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재가자로서 산다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5. 9. 18. 13:01

 

재가자로서 산다는 것은

 

 

 

 

 

 

바라문상윳따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 바라문상윳따(Brahmaa Sayutta, S7)’가 있다. 바라문을 주제로 하여 22개의 경으로 구성된 상윳따이다. 이렇게 바라문을 주제로 하여 분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해제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전재성님은 해제 글에서 바라문상윳따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상윳따는 사제계급인 바라문과 관련된 2 22경으로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모임이 부처님 당시의 보다 지배적인 종교와의 관념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데 비해, 바라문의 모음은 당시의 지배적인 종교의 사제였던 바라문들과 신흥종교인 불교와의 실제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상윳따니까야 바라문상윳따해제, 전재성님)

 

 

해제에 따르면 초기경전에 바라문이 등장하는 것은 지배종교로서의 바라문교와 신흥종교로서의 불교와의 일종의 대립관계를 보고 있다. 이는 불교가 성립된 역사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바라문의 영원주의 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교는 바라문교를 비판하며 성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라문상윳따와 관련하여 초불연의 해제를 보았다.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지하듯이 바라문은 우리가 카스트라 부르는 인도의 와르나(Varna) 제도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계층이며 인도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문헌인 4베다와 여기에 관계된 다양한 문헌과 학문을 전승하고 복잡다단한 제사를 발전시키고 이를 관장한 지식인 계층이고 성직자 계층이었다. 이들에 의해 전승된 종교가 바로 바라문교이다.

 

(상윳따니까야 바라문상윳따해제, 각묵스님)

 

 

바라문 상윳따와 관련하여 빅쿠보디의 CDB해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is Sayutta, recording the Buddha's conversations with brahmins, contains two vaggas, each with a different unifying theme.

 

In the first all the brahmins who come to the Buddha, often angry (7:1-4) or disdainful (7:7-9), are so deeply stirred by his words that they ask for ordination into the Sangha and "not long afterwards" attain arahantship.

 

These suttas display the Buddha as the incarnation of patience and peace, capable of working, in those who would attack him, the miracle of transformation simply by his unshakable equanimity and impeccable wisdom.

 

In this vagga we also see how the Buddha assessed the brahmin claim to superior status based on birth. He here interprets the word "brahmin" by way of its original meaning, as a holy man, and on this basis redefines the true brahmin as the arahant.

 

The three Vedas which the brahmins revered and diligently studied are replaced by the three vijjas or true knowledges possessed by the arahant: knowledge of past births, of the laws of kammic retribution, and of the destruction of the taints (7:8).

 

The last sutta adds a touch of humour, still recognizable today, by depicting the contrast between the oppressive cares of the household life and the untrammelled freedom of the life of renunciation (7:10).

 

In the second vagga the brahmins come to challenge the Buddha in still different ways, and again the Buddha rises to the occasion with his inexhaustible wit and wisdom. In this vagga, however, though the Buddha inspires in his antagonists a newly won faith, the brahmin converts do not become monks but declare themselves lay followers "who have gone for refuge for life."

 

(빅쿠보디, 바라문상윳따 해제)

 

 

빅쿠보디의 해제글을 보면 바라문에 대하여 “Brahmin”이라 하였다. 여기서 브라흐민이라는 말은 바라문을 뜻하는 브라흐마나(brāhmaa)의 영문표기에 해당된다. 전재성님은 성직자 또는 바라문이라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바라문이라 번역하였다.

 

빅쿠보디에 따르면 Brahmin에 대하여 정의 하였다. 그것은 “way of its original meaning, as a holy man’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바라문 또는 브라흐민이라 번역되는 브라흐마나는 성스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범천을 뜻하는 브라흐마(Brahma)에서 유래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이전의 정통바라문들과 달리 타락하였다. 그래서 이전의 바라문들의 삶을 재해석 하여 불교에 적용하였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on this basis redefines the true brahmin as the arahant.”라 하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라문이란 아라한과 동급이라 재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바라문의 품에서는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 brūmi brāhmaa)”라고 하였다.

 

바라드와자 가문

 

바라문상윳따에 등장하는 인물은 한 가문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것은 바라드와자가문이다. 아마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유력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유력가문에서 연속해서 부처님 교단으로 출가하는 바라문이 늘어 가자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는 바라문들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다난자니의 경(S7.1)’에서는 이 가엾은 여인은 언제 어느 때나 머리를 빡빧 깍은 수행자들을 칭찬한다. 가엾은 여인이여, 지금 내가 그대의 스승의 입을 닥치게 만들겠다.” (S7.1)라고 악담을 퍼붓는 바라문이 있었다.  어떤 바라문은 가문에서 출가자 생겼다는 말을 듣고 흥분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는 화가 나서 불만스럽게 세존께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을 무례하고 추악한 말로 비난하고 모욕했다.”(S7.2)라 되어 있다. 바라문들의 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바라문들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교단에 불쾌와 혐오를 표한 것은 아니다. 어떤 바라문들은 지극히 호의적이다. 그런 바라문들은 이름에서 드러난다. 아힝사까바라문은 이름 그대로 불살생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교화 되었다. 그래서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존자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 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합니다.(S7.5)”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적대적이었던 바라문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위와 같이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재가자로서 산다는 것은

 

바라드와자가문에서 부처님에게 우호적인 바라문이 있었다. 많은 딸들을 가진 바라문이다. 그래서 경의 이름도 많은 딸들의 경(S7.10)’이다. 경에 따르면 바라문은 열 네 마리의 황소를 잃어 버렸다. 잃어 버린 황소를 찾고자 부처님 계신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때 우거진 숲에서 가부좌를 하고 하고 명상을 하고 있는 부처님을 발견하였다.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잃어 버린 황소에 대하여 심정을 게송으로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답송으로 말한다.

 

경을 보면 마치 숫따니빠따 다니야의 경(Sn1.2)’를 보는 것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소치는 다니야의 경우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지만, ‘많은 딸들의 경에서의 바라문은 많이 가진 것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다.

 

경에서는 바라문이 여러 게송을 읊고 있다. 이에 부처님은 각 게송에 상응하는 답송을 연이어 하고 있다. 이런 점은 다니야의 경에서 일대일 대응방식과 다르다. 각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Na hi  nūnimassa samaassa

balivaddā catuddasa,
Ajja sa
ṭṭhi na dissanti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tilā khettasmi pāpakā,
Ekapa
ṇṇā dupaṇṇā ca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tucachakoṭṭhasmi mūsikā,
Usso
hikāya naccanti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santhāro sattamāsiko,
Upp
āakehi sañchanno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vidhavā satta dhitaro,
Ekaputt
ā duputtā ca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pigalā tilakāhatā,
Sotta
pādena bodheti

tenāya samao sukhī.


Na hi n
ūnimassa samaassa

paccūsamhi iāyikā,
Detha deth
āti codenti

tenāya samao sukhīti,

 

[바라문]

이 수행자에게는 없으니

열 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잎의 참깨나 두 잎의 참깨

밭에서 참깨가 썩어감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텅 빈 창고 앞에서

열렬히 춤추는 쥐들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일곱 달이 지나면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룻바닥이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쏘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에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S7.10, 전재성님역)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구나.

오늘이 벌써 엿새째인데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한 잎이나 두 잎이 달려 있는

병든 참깨 밭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텅 빈 헛간 안에서

명랑하게 춤춰 대는 쥐들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한 아들이나 두 아들을 가진

과부가 된 일곱 딸년들이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잠자리에서 발로 깨우는

누렇게 뜬 곰보 같은 마누라가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참으로 이 사문에게는

새벽같이 찾아와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 없으니

그래서 이 사문은 행복하도다. (S7.10, 각묵스님역)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Fourteen oxen [that have gotten lost],

Not seen now for the past six days: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A field of blighted sesamum plants,

Some with one leaf, some with two: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Rats inside an empty barn

Dancing around merrily: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A blanket that for seven months

Has been covered with swarms of vermin: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Seven daughters left for widows,

Some with one son, some with two: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A tawny wife with pockmarked face

Who wakes him up with a kick: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urely this ascetic does not have

Creditors who call at dawn,

Chiding him, ‘Pay up! Pay up!’:

Hence this ascetic is happy.” (S7.10, 빅쿠보디역)

 

 

바라문은 자신의 처한 상황을 말하면서 수행자로서의 부처님의 행복을 찬탄하고 있다. 재가자로서의 삶과 수행자로서의 삶을 대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런 재가자의 삶은 힘겨운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을 보면 출가하고자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다나에 쏘나의 경(Ud.57)’이 있다. 재가신자 소나는 마음 속으로 늘 가정생활을 하는 자가 아주 완전하고 아주 깨끗하게, 연마된 소라껍질처럼 빛나는 청정한 삶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Ud.57)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한다. 재가신자로서 청정한 삶을 살기 어려움을 토로 하고 있다.

 

경에서와 같이 재가신자는 늘 걱정거리가 많다. 황소걱정, 참깨걱정, 창고걱정, 심지어 과부걱정을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빚을 졌다면 빚쟁이에게 시달려야 한다. 이런 재가자의 힘겨운 삶에 비하여 수행자는 이런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에 대하여 찬탄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보면서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 (tenāya samao sukhīti)”라 하여 후렴구로서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혀 다른 번역1

 

위 번역에서 차이 나는 부분이 있다. 네 번째 게송에서 일곱 달이 지나면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룻바닥이 없으니 (santhāro sattamāsiko, Uppāakehi sañchanno

라는 문구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라 하였다.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룻바닥과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의 차이이다. 왜 이처럼 다른 번역이 되었을까?

 

번역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Ggs를 따랐다. 여기서 Ggs는 독일어로 ‘Die in Gruppen geotdnete Sammlung’ 의 약어를 말한다. 그래서 “Ggs.I.267에 따르면, 쇠똥으로 만든 현관의 바닥으로 틈틈이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Srp.I.239에서 붓다고싸는 Uppādakehi(Uppāakehi 대신) Sachanno로 읽어서 Uppādakapaakehi Sachanno로 해석하여 잠을 못 자게 하는 유해한 작은 곤충으로 생각하고 있다.”(1544번 각주) 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붓다고사의 주석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붓다고사의 주석을 따르지 않고 새롭게 해석된 ‘Ggs.I.267’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각묵스님은 붓다고사의 주석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A blanket that for seven months Has been covered with swarms of vermin:”라 함으로써 역시 붓다고사의 주석을 따라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Uppāakehi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았다. Uppāaka형으로서 ‘[fr. ud + pa in meaning of “biting, stinging”] an insect, vermin S.I,170 (santhāro °ehi sañchanno “a siesta-couch covered by vermin swarm” trsld. p. 215 & note). (Page 152)’라 설명되어 있다. ‘벌레가 갉아 먹는다(biting)’는 의미와 상처를 준다(stinging)’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Uppāaka, 跳蚤, 虱子, のみ(벼룩), しらみ()’의 뜻이 있다.

 

Sañchannasañchādeti의 과거분사의 형태로서 ‘covered with; full of’의 뜻이다. 따라서 문제의 문구 ‘Uppāakehi sañchanno’의 뜻은 사전적으로 해석한다면 벼룩이나 이 등 곤충으로 가득 덥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깨어진 마룻바닥과 곤충으로 가득 덥혀 있는 담요, 과연 어느 것이 맞는 번역일까?

 

과부가 된 일곱 딸년들

 

다섯 번째 게송에서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vidhavā satta dhitaro)”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과부가 된 일곱 딸년들이 없으니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Srp.I.239에 따르면, 바라문이 부유해지면, 그의 딸들이 과부이더라도 그녀들의 시아버지가 사위의 집에 머물게 하지만, 그가 가난하게 되면, 시아버지가 그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보낸다. 그가 식사를 하려고 하면, 아이들이 접시에 먼저 손을 넣어, 그 자신은 손을 대보지도 못한다.”라 되어 있다.

 

이런 일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딸들이 많았을 때, 더구나 모두 과부가 되었을 때, 더구나 시집이 가난하여 식솔을 부양할 능력이 못 되었을 때 친정집에 가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라문은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딸들이 과부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과부가 된 일곱 딸년들이라 하여 자조적으로 번역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Seven daughters left for widows”라 하여 단지 일곱명의 미망인들이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전혀 다른 번역 2

 

여섯 번째 게송을 보면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쏘지 않으니 (pigalā tilakāhatā, Sotta pādena bodheti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잠자리에서 발로 깨우는 누렇게 뜬 곰보 같은 마누라가 없으니라 하였다. 두 번역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였을까?

 

이 문구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붉은 종기들(Tiloka)’에 대하여 가려워 긁기 때문에 생겨나는 종기로 꿈틀 거리는 생물에 비교된다.”(1548번 각주)라 하였다. 이 각주는 주석에 근거하지 않는 개인적 견해라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의 경우 아무런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 역시 각주가 없다.

 

문구와 관련하여 빅쿠보디는 A tawny wife with pockmarked face Who wakes him up with a kick”라 하였다. 이는 마맛자국이 있는 황갈색의 아내가 발로 차며 그를 깨운다.”라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쏜다.’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전혀 다른 내용이다.

 

pigalā‘brown; tawny(마맛 자국이 있는)’의 뜻이다. Tilakāhatātilaka+āhata의 형태이다. Tilaka‘a spot, stain, mole’의 뜻이다. Sotta‘asleep’의 뜻이다. Pādenapada의 뜻으로 ‘foot; foot-step’의 뜻이다. Bodheti‘awakens; enlightens’의 뜻이다. 그래서 “pigalā tilakāhatā, Sotta pādena bodheti”라는 문구는 빅쿠보디가 번역한 것처럼 A tawny wife with pockmarked face Who wakes him up with a kick”에 가깝다.

 

빚 없는 자의 행복

 

마지막 게송을 보면 빚 없는 행복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님은 이른 아침에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paccūsamhi iāyikā, Detha dethāti codenti)”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새벽같이 찾아와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 없으니라 하였다. 여기서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라 한 부분이 다르다.

 

빅쿠보디는 Creditors who call at dawn, Chiding him, ‘Pay up! Pay up!’”라 하였다. 문장에서 내돈 내놔! 내돈 내놔!”의 뜻으로 “Pay up! Pay up!”라 한 것이 각묵스님의 번역과 동일 하다.

 

Paccūsamhi‘early morning’의 뜻이다. iāyikā‘debtor’의 뜻이다. Dethadadāti의 뜻으로 ‘gives; offers; allows’의 의미이다. Codenticodenta의 뜻으로 ‘inciting(자극하는, 선동하는); reproving(꾸짖는 듯한)’의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paccūsamhi iāyikā, Detha dethāti codenti”라는 문구는 이른 아침 빚쟁이들이 돈을 달라고 조르는 모양임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대화체로서 ‘Pay up! Pay up!’라 하여 실감 나게 번역하였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빚 없는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Anaa sukha ñatvāna

atho atthisukha sare,
Bhuñja
bhoga sukha

macco tato paññā vipassati.

 

[세존]

빚 없음의 행복을 이루고

소유의 행복을 새기리.

향유의 행복을 누리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지혜로 통찰하네.

 

(Anaasutta-빚 없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빚 없는 것이 행복이라 하였다. 또 소유와 향유의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이는 재가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빚 없는 행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부처님은 빚 없는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소유와 향유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였다. 먼저 소유에 대한 행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장자여, 소유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은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한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소유의 행복이라 한다.

 

(Anaasutta-빚 없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정당한 노력에 따른 소유를 강조 하였다. 이에 대한 키워드는 노력과  힘과 땀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노동의 가치를 말한다. 불로소득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성과가 가장 가치 있음을 말한다.

 

경에서 가장 돋보이는 말은 ‘완력(bāhāba)’과 ‘땀(sedā)’이다.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특히 완력이 그렇다. 농부가 팔의 힘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거나 광부가 팔의 힘으로 곡괭이질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팔의 힘은 반드시 육체노동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도 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팔의 힘을 이용하여 노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의 힘과 이마의 땀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소유의 행복(atthisukha)’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경(A4:62)에서 총 네 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유의 행복

(atthisukha)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소유

세간의 행복

향유의 행복

(bhogasukha)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고 베품

세간의 행복

빚 없는 행복

(anaasukha)

많건 적건 빚을 지고 있지 않음

세간의 행복

허물없음의 행복

(anavajjasukha)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허물이 없음

출세간의 행복

 

 

부처님이 말씀 하신 네 가지 행복을 보면 크게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눌 수 있다. 소유, 향유, 빚 없는 행복은 세간에 속하고, 허물없음은 출세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은 자신의 처지와 관련하여 수행자의 삶과 비교해서 자조적으로 일곱 개의 게송을 읊었다. 이에 부처님은 각 게송에 대응 하는 수행자의 삶에 대하여 답송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a hi mayha brāhmaa

balivaddā catuddasa,
Ajja sa
ṭṭhi na dissanti

tenāha brāhmaā sukhī.


Na hi mayha
brāhmaa

tilā khettamhi pāpakā
Ekapa
ṇṇā dupaṇṇā ca

tenāha brāhmaā sukhī.


Na hi mayha
brāhmaa

tucchakoṭṭhasmi mūsikā,
Usso
ahikāya naccanti

tenāha brāhmaā9 sukhī.


Na hi mayha
brāhmaa

santhāro sattamāsiko,
Upp
āakehi sañchanno

tenāha brāhmaā sukhī.


Na hi mayha
brāhmaa

vidhavā sattadhītaro,
Ekaputt
ā duputtā ca

tenāha brāhmaā sukhī.


Na hi mayha
brāhmaa

pigalā tilakāhatā,
Sotta
pādena bodheti

tenāha brāhmaā sukhī.

 

 

[세존]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열 네 마리의 황소가 없네.

오늘 엿새째 보이지 않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한 잎의 참깨나 두 잎의 참깨

밭에서 참깨가 썩어감이 없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텅 빈 창고 앞에서

열렬히 춤추는 쥐들이 없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일곱 달이 지나면 금이 가서

깨어지는 마룻바닥이 없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잠든 자를 발로 깨우는

붉은 종기들이 쏘지 않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바라문이여, 나에게는 없네.

이른 아침에 빚쟁이들이

여기 달라 저기 달라 조르지 않으니

! 바라문이여, 나는 행복하네.” (S7.10, 전재성님역)

 

 

참으로 나에게는

열네 마리의 황소가 없구나.

오늘이 벌써 엿새째인데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한 잎이나 두 잎이 달려 있는

병든 참깨 밭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텅 빈 헛간 안에서

명랑하게 춤춰 대는 쥐들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일곱 달이나 되어

해충들이 바글거리는 담요가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한 아들이나 두 아들을 가진

과부가 된 일곱 딸년들이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잠자리에서 발로 깨우는

누렇게 뜬 곰보 같은 마누라가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참으로 나에게는

새벽같이 찾아와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 없으니

그래서 나야말로 행복하도다. (S7.10, 각묵스님역)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Fourteen oxen [that have gotten lost],

Not seen now for the past six days: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A field of blighted sesamum plants,

Some with one leaf, some with two: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Rats inside an empty barn

Dancing around merrily: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A blanket that for seven months

Has been covered with swarms of vermin: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Seven daughters left for widows,

Some with one son, some with two: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A tawny wife with pockmarked face

Who wakes me up with a kick:

Hence, 0 brahmin, I am happy.

 

“Surely, brahmin, I do not have

Creditors who call at dawn,

Chiding me, 'Pay up! Pay up!':

Hence, 0 brahmin, I am happy.” (S7.10, 빅쿠보디역)

 

 

 

2015-09-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