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초기경전에서 본 십우도 견우(見牛)의 모티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25. 13:31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초기경전에서 본 십우도 견우(見牛)의 모티브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는 게송이 매우 풍부하다. 게송은 하나의 아름다운 시와 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산문과 운문이 함께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응송(應頌: Geyya)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외 어떤 표현방식이 있을까?

 

응송(應頌: Geyya)이란 무엇인가?

 

초기경전을 보면 모두 아홉 가지 표현방식이 있다. 이를 구분교라 한다. 구분교란 ,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 이렇게 아홉 가지 구분하는 방식을 말한다. 구분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

  

 

No

구분교(九分敎)

    

1

()

Sutta

1) 부처님의 모든 대화를 기록한 것.

2) 산문으로 쓰인 경--논이 여기에 속함,

2

응송(應頌)

Geyya

1) 모든 산문과 시가 뒤섞인 것

2) 산문체 경의 뒤에 같은 내용을 다시 시로 표현함.

3

수기(授記)

Veyyākaraa

 

1) 논장 및 그와 유사한 아비담마 텍스트

2) 게송이 없는 산문체로 아비담마 같은 해설로 다른 삼장의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은 경들이 있다.

4

게송(偈頌)

Gāthā

오로지 시로만 구성된 것

5

감흥어(感興語)

Udāna

부처님이 스스로 감탄하여 스스로 설한 것

6

여시어(如是語)

Itivuttka

‘이와 같이 말씀 되어 졌다.’의 뜻으로 감흥어와 유사하게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음.

7

전생담(前生談)

Jātaka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산문이야기를 수반하는 시모음집.

8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초자연적인 상태나 힘을 다루고 있는 경전.

 

9

교리문답(敎理問答)

Vedalla

 

1) 교리문답은 어원적으로는 ‘고양이의 눈’이라는 뜻으로 팔만사천 가르침의 다발 가운데 한 단위를 말함.

2) 앎과 기쁨으로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설해진 경들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 마라상윳따는 산문과 운문이 뒤섞인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런 경우 구분교에 따르면 응송에 해당된다.

 

농부의 경(Kassakasutta, S4.19)에서

 

마라상윳따에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와 같은 근본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응송형태로 선 보이고 있다. 오온의 경우 발우의 경(S4.16)’에서 선보이고, 십이처의 경우  여섯 접촉의 감역의 경(S4.17)에서 간단히 용어만 나열 되는 형식으로 선보이고 있으나 이번에는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이 농부의 경(S4.19)’이다.

 

농부의 경에서 악마 빠삐만은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방해를 하고 훼방을 놓고 있다. 경에 따르면 그 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열반에 관한 법문으로 그들을 교화하고 붇돋우고 고무시키고 기쁘게 하셨다.(S4.19)”라 표현 되어 있다. 여기서 열반에 관한 법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nibbāapaisayuttāya’에 대한 번역이다. 열반(nibbāa)을 주제로 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

 

부처님이 열반에 대한 법문을 하면 제자들은 모두 깨달아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죽음의 신도 알아채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에 악마 빠삐만은 제자들의 깨달음을 방해하기로 한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내가 이제 수행자 고따마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며 부처님 면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빠삐만]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Kimpana pāpima te balivaddehīti?

[세존]

빠삐만이여, 그대에게 황소란 무엇인가?”

 

 

대화에서 황소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황소는 balivadda를 말한다. Balivadd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황소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전 Pattasutta(발우의 경, S4.16)’에서는 물소로 번역하였다. 같은 단어에 대하여 왜 이렇게 번역용어가 다른 것일까? 문맥에 따라 달리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전의 경에서 물소라 한 것은 야생의 소를 말한다. 발우를 깨기 위한 거친 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농부의 경(S4.17)에서는 황소라고 번역하였다. 농사에 사용되고 가축화 된 소를 의미한다.

 

악마 빠삐만이 뜬금 없이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고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에게 황소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답변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여기서 악마와 부처님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밭을 가는 황소(balivadda)와 소가 풀을 뜯는 영역인 행경(gocara)이 동일한 의미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 악마의 답변에서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악마의 황소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Ggs.I.178에서는 부처님의 질문을 그대는 황소로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그대에게 황소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이 옳다.

 

(상윳따1 1091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빠알리 주석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전재성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그래서인지 빅쿠보디와 각묵스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밭을 가는 황소(balivadda)와 소가 풀을 뜯는 영역인 행경(gocara)은 동일한 의미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황소는 농사용으로 사용된다. 옛날에는 밭이나 논을 가는데 황소가 매우 유용하였다. 그런데 황소로 밭을 갈 때 밭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황소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먹이를 주어야 할 것이다. 방목할 경우 방목영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의 행동반경이 있다. 그 행동반경 내에서만 소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라 하였다. 한역으로 행경(行境)’이라 한다. 한자풀이 하면 경계 내에서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가축화 된 황소는 행동반경 내에서만 움직인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 , 코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과 형상, 소리, 냄새 등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만났을 때 하나의 영역이 확보 된다. 예를 들어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시각영역이 확보 된다. 바로 이것이 시각의식에 있어서행경이라 볼 수 있다.

 

악마 빠삐만과 부처님의 대화를 보면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하기 힘든 말이다. 빠삐만이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 하였을 때 단지 황소를 보았느냐는 의미로 받아 들이기 힘들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내용이나 각주, 주석을 참고 해야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황소라는 말은 행경을 뜻한다고 하였다. 경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악마의 황소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빠삐만이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고 물어 보았을 때 이는 다름 아닌 그대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을 보았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

 

빠삐만이 질문하기를

 

부처님이 그대에게 황소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을 때 악마 빠삐만은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대하여 말한다. 일종의 행동반경, 즉 행경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assakasutta(농부의 경, S4.19)

 

빠알리어

Mameva samaa cakkhu, mama rūpā, mama cakkhusamphassaviññāāyatana. Kuhi me samaa gantvā mokkhasi?

 

전재성님역

[빠삐만]

수행자여,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의 영역도 나의 것이다. 수행자여, 그대가 어디로 간들 내게서 벗어 날 수 있겠는가?”

 

각묵스님역

사문이여, 눈은 나의 것이고 형색들도 나의 것이고 눈의 감각접촉과 [눈의] 알음알이의 장소도 나의 것이라오. 사문이여, 그대가 도대체 어디로 가서 내게서 벗어난단 말이오?”

 

빅쿠보디역

"The eye is mine, ascetic, forms are mine, eye-contact and its

base of consciousness are mine.296 Where can you go, ascetic, to

escape from me?”

 

 

 

cakkhusamphassaviññāāyatana 번역에 대하여

 

두 번역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cakkhusamphassaviññāāyatana에 대한 번역이다. 전재성님은 시각의식의 영역이라 간단하게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눈의 감각접촉과 [눈의] 알음알이의 장소라 하여 길게 번역하였다.

 

‘cakkhusamphassaviññāāyatana‘cakkhu+samphassa+viññāā+ayatana’으로 분해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묵스님의 번역이 원문에 가깝다. 이를 단순하게 번역하면 (cakkhu)과 함께 일어나는 감각접촉(samphassa)과 의식(viññāā)의 영역 (ayatana)’이라고 할 수 있다. 빅쿠보디는 “eye-contact and its base of consciousness”이라 하였다. 번역하면 눈의 접촉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의식이 된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유사하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긴 복합어에 대하여 시각의식의 영역이라고 매우 짧게 번역하였다. 왜 이렇게 짧게 번역하였을까? 그것은 문구가 삼사화합에 따른 의식의 발생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영역을 뜻하는 고짜라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축약된 복합어 ‘cakkhusamphassaviññāāyatana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시각의식의 영역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의식영역이 생겨나는  것일까?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리

 

위 경에서는 의식이 일어나는 과정이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초기경에서는 하나의 정형구로 정형화 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알 수 있다.

 

 

Cakkhuñca paicca rūpe vuppajjati cakkhuviññāa, tiṇṇa sa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hā, tahāpaccayā upādāna,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aya kho bhikkhave lokassa samudayo.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

 

 

경에 따르면 의식의 영역이라 볼 수 있는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의식이 생겨나는 원리이다. 그런데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이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리이다

 

영역(dhatu)은 어떤 개념일까?

 

악마 빠삐만은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의 영역도 나의 것이다.”라 하였다. 나머지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영역(dhatu)은 어떤 개념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은 열여덟 가지 인식의 세계[十八界:atthadasa dhatuyo]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감각능력으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이 있고, 감각대상으로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사실이 있으며, 감각접촉에서 생겨나는 의식의 영역에는 시각의식의 영역, 청각의식의 영역, 후각의식의 영역, 미각의식의 영역, 촉각의식의 영역, 정신의식의 영역이 있다.

 

(상윳따1 1092번 각주, 전재성님)

 

 

흔히 오온-십이처-십팔계라 한다. 이때 계는 빠알리어로로 다뚜(dhatu)’라 하고 영역의 뜻이다. 그래서 시각의 의식의 영역 등 여섯 영역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각각의 영역은 마치 소가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영역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 하였을 때 시각을 예를 든다면  시각의식의 영역을 보았는가?”라고 설명된다.

 

82가지 구경법과 오온-십이처-십팔계 도표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은 각각 고유한 영역이 있다. 마치 소가 풀을 뜯어 먹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그 영역 내에서 활동하듯이, 마찬가지로 여섯 감각능력은 각각 고유한 영역이 있다. 이를 라 한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이런 계는 모두 18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십팔계라 한다. 이에 대하여 82가지 구경법과 오온-십이처-십팔계에 대한 도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경법
(82
)

오온
(pancakhandha)

12
(ayatana)

18
(dhatu)

물질 (28)

1. 색온(色蘊)

1. 안처

거친

1. 안계

거친

2. 이처

물질

2. 이계

물질

3. 비처

(12)

3. 비계

(12)

4. 설처

4. 설계

5. 신처

5. 신계

6. 색처

6. 색계

7. 성처

7. 성계

8. 향처

8. 향계

9. 미처

9. 미계

10. 촉처 (, , 풍의 3물질)

10. 촉계 (, , 풍의 3물질)

11. 마노의 대상 (法處)

미세한

11. 마노의 대상 (法界)

미세한

마음부수 (52)

2. 수온(受蘊)

물질 (16)

물질 (16)

3. 상온(想蘊)

마음부수

마음부수

4. 행온(行蘊)

(52)

(52)

열반(1)

없음

열반

열반

마음 (1)

5. 식온(識蘊)

12. 마노의 감각장소

12. 안식계

(意處)

13. 이식계

14. 비식계

15. 설식계

16. 신식계

17. 의계

18. 의식계

 

 

 

반야심경에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오온에 대한 것을 보면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 하여 모두 본래 공한 것이라 보았다. 십이처에 대한 것을 보면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라 하여 본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십팔계에 대한 것을 보면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이라 하여 역시 본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십이처-십팔계에 대하여 모조리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空中)’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온, 십이처, 십팔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에 따르면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였을 때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십팔계는 사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

 

표에서 십팔계에 대한 것을 보면 안식계 등 단지 정신영역에 대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감각능력과 감각대상, 그리고 정신영역 모두 합하여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표로 표현 하면 다음과 같다.

 

 

No

십팔계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구 분

1

안계

시각

감각능력(6)

2

이계

청각

 

3

비계

후각

 

4

설계

미각

 

5

신계

촉각

 

6

의계

정신

마노[]

 

7

색계

형상

형색들

감각대상(6)

8

성계

소리

소리들

 

9

향계

냄새

냄새들

 

10

미계

맛들

 

11

촉계

감촉

감촉들

 

12

법계

사실

[마노의 대상인] 법들

 

13

안식계

시각의식

눈의 감각접촉과

[눈의] 알음알이

감각의식(6)

14

이식계

청각의식

귀의 감각접촉과

[귀의] 알음알이

 

15

비식계

후각의식

코의 감각접촉과

[코의] 알음알이

 

16

설식계

미각의식

혀의 감각접촉과

[혀의] 알음알이

 

17

신식계

촉각의식

몸의 감각접촉과

[몸의] 알음알이

 

18

의식계

정신의식

마노의 감각접촉과

[마노의] 알음알이

 

 

  

 

십팔계를 크게 감각능력과 감각대상과 감각의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에 여섯 가지 요소를 곱하면 열여덟 가지가 된다. 그래서 십팔계라 한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이런 십팔계는 사실상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다름 없다고 하였다.

 

십팔계는 악마의 영역

 

경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는 정형구가 있는데, 이 정형구는 열여덟 가지 영역(세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의식이 생겨 날 때 초기경에서는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라 하였다. 이런 세상이 생겨나는 원인은 다름 아닌 갈애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S35.107)”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불교에서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는 오온-십이처-십팔계로 설명된다. 창조주가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였다거나 원인 없이 세상이 발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이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갈애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악마 빠삐만이 말한 게송에 그대로 나와 있다.

 

빠삐만은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의 영역도 나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감각영역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세상은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어지는 빠삐만의 말을 보면 그대가 어디로 간들 내게서 벗어 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 귀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면 세상이 발생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발생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발생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십팔계는 악마의 영역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이 답송하시기를

 

십팔계는 악마의 영역아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십팔계가 악마의 영역이라면 악마의 영역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정신(mano)과 사실(dhamma)을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Kassakasutta(농부의 경, S4.19)

 

빠알리어

Taveva pāpima mano, tava dhammā, tava manosamphassaviññāāyatana. Yattha ca kho pāpima natthi mano, natthi dhammā, natthi manosamphassaviññāāyatana. Agati tava tattha pāpimāti.

 

전재성님역

[세존]

빠삐만이여, 정신도 그대의 것이고 사실도 그대의 것이며 정신의식의 영역도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정신도 없고 사실도 없고 정신의식의 영역도 없는 곳, 빠삐만이여, 거기에 그대가 갈 길은 없다.”

 

각묵스님역

빠삐만이여, 마노[]는 그대의 것이고 [마노의 대상인] 법들도 그대의 것이고 마노의 감각접촉과 [마노의] 알음알이의 장소도 그대의 것이다. 그러나 마노도 없고 [마노의 대상인] 법들도 없고 마노의 감각접촉과 [마노의] 알음알이의 장소도 없는 곳, 거기에는 그대가 머물 곳이 없다.”

 

빅쿠보디역

“The mind is yours, Evil one, mental phenomena

are yours, mind-contact and its base of consciousness are yours;

but, Evil one, where there is no mind, no mental phenomena, no mind-contact and its base of consciousness-there is no place for you there, Evil one.”

 

 

 

 

두 번역을 비교해 보면 같은 문구에 대하여 달리 표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natthi mano, natthi dhammā, natthi manosamphassaviññāāyatan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정신도 없고 사실도 없고 정신의식의 영역도 없는 곳이라 하여 비교적 누구나 알기 쉽게 표현 하였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마노도 없고 [마노의 대상인] 법들도 없고 마노의 감각접촉과 [마노의] 알음알이의 장소도 없는 곳이라 하여 대괄호치기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길게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은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주석에서나 설명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격이다. 그리고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으로 되어 있다.

 

여러 번역서를 비교해 보아야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매우 생소한 빠알리어마노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논장에대하여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알고 있으나, 경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또 법이라 하였는데 어떤 법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마노의 대상인]’라 하여 별도로 설명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읽기도 불편하고 뜻도 와 닿지 않는다. 이를 전재성님 번역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natthi mano, natthi dhammā, natthi manosamphassaviññāāyatana

 

1) 정신도 없고 사실도 없고 정신의식의 영역도 없다. (전재성님역)

2) 마노도 없고 [마노의 대상인] 법들도 없고 마노의 감각접촉과 [마노의] 알음알이의 장소도 없다. (각묵스님역)

3) there is no mind, no mental phenomena, no mind-contact and its base of consciousness. (빅쿠보디역)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쉬운 번역과 난해한 번역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각묵스님의 난해한 번역을 보면 먼저 용어부터 파악해야 한다. 빠알리어 마노가 무언지부터 알아야 한다. 또 우리말로 번역된 알음알이라는 말도 개념부터 파악해야 한다. 사전을 찾아 보고 여러 번 읽어 보아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차라리 영역이 더 쉽다.

 

빅쿠보디역을 보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본다면 번역서는 한 종류만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 번역서를 비교해 보아야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악마의 영역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부처님의 게송에 따르면 정신도 사실도, 그리고 정신의식의 영역도 악마의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정신도 사실도, 정신의식의 영역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악마 빠삐만이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에 든 자에게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세상 역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초기경에 따르면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의식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Cakkhuñca paicca rūpe vuppajjati cakkhuviññāa,S35.107)”라는 정형구가 대표적이다. 시각(cakkhu)과 형상(rūpa)을 조건(paicca)으로 하여 시각의식(cakkhuviññāa)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시각의식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일어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연기법을 말씀 하신 것이다. 정형구에서 조건으로(paicca)’라는 말이 증거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조건법이라 한다.

 

연기법이 왜 조건법인가? 그것은 연기법이 원인과 결과로만 설명되어 있지 않고 반드시 원인(hetu:)’조건(paccaya:)’결과(phala:)’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헤뚜-빳짜야-빨라(hetu-paccaya-phala)’라 한다. 한자어로 인연과(因緣果)’라 한다. 연기법은 철저하게 인연과로 이루어져 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 하는 것도 모두 인연과(因緣果)’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게 원인조건결과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조건법이라 하였다. 왜 조건법인가? 반드시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을 때 이는 세상의 발생을 뜻하고 이는 다름 아닌 악마의 영역이다. 세상이 생겨 난다는 것은 오온-십이처- 십팔계를 자신의 것이라 보는 갈애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건법인 연기법에 따르면 조건만 소멸되면 세상 역시 소멸된다. 다름 아닌 마음이 일어 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역관에 따르면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라 하였다. 형성의 소멸을 조건으로 의식, 즉 마음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각의식이 소멸하면 시각과 형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마음이 소멸하면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악마의 영토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코 그대는 나의 길을 보지 못하리라

 

농부의 경(S4.19)은 구분교에 따르면 응송(應頌:Geyya)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산문과 시가 뒤섞여 있고, 산문체의 경 뒤에는 게송으로서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서 산문의 의미를 분명히 하셨다.

 

 

Ya vadanti mama idanti

ye vadanti mamanti ca,
Ettha ce te mano atthi

na me samaa mokkhasīti.

 

[빠삐만]

어떤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라 말하고,

나의 것에 대해 말하지만,

수행자여, 그대의 정신이 거기에 있으면,

그대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

 

 

Ya vadanti na ta mayha

ye vadanti na te aha,
Eva
pāpima jānāhi

na me maggampi dakkhasīti.

 

[세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나의 것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자들 가운데 나는 없네.

빠삐만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알아야 하리.

결코 그대는 나의 길을 보지 못하리라.”

 

(Kassakasutta-농부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9, 전재성님역)

 

 

두 개의 게송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악마 빠삐만은 유아론을 이야기하였고 부처님은 무아론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본다면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반대로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악마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십이처-십팔계의 세상에서 갈애를 일으킨다면 악마에게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악마에게 코가 꿰이여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하다가는 세세생생 윤회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십우도(十牛圖)가 연상되는데

 

이 경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십우도(十牛圖)’이다. 악마가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고 묻는 장면에서 십우도를 연상하였다.

 

곽암의 십우도송에 따르면 열 가지로 표현 되어 있다. 나열해 보면 ①심우(尋牛) ②견적(見跡) ③견우(見牛) ④득우(得牛) ⑤목우(牧牛) ⑥기우귀가(騎牛歸家) ⑦망우존인(忘牛存人) ⑧인우구망(人牛俱忘) ⑨반본환원(返本還源) ⑩입전수수(入廛垂手) 이렇게 열 가지 단계이다. 이중 세 번째 견우(見牛) 의 단계가 있다.

 

견우(見牛)소를 본다는 뜻이다. 마치 상윳따니까야 농부의 경에서 악마 빠삐만이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 (api samaa balivadde addasāti, S4.19)”라고 물어 보는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견우(見牛) 서문을 보면

 

그렇다면 견우의 단계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곽암선사의 견우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

그 근원을 감지한다.

 

육감이 하나로 녹아들자

문 안으로 들어선다.

 

어디로 들어가든 소의 머리를 본다.

 

물속의 소금과 같고

물감속의 색채와 같으니

 

가장 미미한 것도

진아와 떨어져 있지 않다.

 

(곽암선사의 견우 서문)

 

 

 

 

견우(見牛)

 

 

이 글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옮긴 것이다. 글에서 보듯이 소를 본다는 것은 결국 진아, 즉 참나를 찾아 가는 여정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견우서문을 보면 소리를 예로 들었다. 그리고 육감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십팔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초기경전식으로 해석하면 청각이라는 감각능력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청각의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이는 철저하게 청각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마치 황소가 풀을 뜯어 먹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청각이라는 범주를 벗어 나지 못한다.

 

그런데 청각 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감각능력의 영역 여섯 개와 감각대상의 영역 여섯 개, 그리고 감각의식의 영역 여섯 개를 모두 합하면 열여덟 가지 영역이 있게 된다. 이 열여덟 가지 영역이 세계라는 것이다. 세계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능력에 따라 세계가 전개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세상이란?

 

불교에서 세상이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이 있어서 그 세상에 태어나 그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이 만든 세상속에 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자신이 죽고 나서도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 갈 것 같지 않을 것처럼 염려하지만 자기가 없어도 이 세상은 잘 돌아 간다. 대부분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이 있어서 세상 속에 사는 것으로 보는 것은 객관적 세상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가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여 그 창조된 세상속에서 피조물로 살다 가는 것으로 본다. 대부분의 종교가 이런 형식이다.

 

그러나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철저하게 주관적 세계관이다. 자신이 있어서 세상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초기경 도처에서 보이는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Cakkhuñca paicca rūpe vuppajjati cakkhuviññāa,S35.107)”라는 정형구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세상의 발생을 뜻한다. 마음이 생겨남을 세상의 발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aya kho bhikkhave lokassa samudayo, S35.107)”라고 초기경에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

 

십우도의 모티브가 초기경전에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의 입을 빌어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의 영역도 나의 것이다라 허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 보고 갈애를 일으켰을 때 세상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악마 빠삐만이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열여덟 가지 세상(십팔계)을 보았는가?”라고 묻는 것과 다름 없다.

 

악마 빠삐만이 황소를 보았는가?”라는 말은 곽암선사의 십우도에 따르면 세 번째 단계인 소를 보다는 뜻의 견우(見牛)’와 같은 것이다. 이 견우와 관련하여 곽암선사는 육근과 육경, 그리고 육근의 의미로 설명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곽암은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견우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곽암의 십우도를 보면서 십우도의 모티브가 초기경전에 있음을 알았다. 십우도의 원형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것이다. 특히 견우와 관련하여 빠삐만이 수행자여,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api samaa balivadde addasāti, S4.19)?”라는 말이 결정적 증거이다.

 

십우도의 모티브가 소치는 사람의 긴 경(M33)’이라고?

 

십우도의 원형이자 모티브로 보여지는 것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농부의 경(S4.19)’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맛지마니까야 소치는 사람의 긴 경(M33)’이 십우도의 원형이라 한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소치는 것을 수행에 비유한 가르침은 중국선종에서 십우도(十牛圖)로 표현되기도 한다. 수행을 소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이미 초기불전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맛지마 니까야』에 몇 개의 경들이 전해온다. 본경과 다음 경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본서 제1권「두 가지 사유 경」(M19)의 §7과 §12에도 수행은 소치는 것에 비유되어 나타난다. 본경은『앙굿따라 니까야』제6권「소치는 사람 경」(A11:18)과 똑같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소떼를 돌보지 못하고 소떼를 불리지 못하는 소치는 사람의 특징 열한 가지를 말씀하시는데,(§2) 그것은물질을 알지 못함특징에 능숙하지 못함진드기를 제거하지 않음상처를 잘 싸매지 않음 ⑤ [외양간 내에 파리와 모기 등이 들끓을 때] 연기를 지피지 않음물 마시는 곳을 알지 못함마시는 물인지 [못 마시는 물인지] 알지 못함 ⑧ [안전한] 길인지 [길이 아닌지] 알지 못함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함젖을 남김없이 다 짜버림소들의 아버지요, 소들의 지도자인 황소를 특별히 공경하지 않음이다. 그리고 이 특징을 향상을 바라는 비구에게 적용시키시고는(§3) 이를 하나씩 설명하신다.(§§4~14)

 

다시 위와 반대로 소떼를 잘 돌보고 소떼를 불리는 소치기의 특징 11가지를 설하시고는(§15) 이를 차례대로 설명하신다.(§§17~27) 이 열한 가지는 불자들 특히 출가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소치는 사람의 (M33) 해설,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경에서 열한 가지 사항을 언급하면서 이런 내용이 십우도와 유사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곽암의 십우도와 비교해 보면 내용이 일치 하지 않는다. 다만 열한 가지 사항 중에서 상처를 잘 싸매지 않음‘⑨ 방목지에 능숙하지 못함이 십팔계에 대한 설명이 곽암의 십우도의 각 게송에서 서문이나 게송을 보면 육근과 육경, 육식에 대한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하긴 하지만 십우도와 정확하게 일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의 해제에서 십우도와 비슷하다고 언급한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의 맞지마니까야 소치는 사람에 대한 큰 경(M33)’에서는 십우도와 관련된 설명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십우도의 모티브는 농부의 경(S4.19)’

 

맛지마니까야 소치는 사람의 긴 경(M33)’과 앙굿따라니까야 소치는 사람 경」(A11:18)’을 십우도와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다. 연관성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 농부의 경(S4.19)는 십우도의 연관성이 보인다. 그것은 악마 빠삐만이 그대는 황소를 보았는가(api samaa balivadde addasāti, S4.19)?”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명백히 십우도에서 세 번째 단계인 견우(見牛)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십우도의 모티브는 맛지마니까나 앙굿따라니까야의 소치는 사람의 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윳따니까야 농부의 경(S4.19)’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15-01-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