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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칠 년 추적과 세 딸 유혹을 물리친 붓다, 황진이의 단 한번의 유혹에 무너진 지족선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3. 15:56

 

악마와 칠 년 추적과 세 딸 유혹을 물리친 붓다, 황진이의 단 한번의 유혹에 무너진 지족선사

 

 

 

마라상윳따 마지막의 경은 악마의 딸들에 대한 경(S4.25)’이다. 약 칠 페이지에 걸친 꽤 긴 길이의 경이다. 이 경의 시작은 바로 이전의 칠 년 추적의 경(S4.24)’에 대한 후미에서부터 시작 된다. 이렇게 본 다면 두 경은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

 

경의 시작은 그 때 악마의 딸들인 땅하, 아라띠, 라가가 악마 빠삐만이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 말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이와는 다르다. 다음과 같이 경이 시작 되기 때문이다.

 

 

그 때 마라 빠삐만은 세존의 곁에서 이런 절망에 찬 게송들을 읊은 뒤 그곳으로부터 물러나서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땅 위에 주저앉아서 말이 없고 당혹하고 어깨가 축 처지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가 꺽여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손톱으로 땅을 긁고 있었다.

 

(초불연 상윳따1, 마라의 딸들 경, S.4.25,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역을 보면 이런 절망에 찬 게송들을 읊은 뒤라는 말이 있다. 이런 게송을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바로 이전 칠 년 추적의 경(S4.24)’에서 악마가 읊은 두 개의 게송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 문장은 이전 경의 말미에 위치해야 한다. 전재성님은 이전 경의 말미에 이 문장을 두었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이전 경의 말미에 두지 않고 마라의 딸들 경(S.4.25)’의 도입부에 두었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하고 있다.

 

 

Ee1, Se에는 이 문단이 앞 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Be, Ee2에는 본경의 맨 처음으로 편집되어 나타난다. 문맥상 후자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보디 스님도 후자로 읽어서 옮겼고 역자도 이를 따랐다.

 

(초불연 상윳따1 513번 각주,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빅쿠보디의 번역방침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e and Eel make this paragraph the last of the preceding sutta, but I follow Be and Ee2. As the two suttas form a single narrative, the division between them is arbitrary.

 

(cdb 321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두 경은 하나의 나레이션으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록두 개의 경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의 경으로 보기 때문에 어디서 나누었는지는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다만  Se and Eel에서는 문장을 이전 경의 후미에 두었지만, Be and Ee2에 따라 문장을 이 경의 앞에 둔다고 하였다. 여기서 Se는 싱할라본, Eel PTS본으로서 1884년 것을 말한다. Be는 미얀마 육차결집본, Ee2 PTS본으로서 1998년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은 미얀마본과 PTS본으로서 1998년본을 따른 것이다. 반면 전재성님은 싱할라본과 PTS본으로서 1884년본을 따른 것이다.

 

손톱으로 긁었나 지팡이로 긁었나?

 

경을 보면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에게 패하여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우스꽝스럽게표현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손톱으로 땅을 긁고 있었다라는 표현이다. 전재성님은 지팡이로 땅을 긁으며 주저 앉았다.”라고 하였다. 손톱과 지팡이 어떤 것이 맞을까?

 

문제의 문장에 대하여 빠알리원문을 보면 “kaṭṭhena bhūmi vilikhantoti”이다. 여기서 ‘kaṭṭhena’‘plouhged; tilled. (nt.) timber; a piece of wood.’의 뜻이다. ‘Bhūmi’을 말하고, ‘Vilikhati’‘scratches; scrapes’의 의미이다. 따라서 “kaṭṭhena bhūmi vilikhantoti”를 직역하면 나무의 조각으로 땅을 긁다의 뜻이 된다. 전재성님이 지팡이로 땅을 긁으며라고 한 것이 맞다. 그렇다면 각묵스님은 왜 손톱으로 땅을 긁고 있었다고 하였을까? 이럴 경우 빅쿠보디의 번역을 보면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scratching the ground with a stick”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a stick은 막대기를 뜻한다. 번역하면  막대기로 땅을 긁고가 된다. 그런데 왜 각묵스님은 손톱으로 땅을 긁었다고 하였을까? 빠알리 원문에는 ‘kaṭṭhena’가 분명히 막대기의 뜻으로 되어 있는데 왜 손톱으로 번역하였을까? 이유를 알 수 없다.

 

악마 빠삐만이 만류하기를

 

악마의 딸들은 아버지 왜 우울해 하십니까? 어떤 사람 때문에 슬퍼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서는 야생의 코끼리를 묶듯이 우리가 탐욕의 끈으로 포박하여 데리고 와서 아버지 지배 아래 두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딸들이 부처님을 유혹하여 보통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에 빠삐만은 다음과 같이 만류한다.

 

 

  

Māradhītusutta(악마의 딸들에 대한 경, S4.25)

비고

빠알리어

Araha sugato loke

na rāgena suvānayo,
Māradheyyamatikkanto

tasmā socāmaha bhūsanti.

suvānayo

전재성님역

[세존]

세상의 거룩한 님, 올바로 잘 가신 님을

탐욕으로 유혹하기가 쉽지 않네.

악마의 영역을 뛰어넘으니

나에게 슬픔이 매우 깊구나.”

유혹하기가

각묵스님역

아라한이며 세상의 선서인 부처는

애욕으로 꼬드겨서 잡아들이지 못하나니

그런 그는 마라의 영역을 넘어섰구나.

그래서 나는 지금 몹시 슬프니라.”

꼬드겨서

빅쿠보디역

"The Arahant, the Fortunate one in the world,

Is not easily drawn by means of lust.

He has gone beyond Mara's realm:

Therefore I sorrow so bitterly."

easily drawn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이 악마의 영역을 벗어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의 영역(māradheyya)’이란 ‘죽음의 나라동의어이다. 이미 올바로 깨달은 부처님은 불사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꼬드기다꼬시다

 

악마의 딸들은 부처님을 유혹하고자 한다. 이에 빠삐만은 그렇게 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 한다. 오온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아 번뇌가 소멸된 자는 어떤 유혹에도 넘어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na rāgena suvānayo”라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탐욕으로 유혹하기가 쉽지 않네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애욕으로 꼬드겨서 잡아들이지 못하나니라 하였다. 여기서 꼬드기다라는 말은 표준어일까 속어일까?

 

사전에 따르면 꼬드기다라는 말은 어떠한 일을 하도록 꾀어 부추기다라는 말이다. 사전에 등재 된 말이다. 이와 유사한 말이 꼬시다이다. 그런데 사전에 따르면 꼬시다는 속어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러나 꼬드기다라는 속어처럼 보인다. 나만 그럴까?

 

꼬드기다라는 말은 ‘suvānayo’를 번역한 것이다. PCED194에 따르면 ‘Easily led’라 되어 있다. 쉽게 따라온다는 뜻이다. 따라서 “na rāgena suvānayo”의 뜻은 악마의 딸들이 탐욕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easily drawn by means of lust”라 하였다. 번역하면 정욕으로 쉽게 끄집어 내는이라는 뜻이 된다. 욕정이 일어나게 하여 타락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자극하여 유혹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립니다

 

악마의 딸들은 부처님을 유혹하기 위하여 부처님 면전에 나타난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이 인사한다.

 

 

  

Māradhītusutta(악마의 딸들에 대한 경, S4.25)

 

빠알리어

Atha kho tahā ca aratiragā ca māradhītaro yena bhagavā tenupasakamisu. Upasakamitvā bhagavanta etadavocu: pāde te samaa paricāremāti. Atha kho bhagavā na manasākāsi yathā ta anuttare upadhisakhaye vimutto.

 

전재성님역

그러자 악마의 딸들인 땅하, 아라띠, 라가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악마의 딸들]

수행자여,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립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집착을 부수어 위없는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에 유념하지 않았다.

 

각묵스님역

그러자 마라의 딸 딴하와 아라띠와 라가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사문이여, 우리는 당신의 발아래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으셨나니 존재의 근거를 모두 부수어 위없는 해탈을 성취하셨기 때문이었다.

 

빅쿠보디역

Then Mara's daughters-Tanha, Arati, and Raga-approached

the Blessed one and said to him: "We serve at your feet, ascetic."

But the Blessed one paid no attention, as he was liberated in the unsurpassed extinction of acquisitions

 

 

 

 

Mara's 3 daughters: Raga, Tanha and Arati.

 

 

악마의 세 딸들이 부처님을 본격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이다. 딸들은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립니다(pāde te samaa paricāremā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pāde te samaa paricāremāti: ‘수행자여, 우리는 당신의 시녀가 되겠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paricāreti’즐긴다라는 뜻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1161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립니다라는 말은 당신의 시녀가 되겠습니다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paricāreti’즐긴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장면

 

초기경을 보면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장면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주로 부처님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존자여, 눈을 갖춘 님이여,

바라문 존자 바바린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음이 고양되어 환희하며

그대의 두 발에 엎드립니다.(숫따니빠따, 서시의 경)

 

2)

그러자 꼬쌀라 국왕 빠쎄나디는 처소로 들어가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존의 두 발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이름을 대며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M89)

 

3)

바라문 브라흐마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윗옷을 걸치고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나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존의 두 발에 입을 맞추고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M91)

 

4)

그때 존자 앙냐씨 꼰당냐가 오래간만에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입을 맞추고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M73)

 

 

부처님의 면전에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두 발에 입을 맞추고 심지어 두 발을 껴안는 것은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보디 스님에 의하면 가이거(Geiger)

 

악마의 딸들도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시녀가 되겠다는 식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주석서는 여기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다. 보디 스님에 의하면 가이거(Geiger)는 독일어 번역에서 이것은 여자 노예처럼 당신을 성적으로 섬기겠다고 한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하며, 보디 스님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보디 스님 423 324번 주해 참조)

 

(초불연 상윳따1 516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가이거(Geiger)가 등장한다. 가이거는 독일의 번역자이다. 성전협의 번역서 말미에 용어설명을 보면 가이거(Geiger,W)에 대하여 ‘Pali Dhamma’의 저자로 소개 하고 있다. 독일어로 된 ‘Kleine Schriften(Wiesbaden: Franz Steiner Verlag, 1973)'라는 책을 참고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가이거(Geiger,W)는 누구인가?

 

가이거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Wilhelm Ludwig Geiger (1856-1943) was a German Orientalist in the fields of Indo-Iranian languages and the history of Iran and Sri Lanka. He was known as a specialist in Pali, Sinhala language and the Dhivehi language of the Maldives. He is especially known for his work on the Sri Lankan chronicles Mahāvasa and Cūlavasa of which he made critical editions of the Pali text and English translations with the help of assistant translators.

 

(Wilhelm Geiger)

 

 

위키백과에 따르면 가이거는 독일출신으로서 인도-이란어 분야의 동양학자이다. 특히 빠알리어 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빠알리 원전과 영역본에 대한 비평서를 출간하였다.

 

가이거의 인생을 보면, 그는 1895년 해당언어를 연구하기 위하여 스리랑카로 건너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가이거 가운터(가이거 계수기)’의 발명자인 한스 가이거(Hans Geiger)’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이거 계수기의 발명자 한스 가이거(Hans Geiger)’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스 가이거(1882-1945)’는 독일 포츠담에서 태어난 물리학자이다. 물리학과 관련하여 위키백과에서는 가이거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만난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우정을 쌓기 시작해 평생동안 개인적 및 직업적 파트너였다 그들은 에너지 광선과 유해 물질에서 입자를 제공에 러더퍼드의 알파 입자 검출 릴리스의 기반으로 시작된 실험 입자 물질 방사성 물질에서 원자 고체 이후 알파의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얇은 입자를 러더 포드와 가이거는 원자를 통해 가이거 빛의 섬광의 작은 디자인으로 되었다 관찰중 그들은, 화면 포일에 기계를 골드를 통해 입자를 쏠 알파 섬광이 분마다 수천의 계산 작업이었고, 길고 힘든 가이거 연구는 카운트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하는 발명보다 쉽게, 많은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Kleine Schriften

 

빠알리 학자 윌리엄 가이거의 저작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이 언급한 것은 Kleine Schriften zur Indologie und Buddhismuskunde, hrsg. von Heinz Bechert. Steiner,Wiesbaden 1973.’이다. ‘Kleine Schriften’은 어떤 내용일까? 영문판 위키백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Kleine Schriften is a German phrase ("short writings" or "minor works"; Latin: Opuscula) often used as a title for a collection of articles and essays written by a single scholar over the course of a career. "Collected Papers" is an English equivalent.

 

These shorter works were usually published previously in various periodicals or in collections of papers (such as a Festschrift) written by multiple scholars.

 

A scholar's Kleine Schriften may be contained in a single volume, or several volumes published at once or (more commonly) in series within a period of a few years. Multi-volume collections may contain a scholar's minor or lesser-known book-length works as well.

 

The title is usually reserved for the collected works of a scholar who wrote primarily in German or whose first language was German.

 

The collection of a scholar who worked or taught internationally will often contain essays in more than one language; the multi-volume Kleine Schriften of Walter Burkert, for instance, includes work in German, English, and French.[1] In the case of expatriates, articles in the host language may outnumber those in German.

 

This is particularly true of German philologists who emigrated in the 1930s, many of whom published much of their research in English or French; Friedrich Solmsen's three-volume Kleine Schriften,[2] in which English articles outnumber German, is an example.

 

Kleine Schriften may also appear as an explanatory subtitle; for example, Gotica: kleine Schriften zur gotischen Philologie, a collection of papers on the extinct Gothic language by Ernst A. Ebbinghaus.[3]

 

(Kleine Schriften)

 

 

전재성님이 번역한 번역서를 보면 수 많은 참고자료가 실려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이거의 비평서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각주에서 위의 모든 시들은 가이거에 의하면, 아마도 여러 다른 하늘사람들이 각각 읊은 것으로 보인다(상윳따1 266번 각주)”라 하여 가이거의 주석을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경우 보디 스님에 의하면 가이거(Geiger)는 독일어 번역에서 이것은 여자 노예처럼 당신을 성적으로 섬기겠다고 한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하며, 보디 스님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보디 스님 423 324번 주해 참조)”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빅쿠보디의 번역서와 각주를 참고 하였지만 가이거의 저서는 참고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빅쿠보디는 가이거의 설명을 인용하여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수행자여, 당신의 두 발에 예배드립니다(pāde te samaa paricāremāti)”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어떻게 각주하였을까? Cdb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On the idiom pāde te samaa paricāremā, Geiger remarks: "In courteous speech one uses pādā, feet, for the person. The meaning is: 'We want to be at your command like slave-women'" (GermTr, p. 193, n. 5). A sexual innuendo is unmistakable. Spk, strangely, does not offer any explanation here of anuttare upadhisakhaye vimutto, but see n. 356.

 

(cdb 324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가이거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악마의 딸들이 부처님에게 정중하게 두 발로 예배 드리는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시녀로서 당신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성적암시(sexual innuendo)’로 보고 있다. 그런데 주석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성적으로 유혹하려 하지만

 

빅쿠보디는 anuttare upadhisakhaye vimutto’와 관련하여 각주 356(n. 356)을 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부처님이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에 유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Cdb 356번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pk explains vimutto upadhisakhaye in pada d thus: "He is liberated into Nibbana, known as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 as object." The expression is also at MN I 454,3-4 and II 260,22-23. Spk-pt defines “the end of all kamma" (sabbakammakkhaya) as arahantship and “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 as Nibbana. See too 4:25 and n. 324.

 

(cdb 356번 각주, 빅쿠보디)

 

 

Cdb 356번 각주는 수행녀상윳따(S5)에서 시수빠짤라의 경(S5.8)에 실려 있는 게송에 대한 설명이다. 게송에서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러/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cdb 각주에서도 주석을 인용하여 집착의 소멸(the extinction of acquisitions)은 다름 아닌 열반으로 해탈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해탈한 자에게 아무리 성적으로 유혹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땅하(tahā), 아라띠(arati), 라가(raga)

 

악마의 딸들의 이름은 땅하, 아라띠, 라가이다. 그런데 딸들의 빠알리어 이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땅하(tahā)갈애를 의미한다. 아라띠(arati)는 불쾌를, 라가(raga)는 탐욕을 의미한다. 이는 다름 아닌 버려야 할 오염원이다.

 

 

 

Mara's 3 daughters

 

 

갈애, 불쾌, 탐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들이 부처님에게 시녀로서 봉사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을 성적으로 유혹하겠다는 말과 다름 없다. 그래서 번뇌다한 성자를 범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숫따니빠따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Sn4.9)’에서

 

상윳따니까야에서 땅하, 아라띠, 라가 이렇게 세 명의 악마의 딸들에 대하여 세 번역서에는 더 이상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숫따니빠따에는 세 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이 있다. 숫따니빠따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Sn4.9)’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Disvāna taha arati ragañcā
N
āhosi chando api methunasmi,
Kimevida
muttakarisapuaa
P
ādāpi na samaphusitu na icchi

 

[세존]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두 발조차 그것을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stn835)

 

 

 

Tanha, Arati, Raga

 

 

경에서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경의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다.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사왓티에 계실 때였다. 꾸루국의 바라문인 마간디야는 마간디야라는 황금색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는 딸을 황금색 피부를 가진 배우자와 혼인시키려 하였다. 많은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바라문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어느 날 부처님은 사왓티에서 나와 깜마사담마라는 총림에 앉아 금색의 광명을 비추었다. 바라문은 그 빛을 보고는 ‘그것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부처님인 것을 알고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부처님께 자신의 딸을 주려고 생각했다.

 

그는 급히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다. ‘딸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으니 딸을 치장시켜 그에게 줍시다. 그래서 바라문의 처는 딸을 향수로 목욕시키고 의복 꽃 장식으로 치장했는데 그때 세존께서 탁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세존께서는 깜마사담마로 탁발을 나갔다. 그들이 딸을 데리고 부처님이 앉아 있던 곳으로 왔으나 세존께서 사라진 것을 알았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앉아있던 자리의 풀로 만들어진 자리를 보고는 앉아계시던 분은 모든 번뇌에서 해탈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라문 마간디야는 ‘축복의 순간에 불길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나서 바라문의 처가 여기저기 걷다가 부처님의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마간디야의 아내는 그 발자국을 보고도 그 발자국의 주인은 욕망에 묶여있지 않은 분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욕망에 물든 자의 발자국은 굽어있고, 분노한 자의 발자국은 끌려 있고, 어리석은 자의 발자국은 급히 눌려 있으나, 번뇌를 걷어낸 자의 발자국은 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때에 세존께서는 식사를 끝내고 총림으로 돌아왔다. 바라문의 아내는 상서로운 광명으로 가득 찬 세존을 보고는 ‘이런 분을 보고 욕망을 즐기라고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바라문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세존은 풀로 만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왼쪽 손으로 딸을 잡고 오른 손에 물병을 잡고는 다가가서 ‘수행자여, 그대가 금색이고 나의 딸도 마찬가지니 잘 어울릴 것입니다. 아내로서 맞아 주십시오. 때가 없는 청정한 딸을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라문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처럼 이 경을 설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청정은 내적인 평화에서 오는 것임을 설했다.

 

(Māgandiyā sutta-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숫따니빠따 Sn4.9, 인연담, 전재성님)

 

 

인연담을 보면 황금색을 가진 부처님에게 황금색을 가진 자신의 딸과 인연을 맺어 주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의 시작에서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것

 

숫따니빠따를 보면 상윳따니까야에서 볼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Nāhosi chando api methunasmi)”라는 말이다. 여기서 성적 교섭이라는 말이 ‘methunasmi이다.  빠알리어 ‘methunasmi의 뜻은 ‘sexual intercourse; coupling’의 의미이다.

 

악마 빠삐만의 딸은인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가 부처님의 두 발 앞에 예배 드리고있다. 더 나아가  두 발을 터치 하려고 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예경의 표시로서 두 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존의 두 발에 입을 맞추고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M91)”라고 하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에게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의 최상의 예경을 왜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오염원이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오염원이 소멸된 된 자에게 있어서 더 이상 오염원에 물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갈애, 불쾌, 탐욕이라는 이름을 가진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에 대하여 오줌(muttā)과 똥(Karīsa)으로 가득 찬 것들이라 하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유혹해도 역겨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매춘부를 대낮에 보면

 

매춘부가 홍등에서는 매혹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낮의 찬란한 햇볕아래서는 역겨워 보인다. 탐욕과 갈애로 얼룩진 자의 모습은 불빛 아래서 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지만 대낮에 보면 불쾌해진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과 갈애에 찌든 자는 보는 순간 불쾌감을 유발한다.

 

부처님이 갈애라는 이름의 땅하, 불쾌라는 이름의 아라띠, 탐욕이라는 이름의 라가를 보았을 때 불쾌를 일으켰을 것임에 틀림 없다. 마치 오줌이나 똥, 또는 오물장을 보면 불쾌하고 역겨움을 느끼는 것과 같다. 비록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에는 탐욕과 갈애와 질투 등으로 가득 차 있다면 불쾌와 역겨움이 일어나는 것은 순간적이다.

 

백명의 여인을 네 차례 동원하였지만

 

여인이 감각적 쾌락을 자극할지 모르지만 오염원이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는 불쾌할 뿐이다. 마치 오줌과 똥과 같이 역겨운 것이다. 그럼에도 악마의 세 딸들은 유혹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Tanha, Arati, Raga

 

 

경에 따르면 무려 백명의 소녀모습으로 변신하여 나타난다. 마치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백명의 미녀들이 혼을 빼 놓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 간다. 부처님은 집착을 부수어 위없는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에 유념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악마의 딸들은 한 번 아이를 낳은 백명의 부인의 모습으로, 두 번 아이를 낳은 백명의 부인의 모습으로, 중년의 나이든 백명의 부인의 모습으로, 심지어 나이가 많은 백명의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악마의 딸들은 처녀, 아이를 가진 부인, 중년의 부인, 노파의 모습으로 백명의 여인을 네 차례 동원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성적으로 유혹하였음을 말한다.

 

악마의 한 딸이 말하기를

 

오염원이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악마의 딸들은 오줌과 똥과 같은 역겨운 대상일 뿐이다. 이에 악마의 딸들은 마침내 유혹하기를 포기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악마의 한 딸]

세상의 거룩한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을

탐욕으로 유혹하기 쉽지 않네.

그는 악마의 영역을 뛰어넘으니

나는 그것을 매우 슬퍼하네.”(S4.25)

 

 

오염원이 마른 자에게는 유혹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약간의 오염원이 남아 있는 자에게는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마치 작은 불씨가 남아 있어 짚이나 나무 등의 연료를 얹어 놓고 부채질 하면 불이 커지는 것과 같다.

 

약간이라도 오염원이 남아 있다면

 

약간의 오염원이 남아 있는 자에게 악마의 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악마의 딸들]

그러나 우리가 탐욕을 떠나지 못한 수행자나 성직자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그의 심장을 부수거나 입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게 하고 광기로 채우고 마음을 혼란하게 하면 마치 푸른 갈대가 시들고 마르고 바래지듯이 그는 시들고 마르고 고갈 될 것이다.” (S4.25)

 

 

탐욕이라는 오염원이 아주 조금만 남아 있어도 유혹의 대상이 되기 쉽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심지어 떼거리로 유혹하면 갈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갈애가 일어나면 불은 지펴진 것이다. 그래서 불이 확 붙었을 때 욕망의 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이는 고양이의 경에서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에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래서 탐욕과 갈애가 손톱의 때 만큼이라도 남아 있을 때 격정에 휘말릴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욕망의 강을 건넜는가

 

부처님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한 사명을 띠고 다가온 악마의 딸들과 대화를 한다.그러나 악마의 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에 악마의 딸들은 부처님에게 어떻게 욕망의 거센 흐름을 건넜는지에 대하여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세존]

몸을 고요히 하고 마음을 잘 해탈하여

형성 없이 집 없이 새김을 갖추고

동요 없이 표류 없이 혼침 없이

가르침을 알고 사유를 넘어 선정을 닦는다네.

 

여기 수행승은 이렇게 수행하여

다섯 거센 흐름을 건너고 여섯 번째도 건넜네.

이와 같이 선정을 닦으면 감각적 욕망의 지각이 제거되고

그것이 그를 사로잡지 못하네.” (S4.25)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이 유혹하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여섯 번째도 건넜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안이비설신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거센 흐름만 건넌 것이 아니다. 여섯 번째에 해당되는 정신(: mano)의 거센 흐름도 건넜기 때문이다. 주석에 따르면 개념적 대상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도 건넜음을 의미한다.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 가는 이야기가 종종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황진이와 지족선사 이야기 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별거 없더라, 황진이 지족선사 vs 홍련 태전선사, 법구경 7-8 마하깔라 장로이야기(2010-06-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지족선사는 16세기 조선시대에 십 년간을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송도에서는 ‘생불(生佛)’이라 일컬어질 만큼 유명한 고승이었다그런데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십년 공부가 하루 밤 사이에 수포로 돌아 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 한다. 

 

지족선사이야기는 악마의 세 딸들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황진이가 선사를 유혹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러나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어느 스님은 월간불광에 “나는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허상을 분명히 알았다부처님께서 인생의 복잡성을 말씀하신 의도를 관념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안 것이다황진이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부처님께서 인간의 실상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준 스승이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라고 기고하였다. 세간의 허상을 알게 해준 황진이야말로 지족선사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족선사에게 생불이라는 ‘딱지’를 떼어준 황진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표현한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이기다. 부처님이 악마의 딸들의 유혹을 물리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비된다. 아마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칠 년동안 추적하였지만

 

악마의 딸들은 부처님을 유혹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웠다.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단 한번의 유혹에 넘어가 십년공부가 한순간에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악마 빠삐만의 칠 년을 추적에도 물리쳤다. 더구나 악마의 세 딸들의 유혹도 물리쳤다. 오염원이 소멸된 부처님의 승리이다. 이에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을 유혹하고자 떠났던 세 딸들이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오자 어리석은 자들이라 말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빠삐만]

어리석은 자들이여,

연꽃 줄기로 산을 부수려 하네.

손톱으로 바위산을 파괴하고

이빨로 쇳조각을 씹으려 하네.

 

큰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절벽에서 바닥을 찾으려 하고

참으로 가슴에 쐐기를 박은 듯,

절망하며 고따마를 떠났구나.” (S4.25)

 

 

 

2015-02-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