karitvā: 부처님은 특별한 시간에 다시 일어날 것을 의도하고 잠드셨다.

 

(성전협 상윳따1 1027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함 없이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래서 특별한 시간에 다시 일어날 것을 의도하고 잠드셨다.”라고 하였다. 초불연과 CDB에서는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주석서에 주석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왜 특별한 시간에 다시 일어날 것을 의도하고 잠드셨다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일과를 알 필요가 있다.

 

부처님의 하루일과

 

부처님의 일과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있었다. 개정판 이전의 초판의 해제글에서이다. 그러나 개정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일과에 대하여 부처님의 하루일과(2012-10-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개정판에는 보이지 않지만 초판에 실려 있었던 부처님의 일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오전 6시에서 12시까지는 하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뭇삶을 도와주고 탁발하고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12시에서 오후 6시까지는 대자비삼매(大慈非三昧mahākaruā samā-patti)에 들어 수행승이나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그들을 돕거나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오후의 수면에 들기도 하고 일반사람들을 제도하거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초저녁인 오후 6시에서 밤 10시까지는 수행승들이 방문하면 친견을 허락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밤중인 밤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는 하늘사람이나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제도했다.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경행(經行)을 하였으며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는 마음새김을 하며 취침했다.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는 열반에 들어 아라한의 경지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는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펴보았다.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전재성님)

 

 

부처님의 일과를 보면 일정이 매우 타이트함을 알 수 있다. 마치 주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시간관리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처님은 인간 뿐만 아니라 천상의 존재들도 교화 하였기 때문이다.

 

심야에는 천상의 존재들과 대화하며

 

부처님은 한밤중인 10시에서 2시까지 하늘사람이나 악마 등 초월적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는 하늘사람이나 하늘아들과의 대화장면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그 때 많은 하늘아들 디갈랏티가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벨루 숲을 밝히며 세존께 계신곳으로 찾아 왔다.(S2.13)”라고 되어 있다. 천상의 존재들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깊은 밤중에 찾아 온 것이다.

 

일과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대부분 잠든 시간인 밤10시에서 새벽2시가 된다. 이 시간대에 하늘사람들 뿐만 아니라 악마, 하느님(브라흐마), 제석천 등 천상에 사는 존재들과 대화가 이루어 진다.

 

두 시간 동안 열반과 삼매에 드는 것으로

 

부처님이 잠든 시간은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라 하였다. 경행을 약 한 시간 가량 하고 나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5시에서 6시 사이에 대자비삼매에 들어 뭇삶들의 괴로움을 살펴보았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일반사람들이 잠을 자는 것처럼 잠을 자지 않는다. 약 두 시간 동안 열반과 삼매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사실상 잠을 자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일반사람들과 같이 대자로 잔다거나 일반사람들처럼 꿈을 꾸며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시간에 열반에 들고 삼매에 들기 때문에 잠자면서도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말이 바로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sato sampajāno)”라는 말과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uṭṭhānasañña manasi karitvā)라는 말일 것이다.

 

 

 

entering nirvana

 

 

시비를 거는 것처럼

 

그럼에도 악마는 부처님이 잠을 자는 것에 대하여 마치 시비를 거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잠을 자는가의 경(oppasisutta, S4.7)

 

빠알리어

Ki soppasi kinnu soppasi

kimida soppasi dubbhago viya,
Suññamag
āranti soppasi

kimida soppasi suriye uggate.

Ki soppasi

전재성님역

[빠삐만]

왜 잠을 자는가? 왜 지금 잠을 자는가?

이렇게 핏기 없는 노예처럼 잠자는가?

빈집에 있다고 생각해 잠을 자는가?

태양이 떠올랐는데 어찌 이리 잠을 자는가?”

왜 잠을 자는가?

각묵스님역

, 잠을 잔다고? 왜 잠을 자는가?

가엾은 사람처럼 지금 잠을 자는가?

빈집이라 여기고 잠을 자는가?

태양이 떠올랐는데도 이렇게 잠을 자는가?”

, 잠을 잔다고?

빅쿠보디역

“What, you sleep? Why do you sleep?

What's this, you sleep like a wretch?

Thinking 'The hut's empty' you sleep:

What's this, you sleep when the sun has risen?”

What, you sleep?

 

 

 

악마는 부처님를 조롱하고 있다. 해가 떳음에도 잠만 자는 듯한 모습을 보고서 마치 게으른 수행자처럼 간주 하는 것이다. 그래서 Ki soppasi”라 하였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왜 잠을 자는가?”라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 잠을 잔다고?”라 하였다. 이는 ‘Kiwhat?’ 또는 ‘why?’의 뜻이기 때문이다. soppasleep의 뜻이다. 그래서 Ki soppasi”왜 잠을 자는가?”의 뜻이 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매우 강한 어조를 사용하여 , 잠을 잔다고?”라 하였다.

 

각묵스님이 , 잠을 잔다고?”라 한 것은 빅쿠보디의 번역과 유사하다. 빅쿠보디는 What, you sleep?(무엇이라고, 네가 잠을 잔다고?”라 하였다.

 

악마여, 네가 무슨 상관인가?”

 

악마의 시비조의 말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부처님이 답송으로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잠을 자는가의 경(oppasisutta, S4.7)

 

빠알리어

Yassa jālinī visattikā

tahā natthi kuhiñci netave,
Sabb
ūpadhīna parikkhayā buddho

soppati ki tavettha mārāti.

buddho

전재성님역

[세존]

탐욕과 갈애의 그물을 끊은 자에게

어디든 이끌릴 곳이 없다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깨달은 자는 잠을 자네.

악마여, 네가 무슨 상관인가?”

깨달은 자

각묵스님역

그물에 걸리게 하고 달라붙게 하는 갈애가 그에게 없나니

그러므로 어디로도 그를 인도하지 못한다.

모든 재생의 근거(소유물) 완전히 부순 뒤에

부처는 잠자노니, 마라여, 왜 그대가 참견하는가?”

부처

빅쿠보디역

“Within him craving no longer lurks,

Entangling and binding, to lead him anywhere;

With the destruction of all acquisitions

The Awakened one sleeps:

Why should this concern you, Mara?”

The Awakened

 

 

악마가 부처님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서 불쌍하고 가엾게 보았다. 깨달은 자도 일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존재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게송으로서 탐욕과 갈애의 그물을 끊은 자의 잠이라 하여 어디든 이끌릴 곳이 없다네 (natthi kuhiñci netave)”라 하였.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새로운 윤회의 존재로 이끌릴 곳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 모든 집착을 부순 자의 잠이라 하였다.

 

여기서 모든 집착을 부순(Sabbūpadhīna parikkhayā)’ 이라는 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존재의 다발, 번뇌, 유위법적 형성,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대한 집착이 모두 파괴된 것을 말한다.(Srp.I.175)”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귀찮게 하는 악마에게 부처님은 악마여, 네가 무슨 상관인가?”라 말한 것이다.

 

집착(Sabbūpadhī)

 

세 번째 구절에 ‘Sabbūpadhīna가 있다. 이 말은 Sabba+ūpadhī’의 결합어이다. Sabba‘all’의 뜻이고, ūpadhī‘substratum of existence’의 뜻이다. ūpadhī는 십이연기에서 우빠다나(집착)’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집착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Sabbūpadhī모든 집착의 뜻이 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모든 집착이라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모든 재생의 근거(소유물)’라 하여 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빅쿠보디는 all acquisitions’이라 하여 모든 획득물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을 말한다.

 

빅쿠보디의 탁월한 번역 ‘The awakened’

 

오온에 집착하는 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든 집착을 부수고 깨달은 자라 하였다. 여기서 깨달은 자‘buddha’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부처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잠자노니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awakened’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어 있는 자라는 뜻이다.

 

빅쿠보디는 buddha에 대하여 깨어 있는 자라는 뜻으로 ‘The awakened’라 하였다. 이는 매우 탁월한 번역이라 본다. 악마가 깨달은 자의 잠자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하였을 때 부처님은 “Why should this concern you, Mara?”라 한 것이다. 깨달은 자의 잠은 잠을 자는 것 같아도 항상 깨어 있는 것과 같으니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깨달은 자는 잠을 자네라 하여 붓다에 대하여 깨달은 자라 하였다. 비교적 상황에 맞는 번역이라 본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붓다에 대하여 부처는 잠자노니라 하여 상황에 맞지 않은 번역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잘 된 번역은 빅쿠보디의 ‘The awakened’이고, 그 다음으로 전재성님의 깨달은 자라 본다.

 

잠을 잘 때도 알아 차리면서

 

깨달은 자는 잠을 잘 때도 알아 차리면서 잔다. 이는 경에서도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 manasi karitvā)”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깨달은 자가 잠을 자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이 잠을 자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악마는 부처님에게 왜 잠을 자는가? 왜 지금 잠을 자는가? 이렇게 핏기 없는 노예처럼 잠자는가? 빈집에 있다고 생각해 잠을 자는가? 태양이 떠올랐는데 어찌 이리 잠을 자는가?(S4.7)”라고 비아냥 거리듯이 시비를 건다.

 

이에 부처님은 깨달은 자의 잠에 대하여 말해 준다. 항상 깨어 있는 자의 잠에 대하여 모든 집착을 부수고 깨달은 자는 잠을 자네.”라 하였다. 깨달은 자, 즉 깨어 있는 자는 집착을 부수었기 때문에 잠을 즐기거나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자의 잠에 대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뜻으로 악마여, 네가 무슨 상관인가?”라 말씀 하신 것이다.

 

 

 

2014-0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