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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밋디의 경(S4.22)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31. 18:26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밋디의 경(S4.22)에서

 

 

 

정진중에 떠오른 생각

 

사밋디존자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사밋디의 경에 나온다. 경에 따르면 사밋디존자는 정진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 yassa me satthā araha sammāsambuddho.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 yo'ha eva svākkhāte dhammavinaye pabbajito.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 yassa me sabrahmacārayo sīlavanto kalyāadhammāti.

 

내가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을 스승으로 가진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내가 이와 같이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출가한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내가 계율을 갖추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Amiddhisutta-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2, 전재성님역)

 

 

사밋디존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하여 대단히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라 하였다.

 

여기서 진실로(vata)’라는 말이 두 번 사용되었다. 그것은 유익함(lābha: gain)’큰 이익(suladdha: well gained)’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이것은 참으로 내게 이득이구나, 이것은 참으로 내게 큰 이득이구나라고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이득이라는 말이 두 번 나와 동어(同語)가 반복되었다. 빅쿠보디는 “It is indeed a gain for me, it is well gained by me”라 하였다. 번역하면 이것은 정말로 나에게 이익이다. 이것은 정말로 나에게 이익이다가 된다. 역시 동어반복이다.

 

좋은 일을 해서 얻는 이익, suladdha

 

빠알리어구문을 보면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라 되어 있다. 이득이라 뜻이 Lābhāsuladdha이다. 그러나 동어는 아니다. 이득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서로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먼저 lābha의 의미를 보면, 이는 일반적인 이익을 뜻한다. 영어로는 ‘gain; acquisition’의 뜻이다. 그러나 suladdha라는 말은 이익은 이익이지만 약간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PCED194에서 한자어 사전을 보면 suladdha 라는 말은 ‘suladdha:, sulladdha a. [su-laddha] 善得, 善利的라 설명되어 있다.  Suladdha‘su+laddha’의 형태로서, su‘well, 의 뜻이고, laddha‘obtained, たる의 뜻이다. 따라서 Suladdha‘well gained, 善得, 善利的, よくられたる, 善利의 뜻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Suladdha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득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해서 얻는 이익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이득이 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배우고 계율을 준수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에 따라 부가적으로 발생하는 좋은 결과를 뜻한다. 그래서 사밋디존자는 내가 계율을 갖추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라 한 것이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인가?

 

사밋디존자의 생각을 보면 마치 불자가 되기를 참 다행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하여 안도해 하며, 가르침과 계율을 실천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악마 빠삐만이 알아차렸다. 경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이 존자 사밋디의 생각을 마음으로 알아채고 사밋디가 있는 곳으로 와서 무섭고 두려운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경에서는 마치 땅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빠삐만이 방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너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 악마 빠삐만이 온 것이다.”라고 말해 준 것으로 알 수 있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가 잘 되려 할 때 악마 빠삐만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격려하자

 

부처님은 사밋디존자가 생각하는 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겨 사밋디존자를 격려한다. 그래서 싸밋디여, 너는 가서 거기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며 지내라.”라고 말씀 하신다. 이에 사밋디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Evambhanteti kho āyasmā samiddhi bhagavato paissutvā uṭṭhāyāsanā bhagavanta abhivātvo padakkhia katvā pakkāmi.

[싸밋디]

세존이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 싸밋디가 세존께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Amiddhisutta-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제자로서 사밋디존자가 부처님에게 최상의 예를 표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것이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사라졌다라는 말이다. 이는 “bhagavanta abhivātvo padakkhia katvā pakkāmi.구문에 대한 번역이다.

 

이 구문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라고 번역하였다.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세 번경의를 표한을 삽입한 것이다.

 

대괄호치기를 보았을 때

 

대괄호치기라는 것은 읽어도 좋고 안읽어도 좋고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연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다름 아닌 주석적 번역이다. 각묵스님은 친절하게도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본문을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방식은 타당한 것일까?

 

본문에 괄호를 이용한 한자나 대괄호를 이용한 보충어를 보면 문장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마치 유려하게 흘러 가는 강물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구나 산문도 아닌 운문, 즉 게송에서 괄호치기를 보면 시어로서 맛이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어느 경전을 보아도 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보충어를 삽입하는 것을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초불연번역서를 보면 도처에 괄호치기가 산재해 있다. 심지어 게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른쪽으로 [세 번]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bhagavanta abhivātvo padakkhia katvā pakkāmi.구문은 어떤 내용일까?  이구문에서 가장 핵심어는 padakkhia이다.  padakkhiapadakkhiā형태로서 ‘[f.] to go round, keeping the right side turned towards a respectful person or an object of veneration; circumambulation.’라 설명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돈다는 뜻이다. 특히 존경하는 향하여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라 한다.

 

PCED194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padakkhiā라는 말이 들어간 수 많은 경, ‘Vin.I,17; S.I,138; A.I,294; II,21, 182; III,198; Sn.1010; J.I,50, 60; III,392’와 같은 경을 소개 하고 있다.

 

사밋디존자가 부처님에게 최상의 예를 표하는 장면이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사라졌다.”라는 표현이다. 각묵스님은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CDB를 보면 departed, keeping him on the right.”라 되어 있다. ‘그를 오른쪽으로 돌아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 어디에도 경의를 표한다고나 세 번돌았다는 내용이 없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라 번역한 것은 과잉이라 본다. 이런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아마 빠알리 사전에 실려 있는 padakkhiā에 대하여 ‘keeping the right side turned towards a respectful person or an object of veneration’라는 내용을 참고 해서 일 것이다. 설명을 보면 경의를 뜻하는 respectful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초불연의 [경의를 표한]’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세 번]돌아에서 세 번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대괄호치기([])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인가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경의를 표할 대상에 대하여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세 번]돌아라 하였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세 번]돌아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경의를 표하여 세 번 돌았다는 표현이 무수하게 나온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러자 왓지야마히따 장자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듣고] 격려를 받고 분발하고 기뻐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왓지야마히따 경, A10:94)

 

2)

그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바란두 경, A3:124)

 

3)

사함빠띠 범천은 이렇게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을 드린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 거기서 사라졌다. (꼬깔리까 경, A10:89)

 

 

1번항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라 하였다. 빠알리 원문을 보면 “abhivādetvā padakkhia katvā pakkāmi.”라 되어 있다. 번역에 세 번 돌아라는 말이 있지만 원문에는 없는 말이다. 전재성님은 오른쪽으로 돌아 그곳을 떠났다라고 번역하였다.

 

2번항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빠알리 원문은 “bhagavanta abhivādetvā padakkhia katvā pakkāmi.”이다. 어디에도 세 번이라는 말과 경의를 표한 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전재성님은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그곳을 떠났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초불연의 번역은 원문에 없는 단어를 집어 넣어 과잉 번역한 것으로 본다.

 

물론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이다. 만약에 안읽어도 그만식이라면 번역은 매우 이상해지고 만다.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라는 문장은 오른쪽으로 돌아 뒤에 물러갔다.”가 되어 버린다. 이런 문장은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고 문장도 성립하지 않는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굳이 번역에 집어 넣지 않아도 될, 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식의 번역은 군더더기라 본다. 그런데 반드시 번역해야 될 것은 번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도반은?

 

사밋디는 부처님의 격려에 크게 고무된다. 악마 빠삐만이 땅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굉음으로 겁을 주지만 이에 게으치 않고 열심히 정진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싸밋디]

Lābhā vata me suladdha vata me yassa me sabrahmacārayo sīlavanto kalyāadhammāti.

 

내가 계율을 갖추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실로 나에게 유익함이고 진실로 나에게 큰 이익이다.”

 

(Amiddhisutta-싸밋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2, 전재성님역)

 

 

사밋디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 뿐만 아니라 도반도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안심한다. 마치 도반이 있어서 다행이야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수행자에게 있어서 도반은 보통 도반이 아니다.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sabrahmacārayo sīlavanto kalyāadhammāti”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계율을 갖추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계율을 갖춘 자는 ‘sīlavanto’에 대한 번역이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kalyāadhammā에 대한 번역이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자는 ‘sabrahmacārayo’에 대한 번역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나의 동료수행자들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라고 번역하였다. 세 가지 항목 중에서 ‘sabrahmacārayo’에 대한 번역이 빠져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Sabrahmacārī,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인가 동료수행자들인가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았다. CDB를 보면 that my companions in the holy life are virtuous, of good character!”라 되어 있다. 번역해 보면 도덕적이고 좋은 성품을 가진 성스런 생활을 하는 나의 동료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문장에서 키워드는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뜻하는 sabrahmacārayo이다. Sabrahmacārayo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보면 ‘a fellow monk’라 되어 있다. 동료 수행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단순한 동료 수행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단어에 그 의미가 들어 있다.

 

Sabrahmacārayo‘sabrahmacārī’로서 출가도반을 뜻한다. 함께 수행하는 동료수행자이다. Sabrahmacārī‘sa+brahmacārī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sa의 뜻으로 함께라는 의미이다. Brahmacārī‘A religious student’의 의미이다.

 

그런데 Brahmacārībrahmacariya에서 유래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brahmacariya라는 말은 ‘religious life’의 뜻으로 전재성님은 청정한 삶으로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holy life’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sabrahmacārayo sīlavanto kalyāadhammāti”문구에서 가장 핵심어는 ‘sabrahmacārayo’ 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빅쿠보디는 the holy life’를 주어로 내 세웠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나의 동료수행자들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라 하여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각묵스님은 sabrahmacārayo에 대하여 단지 사전적 의미로 동료수행자들이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어원에 따른 정확한 번역은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전재성님역)’ 또는 my companions in the holy life(빅쿠보디역)’이라 해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왜 그런가? 이미 출가한 자들은 청정한 삶을 살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sabrahmacārayo sīlavanto kalyāadhammāti

 

1) 내가 계율을 갖추고 착한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재성님역)

 

2) 나의 동료수행자들은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각묵스님역)

 

3) my companions in the holy life are virtuous, of good character!(빅쿠보디역)

 

 

각묵스님역을 보면 동료수행자들을 주어로 내세웠다. 그래서 동료수행자들이 계행을 구족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계행을 갖추고 선한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 대하여 청정한 삶을 사는 도반이라 하여 청정한 삶, 즉 브라흐마짜리야를 강조하였다. 빅쿠보디 역시 the holy life’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각묵스님역에서는 출가자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볼 수 있는 청청정한 삶이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했고

 

왜 출가자에게 있어서 청정한 삶이 중요할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밋디의 게송으로 알 수 있다.

 

 

 

Amiddhisutta(싸밋디의 경,S4.22)

  

빠알리어

Saddhāyāha pabbajito

agārasmā anagāriya,
Sati paññā ca me buddhā

cittañca susamāhita,
Kāma
karassu rūpāni

neva ma byādhayissasīti.

agārasmā anagāriya

전재성님역

[싸밋디]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했고

새김과 지혜가 성숙해서

마음은 삼매에 들었네.

마음대로 그대의 모습을 바꾸어도

나를 두렵게는 하지 못하리라.”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각묵스님역

나는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에서 나와 집 없이 되었나니

나의 마음 챙김과 통찰지는 익었고

마음은 삼매에 들었도다.”

집에서 나와 집 없이 되었나니

 

빅쿠보디역

"I have gone forth out of faith

From the home to the homeless life.

My mindfulness and wisdom are mature,

And my mind well concentrated.

Conjure up whatever forms you wish,

But you will never make me tremble."

From the home to the homeless life

 

 

 

 

이 게송은 육구게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과 빅쿠보디는 육구게로 번역하였다. 그런대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사구게로 되어 있다. 나머지 두 개의 게송이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의 초불연 번역

 

각묵스님역에서 두 개의 게송이 왜 빠져 있을까? 그것은 산문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송이 끝난 다음에 산문에서 그대 원하는 형색들을 아무리 만들어 내더라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로다.””라 되어 있다. 이는 실수이다. 게송의 영역에 있어야 할 문장이 산문에 실려 있는 것은 편집과정에서 실수로 본다. 이는 못할 것이로다.”’ 라는 끝 문장에서 알 수 있다. 뒤에만 따옴표 쌍따옴표가 있고 앞에는 없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또한 편집상의 실수로 본다. 문제의 초불연 번역을 다시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나는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에서 나와 집 없이 되었나니

나의 마음 챙김과 통찰지는 익었고

마음은 삼매에 들었도다.”489

 

그대 원하는 형색들을 아무리 만들어 내더라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로다.”

 

 

이와 같은 번역방식은 명백히 잘 못 된 것이다. 이를 바로 잡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에서 나와 집 없이 되었나니

나의 마음 챙김과 통찰지는 익었고

마음은 삼매에 들었도다.

그대 원하는 형색들을 아무리 만들어 내더라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로다.” 489

 

 

이렇게 해야 맞다.

 

불교에서 믿음은?

 

사밋디의 게송을 보면 믿음을 가지고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Saddhāyāha pabbajito’에 대한 번역이다. 여기서  믿음을 가지고(to have faith)’라는 뜻은 saddahati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라고 하면 단순한 믿음도 아니고 맹목적 믿음도 아니다. 불교에서 믿음은 확신에 찬 이성적인 믿음이다. 이를 빠알리로 삿다(saddaha)’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어떤 믿음을 가졌길래 믿음을 가지고 출가했다고 하였을까?

 

초기경의 특징은 대부분의 경이 연계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송이 하나 있다면 다른 경전에도 관련된 게송이 있음을 말한다. 사밋디의 게송도 마찬가지이다.

 

사밋디가 믿음을 가지고 출가하였다고 하였을 때 출가의 동기가 된 믿음은 단순한 믿음도 아니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이다. 가르침을 실천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출가한 것이다. 이렇게 출가의 동기가 된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보인다.

 

날라까빠나 법문의 경(M68)에서

 

맛지마니까야 날라까빠나 법문의 경(M68)’에 따르면 훌륭한 제자들과 함께 있있었다. 훌륭한 가문들의 아들들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이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는데, 수행승들이여, 그들 수행승들이 청정한 삶에 대하여 기뻐하는가?”라고 묻는다. 세 번 묻고서는 아누룻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신다.

 

 

Sādhu sādhu anuruddhā eta kho anuruddhā tumhāka patirūpa kulaputtāna saddh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na ya tumhe abhirameyyātha brahmacariye.

 

Yena tumhe anuruddh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hamena vayasā susu kālakesā kāme paribhuñjeyyātha. Tena tumhe anuruddh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hamena vayasā susu kālakes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Te kho pana tumhe anuruddhā neva rājābhinīt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na corābhinīt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na iaṭṭ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na bhayaṭṭ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na ājīvikāpakatā agārasmā anagāriya pabbajitā. Api ca khomhi otiṇṇo jātiyā jarāya mara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dukkhotiṇṇo dukkhapareto appevanāma im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antakiriyā paññāyethā'ti.

 

“아누룻다여, 훌륭하다. 훌륭하다. 그대들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이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청정한 삶을 기뻐하는 것은 그대들 누구에게나 훌륭한 일이다.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꽃다운 청춘을 갖추고 아주 검은 머리를 하고 있고 인생의 초년에 감각적 쾌락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아누룻다여, 그대들은 꽃다운 청춘을 갖추고 아주 검은 머리를 한 인생의 초년인데도 불구하고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그대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은 왕의 명령 때문도 아니고, 도둑에 쫓겨서도 아니고, 부채 때문도 아니고, 공포 때문도 아니고, 빈궁 때문도 아니다. 그대들은 이와 같이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빠졌다. 괴로움에 빠졌고 괴로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러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을 종식시키는 것에 대해 알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이 아닌가?

 

(Naakapāna sutta- 날라까빠나 법문의 경, 맛지마니까야 M68,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출가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굳이 출가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누군가 강제로 출가하라고 하여 출가 한 것도 아니고 굶어 죽을 까봐 먹고 살기 위하여 출가한 것도 아니라 하였다.

 

왜 출가하는가?

 

괴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출가 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더 이상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이는 랏타빨라의 경에서 출마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마치 도둑이 강도에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랏타빨라 경-Raṭṭhapalasutta, 맛지마니까야 M82,전재성님역)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는 매우 유명하다. 이 출가이유를 보고서 고래로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였다고 한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괴로움의 종식과 동시에 윤회의 종식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이유가 있어야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양가의 훌륭한 자제들이 출가한 이유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출가하였다. 만약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포기함 없이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출가한 자들의 공통된 목표가 있다. 그것은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이라 하였다. 이런 목표를 위해 출가한 자들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하나의 정형구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na cirasseva yassatthāya kulaputtā sammadeva agārasmā anagāriya pabbajanti tadanuttara brahmacariyapariyosāna diṭṭheva dhamme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āsi.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 kata karaīya nāpara itthattāyāti abbhaññāsi.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

 

 

훌륭한 집안의 자제들이 앞다투어 출가한 이유는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정형구에 따르면 반드시 들어 가는 말이 청정한 삶이다. 이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를 말한다.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brahmacariyapariyosāna diṭṭheva dhamme saya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āsi)”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의 조건은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골절주지의 귀사일기

 

청정한 삶의 실현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말은 불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하나의 정형구로 정형화 되어 있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였을 때 반드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아라한선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을 위하여 깊은 산속에 들어가 하루 종일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려 주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현재 불교포커스에 연재되고 있는 시골절주지의 귀사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강원(승가대학)에 들어가서 치문을 배우며 만난 것은 다음과 같은 선언이었다. ‘대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뚫는 의지가 있는지라. 여래께서 행하신 곳을 향하여 행하지 않는 것도 이것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부처님의 행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것도 이것이다(丈夫自有衝天志 不向如來行處行是也 非佛之言不言 非佛之行不行 亦是也)’.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한정 긍정하는 이 선언을 가슴에 품고 살았지만 그것도 또한 어느 곳으로 가라는 방향이 되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나에게 무한한 힘을 주었던 글귀는 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이었다. 이 말에 대한 철썩 같은 믿음은 화두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었고 출가한 대장부의 살림살이를 멋지고 활기차게 하였다. 인간은 평등하고 부처와 동급이며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부에 진척이 없이 세월만 흐르자 다시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선방을 다니기 십년이 흐를 무렵 화두 들기에 지쳐 화두를 놓아 버렸을 땐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숨 쉬는 한 마리 야생의 동물이 숲속에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 후 경전을 읽으면서 나에게 불교는 비로소 바른 견해, 괴로움의 소멸, 일체유심조 등으로 다가왔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와 성스러운 바른 견해로 설명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교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게 해주었고, 괴로움의 소멸은 언젠가 깨달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에서 내게 발견되는 괴로움들이 바로 내가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로 인식하게 하였다.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가르침은 막연히 가지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이미지를 버리고 어떤 사람이 선지식인가 하는 판단기준을 갖게 하였다. ‘전통이라고 해서 따르지 말라는 가르침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하였고의도적인 행위가 업이라는 가르침은 생각하고 말할 때 내 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일체유심조는 내게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책임이 나에게 동시에 있으므로 내가 이 세상의 주인임을 알게 하였다. 그 주체적인 태도는 일상생활에서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라는 생활태도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들의 구체성은 실제로 나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살게 하는 에너지가 되었고 부처님이 나의 스승이라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제대로 스승을 만나면, 스스로가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결심하게 되기에 스승을 만난 것과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 차이가 크다.

 

(불교, 어떻게 설명하지? 시골절주지의 귀사일기, 불교포커스 2015-01-28)

 

 

시골절 주지스님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다만 시골절 주지라는 이름으로 인기연재 되고 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시골절 주지스님에 따르면 깨달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신비화 하고 스님이 아니면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시골절 주지스님의 체험담에 따르면 별거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하였다. 그래서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가르침은 막연히 가지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이미지를 버리고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것은 청정한 삶으로 실현된다. 초기경에서 양가집 자제들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것도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왜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까? 정형구에서도 표현 되어 있듯이 탐진치 없는 청정한 삶을 살면 열반이 실현 되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을 살게 되면 자신의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 스스로 알게 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스스로 선언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아는 아라한선언이라는 것이다.

 

아라한선언으로 출가의 목적은 달성된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탐진치를 소멸해 가는 청정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그 청정한 삶을 빠알리어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 한다.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밋디존자는 믿음을 가지고 출가 하였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를 감행한 것이다. 그런 사밋디존자에게 악마 빠삐만이 나타나 커다란 굉음으로 겁을 주면서 믿음을 약화 시키고자 한다. 경에서는 눈을 멀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밋디존자는 악마 빠삐만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사밋디존자는 악마 빠삐만이 자신을 눈 멀게 하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게송으로서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는 출가했고/ 새김과 지혜가 성숙해서/ 마음은 삼매에 들었네./ 마음대로 그대의 모습을 바꾸어도/ 나를 두렵게는 하지 못하리라.(S4.22)”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수행승 싸밋디는 나에 대하여 안다라고 알아채며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을 떠 났다고 하였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몰랐을 때 두렵고, 불확실 할 때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알고 나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진다. 깜깜한 방에서 촛불을 켜거나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방안이 순식간에 밝아 지듯이, 마찬가지로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Candle light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힘들다는데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힘들다고 한다. 어쩌다 세상에 태어나 세상에서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살아 간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한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괴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 갈까? 그것은 세상을 사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몰라서 힘든 것이다. 반대로 알면 힘들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힘들지 않게 살아 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면 세상이 힘들지 않은 것이다.

 

알면 사라진다고 하였다. 악마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인줄 알았을 때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경에서도 악마는 정체가 탄로 났을 때 나에 대하여 안다라고 말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알면 사라지는 것이다.

 

 

2015-01-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