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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사 가운데의 부처님,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부처님의 열 가지 힘(如來十力)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9. 20:41

 

 

 

빠리사 가운데의 부처님,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부처님의 열 가지 힘(如來十力)

 

 

 

마라상윳따 12번 째 경은 ‘Sīhasutta’이다. 이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사자처럼의 경이라 하였다. 경의 빠알리어 제목이 ‘Kinnusīhasutta’로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사자 경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Lion’이라 하였다.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 있을 때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을 때 악마가 대중의 눈을 멀게 하려 한다그래서 악마는 내가 수행자 고따마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 하였다. 이에 악마는 게송으로서 부처님께 말한다.

 

 

  

Sīhasutta(사자의 경, S4.12)

  

빠알리어

Kinnu sīhova nadasi

parisāya visārado,
Pa
imallo hi te atthi

vijitāvī nu maññasīti.

사구게

전재성님역

[빠삐만]

왜 사자처럼 무리의 가운데 있으며

두려움 없이 부르짓는가?

그대의 호적수가 여기 있네.

그대가 승리자라고 생각하는가?”

사구게

각묵스님역

왜 그대 담대하게 회중에서 사자처럼 포효하는가?

그대의 호적수가 있나니 그대가 승리자라 생각하는가?”

이구게

빅쿠보디역

“Why now do you roar like a lion,

Confident in the assembly?

For there is one who's a match for you,

So why think yourself the victor?”

사구게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백수의 왕 사자처럼 무리의 가운데 있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초기경전에서 사자는 부처님의 상징과도 같다. 시하경(S22:78)에 따르면 사자가 포효하면 모든 동물들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사자후 역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하여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부처님 사자후(2012-11-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대중들이 부처님의 사자후를 설하면 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질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하늘사람의 예를 들어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이라 하였다. 복과 수명이 보장 되는 천상의 존재들이 부처님의 사자후를 듣고 상락아정의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천상의 존재는 처음에는 부처님의 설법에 두려움을 느낀다. 상락아정의 존재로 알았으나 부처님의 무상, , 무아의 설법을 듣고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두려움이 들 것이다. 그러나 설법을 들으면 두려움은 전율로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의미의 전율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리가 틀림 없음을 알았을 떄 전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전율은 감동을 주게 된다. 부처님의 설법을 실천하면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Lion Roar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 한다. 마치 사자가 포효하면 온갖 짐승들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하듯이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법하면 대중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로 비유한다. 사자후는 최상의 지혜에서 나오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을 말한다.

 

난해한 번역과 심오한 내용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은 대중들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 악마가 대중들의 눈을 멀게 하려 한다. 눈을 멀게 하면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해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악마가 대중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란 회중의 통찰지의 눈을 파괴시킬 목적으로 라는 뜻이다. 그는 부처님들의 통찰지의 눈은 파괴시킬 수 없다. 그는 회중에게 무서운 대상을 듣게 하거나 보게 하여 하여서 그렇게 할 수 있다. (S.A.i.176)”

 

(초불연 상윳따1 468번 각주, 각묵스님)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할 때 악마는 부처님의 사자후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설법을 듣는 대중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어떻게 멀게 하는가? 대중들에게 무서운 형상을 보여 주게 하여 겁을 먹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회중에게 무서운 대상을 듣게 하거나 보게 하여 하여서 그렇게 할 수 있다.”라 설명하였다. 그러나 난해한 설명이다. 왜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였을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Out of a desire to destroy the wisdom-eye of the people in the assembly. He is unable to destroy the Buddha's wisdom eye, but he could do so for the people in the assembly by manifesting a frightening sight or noise.(cdb 281번 각주)”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님은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rp.I.176에 따르면, 모임에서 사람들의 지혜의 눈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부처님의 지혜의 눈은 파괴할 수 없지만 놀라운 형상이나 소리로써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지혜의 눈을 파괴할 수 있다.

 

(성전협 상윳따1 1048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매우 쉽게 설명 되어 있다. 악마가 부처님의 지혜의 눈을 파괴 할 수 없지만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들의 지혜의 눈은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같은 주석이라도 번역하는 자에 따라 난이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난이하면 할수록 심오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한 줄을 빼 먹고 번역하였을 때 앞뒤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이에 대하여 “왜 몸만 바라 보지요?”32상 80종호와 법신(法身)(3013-01-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금강경에서 구마라집이 한 줄을 빼먹고 번역하는 바람에 경의 내용이 난해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심오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결국 난해한 번역은 심오한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답송하기를

 

악마의 게송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한다.

 

 

  

Sīhasutta(사자의 경, S4.12)

  

빠알리어

Nadanti ve mahāvīrā

parisāsu visāradā,

Tathāgatā balappattā

tiṇṇā loke visattikanti.

parisā

전재성님역

[세존]

위대한 영웅들이 무리 가운데 있으며

두려움 없이 부르짓네.

이렇게 오신 님들은 힘을 갖추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뛰어 넘었네.”

무리 가운데

각묵스님역

대영웅은 담대하게

회중에서 사자후를 토하나니

여래는 [열 가지] [十力]을 얻어서

세상에 대한 집착을 건넜도다.”

회중

빅쿠보디역

“The great heroes roar their lion's roar

Confident in the assemblies-

The Tathagatas endowed with the powers

Have crossed over attachment to the world.”

the assemblies

 

 

 

빠리사(parisā)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무리 가운데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회중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assemblies’라 하였다.

 

빠리사(parisā)는 어떤 뜻일까?

 

 여기서 빠리사는 어떤 뜻일까? 먼저 빅쿠보디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Spk: In the assemblies: in the eight assemblies (see MN I 72,18-20). Endowed with the powers: endowed with the ten powers of a Tathagata (see MN I 69-71 ) . At MN I 69,31-34, the Buddha says that, endowed with the ten Tathagata powers, he roars his lion's roar in the assemblies.

 

(cdb 282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빠리사에 대하여 ‘the assemblies’라 번역하였다. 빠리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모임이라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회중이라 번역하였다. 빠리사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PCED194에 따르면 ‘[f.] a company; an assembly., 眾會, 會眾, 集會處라 되어 있다. 또 문자적으로 “sitting round”의 뜻이다. 빙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은 여덟 종류의 어셈블리에 힘을 부여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힘은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을 말한다. 또 빅쿠보디는 맛지마니까야 ‘MN I 69-71’를 참고 하라고 하였다.

 

시어로서 맛을 떨어 뜨리는 괄호치기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Tathāgatā balappattā”라는 구절은 부처님의 열 가지 힘, 즉 십력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이 구절에 대하여 여래는 [열 가지] [十力]을 얻어서라 하였다.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한글로 열 가지라 하였고 또 한자어로 十力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주석에서 설명 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격이다. 더구나 아름다운 시어로 되어 있는 게송에서 대괄호치기를 이용한다거나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어로서 맛을 떨어 뜨리게 한다. 괄호치기는 생략해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여래는 [열 가지] [十力]을 얻어서라는 구절은 여래는 힘을 얻어서가 될 것이다.

 

네 가지 모임인가 여덟 가지 모임인가?

 

게송에서 키워드는 빠리사(parisā)와 힘(bala)이다.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열 가지 힘을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이때 열 가지 힘은 부처님만이 가지고 있느 힘을 말한다. 이와 관련된 경이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다. 관련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빠리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Aṭṭha kho imā sāriputta parisā: katamā aṭṭha? Khattiyaparisā brāhmaaparisā gahapatiparisā samaaparisā cātummahārājikaparisā tāvatisaparisā māraparisā brahmaparisā. Imā kho sāriputta aṭṭha parisā. Imehi kho sāriputta catūhi vesārajjehi samannāgato tathāgato imā aṭṭha parisā upasakamati ajjhogāhati.

 

[세존]

사리뿟따여, 여덟 가지의 모임이 있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왕족의 모임, 사제의 모임, 장자의 모임, 수행자의 모임, 사천왕의 모임, 도솔천의 모임, 악마의 모임, 하느님의 모임이다. 이것들을 여덟 가지 모임이라고 한다. 사리뿟따여,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갖춘 여래는 이들 여덟 가지 모임을 찾아서 들어갔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왕족의 모임 등 여덟 종류의 모임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Bm.51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이 경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훨씬 후에 성립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전의 고층에서는 오직 처음의 네 모임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있다.(279번 각주)”라 하였다. 이렇게 자신 있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고층의 경전에서는 오직 왕족의 모임, 사제의 모임, 장자의 모임, 수행자의 모임이렇게 네 종류의 모임만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여덟 가지 모임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별다른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사무외(四無畏)란 무엇인가?

 

게송에서 위대한 영웅들이 무리 가운데 있으며 두려움 없이 부르짓네라 하였다. 여기서 두려움이 없다라는 빠알리어는 ‘visāradā’이다, 영어로는 ‘[adj.] self-possessed; confident; skilled.’의 뜻이고, 일어사전에는 れなき, 無畏, 無所畏, 自信ある라 해석되어 있다.

 

두려움 없음에 대하여 한자어로 무외(無畏)’라 한다.  각묵스님은 담대하다라 번역하였다. 담대(膽大)라는 말은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함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이 있는데, 그 두려움 없음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하늘의 수레를 굴린다. (M12)”라 하여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이라 하였다.

 

네 가지 두려움 없음에 대하여 사무외(四無畏)라 한다. 사무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정등무각외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올바로 깨달은 자라고 그대가 주장하더라도, 그 가르침들은 올바로 깨달아진 것이 아니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달한 안온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두려움 없음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공포 없음에 머물러 있다.

 

2) 누영진무외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번뇌를 부순 자라고 그대가 주장하더라도, 그대에게 그 번뇌들이 부수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달한 안온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두려움 없음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공포 없음에 머물러 있다.

 

3) 설장법무외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달한 안온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두려움 없음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공포 없음에 머물러 있다.

 

4) 설출도무외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그대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설한다 해도 그것이 그 가르침을 실천한 자를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끌지 못한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도달한 안온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두려움 없음에 머물러 있고 도달한 공포 없음에 머물러 있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두려움이 없는 자이다. 그래서 어디서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두려움 없이 부르짓네라 하였다. 네 가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부르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 원문에는 사자후라는 말이 없는데

 

부르짓다라는 말이 Nadanti이다. Nadant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보면 ‘roaring; making a noise.’라 되어 있다.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부르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The great heroes roar their lion's roar Confident in the assemblies”라 하였다. “위대한 영웅이 대중들에게 확신에 차 사자의 목소리 부르짓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lion's roar는 사자후를 말한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에는 사자후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자후라 한 것은 맛지마니까야에 사리뿟따여, 여래에게는 이와 같은 여래의 열 가지 힘이 있는데 그 힘을 갖춘 여래는 최상의 지위를 선언하고 대중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며 하늘의 수레를 굴린다. (Imāni kho sāriputta dasa tathāgatassa tathāgatabalāni, yehi balehi samannāgato tathāgato āsabha hāna paijānāti, parisāsu sīhanāda nadati, brahmacakka pavatteti. M12)”라는 구절이 있어서 일 것이다.

 

이어지는 게송에 따르면 이렇게 오신 님들은 힘을 갖추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뛰어 넘었네.(S4.12)”라는 구절이 이를 뒷바침한다. 부처님은 힘을 갖추고 있는데, 그 힘이 바로 여래의 열 가지 힘이라 한다.

 

열 가지 힘, 즉 십력을 갖춘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 네 가지 두려움이 없이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자후는 ‘sīhanāda을 번역한 것이다. sīhanāda에 대하여 ‘lion's roar; a brave speech.’라 한다.

 

그런데 게송에서는 Nadanti라 하여 부르짓다는 뜻의 ‘roar’의 의미이다. 그럼에도 빅쿠보디는 원문에 없는 lion's roar’라 하였다. 각묵스님 역시 빠알리 원문에 보이지 않는 말인 사자후라는 말을 넣어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원문의 단어 Nadanti에 대하여 부르짓네라 하여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부처님의 열 가지 힘(如來十力)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의 열 가지 힘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이는 게송에서는 “Tathāgatā balappattā”라 되어 있다. 직역하면 여래가 힘을 갖추다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렇게 오신 님들은 힘을 갖추고라 하여 직역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The Tathagatas endowed with the powers”라 하여 직역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여래는 [열 가지] [十力]을 얻어서라 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비록 대괄호에 집어 넣어 원문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였지만 열가지또는 十力이라는 말은 각주에서나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게송에서 언급된 부처님의 힘(Tathāgatā balappattā)은 어떤 것일까? 맛지마니까에서는 여래십력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신통변화는 황당무계한 것일까?  여래십력과 사무외 그리고 삼명 육신통(2014-02-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경에 표현 되어 있는 여래십력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여래의 열 가지 힘(십력)

No

십 력

경의 문구(M12)

 

1

처비처지력

조건을 갖춘 경우와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여실히 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

2

업이숙지력

과거, 미래, 현재의 업보에 관해 조건과 원인을 살펴 여실히 그 과보를 분명히 안다.

3

편취행지력

모든 운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

4

종종계지력

많은 세계로 구성된 다양한 세계의 세계에 관해 분명히 안다.

5

종종승혜지력

다른 뭇 삶들의 여러 가지 경향에 관해 분명히 안다.

6

근상하지력

뭇 삶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에 관해 분명히 안다.

7

정려해탈등지지력

선정, 해탈, 삼매, 성취에 대해서 오염과 청정과 벗어남을 분명히 안다.

8

숙주수념지력

그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숙명통

(윤회)

9

사생지력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관찰한다.

천안통

(업과 과보)

10

누진지력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누진통

(사성제)

 

 

 

 

2015-0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