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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잠자리를 위하여, 왜 알아차림(sati)과 자애(metta)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13. 17:48

 

행복한 잠자리를 위하여, 왜 알아차림(sati)과 자애(metta)인가?

 

 

 

스님도 아프세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스님들은 밥을 먹지 않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삭발하고 회색승복을 입었을 때 마치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이다. 더구나 탁발에 의존하여 하루 한끼 밖에 먹지 않으며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테라와다빅쿠들을 보면 더욱 더 청정하게 보인다.

 

청정한 이미지의 스님이나 빅쿠들을 보면 모두 다 도인처럼 보인다. 일종의 도사이미지이다. 일일반사람들이 보기에 도력이 있는 특별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 스님은 스님도 아프세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스님도 몸이 아플 수도 있는데 일반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스님은 병도 들지 않고 아프지도 않는 존재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아팠다

 

스님도 병이 들 수 있고, 병이 들면 아픔을 느낀다. 일반사람들과 똑 같이 오온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픔을 느끼지만 아픔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부처님도 아팠다. 부처님도 인간의 몸을 가졌기에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Eva me suta: eka samaya bhagavā rājagahe viharati maddakucchismi migadāye.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ato pādo sakalikāya khato hoti. Bhūsā suda bhagavato vedanā vattanti sārīrikā dukkhā tibbā kharā kaukā asātā amanāpā. Tā suda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ti avihaññamāno.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맛다꿋치 숲의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세존께서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올바른 새김과 올바른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어 고통 없이 참아내셨다.

 

(Sakalikasutta-돌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돌조각으로 상처를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상윳따니까야 하늘사람의 모음(S1)’돌조각의 경(S1.38)’이라는 경의 이름에도 실려 있다. 이 경의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발을 다친 이유에 대하여 데바닷따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데바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깃자꿋따산에서 돌을 굴려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도 아픔을 느낀다, 사깔리까경( 조각의 경, S1.38)(2014-01-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고통을 알아차리면서

 

부처님은 돌조각에 다리를 맞아 심하게 통증을 느꼈다. 이에 대하여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Bhūsā1 suda bhagavato vedanā vattanti sārīrikā dukkhā tibbā kharā kaukā asātā amanāpā)”라고 표현 되어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그 육체적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라고 번역하였다. 몹시 고통스런 상황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사용된 단어를 보면 차이가 난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니 “bodily feelings that were painful, racking, sharp, piercing, harrowing, disagreeable.”라 되어 있다.

 

경에서 상처로 인한 아픔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 얼마나 통증이 심하였는지 상상이 간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아프다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소리 질렀을까? 부처님은 통증이 일어 날 때 마다 알아차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올바른 새김과 올바른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어 고통 없이 참아내셨다.(Tā suda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ti avihaññamāno.)”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 without becoming distressed.”라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sato sampajāno’이다.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 수 없이 나온다. 거의 정형화 되어 있다 시피 한 이말에 대하여 한자어로 정념정지(正念正知)’ 라 한다. 각묵스님은 친절하게도 본문에 대괄호치기로 한자어 正念正知를 넣었다.

 

사띠와 삼빠잔나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대부분 페어로 사용되는 사띠와 삼빠잔나는 수행의 용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번역자 마다 용어가 다르다. 사띠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새김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빅쿠보디는 ‘mindfulness’라 하였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간화선 보조 수단으로 전락한 사띠(sati)(2013-09-13)’와 사띠(sati) 가장 올바른 표현(2013-01-04)’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빠삐만의 조롱

 

부처님이 돌조각을 맞아 고통스러워 하자 악마 빠삐만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한다.

 

 

    

Sakalikasutta(돌조각의 경, S4.13)

  

빠알리어

Mandiyā nu kho sesi udāhu kāveyyamatto
Atth
ā nu te sampacurā na santi,
Eko vivitte sayan
āsanamhi
Nidd
āmukho kimida soppasevāti.

 

전재성님역

[빠삐만]

게으르게 시상에 잠겨 누워 있는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은가?

홀로 외로운 휴식처에서 졸린 얼굴로

왜 이렇게 잠자고 있는가?”

 

각묵스님역

무기력함인가? 시상에 취했는가?

그대 할 일이 아주 많지 않은가?

홀로 한적한 침상위에 누워

졸린 얼굴을 하고 왜 이처럼 자고 있는가?”

 

빅쿠보디역

"Do you lie down in a daze or drunk on poetry?

Don't you have sufficient goals to meet?

Alone in a secluded lodging

Why do you sleep with a drowsy face?"

 

 

 

악마 빠삐만은 아파하는 부처님을 보고 시상에 잠겨 있다는 등 비아냥 거리고 있다.

 

특별한 내용이 아님에도

 

이 게송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시상에 취했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각주를 하였다.

 

 

“ ‘시상에 취해 있는이란 마치 시인이 시를 지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시작에 취해 누워 있는가라는 뜻이다.” (SA.i.176)  이 표현은 왕기사 경(S8.12)’에도 있다.

 

(초불연 상윳따1 471번 각주, 각묵스님)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각주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구나 왕기사경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도 각주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Spk paraphrases kāveyyamatto in pada a thus: "Do you lie down thinking up a poem like a poet, who lies down intoxicated with the composing of poetry?" The expression recurs at v. 753a. Sampacurā, glossed by bahuvo, is at AN II 59,12 and 61,10, also in apposition to atthā.

 

(CDB 284번 각주, 빅쿠보디역)

 

 

빅쿠보디는 주석(Spk)의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래서 게송 753a를 참고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기사의 경(S8.12)에 있는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일찍이 시에 도취되어 방랑했네.”라는 게송의  한 구절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빅쿠보디나 각묵스님이 시상에 취해 있는구절에 각주를 하였지만 특별한 내용이 없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각주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이 답송하기를

 

악마 빠삐만이 조롱하듯이 말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세 개의 게송으로 답한다.

 

 

 

    

Sakalikasutta(돌조각의 경, S4.13)

  

빠알리어

Na mandiyā sayāmi nāpi kāveyyamatto
Attha
sameccāha mapetasoko,
Eko vivitte sayanāsanamhi
Sayāmaha
sabbabhūtānukampī.

Yesampi salla urasī paviṭṭha
Muhu
muhu hadaya vedhamāna,
Tepīdha5 soppa
labbhare6 sasallā
kasmā aha
na supe vītasallo.

Jagga na sake napi bhemi sottu
Rattindivā nānutapanti mā ma
,
Hāni
na passāmi kuhiñci loke
Tasmā supe sabbabhūtānukampīti.

 

전재성님역

[세존]

나는 게으름을 피거나 시상에 잠겨 눕지 않네.

할 일을 다 마쳐 번뇌를 떠났네.

홀로 외로운 휴식처에서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편히 누워 있네.

 

사람들은 화살이 가슴에 박혀 매순간 심장에 고통을 겪지만

화살에도 불구하고 잠에 빠지네.

나는 화살을 뽑아버렸는데

왜 편히 잠자서는 안 되는가?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 데 두려움 없네.

번뇌 없어 밤낮으로 괴로움이 없네.

또한 세상의 퇴락을 결코 보지 않고,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편히 누워 있네.”

 

각묵스님역

무기력함도 시상에 취함도 아니고

할 일을 마쳐 슬픔을 없앴도다.

홀로 한적한 침상위에서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누워 있노라.

 

사람들의 가슴에 화살이 박히면

그것은 순간순간 심장을 꿰찌르도다.

화살맞은 그들조차 잠자는데

화살을 뽑아버린 나는 왜 잠자면 안되는가?

 

깬 채로 누워 있지 않고, 잠드는 것 두려워 않노라.

밤과 낮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고

내 스스로 세상 어디에서도 퇴보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나는 모든 존재들을 연민하면서 누워 있도다.”

 

빅쿠보디역

"I do not lie in a daze or drunk on poetry;

Having reached the goal, I am rid of sorrow.

Alone in a secluded lodging

I lie down full of compassion for all beings.

 

 "Even those with a dart stuck in the breast

Piercing their heart moment by moment-

Even these here, stricken, get to sleep;

So why should I not get to sleep

When my dart has been drawn out?

 

 "I do not lie awake in dread,

Nor am I afraid to sleep.

The nights and days do not afflict me,

I see for myself no decline in the world.

Therefore I can sleep in peace,

Full of compassion for all beings."

 

 

 

첫 번째 게송에서 전재성님은 번뇌를 떠났네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슬픔을 없앴도다라 하였다. 번뇌인가 슬픔인가? 빅쿠보디는 rid of sorrow”라 하여 슬픔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된 빠알리어는 mapetasoko’이다. 이 단어는 ‘ma(do not) +peta(dead; departed) +soka (grief; sorrow)’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okasorrow의 뜻이므로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번역이 원음에 가깝다. 그러나 슬픔은 커다란 범주로 보면 번뇌에 해당된다. 수행자라면 소멸시켜야 할 오염원인 것이다.

 

깬 채로 누워 있지 않고?

 

세 번째 게송에서 전재성님은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라 하였다. 이는 “Jagga na sake”에 대한 구절이다. 여기서 sakesakati의 형태로서 ‘doubts; hesitates’의 뜻이다. Jaggawakefulness(깨어있음)의 뜻이다. 따라서 “Jagga na sake”의 의미는 주저함 없이 깬다는 뜻이 된다. 깰 때 깬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깬 채로 누워 있지 않고라 하였다. 대체 깬 채로 누워 있지 않고란 무슨 뜻일까? 여러 번 읽어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누워 있는 것을 말할까?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 잠드는 것 두려워 않노라와도 매칭이 되지 않는다.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해하다. 빅쿠보디는 “I do not lie awake in dread”라 하여 두려움 때문에 깬채로 있지 않는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시 난해한 문장이다.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 데 두려움 없네라 하였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깬 채로 누워 있지 않고, 잠드는 것 두려워 않노라라 하여 대단히 난해하게 번역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I do not lie awake in dread, Nor am I afraid to sleep”라 하여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빠알리 구문 “Jagga na sake napi bhemi sottu은 정확하게 어떤 뜻일까? 풀이 하면 주저하지 않고 잠들고 두려움이 깨는 것을 말한다. 잠을 잘 잔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말과 관련하여 와선(臥禪)’이라는 것이 있다. 누운 자세로 하는 참선을 말한다.

 

와선(臥禪)과 관련하여

 

와선과 관련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2009년 당시 위빠사나 수행처를 다녔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막 가질 때 이어서 수행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한국위빠사나선원을 찾아 갔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때 당시 매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거의 네 시간 동안 법문, 경행, 죄선, 인터뷰 순으로 진행 되었다. 이에 대하여 블로그에 위빠사나수행기라는 글을 시리즈로 올린 바 있다. 이렇게 2009년 일년 동안 약 50회에 걸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 수행중에 와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와선은 어떤 것일 것일까?

 

와선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기4] 와선(臥禪),자면서도 수행 있을까(2009-01-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에서 와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매일 잠을 잔다. 잠을 잔다는 것은 잠재의식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하루가 끝나고 다음날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본다면 죽음으식과 재생연결식과 매우 유사 하다. 따라서 잠들기 전에 마지막 의식 또한 꿈속의 내용을 결정 할 것이다. 잠들기 전에 일어 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관찰 한 채로 잠들다가 깨어 나서도 호흡을 관찰 한다면 죽음-재생연결식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수행 방법중의 하나가 '와선(臥禪)'이다. 누워서 하는 수행이다. 호흡을 관찰 하면서 잠에 드는 수행이다.

 

와선은 좌선과 달리 몸이 이완 되어 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이므로 가장 반응이 잘 일어 나는 곳은 배부위에서 일어 나는 호흡이다. 이 곳에 마음을 놓고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본 채로 잠들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잠자는 것도 일종의 죽음을 체험 하는 것이다. 매일 죽었다가 살아 나곤 하는 것이 일상이다. 만일 잠들었는데 깨어 났을 때 내일 올지 내생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와선은 매우 유용한 수행 방법이라 생각 된다.

 

([위빠사나 수행기4] 와선(臥禪),자면서도 수행 있을까(2009-01-09), 진흙속의연꽃)

 

 

위빠사나 수행처에 세 번째 나간 날 와선이라는 것을 하였다. 와선은 누워서 하는 수행을 말한다. 편한한 자세에서 누워 배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하며 알아차리다 보면 잠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알아차리면서 자는 훈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깨어날 때도 역시 알아차리면서 깨어나라고 한다. 알아차리면서 잠을 자고 깰 때도 알아차리면서 잠을 깨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수행법이다.

 

임종순간에 알아차리면서 죽으면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잠드는 모습도 역시 와선에 해당된다. oppasisutta경에따르면 부처님의 잠자는 모습에 대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S4.7)”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잠을 잘 때도 명백히 알아차리면서 자는 것이다. 이처럼 알아차리며 잠을 잔다면 깰 때 역시 알아차리면서 깰 수 있다. 알아차림이 자는 동안에도 유지 됨을 말한다.

 

알아차리며 잠을 자고 알아차리며 잠을 깨면 어떤 점이 좋을까? 첫 번째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다. 불면증으로 인하여 고생하였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잠자는 데 장애가 없고 그것도 푹 잘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알아차리며 잠을 자면 죽을 때 좋은 곳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배의 호흡을 관찰하면서 잠이 든다면 잡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임종순간에 호흡을 관찰하여 임종을 맞는다면 선처에 나거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잠잘 때 다수가 온갖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다보니 잠도 잘 안고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그래서 잠을 제대로 못 잔다. 만일 임종순간에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망상을 대상으로 하여 태어날 곳이 결정 될지 모른다. 이렇게 된다면 선처에 나기 힘들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처에서 와선을 하는 이유는 누워서도 수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부수적으로 잠을 잘 자기 위한 수행도 된다. 그런데 수행처에서 임종순간에 알아차리면서 죽으면 매우 훌륭한 죽음이라 한 것은 매력적이었다. 우스개 소리로 잘 하면 완전한 열반에 들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게송에서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 데 두려움 없네,(Jagga na sake napi bhemi sottu)”라고 노래 한 것은, 부처님이 잘 주무셨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실제로 잠 잘 자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세상에서 잠을 자는 사람(2014-02-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분이었다

 

부처님은 잠을 자는 분이었다. 경에 따르면 알라바까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주무셨습니까?(A3.35)”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Eva kumāra sukhamasayittha, ye ca pana loke sukha senti, aha tesa aññataroti?(A3.35)”라고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잠을 잘 잤을까?

 

부처님은 노지에서도 잠을 잘 잤다. 겨울철 북풍이 몰아치고 서리가 내리는 추운 밤 노지에서도 잠을 잘 자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잠을 잘 잔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존]

“왕자여,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태우면서 괴롭게 잠을 자게 만드는, 그 탐욕이 여래에게는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āavakasutta-알라와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35,전재성님역)

 

 

buddha

 

 

부처님이 잠을 잘 자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탐욕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또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 된 자의 잠자리는 편할 것이다. 비록 북풍의 서리 내리는 겨울밤의 노지일지라도 탐진치가 소멸된 자는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 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잠을 가장 잘 자는 자라 하였다.

 

사랑보다 더 좋은 말 자애(慈愛: metta)’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잠을 못 이룬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 가져 갈 까봐 잠을 못 이룬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분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룬다. 그러나 현재의 있는 조건에 만족한다면 근심 걱정이 있을 수 없다. 또 누군가를 미워하기 보다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애의 마음을 내면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세 번째 게송에서는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편히 누워 있네. (Tasmā supe sabbabhūtānukampīti)”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자비의 마음이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 한다. 불교인들도 컬럼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간의 관계가 연상된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말을 불교인들도 거침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말 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 그것은 자애(慈愛)’이다.

 

초기불교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삐야(piya)’라 하고 자애라는 말은 멧따(metta)’라 한다. 이에 대하여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 삐야(piya,사랑) 아니라 멧따(metta, 자애)(2012-12-0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삐야와 멧따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초기경에 따르면 삐야(piya)라는 말은 사랑으로 번역되고, 세속적이고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욕망 추구에 대한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스런 것들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데, 반드시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초전법륜경의 고성제에서 언급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piyehi vippayogo , 愛別離苦)'이 이에 해당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필연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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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사랑이라는 말 대신 자애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오욕락을 바탕으로 하는 삐야(piaya, 사랑)의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애라는 말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뭇삶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Sn1.8)에 따르면“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자신보다 사랑스런 것은 없다” 삐야(piya,사랑) 아니라 멧따(metta, 자애)(2012-12-07), 진흙속의연꽃)

 

 

이렇게 본다면 불교인들은 사랑이라는 말 보다 자애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애는 일종의 우정을 나타낸다. 이는 남녀간 또는 부부간, 연인간의 사랑, 그리고 육체적 사랑을 배제한 모든 것을 말한다.

 

자애를 많이 닦으면 잠을 잘 잔다

 

자애와 함께 항상 쓰이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연민기뻐함평정이다. 이를 사무량심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뭇삶에 대한 사랑하는 방식이다. 오로지 사랑 하나만 달랑 이야기 하는 것이 하니라 자애와 연민, 기뻐함, 평정 이렇게 네 가지를 항상 말한다. 마치 네 가지가 종합선물세트처럼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만을 말하는 타종교와 차별화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자애를 많이 닦으면 잠을 잘 잔다고 하였다. 이는 게송에서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편히 누워 있네. (Tasmā supe sabbabhūtānukampīti)”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며라는 말은 ‘sabbabhūtānukampīti’를 번역한 것이다. sabbabhūtānukampīti‘sabba(전체)+bhūtā(존재)+anukampīta(연민된)’로 설명된다. anukampītaanukampati의 과거분사형으로 compassioned, gratified의 뜻이다. 자애와 연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자애와 연민을 한단어로 합치면 자비가 된다. 세상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가졌을 때 더 이상 성냄이 일어날 수 없다. 자비는 성냄과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탐진치가 소멸된 자, 특히 성냄이 소멸 된 자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한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다. 자비의 마음을 내는 한 편안하게 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심해탈(慈心解脫)의 공덕 열한 가지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 즉 자심해탈 닦을 때 수행자는 편한하게 잠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열한 가지 이득이 있다고 하였다. 열 한가지 이득이란 무엇인가? 앙굿따라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열한가지 공덕이 있다.

 

 

Mettāya bhikkhave cetovimuttiyā āsevitāya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ekādasānisasā pāikakhā. Katame ekādasa:

 

Sukha supati, sukha paibujjhati, na pāpaka supina passati. Manussāna piyo hoti, amanussāna piyo hoti, devatā rakkhanti, nāssa aggī vā visa vā sattha vā kamati, tuvaa citta samādhiyati, mukhavaṇṇo vippasīdati, asammūho kāla karoti, uttari appaivijjhanto brahmalokūpago hoti.

 

Mettāya bhikkhave cetovimuttiyā āsevitāya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ime ekādasānisasā pāikakh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섬기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면, 열한 가지 공덕이 기대된다.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악몽을 꾸지 않고, 사람들에게 아낌을 받고, 귀신들에게조차 사랑을 받고, 신들이 보호해 주고, 불이든 독약이든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빠르게 삼매에 들고, 안색이 맑고, 당황함이 없이 임종에 들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섬기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면, 열한 가지 공덕이 기대된다.

 

(Mettānisasa sutta-자애 공덕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1.15, 전재성님역)

 

 

이 경은 매우 유명하다. 자애수행의 공덕에 대한 것으로 널리 회자 되고 있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번째를 보면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Sukha supati, sukha paibujjhati)”라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애수행을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말이다. 편안하게 자고 행복하게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

 

왜 니까야가 부처님의 원음이라 하는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Sukha supati, sukha paibujjhati)”라는 구절은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 데 두려움 없네. (Jagga na sake napi bhemi sottu, S4.13)”라는 구절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니까야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종횡으로 엮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니까야가 부처님의 원음이라 하는지, 또 니까야가 틀림 없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는지에 대한 증명이 될 것이다.

 

고통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귀한 손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설령 잠을 잔다고 해도 자는 것 같지 않아 늘 피곤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다. 실제로 와선수행을 해 보면 금방 잠이 들 수 있다.

 

누워 있을 때 가장 강한 대상은 배이다. 호흡을 할 때 배가 일어나고 꺼지곤 하는데 편안한 자세로 누운 상태에서는 가장 강한 대상이다. 위빠사나수행의 포인트는 강한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좌선시에 통증이 발생되면 통증이 가장 강한 대상이기 때문에 통증에 집중하면 된다. 그래서 통증을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통증은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수행을 하면 병도 고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통증이라는 강력한 대상을 만났을 때 그 강한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중에 일어나는 통증은 손님과도 같이 반가운 것이다.

 

손님이 오면 정중하게 맞아 주는 것이 예의 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좌선중에 어딘가에서 통증이 일어나면 주의를 기울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켜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통증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귀한 손님과도 같은 것이다. 고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말못할 고통을 겪었을 때 이를 알아차리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고통에 대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는 귀한 손님으로 보고 있다.

 

2의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고통이 발생하면 회피 하려 한다. 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돌조각에 맞아 다리가 골절되었을 경우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알아차리면 그다지 아프지 않다. 왜 그럴까? 육체적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픔을 느낀다. 그래서 아프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알아차림이 없는 사람들은 아파 죽겠네!”라 한다. ‘아프다에다 죽겠네가 붙어 아파 죽겠네!”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파 죽겠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파 죽겠네!”라는 말은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고통으로 전개 되었음을 말한다. 이런 경우 초기경에 따르면 화살을 한방 더 맞았다고 하여 2의 화살을맞았다고 말한다. 이때 제2의 화살에 대하여 정신적 화살이라 한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으로 고통으로 넘어 가면 흔히 제2의 화살을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사람들은 화살이 가슴에 박혀 매순간 심장에 고통을 겪는다라 하였다. 화살이 가슴에 박힌다는 것은 제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아이고 아파 죽겠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람들은 화살이 가슴에 박혀 매순간 심장에 고통을 겪지만/화살에도 불구하고 잠에 빠지네./ 화살을 뽑아버렸는데.(S4.13)”이라고 노래 하였다. 부처님이 몸이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지만, ‘화살에도 불구하고 잠에 빠지네라 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육체적 화살 한방에 맞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단지 아프네라고 알아차린 것이라 볼 수 있다.

 

행복한 잠자리를 위하여

 

부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했지만 잠을 잘 잘 수 있었다정신적 고통이라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깨는 데 주저함이 없고 잠드는 데 두려움 없네. (S4.13)”라고 말씀 하시면서 모든 뭇삶을 불쌍히 여기며 편히 누워 있네.(S4.13)”라 말씀 하셨다. 성냄이 소멸된 부처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자비의 마음 뿐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자애의 마음을 내면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나고 (Sukha supati, sukha paibujjhati, A11.15)”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잠을 잘 자려면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다.

 

잠을 잘 못 자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공을 뛰어 넘어 유효하다. 그리고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알아차림(sati)’이고 또 하나는 자애(metta)’이다. 잠자리에 들기전 알아차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뭇삶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내면 그 공덕으로 편안히 잠자고 행복하게 깨어날 수 있디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잠못이루는 현대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효과적이다. 행복한 잠자리를 원하거든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야 하지 않을까? 

 

 

 

 

2015-0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