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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와지라의 경(S5.10)

담마다사 이병욱 2015. 4. 17. 18:42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와지라의 경(S5.10)

 

 

창조주를 가정하여

 

수행녀 와지라가 탁발을 마치고 안다 숲에서 선정에 들려 할 때 악마 빠삐만이 나타났다. 선정을 방해하기 위하여 나타난 빠삐만은 수행녀에게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 (kenāya pakato satto)”라며 묻는다. 이전의 셀라의 경에서는 누가 이 환영을 만들었는가?”라 하였다.

 

뭇삶이라는 말이 있다. 전재성님의 번역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말은 satta의 번역어이다. 초불연에서는 중생이라 번역하였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뭇삶의 세계, 즉 중생계에 대하여 지옥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천에 이르기까지 육도하는 모든 세계를 이른다.”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악마 빠삐만은 이런 뭇삶을 누가 만들었는가?”라 하여 창조자를 가정하고 있다. 이어지는 빠삐만의 게송을 보면 뭇삶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kuva sattassa kārako)”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와지라 빅쿠니 답송하기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세상을 창조한 자는 있을 수 없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피조물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악마 빠삐만은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를 가정하며 수행녀에게 질문을 한다. 이에 수행녀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한다.

 

 

 

Vajirāsutta(와지라의 경, S5.10)

비 고

빠알리어

Kinnu sattoti paccesi

māradiṭṭhigatannu te,
Suddhasa
khārapuñjoya

nayidha sattūpalabbhati.
 
Yathā hi a
gasambhārā

hoti saddo rato iti,
Eva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Dukkhameva hi sambhoti

dukkha tiṭṭhati veti ca,
Nāññatra dukkhā sambhoti

nāññatra dukkhā nirujjhatīti.

sammuti

전재성님역

[바지라]

그대는 왜 뭇삶에 집착하는가?

악마여, 그대의 사견일 뿐,

그것은 단순한 형성의 집적이니

거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은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거짓이름

각묵스님역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속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단지 괴로움이 생겨나고

단지 괴로움이 머물고 없어질 뿐이니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고

괴로움 외에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도다.”

인습적 표현

빅쿠보디역

"Why now do you assume ‘a being’?

Mara, is that your speculative view?

This is a heap of sheer formations:

Here no being is found.

 

"Just as, with an assemblage of parts,

The word  ‘chariot’ is used,

So, when the aggregates exist,

There is the convention ‘a being.’

 

"It's only suffering that comes to be,

Suffering that stands and falls away.

Nothing but suffering comes to be,

Nothing but suffering ceases."

the convention

 

 

 

 

추론에 불과한 영원주의

 

첫 번째 게송을 보면 창조주를 가정한 질문에 반박하고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오온의 결합에 지나지 않은 것임에도 중생이니 또는 뭇삶이니 하는 명칭에 집착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체도 없는 명칭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삿된견해에 불과한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창조주를 가정한 것은 왜 삿된 견해인가? 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서 영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말한다.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인 자아가 있어서 영원히 존재함을 말한다. 이는 삿된 견해이다. 왜 삿된견해인가?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추론으로 안 것에 불과 하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는 추론으로 두드리고 탐구로 뒤쫒아서 스스로 이해한 것을 이와 같이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말한다.”(D1)

 

 

영원주의는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추론자가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하였을 때 이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가 대를 이어 간다고 하였을 때 후대 사람들은 단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은 붙이기 나름이다. 태어나면 이름을 붙여 주고, 주민번호가 자동으로 부여된다. 저 창문 밖에 보이는 관악산 역시 누군가 붙여준 것에 불과하다. 관악산을 바라 보고 사는 자는 앞산이라 할 것이고, 등지고 사는 사람은 뒷산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명칭이라는 것은 누군가 부르기 쉽게 이름을 부여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명칭에 집착하여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관례에 따라 부르는 명칭

 

두 번째 게송에서는 수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수레라 부르는 것은 단지 바퀴와 바퀴살 등 부속품들이 모여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누군가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여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분석해 보면 크게 다섯 가지 다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색, , , , , 즉 오온이라 한다. 이렇게 다섯 가지 다발로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사람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수행녀 와지라는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hoti sattoti sammuti)라 하였다.

 

뭇삶이란 중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람도 중생의 범주에 들어 가므로 사람은 거짓이름이다.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명칭만 부여 됐을 뿐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여기 거짓이름이라 한 것은 ‘sammuti’에 대한 번역어이다.

 

PCED194에 따르면 ‘sammuti’는 여성명사로서 ‘general opinion’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인습적 표현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convention’이라 하여 관습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사람이라는 말이 단지 명칭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음에도 사람이라 칭하는 것은 관례적으로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습적인 표현에 대한 적절한 게송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거룩한 님의 경에서 나라는 명칭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무아를 설한 부처님이 종종 나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관례적으로 붙이는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음에도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소통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접촉에 따른 것일 뿐

 

세 번째 게송은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악마 빠삐만이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은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가정하여 물었다. 이에 수행녀 와지라는 명칭에 불과한 것이라 답한다. 그러면서 괴로움에 대한 게송을 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체도 없는 영원주의에 대하여 희론으로 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라 하였다. 괴로움의 생성과 소멸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여기서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상윳따니까야 괴로움의 생겨남에 대한 경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 하였다.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도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리도 모두 접촉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이 생겨난 것은 창조주가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시각과 청각 등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하여 세상이 발생하고 괴로움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창조주가 있어서 괴로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인가? 이어지는 경에 따르면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은 이와 같이 소멸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S35.106)”라 하였다. 결국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청정도론 견청정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게송과 관련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밀린다빤하(Mil.27-28)와 청정도론(XVIII.25-28)을 참고하라고 하였다. 빅쿠보디의 각주에서도 The simile of the chariot is elaborated at Mil 27-28, which quotes the previous verse. Vism 593,18-19 (Ppn 18:28)”로 되어 있어서 동일한 내용이다.

 

청정도론에 견청정이 있다. 칠청정에서 세 번째인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을 말한다. 게송과 관련된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경과 대조함

 

25.

이와 같이 그들의 본성에 따라 정신물질을 구분한 뒤 중생이나 인간 등 세간에 통용되는 명칭(lokā-sāmānna)을 완전히 제거하고, 중생이라는 미혹을 넘어서고, 미혹이 없는 경지에 마음을 안 주하기 위하여 여러 경을 통해서 ‘이것은 단순히 정신물질일 뿐이다. 중생도 없고 인간도 없다’라고 이 뜻을 대조하여 구분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단어가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S.i.135)”

 

26.

다시 설하셨다. “도반이여, 목재와 덩굴과 진흙과 짚으로 공간을 에워쌀 때 집이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뼈와 힘줄과 살과 피부로 공간을 에워쌀 때 몸뚱이(rupā,물질)라는 명칭이 있습니다.(M.i.190)”

 

 

27.

다시 설하셨다.

 

“오직 괴로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머물고 사라질 뿐

괴로움과 다른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과 다른 것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다.(S.i.135)”

 

비유로 정신-물질을 설명함

 

28.

이와 같이 수백의 경지들에서 오직 정신물질을 설하셨을 뿐 중생을 설한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설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굴대와 바퀴와 차체와 수레의 채 등의 부품들이 일정한 형태로 조립 되었을 때 수레라는 인습적인 표현이 있지만 궁극적인 뜻에서 각각의 부품들을 면밀히 조사하면 수레라는 것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목재 등 집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일정한 형태로 공간을 에워싸고 있을 때 집이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있지만 궁극적인 뜻(pārāmā-tthā)에서 집은 없다. 손가락과 엄지손가락 등이 일정한 형태로 있을 때 주먹이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있고, 류트의 판과 현 등에서 류트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있고, 코끼리와 말 등에서 군대라는, 성벽과 집과 성문 등에서 도시라는, 줄기와 가지와 잎 등이 일정한 형태로 유지되었을 때 나무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나’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溫]들이 있을 때 중생이나 인간이라는 통상적인 표현이 있을 뿐, 궁극적인 뜻에서 하나하나 세밀히 조사하면 ‘내가 있다’라든가 혹은 ‘나’라고 거머쥐는 토대가 되는 중생이란 것은 없다. 궁극적인 뜻에서 볼 때 오직 정신물질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자는 봄(, dāssānā)을 있는 그대로 봄(yāthabhutā-dāssānā, 如實見)이라 한다.

 

(청정도론, 18장 견청정, 25-28,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은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집필한 책이다. 5부 니까야에 대한 주석서이자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다.

 

붓다고사는 상윳따니까야 와지라경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게송을 실어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창조자, 중생, 수레, 인간 등의 이름과 명칭이 있지만 이는 관습적으로 붙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부르기 좋게 지어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 명칭을 보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구성하고 있는 요소만 있을 뿐이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수레라는 것도 굴대와 바퀴와 차체와 수레의 채 등의 부품들이 일정한 형태로 조립 되었을 때 수레라는 인습적인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런 수레에 대하여 영어로는 ‘a wagon’이라 한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웨건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수레라는 말을 모르는 미국인에게도 역시 수레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있다면 수레를 구성하고 있는 부속품들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라고 하였을 때 내가 있다라고 하지만 이는 사회통념상 그렇게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나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색, , , , 식이다. 이를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라 하여 오온이라 한다.

 

부처님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말씀 하셨다. 수레가 있다고 하여 수레라는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수레를 구성하고 있는 부속품을 본다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것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으로 분석하여 본다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몸과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창조주가 있어서 피조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것이고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창조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야 한다. 이 몸과 마음 밖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 안에 해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여실견(如實見, yāthabhutā-dāssānā)’이라 하였다.

 

 

 

2015-04-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