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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부처님의 계급평등사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6. 21:21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부처님의 계급평등사상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

 

바라문상윳따에 순다리까의 경(S7.9)’이 있다. 여기서 순다리까는 바라문의 이름이다. 순다리까는 어떤 뜻일까?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순다리까 강의 언덕에서 불에 헌공하는 자였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 한다.

 

 

불의 제사(agnihotra)

A Brahmin priest making offerings of ghee (clarified butter) into a sacred fire.

 

 

 

바라문 순다리까는 불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 때 순다리까는 누가 제사를지내고 남은 이 음식을 즐길 것인가?”라고 하며 사방을 살펴 보았다. 바라문 순다리까는 어떤 나무 밑에서 두건을 쓴 수행자를 보았다.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들고 찾았다. 두건을 쓴 사람은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은 두건을 벗었다. 그러자 바라문은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이 존자는 머리 깍은 자로구나. 이 존자는 머리 깍은 자로구나.”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is worthy is shaven-headed, this worthy is a shaveling,”이라 하였다.

 

머리 깍은 모습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빡빡 깍은 까까중이라 비하의 의미로 번역 하였다. 각묵스님은 이 존자는 머리 깍은 자라 하여 존중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빠일리어는 “muṇḍo aya bhava이다. 여기서 muṇḍo‘Shaved, bald, bare’의 의미이다. aya‘this person’의 의미이고, bhava‘Lord, Sir’이다.

 

바라문이 삭발한 부처님을 발견한 것은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이는 이어지는 문장 어떤 바라문은 빡빡 깍은 자도 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 머리 깍은 자에 대하여 천하게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죄수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도 삭발하였다. 이에 바라문은 마치 머리를 삭발한 자에 대하여 매우 천하게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빡빡 깍은 까까중이라는 표현이 와 닿는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바라문 순다리까는 삭발한 부처님을 보고 그대는 어떤 가문 출신입니까?”라고 물었다. 바라문 출신 유행자 중에도 삭발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라문 출신이면 음식을 주고, 아니면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한다.

 

 

Mā jāti puccha caraañca puccha

kaṭṭhā have jāyati jātavedo,
N
īcā kulīnopi munī dhitīmā

ājāniyo hoti hirīnisedho.

 

[세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바라문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라는 말과 같다. 태생에 따라 차별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어서 행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태생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바라문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태생이 아니라 행위를 묻는 것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바셋타의 경(Sn3.9)에 내용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태생에 의해 바라문인 자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인 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stn650)라 하였다.  

 

부처님은 태생보다 행위라 하였다. 바셋타의 경에서 이어지는 게송에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stn651-652)라 하였다. 태생으로서 바라문을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Mā jāti puccha caraañca puccha)”라 한 것이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게송에서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난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마지마니까야 MN.II.152를 참조 하라고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앗살라야나의 경(M93)’를 말한다. 관련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 (M92,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바라문들은 ‘바라문들이야말로 최상의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 (M92)라 하였다. 또 바라문들은 청정하고 다른 계급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순다리까가 머리를 빡빡 깍았다고 차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태생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땔감의 비유를 하였다. 어떤 땔감에서도 불이 붙고 그 불의 형태는 모두 똑 같은 것이라 하였다. 바라문이  고급 전단향나무에 불을 붙인 것이나, 불가촉천민이 돼지먹이통에 불일 붙인 것이나 불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같은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계급평등사상

 

소똥으로 불을 붙이면 소똥 같은 불일까? 고급 전단향목재로 불을 붙이면 전단향 같은 불일까? 모든 불의 형태는 재료와 관계 없이 동일하다. 어떤 땔감을 사용해도 불의 형태는 변함이 업다. 그래서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평등사상을 잘 표현 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서는 계급의 평등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세존]

바쎗타여, 바라문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

 

바쎗타여, 평민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

 

바쎗타여, 노예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

 

바쎗타여, 수행자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27)

 

 

누구든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하였다. 바라문 뿐만 아니라 평민도, 심지어 노예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어떤 땔감에서도 불이 붙듯이, 불가촉천민의 가문에서도 현자가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을 보면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jāniyo hoti hirīnisedho)”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양심으로 자신을 제어 하는 자가 혈통 좋은 사람이니라.”라 하였다. 여기서 ājāniyo의 뜻은 ‘Of good race or breed’이다. 좋은 혈통 또는 훌륭한 출생을 뜻한다. 부끄러움으로 자제한다는 뜻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이렇게 각주 하였다.

 

 

번뇌 다한 성자요 결연하고 양심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자가 혈통 좋은 사람이다. 이러한 결연함과 양심과 해탈이라는 덕을 구족한 자가 태생을 갖춘자여서 공양하기에 으뜸가는 자이다.”(S.A.i.234)  (초불연 상윳따1 684번 각주)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충고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태생이나 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되는 것이고, 비천한 가문에서도 현자는 나오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네 번째 구절에서는 바라문 순다리까에게 일종의 충고 형식으로 양심으로 자신을 제어 하는 자가 혈통 좋은 사람이니라.”라 한 것이다.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

 

부처님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ccena danto damasā upeto

vedantagū vusitabrahmacariyo,
Ya
ññūpanīto tamupavhayetha

kālena so juhati dakkhieyyoti.

 

진리로 길들여지고 감관의 제어를 갖추고

지혜를 성취하고 청정한 삶을 이룬 님,

제사가 정해졌으니 마땅히 그를 초빙하라.

올바른 때 공양 받을 만한 이에게 헌공하라.” (S7.9,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바라문 순다리까에게 준엄하게 명령하는 듯 하다.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제사가 정해졌으니 마땅히 그를 초빙하라.”라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인드라 신이나 바루나 신 등에 헌공하는 것은 소용이 없으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초빙해서 헌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Srp.I.236) 라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드라나 바루나를 보지 못하였음에도 제사 지내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에게 헌공 하느니 차라리 살아 있는 앞에 있는 깨달은 자에게 헌공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하느님은 있을까? 마치 귀신이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고 한다. 바라문이 제사 지내며 헌공하는 신은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디가니까야 세 가지 베다의 경(D13)’에서 부처님은 바라문 바셋타에게  그런데 바쎗타여,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 가운데 어떠한 한 바라문이라도 하느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D13)라고 묻는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梵天)로서 브라만의 최고신을 말한다. 이에 바셋타는 존자 고따마시여,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바라문들의 스승 가운데 하느님을 본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또 일곱 세대 이전의 스승 가운데 하느님을 본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바라문 바셋타는 없습니다라고 계속 답한다. 누구도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바라문들은 하느님을 믿고 제사 지낸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바쎗타여, 성직자들 가운데 옛 선인들은 성전을 쓰라 전했고, 지금의 성직자들은 그 성전이 외워지고 설해져서 모아진 것을 따라서 외우고 따라서 설하고, 그 설해진 것을 따라서 설하고 가르쳐진 것을 따라서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앗타까, 바마까,바마데바, 벳싸밋따, 야마딱기, 앙기라싸, 바라드와자, 바쎗타, 깟싸빠, 바구와 같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도 어디에 하느님이 있는지, 어떻게 하느님이 있는지 어느 곳에 하느님이 있는지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본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D1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들이 베다를 단지 외우고 베다에 써진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표하고 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하느님을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마치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창주주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면 단지 전승된 믿음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제사 지낸다면 허상에 제사 지내는 것과 같다. 그런 제사는 아무런 공덕도 없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앞에 서 있는 청정한 성자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때 공양 받을 만한 이에게 헌공하라.”라고 준엄하게 말씀 하신다.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은 향유하지 않으리

 

바라문 순다리까는 부처님의 준엄한 말을 알아 들었다. 비록 머리는 죄수처럼 삭발 하였지만 모든 면에서 행동거지가 성자의 면모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순다리까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부처님에게 공양하고자 한다.

 

 

Addhā suyiṭṭha suhuta mamayida

ya tādisa vedagumaddasāmi,
Tumhādisāna
hi adassanena añño

jano bhuñjati havyasesanti.

 

[쑨다리까]

분명히 나는 제사를 잘 지내고 헌공을 잘 했네.

이같이 지혜에 통달한 자를 만났으니

그대와 같은 자를 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이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즐겼으리.”

 

고따마여, 그대가 드시라. 그대가 바라문이네.”(S7.9, 전재성님역)

 

 

고대 인도에서도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공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같은 바라문 수행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순다리까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부처님에게 음식을 공양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시를 읊은 대가로 주는 것은 향유하지 않으리.”하며 공양을 거절한다.

 

소화 할 수 없는 음식

 

부처님에 공양을 거절하자 순다리까는 그러면 저는 누구에게 제사 지내고 남은 이 음식을 주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세존]

바라문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여래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이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들고 올바로 소화시킬 사람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이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풀 없는 곳에 던져버리거나 벌레가 없는 물에 부어 버리십시오.” (S7.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을 버리라고 하였다. 아무도 소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왜 소화 시킬 수 없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음식을 선물할 때, 하늘 사람들이 천상의 위력으로 만들어진 자양분으로 음식을 만들어 뿌렸다. 그러나 음식은 거친 소화기관을 갖고 있는 일반사람들이 소화해내기에는 너무 섬세했다. 그렇지만 음식은 거친 물질적 토대를 가졌기 때문에 하늘사람들이 소화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삼매에 들지 않고 깨우친 아라한 조차 그것을 소화할 수 없었다. 여덟 가지 명상적인 선정의 단계를 거친 아라한 만이 그 성취의 힘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반면 세존은 타고난 소화력으로 소화시킬 수 있었다.”(Srp.I.235, 전재성님) 라고 되어 있다.

 

바라문 순다리까가 만든 제사 음식은 천상의 존재도 인간도 소화할 수 없는 공양음식이었다. 부처님만이 소화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이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들고 올바로 소화시킬 사람이 없다고 봅니다.”  한 것이다.

 

순다리까는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을  생명체가 없는 물속에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지글지글 소리를 내면서 수증기를 내뿜었다.” (S7.9)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부처님은 기적적인 일을 행해서 바라드와자를 교화하려고 했다.”라고 되어 있다. 고대 인도에서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에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도전통에서 제사헌공의 특징이라 한다.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시길

 

부처님은 기적을 보이면서 바라문 순다리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교화하였다.

 

 

1.

Mā brāhmaa dārusamādahāno

suddhi amaññi bahiddhā hi eta,
Na hi tena suddhi
kusalā vadanti

yo bāhirena parisuddhimicche.

 

[세존]

바라문이여, 땔나무를 지피어

청정함을 얻는다고 믿지 말라.

밖으로 청정함을 구한다면

청정함을 얻지 못한다고 현자들은 말하네.”(전재성님역)

 

[세존]

나무에 불을 지펴, 바라문이여

밖으로 청정 구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

밖으로 청정 구하는 자는 청정 얻지 못한다고

능숙한 자들은 말하도다.” (각묵스님역)

 

When kindling wood, brahmin, do not imagine

This external deed brings purity;

For experts say no purity is gained

By one who seeks it outwardly. (빅쿠보디역)

 

 

2.

Hitvā aha brāhmaa dārudāha

ajjhattameva jalayāmi joti,
Niccaggini3 niccasam
āhitatto

araha aha brahmacariya carāmi.

 

바라문이여, 나무에 불을 피우는 것을 버리고,

항상하는 불꽃과 항상하는 삼매로써

나는 내부에 광명을 지피우고

거룩한 님으로서 청정한 삶을 이끄네.” (전재성님역)

 

바라문이여, 나무에 불 지피는 것 버리고

내적인 광명으로 나는 항상 타오르나니

내게는 항상 불이 있고 마음은 항상 삼매에 드나니

그런 나는 아라한이요 청정범행을 닦도다.” (각묵스님역)

 

"Having given up the fire made from wood,

I kindle, 0 brahmin, the inner light alone.

Always ablaze, my mind always concentrated,

I am an arahant living the holy life. (빅쿠보디역)

 

 

3.

Māno hi te brāhmaa khāribhāro

kodho dhūmo bhasmani mosavajja, 

jivhā sujā hadaya jotiṭṭhāna

attā sudanto purisassa joti.

바라문이여, 그대의 교만은 어깨의 짐이고

화냄은 연기이고 거짓말은 잿속에 있네.

혀는 제사의 국자이고 심장은 제단이네.

잘 길들여진 자아는 인간의 광명이네.” (전재성님역)

 

 바라문이여, 그대의 자만은 어깨에 울러 멘 짐이고

분노는 연기요 거짓말은 재

혀는 주걱, 심장은 불지피는 재단

잘 길들여진 자신은 인간의 광명이로다.” (각묵스님역)

 

"Conceit, 0 brahmin, is your shoulder-load,

Anger the smoke, false speech the ashes;

The tongue is the ladle, the heart the altar,

A well-tamed self is the light of a man. (빅쿠보디역)

 

 

4.

Dhammo rahadobrāhmaa sīlatittho

anāvilo sabbhi sata pasattho,
Yattha have vedaguno sin
ātā

anallagattāva taranti pāra.

 

바라문이여, 가르침은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이니,

오염되지 않아 참사람에 의해 참사람에게 가려지네.

그곳에서 지혜를 성취하고자 목욕하면,

몸을 적시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 (전재성님역)

 

바라문이여, 법은 계행이라는 여울을 가진 호수

맑고 투명하여 참된 자들이 참된 자들에게 칭송하는 것

지혜의 달인들은 거기서 목욕하여

물들지 않은 몸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도다.” (각묵스님역)

 

"The Dhamma is a lake with fords of virtue

Limpid, praised by the good to the good

Where the knowledge-masters go to bathe,

And, dry-limbed, Cross to the far shore. (빅쿠보디역)

 

 

5.

Sacca dhammo sayamo brahmacariya

majjhesitā brāhmaa brahmapatti,
satujjubh
ūtesu namo karohi

tamaha nara dhammasārīti brūmīti.

 

진실과 명상과 자제와 순결한 삶과 중도를 실천하는 것

바라문이여, 이것이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네.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귀의하라.

그러한 자를 나는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 부르네.”(전재성님역)

 

 

진리와 법, 제어와 청정범행

중간[]을 의지하여 브라흐마가 되는 것

[이런 것을 실천하는] 올곧은 분들에게

바라문이여, 그대는 성심으로 예배하라.

이런 사람을 일컬어 법을 따르는 자라고 나는 말하노라.” (각묵스님역)

 

"Truth, Dhamma, restraint, the holy life,

Attainment of Brahma based on the middle:

Pay homage, 0 brahmin, to the upright ones;

I call that person one impelled by Dhamma. (빅쿠보디역)

 

 

다섯 번째 게송에서 진실과 명상과 자제와 순결한 삶과 중도를 실천하는 것 (Sacca dhammo sayamo brahmacariya)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dhamm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명상으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근거로 하여 “Srp.I.237-238에 따르면, 진실(sacca)은 진실한 말(saccavadi) , 올바른 언어를 말하고, 명상(dhamma: 원래는 법)은 올바른 견해(diṭṭhi), 올바른 사유(sakappa), 올바른 정진(yāyamā), 올바른 집중(samādi)을 말하고, 자제는 올바른 행위(kammanta), 올바른 생활(ajīva)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상은 팔정도를 말한다. 여기서 역자가 법(dhamma)을 명상이라고 번역한 것은 견해, 사유, 정진, 집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1530번 각주) 라 하였다.

 

브라흐마짜리야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부처님은 헌공 대상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신이 아니라 하였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특별한 때 불의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니라 항상 불이 꺼지지 않는 살아 있는 성자에게 헌공할 것을 말하였다. 또 호수가에 가서 목욕을 함으로 인하여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목욕을 하지 않아도 지혜를 성취하면 청정해진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밖에서 청정함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 순결한 삶, 브라흐마짜리야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중도를 말씀 하셨다. 그 중도란 다름 아닌 팔정도를 말한다.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최상의 목표를 실천할 수 있음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불의 제사를 지낼 것이 아니라 번뇌 부순 아라한에게 공양하고 귀의 하라는 말이다.

 

 

2015-09-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