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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27. 15:50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정의롭지 못한 왕들 때문에

 

마라상윳따 스무번째의 경은 통치의 경이다. 권력자의 통치로 인하여 고통 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고요히 명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고 한다.

 

 

Sakkā nu kho rajja kāretu ahana aghātaya ajina ajāpaya asoca asocāpaya dhammenāti

 

죽이지 않고, 죽이게 만들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만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만들지 않고,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S4.20)”

 

 

부처님은 왜 이렇게 생각 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부처님은 정의롭지 못한 왕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에서 처벌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비심으로 이와 같이 말했다.(Srp.I.180)”라 하였다.

 

전쟁광들이 하는 말은?

 

정의롭지 못한 왕들이란 폭력을 일삼는 전쟁광들일 것이다. 전쟁이란 증오심이 있어야 일어난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장수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그리고 극도의 증오심을 부추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증오심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사람의 목숨은 파리목숨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전사들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 십육대국으로 나누어져 서로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전쟁은 늘 일어났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전쟁의 경(S3.14)’을 보면 꼬살라와 마가다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삼촌과 조카 사이의 혈육전쟁이나 다름 없다.

 

공권력이 폭력인 이유

 

부처님은 정복전쟁을 하지 않고 올바로 통치 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이에대하여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통치행위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초불연 상1 488번 각주)”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치행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힘을 말하며 그 힘이라는 것은 폭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지 공권력이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합법적인 힘의 행사이다. 그럼에도 모든 힘은 폭력적 요소를 동반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약자들이 억울하다고 느낄 몰락의 징후가, 최상자가 정의롭지 못하면(2014-09-2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에서 국가의 공권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올렸다.

 

 

국가를 대리하는 것이 정부이다. 그런데 정부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행사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경찰병력을 동원한 공권력이다. 그런데 모든 힘은 폭력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권력 역시 폭력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경찰병력은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롭지 않은 힘이다.”

 

(약자들이 억울하다고 느낄 때 몰락의 징후가, 최상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2014-09-22, 진흙속의연꽃)

 

 

어떤 힘이든지 폭력적인 요소가 있다. 특히 공권력이라는 폭력은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폭력이라는 것이다. 

 

‘~라 하더라식의 표현

 

 

고대 왕조에 있어서 왕권 그 자체는 항상 폭력적인 요소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라고 고민한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법답게 통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법답게 통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그런데 법답게 통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Sakkā dhammenā rajja kāretu)?’라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다. 본경뿐만 아니라 빠알리삼장 전체에서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초불연 상1 488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추측성문구이이다. 대표적으로 “~것으로 보인다라거나 “~하셨다고 한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자신이 없어 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제 삼자적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추측성 문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Srp.I.180에 따르면, 부처님은 정의롭지 못한 왕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에서 처벌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비심으로 이와 같이 말했다.(전재성님 각주)

 

2) 법구경 주석서(DhpA.iv.31~33)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법답지 못한 왕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백성들이 형벌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각묵스님 각주)

 

 

두 번역자의 각주를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말했다.(전재성님 각주)”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각묵스님 각주)”라는 부분이다. 전재성님은 확정적으로 썼는데, 각묵스님은 전달하는 식으로 썼다.

 

내가 없어요. 내가

 

그렇다면 카더라식의 글쓰기가 왜 문제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인터넷에는 유시민님의 글쓰기가 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러분이 방송에서도 많이 들을 겁니다. 요즘 어떤 지식인들이 나와가지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 이것은 뭐 우리 사회가 더 발전되어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되어지면 해결되어질 수 있는 문제라고 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은 우리말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발전되어지고 라는 말은 없어요. 이것은 전부 일본어와 영어의 피동형 문장에서 넘어온 겁니다. 우리나라가 좀 더 발전하면 이렇게 표현해야죠. 우리나라가 좀 더 발전하면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 해결할 수 있는, 저절로 해결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해결될 문제로 보입니다. 나는 없어요. 나는. 내가 없어요. 내가. 글쓰기에.

 

(글을 쓰는 방법, 유시민님)

 

 

유시민님에 따르면 방송등에서 지식인이나 유명인들이 등장하여 종종 “~라고 보입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없어요. 내가라 하였다. 소위 카더라하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빌어 하는 것이다.

 

이는 책임회피라 볼 수 있다. 속되게 말하면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는 것이나 다름 없다. 특히 논문이나 경전 등에서 카더라식의 표현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라고 하여 카더라식의 표현을 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니

 

각묵스님의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S4.20)”라는 문구를 설명하는데 이어서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라는 문구를 사용하였다. 직접 확인 하지 않고 전달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자신이 없어 보이는 듯 하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표현 하였을까? Cdb를 열어 보니 다음과 같다.

 

 

A slightly more elaborate version of the incident, including the verses, is recorded at Dhp-a IV 31-33; see BL 3:213-14.

 

Spk: "The Buddha reflected thus with compassion, having seen people,: afflicted with punishments in realms ruled by unrighteous kings."

 

(cdb 299번 각주)

 

 

빅쿠보디는 법구경 주석서 4 31-33페이지에 경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the verses, is recorded at Dhp-a IV 31-33)’고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이 각주한 법구경 주석서(DhpA.iv.31~33)에 의하면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빅쿠보디는 주석(Spk)을 인용하여 정의롭지 않은 왕들이 자신의 영토에서 백성들을 처벌 하는 등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내고 있다. (The Buddha reflected thus with compassion, having seen people,: afflicted with punishments in realms ruled by unrighteous kings.)라고 하였다. 추측성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세존께서는 법답지 못한 왕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백성들이 형벌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라 하여 마치 타인에게 들은 것을 전달하는 식으로 말하였다.

 

각묵스님은 “‘법답게 통치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Sakkā dhammenā rajja kāretu)?’라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다.(--1, 488번 각주)”라 하였다. 이어서 본경뿐만 아니라 빠알리삼장 전체에서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은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488번 각주)”라 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각묵스님 개인의 견해라 볼 수 있을까? cdb에서 빅쿠보디는 It is interesting that the sutta does not offer an answer to the question whether righteous governance is possible, and this ambiguity pervades the Pali Canon as a whole. (cdb 299번 각주)”라 하였다. 이 설명은 각묵스님이 각주에서 말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 한다.

 

부처님이 나서서 통치하라고?

 

통치와 관련하여 악마와 부처님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빠삐만]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대는 통치하라.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죽이지 않고, 죽이게 만들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만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만들지 않고, 올바르게 통치하라.”

 

(Rajjasutta-통치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0, 전재성님역)

 

 

악마는 부처님에게 통치하라고 말한다. 정의롭지 못한 왕들의 통치로 인하여 백성들이 고통당하느니 차라리 부처님이 나서서 통치하는 것이 나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악마는 부처님을 유혹해서 세속적인 권력을 지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1099번 각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악마의 유혹에 부처님은 왜 그와 같이 말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또 다음과 같이 유혹한다.

 

 

[빠삐만]

세존이여, 그대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만들고 확립하고 구현시켜 훌륭하게 성취하였다. 이제 세존이여, 그대가 히말라야 산이 황금으로 되길 원하면, 그 산은 황금으로 될 것이다.”

 

(Rajjasutta-통치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0, 전재성님역)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을 부를 때 수행자여(samaa)”라고 주로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존이여(Bhagavatā)’라 부른다부처님을 세속으로 나오게 하기 위하여 높여 부르는 것이다. 마치 사기꾼이 사기를 치기 위하여 사장님또는 사모님하는 것과 같다.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네 가지 신통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신통이 있다면 히말라야 산도 황금산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 한다. 그래서 빠삐만은 그 신통을 사용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신통(cattāro iddhipādā)의 기초란 무엇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1)의욕의 신통력의 기초(欲神足chanda-iddhipāda), 2) 노력의 신통력의 기초(勤神足viriya-iddhipāda),  3) 마음의 신통력의 기초(心神足citta-iddhipāda), 4) 관찰의 신통력의 기초(觀神足vīmasā-iddhipāda)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진정한 구제는 무엇인가

 

초기경에 따르면 32상을 갖춘 자가 출현하면 부처 또는 전륜성왕이 된다고 하였다.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이 전륜성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다.

 

 

pabbatassa suvaṇṇassa

jātarūpassa kevalo,
Dvitt
āva nālamekassa

iti vidvā samañcare.

 

Yo dukkhamaddakkhi yato nidāna

kāmesu so jantu katha nameyya,
upadhi
viditvā sagoti loke

tasseva jantu vinayāya sikkheti.

 

 

[세존]

황금으로 이루어진 산이 있어

그 모든 황금이 두 배가 되어도

한 사람에게도 충분하지가 않네.

이렇게 알고 올바로 살아야 하리.

 

괴로움과 그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빠지겠는가.

애착을 세상의 결박으로 알고,

사람은 그것을 끊기 위해 힘써야 하리.”

 

(Rajjasutta-통치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0, 전재성님역)

 

 

악마의 권유대로 세상으로 나가서 전륜성왕이 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륜성왕이 되는 것은 당시대로 한정된다. 비록 당시대의 백성들을 구제할 지 모르지만 더 먼 나라의 사람들이나 미래의 사람들은 구제 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의 바퀴를 굴리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두 구제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과 그 원인을 본 사람이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빠지겠는가라고 말씀 하시면서 애착을 세상의 결박으로 알고, 사람은 그것을 끊기 위해 힘써야 하리라 하였다. 진정한 중생구제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말한다.

 

콜린스의 책을 참고하라고 하였는데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부처님께서 정의롭지 못한 왕의 통치행위에 대하여 답을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빅쿠보디는 does not offer an answer to the question”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세존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다.(--1, 488번 각주)”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어지는 각묵스님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물론 디가니까야 전륜왕의 사자후경(D26)’처럼 법다운 전륜성왕에 대한 언급이 자세하게 나타나는 경들이 있기는 하지만 통치행위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자가 계목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은 지난한 문제라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Collins, 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 pp. 419-436, 448-70을 참조할 것.

 

(초불연 상1 488번 각주, 각묵스님)

 

 

각주를 보면 전륜왕의 사자후경(D26)’이 언급하면서 더 자세한 것은 콜린스의 책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Collins, 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 pp. 419-436, 448-70을 참조할 것.”이라 하였다. 특히 참조할 것이라 하여 명령어를 사용하였다.

 

번역자가 참조하라고 하였을 때 참조부분을 찾아 보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 어느 니까야 어느 경을 찾아 보라고 하였을 때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경이 아닌 다른 책을 참고하라고 하였를 때 대략난감하게 된다. 책을 구입해서 읽으라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이 참조하라고 한 콜린스의 책에 대하여 빅쿠보디도 언급하였다는 사실이다.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It is interesting that the sutta does not offer an answer to the question whether righteous governance is possible, and this ambiguity pervades the Pali Canon as a whole.

 

While some texts admit that righteous rulers do arise (the "wheel-turning monarchs"), the general consensus is that the exercise of rulership usually involves the use of violence and thus is hard to reconcile with perfect observance of the precepts. For an insightful discussion of the ambiguity, see Collins, 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 pp. 419-36, 448-70.

 

(cdb 299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이 각주한 것과 거의 같다. 각묵스님이 통치행위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자가 계목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은 지난한 문제라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라고 각주 하였는데, 이는 빅쿠보디가 the general consensus is that the exercise of rulership usually involves the use of violence and thus is hard to reconcile with perfect observance of the precepts.”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또 각묵스님이 콜린스의 책을 인용하여 여기에 대해서는 Collins, 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 pp. 419-436, 448-70을 참조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 부분 역시 빅쿠보디의 “see Collins, 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 pp. 419-36, 448-70”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이 각주 한 것은 빅쿠보디의 각주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행위라는 명목으로 자행 되는 국가범죄

 

통치행위에 대하여 사람들이 오해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통치자가 하는 일 역시 옳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물정에 대하여 모를수록 심하다. 그래서 나라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통치자가 하는 일에 비난하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하여 모두 바른 것은 아니다. 또한 통치자가 하는 일이라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근대사를 통하여 국가나 통치자가 저지른 범죄행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저지른 국가범죄에 대하여 사람이 먼저인가 국가가 먼저인가? 국가발생 기원과 국가범죄(2014-09-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그렇다면 국가나 통치자가 저지른 범죄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올린 글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다 기억하시겠지만 6.25전쟁 때 보도연맹학살사건, 이런 건 수만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구덩이에 몰아 넣고 총살 시켰는데, 이는 국가가 학살한 거거든요. 국민방위군사건 이런 것은 청년들을 징집해 놓고 밥을 안주어 굶겨 죽인 사건이에요. 그리고 조봉암선생 법살, 장준하선생 암살, 최종길교수 고문치사 등등을 비롯해서 정부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거꾸로 매달고 두들겨패고 죽이고 갖다버리고 이런 일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조계종 불학연구소특강, 유시민 특강 '한국사회의 현실과 국가의 역할' 전체보기, 오마이TV 2014-08-22)

 

 

지금은 작가라 불리우는 유시민님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국민방위군사건, 장준하선생 암살, 박종철고문치사 사건, 최근에는 세월호진실은폐 등 수 없이 많은 국가범죄가 있다. 특히 통치행위라는 명목으로 자행 되는 사건 역시 무수히 많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집단이라 볼 수 있다. 어떤 폭력을 말하는가?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았고 국가를 대리한다. 그런 정부가 합법적이고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일컬어 ‘공권력’이라 한다. 그런데 공권력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데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통치자가 정의롭지 않게 공권력을 행사하였을 때 이는 폭력이나 다름 없다. 지금까지 공권력이라는 이름하에 저질러진 수 많은 국가범죄행위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이 있는 곳에 폭력이 있어 왔다. 힘이 넘쳐 나면 힘을 행사 하고 싶어 하듯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통치하기 위하여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고대 왕조 국가에서의 전제군주의 통치행위는 폭력적 요소를 늘 갖고 있었다. 더구나 정의롭지 못한 군주가 통치하였을 때 백성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 고통은 전쟁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파괴 된다. 전제군주가 영토의 야심으로 또는 경제적 이익으로, 또는 사적인 감정으로 전쟁을 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없는 사회를 원하였다. 바로 이런 점에 대하여 부처님은 죽이지 않고, 죽이게 만들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만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만들지 않고,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S4.20)”라고 고민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세존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다.(--1, 488번 각주)”라 하였다. 과연 그럴까?

 

 

이 땅에서 전쟁을 없앨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국가나 통치자에 의한 범죄행위를 없앨 수 있다.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면 되는 것이다. 담마에 의하여 세계가 정복될 때 더 이상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국가에 의한 범죄나 통치자의 통치 행위에 따른 범죄 역시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이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담마에 의하여 세계는 정복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담마에 의한 정복 담마위자야(Dhammavijaya)(2014-05-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까대왕의 예를 든 것이다.

 

아소까대왕은 불교인들에게 전륜성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에 따르면, 아소까는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아소까의 비문에 실제로 실려 있는 이야기라 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담마위자야(Dhamma vijaya)’라 한다. 아소까의 바위 칙령 13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

 

(아소까 바위 칙령13)

 

 

 

Ashoka Chakra

 

 

 

아소까는 담마에 의한 세계 정복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는 아소까 자신이 끔찍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담마위자야(Dhamma vijaya)’의 경전적 근거는

 

아소까 대왕은 깔링가전쟁에서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하였다. 이후로 아소까는 정복전쟁을 포기하고 오로지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진하였다. 전쟁 없는 세상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의한 통일이라는 그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담마에 의한 정복, 즉 담마위자야의 경전적 근거는 무엇일까? 디가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이를 말해 준다.

 

 

So ima pahavi sāgarapariyanta akhīlamanimittamakaṇṭaka iddha phīta khema siva nirabbuda adaṇḍena asatthena dhammena samena abhivijiya ajjhāvasati.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이 없고 약탈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번영하고 풍요하고 안온하고 평온하고 위해가 없는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

 

(Lakkhaasutta-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  디가니까야 D30,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내용은 전륜왕 사자후의 경(D26)’에서도 나온다. 담마에 의한 정복은 칼과 몽둥이 등 폭력에 의한 정복전쟁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라 하였다. 여기서 정법(dhammena)’이란 주석에 의하면 계행의 법이라 하였다.

 

전륜왕은 법에 의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의롭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는 dhammena라는 말이 ‘Justly, righteously’의 뜻이기 때문이다. 초불연에서는 법답게라 번역하였다.

 

정의롭게 세상을 다스릴 때 전쟁도 없고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S4.20)”라고 고민 하였지만 사실상 초기경전에 그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세존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다.(--1, 488번 각주)”라 하였다. 물론 각주에서 전륜왕 사자후의 경(D26)’을 언급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문구까지 언급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자는 빅쿠보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 들인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전륜성왕이라 일컫는 아소까대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를 천명하였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 올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마에 의한 정복이 디가니까야에서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D30)”라는 경전적 근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구체적인 가르침이 있다. 숫따니빠따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셀라의 경이 그것이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숫따니빠따에서 바라문 셀라가 부처님에게 전륜성왕이 되시어 전차위의 정복자, 사방에 승리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되셔야 합니다.(stn552)”라고 말하였다. 마치 상윳따니까야 통치의 경에서 악마 빠삐만이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대는 통치하라.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죽이지 않고, 죽이게 만들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만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만들지 않고, 올바르게 통치하라.(S4.20)”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바라문 셀라의 말에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명백히 담마에 의한 세계의 정복을 천명한 것이라 보여진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

 

 

이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왕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담마라자(dhammarājā), 즉 가르침의 왕이다. 그런데 담마왕인 부처님은 가르침의 바퀴를 굴린다고 하였다.

 

전제군주는 코끼리군대, 기마군대, 전차군대, 보병군대로 이루어진 사군을 거느려 주변국가로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로지 담마의 바퀴만 굴린다. 그런데 담마의 바퀴(法輪)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절대로 뒤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후진도 안될 뿐 더러 옆으로도 가지 않는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갈 뿐이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것이 진리의 바퀴, 가르침의 바퀴, 법의 바퀴이다. 부처님이 사성제의 진리를 설하였을 때 이를 부정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진리의 바퀴는 전제군주의 사군 보다 더 막강한 것이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이 실현 되었을 때

 

진리의 바퀴를 굴릴 때 모두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였기 때문에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진리로서 받아 들일 때 담마에 의한 정복은 실현된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이 실현 되었을 때 더 이상 전쟁도 없도 슬픔도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담마에 의한 정복은 죽이지 않고, 죽이게 만들지 않고, 정복하지 않고, 정복하게 만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슬프게 만들지 않고, 올바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한가?(S4.20)”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2015-01-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