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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쿠니는 숲에서 홀로 살았을까? 빅쿠니에게 금지되어 있는 두타행 다섯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2. 4. 18:07

 

빅쿠니는 숲에서 홀로 살았을까? 빅쿠니에게 금지되어 있는 두타행 다섯 가지

 

 

 

상윳따니까야 1권 악마상윳따에 대한 번역비교가 끝났다. 이어지는 상윳따는 빅쿠니상윳따이다. 전재성님은 수행녀의 모음이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비구니 상윳따라 하였다. 빅쿠니를 주제로 한 경의 모음이라 볼 수 있다.

 

빅쿠니상가는 존재하였다

 

빅쿠니상윳따에 나오는 첫 번째 경은 알라위까경(S5.1)이다. 이 경의 도입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Atha kho āavikā bhikkhūnī pubbahasamaya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sāvatthi piṇḍāya pāvisi. Sāvatthiya piṇḍāya caritvā pacchābhatta piṇḍapātapaikkantā yena andhavana tenupasakami vivekatthinī.

 

그 때 수행녀 알라비까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 시로 들어갔다. 싸밧티 시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홀로 있기 위해 안다 숲으로 갔다.

 

(Āavikā- 알라비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5.1,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빅쿠니도 빅쿠와 마찬가지로 탁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빅쿠니 상가는 존재 하지 않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빅쿠니상가가 존재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알라위까 빅쿠니는 테리가타(장로니게)에 등장하는 셀라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테리가타에 똑 같은 게송이 셀라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경에서 안다숲(andhavana)이 나온다. 이 숲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사왓티시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곳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알라위까 빅쿠니는 3.5키로미터를 걸어서 탁발나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악마가 등장한다. 악마 빠삐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전 상윳따인 악마상윳따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보여 진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Maravagga’라 하였다. 그런데 한글로는 수행녀의 품이라 하였다. 그래서 수행녀의 품(Maravagga)’라 하였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PTS본에 따르면 ‘Bhikkhūnīvaggo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녀의 품(Bhikkhūnīvagga)’로 고쳐야 할 것이다.

 

빅쿠니앞에 나타난 악마 빠삐만은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한적한 숲속에 나타났다. 비록 수행자라 하지만 육체적으로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의 몸이다. 여자 앞에 나타난 악마 빠삐만은 다음과 같이 유혹한다.

 

 

  

Āavikā(알라비까의 경, S5.1)

 

빠알리어

Natthi nissaraa loke

ki vivekena kāhasi,
Bhuñjassu kāmaratiyo

māhu pacchānutāpinīti.

ki vivekena kāhasi

전재성님역

[빠삐만]

세상에 욕망의 여윔이란 없으니

멀리 여의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겨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야 하네.”

멀리 여의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각묵스님역

세상에는 벗어남이란 없는데

한거가 무슨 소용이랴?

감각적 욕망의 기쁨을 즐겨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

한거가 무슨 소용이랴?

 

빅쿠보디역

"There is no escape in the world,

So what will you do with seclusion?

Enjoy the delights of sensual pleasure:

Don't be remorseful later!"

what will you do with seclusion?

 

 

 

 

 

The Bhikkhuni who plucks out an eye

 

 

악마 빠삐만은 수행을 방해하는 존재이다. 오염원을 떨쳐 버리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에게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젊은 수행자들에게 젊었을 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전혀 다른 번역을 보고

 

악마 빠삐만은 쾌락을 즐겨야 함을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배경으로서 욕망에 대한 포기는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등 근원적인 욕망이 있음에도 이를 억누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멀리 여의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ki vivekena kāhasi)”라며 반문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한거가 무슨 소용이랴?”라 하여 달리 번역하였다. 멀리 여읨과 한거의 차이이다.

 

 빅쿠보디는 “what will you do with seclusion?”이라 하였다. 여기서 seclusion격리, 은둔을 뜻한다. 그래서 은둔해서 무엇하느냐?”의 뜻이 된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같은 내용이다. 그렇다면 멀리 여읨과 한거, 어느 것이 맞을까?

 

전재성님은 멀리 여윔(vivekena)’에 대하여 “Srp.I.189에 따르면, 그녀는 선정에 들고자 했다.(1185번 각주)”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멀리 여읨이라 번역한 것은 선정에 드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단지 은둔이나 한거하는 뜻으로 번역 하였다.

 

빅쿠니는 숲에서 홀로 살았을까?

 

Vivekena에 대하여 PCED194를 보면 ‘detachment(분리); seclusion(은둔), , 遠離로 되어 있다. 그런데 Vivekena에 대한 말은 산문체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빅쿠니 알라위까가 탁발에서 돌아와 홀로 있기 위해 안다 숲으로 갔다.”라 되어 있다. 여기서 홀로 있기라는 말은 Vivekatthikini의 번역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한거(閑居)를 위하여 장님들의 숲으로 갔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she went to the Blind Men's Grove seeking seclusion.”라 하여 은둔지로 갔음을 말한다.

 

전재성님은 빅쿠니가 숲으로 간 것에 대하여 선정삼매에 들기 위하여 간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Vivekena’에 대하여 멀리 여임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니는 숲에서 홀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한거(閑居)를 위하여 장님들의 숲으로 갔다.”라 하여 마치 빅쿠니가 숲에서 홀로 사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과연 부처님 당시 빅쿠니는 숲에서 홀로 살았을까?

 

한거의 의미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안에 한가하게 있음의 뜻이다. 집안에서 하는 일 없이 머무는 것을 말한다. 한거의 사전적 의미가 이와 같다면 알라위까 빅쿠니는 하릴 없이 숲속에서 사는 경우에 해당된다. 굶지 않기 위하여 숲에서 나와 탁발을 하고 탁발이 끝나면 숲속의 거처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이 지내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태도가 아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초불연의 번역어 한거(閑居)’라는 말은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M4)’에서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고따마 존자시여,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은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습니다. 숲은 삼매를 얻지 못한 비구의 마음을 빼앗아 가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대림스님역)

 

 

이 경은 바라문 자눗소니와 부처님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바라문 자눗소니가 부처님의 제자들이 출가하여 부처님을 의지하여 숲에서 머무는 것에 대하여 찬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외딴 곳은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한다. 혼자 머물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과연 이런 번역은 맞을까?

 

깟싸빠존자의 두타행

 

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는 빅쿠이다. 빅쿠니가 아니다. 빅쿠가 홀로 숲에서 머무는 것은 두타행을 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두타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깟사빠 존자와 같은 제자가 숲속에서 홀로 살며 두타행을 하였다. 깟싸빠는 어떻게 두타행을 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유익한 점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숲에서 사는 자로서 숲의 생활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걸식하는 자로서 걸식의 생활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분소의를 걸친 자로서 분소의를 입는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한 자로서 세 가지 옷만을 소유하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욕심이 적은 자로서 욕심이 적은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만족을 아는 자로서 만족을 아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홀로 있는 자로서 홀로 있는 것을 찬탄하고, 또한 저는 사교하지 않는 자로서 사교하지 않는 것을 찬탄하며, 또한 저는 정진하는 자로서 정진하는 것을 찬탄해왔습니다.” (S16.5)

 

 

흔히 깟싸빠존자를 두타제일이라 한다. 숲에서 살며 걸식에 의존하며 분소의를 입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타행에 대하여 부처님은 “깟싸빠여, 훌륭하다. 깟싸빠여, 훌륭하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참으로 이와 같이 실천해왔다. 그러므로 깟싸빠여, 닳아빠진 베로 만든 그 분소의를 걸치고 걸식하러 다니며 숲속에서 살아라. (S16.5)라며 칭찬해 주었다.

 

열 세 가지 두타행이 있는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 세 가지 두타행이 있다. 이에 대하여 성직자들이 ‘개판’칠 때, 13가지 두타행과 실패요인(2011-03-1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열 세가지 두타행은 어떤 것일까?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열 세가지 두타행(terasadhutagāni)

No

수행

분류

관련

비구

비구니

사미

식차마나

사미니

청신사

청신녀

1

분소를 입는 수행

pasukūlikaga

단독

수행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2

삼의만 수용하는 수행

tecīvarikaga

단독

수행

수용

수용

X

X

X

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

piṇḍapātikaga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

sapadānacārikaga

주수행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

ekāsanikaga

주수행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

pattapiṇḍikaga

수용

수용

수용

수용

수용

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음

khalupacchābhattikaga

수용

X

수용

X

X

8

숲에 머무는 수행

āraññikaga

단독

수행

수용

X

수용

X

X

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

rukkhamūlikaga

수용

X

수용

X

X

10

노천에 머무는 수행

abbhokāsikaga

주수행

수용

X

수용

X

X

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

sosānikaga

단독

수행

수용

X

수용

X

X

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

yathāsanthatikaga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13

눕지 않는 수행

nesajjikaganti

단독

수행

精進

수용

수용

수용

수용

X

 

 

 

빅쿠니에게 금지되어 있는 두타행 다섯 가지

 

표를 보면 열 세 가지 두타행은 빅쿠니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빅쿠니의 경우 탁발은 수용되지만 8번항 숲에 머무는 수행(āraññikaga)’ 등은 허용 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의 몸으로서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빅쿠니의 두타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만약 숲에 머무는 수행을 성취할 공동묘지가 노천에 있으면, 한 비구가 동시에 모든 두타행들을 받아지닐 수 있다.

 

그러나 숲에 머무는 수행(8)과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앟는 수행(7), 이 두 가지는 비구니들에게 학습계율에 의해 금지되었다. 노천에 머무는 수행(10)과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9)과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11)의 이 셋은 비구니들이 행하기가 어렵다. 비구니들은 동료 없이 혼자 머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 같이 [머물] 의욕을 가진 동료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설혹 만난다 하더라도 동료와 함께 머무는 것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으므로 두타행을 실천하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받아지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다섯을 제하고 비구니들에게는 여덟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2장 두타행,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따르면 두타행 열 세가지 항목중에 빅쿠니에게 허용된 것은 탁발 등 여덟 가지이고, 허용되지 않은 것은 숲에서 머무는 것 등 다섯 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니가 숲에서 한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빅쿠니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빅쿠니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이는 고따미의 경(A8.51)’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경에 따르면 팔경법이 나온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남녀성차별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팔경법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팔경법(八敬法) 성립한 이유는? 고따미의 경(A8.51) 대애도비구니경(2013-09-2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팔경법 중에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A8.51)”라는 가르침이 있다. 일견 남녀차별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처님의 세심한 배려가 보인다. 그것은 여자들에 대하여 보호 받아야 할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빅쿠와 빅쿠니상가가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몸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을 때 머물 장소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남자들 처럼 두타행을 목적으로 숲에서 홀로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출가한 빅쿠니들은 빅쿠들이 사는 곳 옆에 머물게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처님 당시에도 여자들은 도적이나 강도 등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 받아야 할 존재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니 혼자 숲에서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빅쿠니 알라위까가 숲에서 한거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 ‘Vivekena’에 대하여 한거(閑居)’라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 본다.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빅쿠니가 홀로 숲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한거라 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고, 또 하나는 ‘Vivekena’라는 말이 욕망을 여읨의 뜻임에도 한거라 번역한 것은 명백히 번역실수라 보여진다. 특히 후자에 대하여 번역비교를 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번역 비교를 해보면

 

맛지마니까야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에서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 M4)

 

빠알리어

Durabhisambhavāni hi bho gotama, araññe 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Dukkara paviveka. Durabhirama ekatte. Haranti maññe mano vanāni samādhi alabhamānassa bhikkhunoti.

Dukkara paviveka.

전재성님역

[바라문]

존자 고따마여, 숲속 우거진 숲의 수행처는 견디기 어렵고 멀리 여읨을 실천하기 어렵고 멀리 여윔을 즐기기 어렵습니다. 생각하건데, 숲은 집중하지 않으면, 수행승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멀리 여읨을 실천하기 어렵고

대림스님역

(초불연)

고따마 존자시여, 숲과 밀림의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은 참으로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습니다. 숲은 삼매를 얻지 못한 비구의 마음을 빼앗아 가버린다고 생각합니다.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빅쿠보디와

냐나몰리역

“But, Master Gotama, remote jungle-thicket resting places in the forest are hard to endure, seclusion is hard to practise, and it is hard to enjoy solitude. one would think the jungles must rob a bhikkhu of his mind, if he has no concentration.”

seclusion is hard to practise

 

 

 

 

두 한글 번역의 가장 큰 차이점은 멀리여윔한거이다. 이는 paviveka에 대하여 여윔으로 보느냐 아니면 거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읨으로 해석하였을 때

 

전재성님은 paviveka에 대하여 여윔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paviveka‘retirement, solitude, seclusion. 遠離, 獨居, 閑寂의 뜻이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다는 뜻에서 遠離라 보고, 이를 감각적 쾌락에 대한 멀리 여윔으로 해석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각주를 보면 세속에서 떠남이라 하였고, 이어서 은둔, 고독, 격리, 한거, 원리를 뜻함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홀로 명상을 통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멀리 여읨을 말한다.(81번 각주)”라고 하였다.

 

한거로 해석하였을 때

 

반면에 대림스님은 paviveka에 대하여 한거(閑居)’라 번역하였다.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기서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다(Dukkara paviveka).’는 것은 몸으로 부터의 한거(kaya-viveka)를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혼자 있는 상태를 즐기기는 쉽지가 않다. 몸이 한거할 때 마음은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사람들은 둘씩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MA.i.112-113)

 

(초불연 상윳따1 150번 각주, 대림스님)

 

 

이 각주를 보면 이해 하기 힘들다. 이런 경우 난해하다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난독이라 한다. 각주를 읽어 보아도 쉽사리 뜻이 다가오지 않는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듯한 설명

 

대림스님은 paviveka에 대하여 한거(閑居)’라 한 것에 대하여 몸을 예로 들었다. 그래서 몸으로 부터의 한거(kaya-viveka)를 행하기가 어렵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왜 그런가? 경의 내용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숲속에서 머물기 힘든 이유가 여럿 나열 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몸의 행위가 청정하지 못한 자가 숲에서 머물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몸만 이유가 아니다. 언어와 정신이 청정하지 못한 자도 숲에서 머물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경에서는 감각적욕망과 성냄 등 이른바 오장애를 가진 자들 역시 숲에 머물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각주에서 숲에서 머물기 힘든  이유로 단지 몸이 청정하지 못한 것으로 한정한다면 너무 좁게 본 것이다. 마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한거하는 것에 대하여 혼자 있는 상태를 즐기기는 쉽지가 않다. 몸이 한거할 때 마음은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사람들은 둘씩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본문의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 설명이다. 마치 숲속에 있으면 심심하여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묘사 하였기 때문이다.

 

paviveka와 관련된 빅쿠보디와 냐나몰리의 영역을 보면 “seclusion is hard to practise, and it is hard to enjoy solitude’라 되어 있다. 여기서 seclusion을 은둔으로 본다면 은둔은 실행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홀로 즐기기 어렵다가 된다. 초불연 번역과 구조가 똑 같다. 다만 은둔이 한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영역 MDB에서는 paviveka와 관련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차이점을 표로 만들어 보면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본문의 문맥과 동떨어진 설명이다. 주석에 근거하여 설명을 해 놓았지만 마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읽어 보아도 고개를 갸웃하게 할 정도로 동떨어진 설명이다. 이를 표로 정리해서 비교해 보았다.

 

 

구분

  

 

빠알리어

Dukkara paviveka. Durabhirama ekatte

 

전재성님역

멀리 여읨을 실천하기 어렵고 멀리 여윔을 즐기기 어렵습니다.

홀로 명상을 통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멀리 여읨을 말한다.

대림스님역

한거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혼자됨을 즐기기는 어렵습니다.

몸으로 부터의 한거를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혼자 있는 상태를 즐기기는 쉽지가 않다. 몸이 한거할 때 마음은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 세상사람들은 둘씩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빅쿠보디와

냐나몰리역

seclusion is hard to practise, and it is hard to enjoy solitude.

-

 

 

 

두 번역을 보면 번역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pavivek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멀리 여윔이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한거라 하였기 때문이다.

 

전재성님은 홀로 명상을 통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멀리 여읨이라 하였지만, 초불연 대림스님은 몸으로 부터의 한거를 행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의 내용을 보면 신구의 삼업의 청정은 물론 오장애까지 청정해야 숲에서 머물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paviveka에 대하여 전재성님이 번역한 멀리 여윔이라는 번역이 옳다고 본다.

 

부처님 당시나 이후나 빅쿠니는 숲속에서 홀로 살지 못하였다. 빅쿠니상가가 빅쿠 상가 가까이에 있어서 빅쿠상가의 보호를 받고 살았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마치 빅쿠니가 숲속에서 홀로 살아 가는 것처럼 한거라 하였다. 더구나 한거라는 말은 사전에 따르면 하릴없이 시간만 때운다는 뜻이다. 이는 문장의 문맥과도 맞지 않고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다.

 

알라위까 빅쿠니가 답송하기를

 

악마 빠삐만이 숲속에서 명상하려는 빅쿠니에게 감각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에 빅쿠니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Āavikā(알라비까의 경, S5.1)

 

빠알리어

Atthi nissaraa loke

paññāya me suphassita,
Pamattabandhu pāpima

na tva jānāsi ta pada.


Sattisulūpamā kāmā

khandhāsa adhikuṭṭanā,
Ya
tva kāmarati brūsi

arati mayha sā ahūti.

 khandhāsa adhikuṭṭanā

전재성님역

[알리비까]

세상에서 욕망의 여읨은 있으니

나는 지혜로 잘 파악하고 있네.

게으름의 벗, 빠삐만이여,

너는 그러한 발자취를 알지 못하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창칼과 같고

존재의 다발은 형틀과 같네.

그대가 감각적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네.”

 존재의 다발은 형틀과 같네

각묵스님역

세상에는 벗어남이 있나니

나는 통찰지로 거기에 닿았노라.

방일함의 친척 빠삐만이여,

그대는 그 경지를 알지 못하도다.

 

감각적 욕망들은 칼과 쇠살과 같고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

그대가 감각적 욕망의 기쁨이라 부르는 것

나에게는 결코 기쁨이 아니로다.”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

빅쿠보디역

“There is an escape in the world

Which I have closely touched with wisdom.

o Evil one, kinsman of the negligent,

You do not know that state.

 

"Sensual pleasures are like swords and stakes;

The aggregates like their chopping block.

What you call sensual delight

Has become for me nondelight.”

 The aggregates like their chopping block

 

 

 

창칼인가, 칼과 쇠살인가

 

번역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먼저 ‘Sattisulūpamā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창칼이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칼과 쇠살이라 하여 두 개의 단어로 분리하였다. 이런 분리는 빅쿠보디도 동일하여 ‘swords and stakes’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왜 창칼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가이거의 주석을 참고하여 병렬복합어로 해석하지 않고 격한정복합어로 해석하였다고 하였다.

 

Sattisulūpamā에 대하여 PCED194를 찾아 보니 ‘sattisūla(the stake of a spear) +ūpamā(like)’ 의 뜻이다. 번역하면 창의 끝과 같고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이 번역한 창칼과 같고라 한 것이 맞다. 그럼에도 각묵스님은 칼과 쇠살이라고 두 개의 단어로 번역하였다. 왜 이런 번역이 나왔을까? 빅쿠보디가 “like swords and stakes(칼과 지분처럼)”라 번역한 것과 유사하다.

 

화두처럼 난해한 번역

 

또 하나 차이가 나는 번역이 있다. 그것은 “khandhāsa adhikuṭṭanā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존재의 다발은 형틀과 같네라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라 하여 다르게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aggregates like their chopping block”라 하여 무더기들은 자르는 사각형덩어리처럼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구조가 같다.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른 부분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창칼과 같고

존재의 다발은 형틀과 같네.(전재성님역)

 

2)

감각적 욕망들은 칼과 쇠살과 같고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각묵스님역)

 

 

두 개의 번역을 보면 모두 감각적 욕망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임을 말한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은 창칼과도 같다고 하였다.

 

문제는 “khandhāsa adhikuṭṭanā에 대한 번역이다. 직역하면 존재의 무더기들은 단두대이다라는 뜻이다. 오온이라는 것이 목을 자르는 형틀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 집착하는 것은 단두대에 목을 집어 넣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죽음을 말한다.

 

죽음은 또 다시 재생을 불러 온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한 한량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오온에 대하여 존재의 다발은 형틀과 같네라 한 것이다. 여기서 형틀은 창칼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 여겼을 때 단두대의 신세를 벗어나기 힘듦을 말한다.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라 하였다. 앞의 구절과 함께 읽어 보아도 언뜻 의미가 다가 다가 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라 하였을 때, ‘이들의 자르는라는 말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 ‘이들을 자르는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은 이들을 자르는 받침대라 고칠 수 있다. 그래도 문장이 어색하다. 참으로 어려운 번역문이다.

 

초불연의 번역에서 감각적 욕망들은 칼과 쇠살과 같고 오온은 이들의 자르는 받침대이니라 하였다. 어떤 뜻일까? 마치 화두처럼 보인다.

 

 

 

2015-02-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