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빠알리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사용하였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3. 18:43

 

 

빠알리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사용하였을 때

 

 

 

 

 

이름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과도 같다. 특히 인터넷시대에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름을 함부로 짓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익명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에서 그렇다. 인터넷에서는 거의 대부분 필명으로 소통한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필명이 등장한다. 의미 있는 필명이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장난으로 지은 듯한 필명도 보인다. 대게 필명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향을 판단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바라문상윳따(S7)’가 있다. 부처님 당시 지배계급인 바라문과 부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바라문 중에는 부처님에게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바라문 출신들이 부처님 교단에 입교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못 마땅해 하는 일부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 바라문들은 이름이 있다. 이름을 보면 대충 바라문의 성향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바라문상윳따에서 바라문 이름이 경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역서의경에 대한 명칭은 다르다. 성전협회의 전재성님의 경우 원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의 각묵스님의 경우 사람이름을 우리 말로 풀이하여 경의 이름으로 하였다. 이를 표로 비교해 보았다.

 

 

경의 이름

전재성님역

각묵스님역

빅쿠보디역

Dhanañjānīsutta

(S7.1)

다난자니의 경

다난자니 경

Dhanañjānī

Akkosasutta

(S7.2)

악꼬사까의 경

욕설 경

Abuse

Asurindakasutta

(S7.3)

아쑤린다까의 경

아수라 왕 같은 자 경

Asurindaka

Bilagikasutta

(S7.4)

빌랑기까의 경

시큼한 죽 장수 경

Bilagika

Ahisakasutta

(S7.5)

아힝싸까의 경

해코지 않음 경

Ahisaka

Jaāsutta

(S7.6)

자따의 경

엉킨 머리 경

Tangle

Suddhikasutta

(S7.7)

쑷디까의 경

청정 경

Suddhika

Aggikasutta

(S7.8)

악기까의 경

불에 헌공하는 자 경

Aggika

Sundarikasutta

(S7.9)

쑨다리까의 경

순다리까 경

Sundarika

 

 

 

빠알리어에서 경의 명칭을 보면 사람이름에 대한 것이다. 다난자니(Dhanañjānī)의 경우 경에서는 바라드와자 가문의 바라문녀 다난자니가..” 식으로 되어 있다. 다난자니에 대해서는 세 번역서가 모두 원어를 사용하였다.

 

악꼬사까경(Akkosasutta)에 대해서 전재성님은 원어 그대로 하였다. 이는 악꼬사까가 사람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이름을 풀이하여 우리말로 옮겼다. 욕설경이라 하였다. 왜 욕설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주석에 의하면 욕쟁이 바라드와자 바라문은 앞 경에 나타난 바라드와자 바라문의 동생이었다.(662번 각주)”라 하였다. 악꼬사까라는 말이 욕쟁이라는 말이다.

 

Akkosa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insult; abuse; reproach’로 되어 있다. 모역, 비난, 욕설의 뜻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악꼬사까가 사람 이름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욕설을 잘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풀이하여 욕설 경이라 한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순녀(順女), 온순한 여자

 

사람 이름은 고유명사이므로 그대로 불러 주는 것이 좋다. 일아스님은 아소까에서 이름을 문자적으로 풀어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순녀(順女)’라는 이름을 ‘온순한 여자’라고 풀어서 부르는 것과 같다. ‘순녀’와 ‘온순한 여자’는 단지 문자적의미로만 본다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순녀라는 말 대신 “온순한 여자!”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 되돌아 볼 수 있을까. 람 이름은 고유명사이므로 그대로 불러 주어야 한다.

 

아소까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아소까라고 말하면 이는 세계적인 공통어이기 때문에 모두 알아 듣는다. 그러나 우리말로 풀어 사용하였을 때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된다. 아소까를 무우왕(無憂)이라고 부르는 것도 해당된다.

 

asoka‘free from sorrow’의 뜻이다. 근심 없다는 뜻이다.  슬픔을 뜻하는 soka에 부정접두어 a가 붙으면, asoka는 슬픔 없는, 무우(無憂)의 뜻이 된다. 그러나 아소까는 사람이름이다. 그럼에도 무우라 한 것은 순녀를 온순한 여자라고 번역하는 것과 다름 없다.

 

일아스님은 빠알리 경전상의 고유명사들을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여 부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한자어나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를경우 이는 글로벌해가는 시대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 한다. 이런 예는 수 없이 많이 보인다. ‘디가 니까야’를 ‘장부경전’이라 하고, ‘맛지마 니까야’를 ‘중부경전’으로 부르는 것 등은 오로지 한국의 불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라는 것이다.

 

이름을 풀어 사용하였을 때

 

바라문상윳따 네 번째 경의 명칭은 ‘Bilagikasutta’이다. 여기 Bilagika는 사람 이름이다. 각묵스님은 이 경에 대하여 시큼한 죽 장수 경이라 하였다. 번역에서는 시큼한 죽 장수 바라드와자 바라문은…”이라고 되어 있다. 전재성님은 바라문 빌랑기까 바라드와자가..”라 되어 있어서 이름을 원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Bilagika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그는 시큼한 죽 장수를 하여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667번 각주)”라 하였다.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 빅쿠보디는 원어 그대로 하여 Bilagika라 하였다.

 

바라문상윳따 다섯 번째의 경은 Ahisakasutta’이다. 여기서 Ahisa는 해치지 않는 것, 비폭력 등을 의미한다. 아힝사를 이름으로 하였다는 것은 비폭력주의자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에서는 해코지 않음 경이라 이름 붙였다. Ahisa는 비폭력을 의미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되어 있다.

 

 

Yathā nāma tathā cassa

siyā kho tva ahisako,
Yo ca kāyena vācāya

manasā ca na hisati,
Sa ce ahi
sako hoti

yo para na vihisatīti.

 

[세존]

그대의 이름처럼 그렇다면

그대야말로 불살생자일 것이네.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해치지 않는

참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아힝싸카가 되리.”(S7.5, 전재성님역)

 

[세존]

만일 그대 이름처럼 그렇다면

그런 그대 진정으로 해코지 않는 자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해코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해코지 않는 자이니

남을 해코지하지 않기 때문이로다.” (S7.5, 각묵스님역)

 

“If one were as one's name implies

You would be a harmless one.

But it is one who does no harm at all

By body, speech, or mind,

Who really is a harmless one

As he does not harm others.” (S7.5, 빅쿠보디역역)

 

 

ahisa는 오계가운데 불살생의 의미를 지닌다. 아힝사를 이름으로 하였다는 것은 오계를 준수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살생을 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힝사까에게 그대의 이름처럼 그렇다면 그대야말로 불살생자일 것이네.”라 한 것이다.

 

고유명사는 그대로 불러야

 

초불연의 경의 명칭에 대한 번역을 보면 일관성이 없다. 바라문 이름에 대하여 우리말로 풀이하여 경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가 하면, 또 어느 경우에는 원어 그대로 사용한다. 분명한 사실은 바라문 상윳따에 등장하는 경의 명칭은 사람이름을 근거로 하였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름을 함부로 풀어 부를 수 없다.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불러 주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빌랑기까에 대하여 시큼한 죽 장수라거나, 아힝사까에 대하여 해코지 않음’, 악기까에 대하여불에 헌공 하는 자라는 식으로 이름을 풀어 사용한다면 이는 상식에 맞지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이름이 되어 버린다. 마치 순녀온순한 여자식으로 번역한 것과 같다.

 

 

 

2015-09-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