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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숨은 짧다”팔만사천대겁도 일순간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6. 23:29

 

사람의 목숨은 짧다팔만사천대겁도 일순간

 

 

 

 

지나고 나면 매우 짧은 것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긴 것인지 짧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나가 나면 짧게 보인다.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의 존재도 수명이 다하고 나면 매우 짧듯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나고 나면 매우 짧아 보인다. 노인이 지난 날을 회상할 때 세월이 쏜살 같이 지나간다고 한다.

 

천상의 존재들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른 세상도표에 따르면 욕계천상부터 무색계천상까지는 수명이 명기 되어 있다. 마치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 하듯이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바로 위의 천상인 사대왕천의 수명을 보면 500천상년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길어야 백년을 산다. 경에 따르면  인간의 오십 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A8.43)”이라 하였다. 인간의 오십년은 불과 사오십년 전만 해도 오래 산 것이다. 그러나 인간 오십년이 사대왕천의 하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인간의 백년은 삼십삼천에서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천상에 사는 존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일생은 그야말로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일생이 보장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세계는 천상과 달리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시공덕을 짓거나 선정수행을 닦은 과보로 천상에 태어난다. 그런데 인간과 달리 천상에서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하여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존재들은 이전에 지은 으로 인하여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불교의 세상도표를 보면 비결정(非決定)’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상의 존재도 수명이 다할 날이 있을 것이다. 수명이 다하여 임종에 이르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낄 것이다. 팔만사천대겁을 살아도 임종에 이르면 쏜 화살 보다 더 빠르게 흘러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에서 오랜 세월 즐겁게 살아도 오래 산 것이 아니다. 지나고 나면 매우 짧은 것이다.

 

오래 산다고 하여도

 

백년도 못사는 것이 인간의 수명이다. 인간의 수명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ppamida bhikkhave manussāna āyu, gamanīyo samparāyo, kattabba kusala, caritabba brahmacariya, natthi jātassa amaraa. Yo bhikkhave cira jīvati, so vassasata appa vā bhiyy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사람의 목숨은 짧다. 저 피안은 도달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아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오래 산다고 하여도 백 년이나 그 남짓일 것이다.”

 

(목숨의 경1, 상윳따니까야 S4.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이 짧다고 하였다. 오래 살아야 백년 남짓 산다고 하였다.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samparāyo, 피안인가 내세인가?

 

부처님은 저 피안은 도달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아져야 한다라 하였다. 여기서 저 피안이라는 말에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를 하였다.

 

 

samparāyo : 원래 내세당래(當來)’의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피안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해석이 어려워진다.

 

(1036번 각주, 전재성님)

 

 

samparāyo 에 대하여 피안으로 의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원래 뜻이 내세를 의미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맥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만일 내세로 번역하면 내세는 도달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아져야 한다.”가 된다. 내세는 오는 것이 당연함에도 내세는 도달되어야 하고라 번역하면 어색한 번역이 된다. 그래서 저 피안은 도달되어야 하고라 번역한 것이라 보여진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samparāyo 에 대하여 내세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 유익함[]을 행해야 하고, 청정범행을 닦아야 한다.”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번역에서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라 한 것은 매우 어색하다. 각묵스님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아마도 주석서의 견해를 중시해서 일 것이다. 또 하나는 CDB에 크게 의지 하고 있기 때문에 빅쿠보디의 견해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빅쿠보디는 samparāyo와 관련된 문장에 대하여 “One has to go on to the future life”라 번역하였다. 직역을 하면 미래의 생으로 가야만 하는의 뜻이 된다. 각묵스님의 번역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번역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어지는 구절과 들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kattabba kusala, caritabba brahmacariya라 되어 있다. 이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뜻하는 꾸살라와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 꾸살라는 출세간적 행위를 뜻한다.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무소유와 무집착의 청정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출가자에게 있어서 꾸살라와 브라흐마짜리야는 실현 되어야 할 덕목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안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다음 생으로 가기 위하여 착하고 건전한 행위(꾸살라)를 하고 청정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을 닦아야 한다고 번역한 것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One has to go on to the future life. one should do what is wholesome and lead the holy life;”라는 번역과, 각묵스님의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 유익함[]을 행해야 하고, 청정범행을 닦아야 한다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열반은 이 생에서 실현되어야

 

초기경전에 따르면 열반은 이 생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열반은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 몸과 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실현 되어야 함을 말한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을 보면 바쎗타여, 평민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27)”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현세에서 열반을 강조하였다.

 

또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에 따르면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또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입니다.(D2)”라 하였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브라흐마짜리야를 말한다. 청정한 삶이 완성되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되어 수행자의 삶의 결실이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꾸살라와 브라흐마짜리야는 현세에서 실현 되어야 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 내세에서나 실현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행자의 삶이 내세로 넘어 가는 경우는 깨달음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흐름에 든 자가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 유익함[]을 행해야 하고, 청정범행을 닦아야 한다.”라는 번역 일견 타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유익함을 행하기 위해 청정범행을 닦아야 하기 위해 일부로 다음 생까지 미룰 이유는 없을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출가한 자가 지금 여기에서 꾸살라행을 하고 브라흐마짜리야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내생으로 미룬다는 뉘앙스로 다음 생으로 가야하고라거나, “has to go on to the future life”라 하여 ‘Must’용법을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사람의 목숨은 길다

 

부처님이 인간의 수명은 매우 짧고 오래 살아 보아야 백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짧은 인생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피안으로 가야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행승들에게 말을 할 때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게송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Pahamaāyusutta(수명의 경1, S4.9)

 

빠알리어

Dīghamāyu manussāna

na na hīe suporiso,
Careyya kh
īramattova

natthi maccussa āgamoti.

 

전재성님역

[빠삐만]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

 

각묵스님역

긴 것이 인간의 수명

착한 사람 그 것을 경멸해서는 안되리.

젖을 빠는 [어린애처럼] 살아야 하나니

죽음이 찾아오지 못할 것이로다.”

 

빅쿠보디역

“Long is the life span of human beings,

The good man should not disdain it.

One should live like a milk-sucking baby:

Death has not made its arrival.”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과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인간의 수명이 짧다라고 하였는데, 빠삐만은 정반대로 사람의 목숨은 길다 (Dīghamāyu manussāna)”라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경시하다라는 말은 hīe’에 대한 것이다. PCED194에 따르면 hīl에 대하여 轻视(to disparage)’라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빅쿠보디는 disdain이라 하였다. 이는 경멸하다, 경멸, 멸시하다의 뜻이다.

 

경시와 경멸은 다르다. 경시는 대수롭지 않게 깔보거나 업신여김을 말한다. 영어로는 slight, contempt, negligence’의 뜻이다. 그런데 경멸은 깔보아 업신여기다, 남을 깔보아 업신여김의 뜻이다. 경시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은 것 같지만 영어의 뜻을 보면 scorn, contempt, disdain’로 되어 있어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각묵스님은 빅쿠보디가 번역한 것처럼 경멸이라 번역하였다.

 

주석적 번역의 한계

 

세 번째 구절에 Careyya khīramattova”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젖을 빠는 [어린애처럼] 살아야 하나니라 하였다.

 

우유에 도취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어린 아이가 누워서 우유를 마시고 포근한 요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자듯이 훌륭한 사람은 길고 짧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Srp.I.175)”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똑 같은 주석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마치 어린 애가 젖을 먹고 모포에 누워서 인생이 길든 짧든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인식이 없는 것처럼 착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S.A.i.175)”라고 설명해 놓았다. 같은 주석에 대하여 우유를 마시고젖을 먹고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good man should live like a baby who, after drinking milk, might lie down on a blanket and fall asleep, unconcerned whether life is long or short.”라고 각주 하였다. 여기서 빅쿠보디는 “after drinking milk(우유를 마시고 난 다음에)”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밀크에 대하여 이라 하였다. 그래서 어린 애가 젖을 먹고 모포에 누워서라 하였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본문의 게송과 맞지 않는다. 각묵스님은 본문 게송에서 젖을 빠는 [어린애처럼]”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어린애처럼]이라 하였다.

 

빠알리 게송에 어린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대괄호치기로   [어린애처럼]’이라 하여 주석적 번역을 해 놓았다. 이럴 경우 대괄호를 생략하여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대괄호를 생략하여 읽으면 젖을 빠는 살아야 하나니가 된다. 이는 어법에 맞지 않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의 한계라 보여진다.

 

사람의 목숨은 짧다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과 정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악마는 항상 부처님과 대립되고 반대 되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악마 빠삐만과 부처님의 견해는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빠삐만의 게송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Pahamaāyusutta(수명의 경1, S4.9)

 

빠알리어

Appamāyu manussāna

eyya na suporiso,
Careyyādittasīsova

natthi maccussa nāgamoti.

 

전재성님역

[세존]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

 

각묵스님역

짧은 것이 인간의 수명

착한 사람 그것을 경멸해야 하느니라.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해야 하느니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경우란 없도다.”

 

빅쿠보디역

“Short is the life span of human beings,

The good man should disdain it.

One should live like one with head aflame:

There is no avoiding Death's arrival.”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이 짧은 것이라 하였다. 이는 천상의 존재와 비교하면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짧은 것이다.

 

팔만사천대겁도 일순간

 

짧은 목숨에 대하여 마치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우유를 마시는 아이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살아 가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닥쳤을 때 시간이 금방 지나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목숨을 경시하라라 하였다.

 

여기서 경시하라(hīeyya)”라는 말은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백년도 살지 못하는 짧은 목숨임에도 마치 천년 만년을 사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착한 사람 그것을 경멸해야 하느니라라 하였다. 앞서 빠삐만의 게송에서 착한 사람 그 것을 경멸해서는 안되리라 하였기 때문에 운율을 맞추기 위해 경멸이라는 말을 계속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경멸이라는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 짧기 때문에 더욱 더 알차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난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매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 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라면 지금 여기가 소중한 것이다. 그럼에도 천년 만년을 살 것처럼 여기고 안락만을 추구한다면 인생은 매우 빨리 지나가고 말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눈 깜짝 할 새에 지나지 않는다. 팔만사천대겁을 사는 천상의 존재도 임종의 순간에서는 지난 긴 세월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에 태어나 수명대로 산다는 것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지나고 나면 순간이기 때문에 팔만사천대겁도 일순간이다.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빠삐만

 

āyusutta는 두 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경을 Pahamaāyusutta(목숨의 경1)라 하고, 두번째 경을 Dutiyaāyusutta(목숨의 경2) 이라 한다. 두 번째 경에서도 부처님과 빠삐만은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utiyaāyusutta (수명의 경2, S4.10)

 

빠알리어

Nāccayanti ahorattā

jivita noparujjhati,
Āyu anupariyāti maccāna

nemīva rathakubbara.

 

전재성님역

[빠삐만]

밤과 낮은 지나가지 않고

목숨은 다함이 없네.

수레의 축에 바퀴가 돌아가듯

사람의 목숨은 돌고 돈다네.”

 

각묵스님역

낮과 밤은 지나가지 않고

목숨은 멈추지 않도다.

인간들의 수명이란 돌고 도나니

수레의 테가 바퀴통을 따라 돌듯이.”

 

빅쿠보디역

"The days and nights do not fly by,

Life does not come to a stop.

The life span of mortals rolls along

Like the chariot's felly round the hub."

 

 

 

 

두 번째 경에서 빠삐만은 역시 시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 번째 경의 게송에서 사람의 목숨은 길다(S4.9)”라 하였는데, 이 번 게송을 보면 마치 보충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빠삐만은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라 하고,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라 하는가 하면, 더구나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라 하였다. 이렇게 수레바퀴의 비유를 들어 부처님과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자아와 진아에 기반한 빠삐만의 게송

 

수레바퀴의 비유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다음과 같이 각주하였다.

 

 

The point may be that as the felly revolves around the stable hub, so the changing forms of life revolve around the stable soul or life-principle. The verse seems to be alluding to a simile in the Brhadaranyaka Upanisad II.5.15: "And as all spokes are contained in the axle and in the felly of a wheel, all beings, and all those selves (of the earth, water, etc.), are contained in that Self" (Muller, The Upanishads, 2:116). See too Chandogya Upanisad VI1.15.1 (The Upanishads, 1:120).

 

(CDB 280번 각주, 빅쿠보디)

 

 

각주를 보면 주석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게송을 설명하였다. 이는 어떤 내용일까?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마라가 읊은 이 게송은 우빠니샤드의 자아 이론과도 관계가 깊다. 낮과 밤이나 인간의 수명은 변하지만 그것은 마치 수레의 테가 도는 것처럼 도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바퀴가 돌고 돌아도 바퀴통은 돌지 않는 것처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현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자아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르하다란냐까 우빠니샤드’ II.5.15찬도갸 우빠니샤드’ VII.15.1와 같은 주장이다.

 

(초불연 상윳따1 465번 각주, 각묵스님)

 

 

 

 

 

Felloe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빅쿠보디의 각주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심지어 인용한 책의 페이지까지 일치 한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전재성님은 이 시는 우빠니샤드의 모든 바퀴살은 차축과 바퀴의 테에 포함되듯, 모든 존재, 모든 그들의 자아는 그 진아속에 포함된다.’라는 시를 상기시킨다.(1041번 각주)”라 하였다.

 

세 번역자의 각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빠삐만이 읊은 두 개의 게송은 자아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범아일여로 대표되는 브라만교의 교리로 설명된다.

 

영원히 변치 않는 아뜨만이 있다면 사실상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영혼이 있어서 몸만 바꾸어 세세생생 윤회하기 때문이다. 윤회 하다 보면 결국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모든 그들의 자아는 그 진아속에 포함된다라 하였다. 여기서 진아는 브라만을 뜻하고 바퀴에서는 바퀴통에 해당될 것이다. 또 개별적 자아를 뜻하는 아뜨만은 끊임 없이 윤회하기 때문에 바퀴테로 비유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빠삐만이 말한대로 밤과 낮은 지나가지 않고 목숨은 다함이 없네라 하는 것은 타당하다. 또 사람은 목숨은 긴 것이어서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라 할 만 한 것이다.

 

무아와 연기법에 기반한 부처님 말씀

 

하지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하였다.

 

 

  

Dutiyaāyusutta (수명의 경2, S4.10)

 

빠알리어

Accayanti ahorattā

jīvita uparujjhati,
Āyu khīyati maccāna

kunnadīnava odakanti.

 

전재성님역

[세존]

밤과 낮은 지나가고

목숨은 다함이 있네.

작은 시내에 물이 마르듯

사람의 목숨은 다해 버리네.”

 

각묵스님역

낮과 밤은 지나가고

목숨은 멈추게 되도다.

인간들의 수명이란 고갈되어 가나니

개울의 물과 같도다.”

 

빅쿠보디역

"The days and nights go flying by,

Life comes to a stop.

The life span of mortals is depleted

Like the water in rivulets."

 

 

 

 

빠삐만은 철저하게 자아에 근거하여 사람의 목숨과 시간을 말하였다. 그러나 무아를 설하는 부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근거 한다. 원인과 조건의 결과에 따라 연기법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시간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밤과 낮은 지나가고 목숨은 다함이 있네.”라 하였다. 이전 게송에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사람의 목숨이 짧은 것이고 더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가 소중한 것이다. 우유를 마시며 요람에서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시간관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게송에서는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라 하였다.

 

 

 

2015-01-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