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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셀라의 경(S5.9)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2. 18:25

 

 

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셀라의 경(S5.9)

 

 

 

환영과 꼭두각시

 

수행녀상윳따 아홉 번째 경은 셀라에 대한 것이다. 수행녀 셀라가 탁발을 마치고 안다숲으로 같다. 거기에서 선정에 들려고 할 때 악마 빠삐만이 나타났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Selāsutta(셀라의 경, S5.9)

  

빠알리어

Kenida pakata bimba

kvannu bimbassa kārako,
Kvannu bimba
samuppanna

kvannu bimba nirujjhatīti.

bimba

전재성님역

[빠삐만]

누가 이 환영을 만들었는가?

환영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환영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이 환영은 어디에서 소멸되었는가?”

환영

각묵스님역

누가 이 꼭두각시를 만들었는가?

꼭두각시를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꼭두각시는 어디에서 소멸하는가?”

꼭두각시

빅쿠보디역

"By whom has this puppet been created?

Where is the maker of the puppet?

Where has the puppet arisen?

Where does the puppet cease”

puppet

 

 

Puppet

 

 

환영이라는 말과 꼭두각시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bimba를 번역한 것이다. PCED194에 따르면 bimba‘an image; figure’라 되어 있다. 화상 또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 影像, , 身体의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치 환영을 보는 것처럼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빠삐만은 수행녀 셀라에게 누가 이 환영을 만들었느냐고 물어 본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성전협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즉 오온이라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을 오온이라고도 한다. 누가 이 오온을 누가 만들었을까? 또 오온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여기서는 자기 존재라고 인식되는 이 꼭두각시를 범천, 위슈누, 뿌루샤, 빠자빠띠 등 가운데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드러내었는가, 누가 창조하였는가, 등을 묻는 것이다. (SAT.i.199)

(초불연 548번 각주)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빠삐만의 질문은 창조주를 상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이는 유일신교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bimba에 대하여 꼭두각시로 번역하였다. bimb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puppet로 번역하였다. Puppet은 인형, 꼭두각시, 괴뢰의 뜻이다.

 

꼭두각시는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 만들어야 한다. 요즘말로는 로보트라 볼 수 있다. 로보트는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인다. 이렇게 본다면 로보트는 피조물이다. 로보트를 만든 자는 창조주로 볼 수 있다.

 

두 번역자의 bimba에 대한 번역어는 환영과 꼭두각시로 서로 다르다. 환영은 실체가 없음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고, 꼭두각시는 창조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단지 오온에 대한 것이라고만 표현 되어 있다.

 

수행녀 셀라가 답송하기를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에게 오온이 어떻게 생겨 났고 어떻게 소멸되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이다. 이에 수행녀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Selāsutta(셀라의 경, S5.9)

  

빠알리어

Nayida attakata bimba

nayida parakata agha,
Hetu
paicca sambhūta

hetubhagā nirujjhati.


Yathā aññatara
bīja

khette vutta virūhati,
Pa
avīrasañca āgamma

sinehañca tadūbhaya.


Eva
khandhā ca dhātuyo

cha ca āyatanā ime,
Hetu
paicca sambhūtā

hetubhagā nirujjhareti.

 agha

전재성님역

[쎌라]

이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

원인을 연유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

 

마치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습기를 조건으로 하여,

그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세계 또는 이 감각영역들은

원인을 연유하여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

재난

각묵스님역

이 꼭두각시는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요

이 불쌍한 것은 남이 만든 것도 아니로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으며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마치 씨앗이 들판에 뿌려져서

잘 자라기 위해서는

땅의 영양분과 수분의 둘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도다.

 

그와 같이 무더기들[]

요소들[]과 여섯 감각장소들[]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지만

원인이 부서지면 소멸하도다.”

불쌍한 것

빅쿠보디역

"This puppet is not made by itself,

Nor is this misery made by another.

It has come to be dependent on a cause;

With the cause's breakup it will cease.

 

" As when a seed is sown in a field

It grows depending on a pair of factors:

It requires both the soil's nutrients

And a steady supply of moisture:

 

"Just so the aggregates and elements,

And these six bases of sensory contact,

Have come to be dependent on a cause;

With the cause's breakup they will cease

misery

 

 

수행녀 셀라는 오온에 대하여 조건발생과 조건소멸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게송에서는 원인설에 대하여 거론하고, 두 번째 게송에서는 성장론에 대하여 말한다.

 

자아원인설과 타자원인설

 

첫 번째 게송에서 오온에 대하여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재난에 대하여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재난에 대하여 불쌍한 것이라고 표현 하였다. 이는 agha에 대한 번역이다. agha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Evil, sin, grief, suffering’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misery라 번역하였다.

 

첫 번째 게송 두 번째 구절은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nayida parakata agha)”라 하였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번역서의 각주에서는  ‘S12.17’을 참조하라고 하였다.

 

상윳따니까야에 아쩰라깟사빠의 경이 있다. 이 경에서 앞서 언급된 재난(agha)에 대하여 네 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나형외도 아쩰라깟사빠가 부처님에게 묻는다.

 

 

1)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

2)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3)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4)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이와 같은 네 가지 질문에 부처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라 하여 모두 부정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외도 깟사빠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괴로움을 당하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S12.17)

 

 

부처님은 외도의 질문에 대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설명 하였다. 이는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같고 다름에 대한 것이다. 같다면 영원주의로 보고, 다르면 허무주의로 본 것이다.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에 대하여 단상중도 (斷常中道)로 설명할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반면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 발생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견해이다.

 

부처님은 극단주의를 부정하였다.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17)”라 하였다. 이어서 부처님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십이연기를 설하신다.

 

수행녀 셀라는 빠삐만에게 이 환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이 재난은 타인이 만든 것도 아니니(S5.9)”라 하였다. 이는 자아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을 부정한 것이다. 이어서 수행녀는 원인을 연유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 버리네(S5.9)”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십이연기와 맥을 같이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이라는 존재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씨앗의 비유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씨앗의 비유가 나온다. 씨앗이 발아 하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수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맞았을 때 싹이 돋는다. 그래서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져 흙의 자양분을 연유로 하고 습기를 조건으로 하여, 그 두 가지로 성장하듯이라 하였다.

 

씨앗은 흙이라는 자양분과 습기를 조건으로 한다. 이는 연기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를 든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게송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세존]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재생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A3.76, 존재의 경,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업은 밭, 의식은 종자, 갈애는 수분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의식이 씨앗으로 비유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습기를 머금으면 발아 하게 된다. 그런데 씨앗은 이전의 나무에서 형성된 것이다. 씨앗이 발아 되어 나무가 되면 또 씨앗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전 씨앗과 현재의 씨앗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이전 씨앗을 조건으로 하여 현재의 씨앗이 나왔기 때문이다.

 

씨앗을 의식()으로 볼 수 있다. 식은 조건 발생하고 조건소멸한다. 만일 식이 변치 않는다면 씨앗이 변치 않는다는 말과 같다. 씨앗은 조건에 따라 발생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식 역시 조건에 따라 발생되었다. 씨앗이 땅과 습기를 조건으로 하듯이, 마찬가지로 식 역시 업과 갈애를 조건으로 한다.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라 하였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

 

세 번째 게송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세상속에서 산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죽어도 세상은 잘 돌아 갈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은 다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세상의 생겨남에 대한 경,S35:107, 전재성님역)

 

 

세상이 생겨남에 대하여 접촉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시각접촉, 청각접촉 등 접촉이 일어날 때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의 소멸은 어떤 것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세상의 소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은 이와 같이 소멸한다. 이것이 세상의 소멸이다.”

(세상의 생겨남에 대한 경,S35:10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상의 소멸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멸의 첫째 원인으로 갈애를 들고 있다. 갈애의 소멸을 조건으로 인하여 결국 세상이 소멸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부처님은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접촉에서 기인된다고 하였다. 이런 접촉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시각, 청각 등 감각능력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과 형상, 후각과 냄새 등 여섯 가지 감역이 일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세계 또는 이 감각영역들(Eva khandhā ca dhātuyo cha ca āyatanā ime, S5.9)”라 하였다. 이는 온(khandhā), (dhātu), (āyatanā)를 말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 일체인 것이다.

 

부처님은 세상의 생겨남에 대하여 접촉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라 하였다. 이런 세상이 모든 것, 즉 일체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그것은 틀려먹었어요?”라고 부인한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 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Sabbasutta-일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 전재성님역)

 

 

여기서 그의 감역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슬기로운 자라면 일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이는 깊은 물속을 걸으려 하거나 달이나 태양을 끌어내리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2015-04-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