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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자만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2. 20:25

 

 

아홉 가지 자만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바라문상윳따를 보면 부처님 당시 바라문과 부처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은 잘 배운 사람들이고 지도층이고 부유한 사람들이다. 평민이나 노예와는 다른 계층으로서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머리를 깍은 부처님을 여러 모로 테스트하고자 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교만하고 거만한 바라문

 

초기경전에 등장한 바라문은 거만한 타입이 많다. 다짜고짜 욕설부터 하는 바라문이 있는가 하면 죄수처럼 머리를 깍았다고 놀려 대기도 한다. 그런 바라문 중에 마낫탓다가 있었다. 경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거만한 바라문이었다.

 

그는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래서 부모도 공경하지 않고 스승도 공경하지 않고 나이 든 현자도 공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법회에 참석하였다. 이유는 만약 수행자 고따마가 나에게 말을 건다면, 나도 또한 그에게 말을 걸 것이다. 만약 수행자 고따마가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면, 나도 또한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것이다.” (S7.15) 라고 생각하며 참석한 것이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이 수행자 고따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왜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높은 지위의 나와 같은 바라문이 왔는데도 이 수행자는 특별한 예우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Srp.I.264) 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마음을 읽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충고 하였다.

 

 

[세존]

바라문이여, 교만함은 옳지 않네.

여기 누구에게 왔는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대가 왔는지 말해 보시오.”(S7.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왜 교만하다고 하였을까? 바라문이 슬그머니 법회에 참석하여 어쩌나 보자며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래서 왜 왔는지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여기에 왔는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하다는 것이다.”(1628번 각주) 라 하였다.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모든 것이 들통 났다. 그래서 수행자 고따마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고, 더구나 두 발에 입을 맞춘 뒤 합장 한 채 이름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자만(māna), 오만(atimāna), 교만(mada)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교만하다는 것이다. 이때 교만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māna’이다. ‘conceit, pride’의 뜻이다. 그런데 교만과 유사한 말로서 자만, 아만, 거만 등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옷감의 비유의 경(M7)’에 여러 가지 만()이 열거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자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오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교만이 마음의 더러움이고, 방일이 마음의 더러움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만, 오만, 교만이라는 말이 나온다, 모두 마음의 더러움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자만, 오만, 교만은 어떻게 다를까? 사전을 찾아 보니 자만은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있는 것을 스스로 우쭐거리며 뽐냄이라 한. 오만은 방자하고 잘난 체하여 건방지다의 뜻이다. 교만은 잘난 체하며 겸손함이 없이 건방지다의 뜻이다. 그 말이 그 말 같다.

 

옷감의 비유의 경에서 자만은 māna의 번역이고, 오만은 atimāna의 번역이고, 교만은 mada의 번역이다. 자만으로 번역된 māna의 뜻은 ‘conceit, pride’라 하였다. 그런데 오만으로 번역된 atimāna에 대하여 'superiority-conceit'라 하여 초자만이라 볼 수 있다. 교만으로 번역된 madainfatuation(심취)의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찾아 보니 자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거만이 마음의 오염원이다. 허영이 마음의 오염원이다.”(M7) 라 하였다. 자만이라는 말 하나만 빼고 모두 다르다. atimāna에 대하여 오만과 거만, mada에 대하여 교만과 허영, 이렇게 차이가 난다.

 

가장 차이가 나는 번역이 mada이다. 교만과 허영이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mada가 들어간 구절을 찾아 보았다. PCED194에 따르면 마다에 대하여 세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D33)’에 따르면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Tisso vidhā: seyyo'hamasmī'ti vidhā. Sadiso'hamasmī'ti vidhā, hīno'hamasmī'ti vīdhā.)

”(D33) 라 하였다.

 

디가니까야에서는 교만이라는 뜻으로 vidhā를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madavidhāmāna나 모두 내가 있다거나, “내가 누군데라는 뜻의 아만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홉 가지 교만

 

디가니까야에서 세 가지 교만과 관련하여 주석이 되어 있다. 교만에 대하여 월등하다고 정의되므로 교만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월하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월-동등-열등의 세 가지 교만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교만은 각각 세 가지씩으로 하여 총 아홉 가지 교만으로 분류 된다. 주석을 근거로 하여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1)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

 

2)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나는 다른왕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나는 다른 왕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나는 다른 수행승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왕들이나 출가자에게도 생겨난다.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나는 왕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무슨 왕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출가자에게도 이득과 존경이 없을 경우 나는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라고 불리는데, 이득과 존경이 없는 내가 다른 무슨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2.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1)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와 같은 다른 왕신이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2)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와 같은 다른 왕신들과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대신 등에게 생겨난다. 대신이나 공신은 재산-탈 것-운반자(동물) 등에 의해서 나는 대신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대신인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

 

1)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어머니 쪽에서나 아버지 쪽에서 노예인 경우 나와 같은 다른 노예가 있는가? 다른 자들은 태어날 수 없다. 잉태 되었기 때문에 노예이다. 그러나 나는 혈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월하다.’라고 교만을 만든다.

 

2)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부모가 모두 노예인 경우 나는 다른 노예와 차이가 있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3)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노예 등에서 생겨난다. ‘나는 태생에 의해서 노예상태이다. 그러나 나에게 부모의 노예의 지위는 없다. 내가 왜 노예라고 불리는가.’라고 교만을 만든다. 그리고 노예와 동일하게 도살자 또는 짠달라와 같은 천민도 교만을 만든다.

 

이 가운데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의 삼자는 여실한 교만으로 거룩한 길에서 부수어지고, 나머지 여섯 가지 교만은 여실하지 못한 교만으로 첫 번째 길 흐름에 드는 길 에서 부수어진다.

 

(2539번 각주,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 D33, Smv.999-991,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총 아홉 가지 교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 우월중월, 동등중동등, 열등중열등 이렇게 세 가지는 거룩한 길의 경지에서 부수어진다고 하였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 가지는 흐름에 들었을 때 즉, 수다원이 들었을 때 부수어 진다고 하였다.

 

교만, 아만, 거만, 오만 등으로 불리는 만()은 뿌리 깊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아라한단계에서 부수어지기 때문이다. 세 가지 교만을 보면 우월감은 주로 많이 배우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을 때 생겨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등감은 중간수준에서 생겨난다. 열등감은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고 지위가 낮았을 때 발생할 수 있다.

 

우월한 스님의 우월하다는 교만

 

최악의 우월감은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다. 이는 출가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 스님과 신도는 이분법적 구조, 그리고 주종관계처럼 보인다. 그래서 스님이 신도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이는 우월감에 따른 것이다. 단지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승복을 입었다고 하여 내가 누구인데라며 삼배를 받으려 한다면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한글 삼귀의문을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스님들의 집단이기주의의 때문일 것이다.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여 부처님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스님이라는 지위가 우월함에도 더욱 더 높여서 승보로서 대우 받고자 하는 것은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열등한 신도의 열등하다는 교만

 

또 하나 최악의 교만은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이다. 스님과 신도라는 상하 관계에서 신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신도들은 자신들이 스님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머리도 깍지 않았고 승복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절에 오래 다닌 신도들은 신참 신도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단지 절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스님과 친하다는 이유로 같은 신도들을 차별한다.

 

여기 신참신도가 있다. 스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절에도 익숙하지 않다. 그런 한편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텃새를 부리는 듯한 구참신도가 못 마땅하다. 그럴 때 너나 나나 똑 같은 신도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차별 받아야 하는가?”라고 불평하였을 때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타종교의 재정을 부러워하는 스님

 

스님들이 법문할 때 종종 예수의 탄생과 부처님의 탄생을 비교하는 것을 보았다. 또 한국불교가 1700년이나 되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제 2백년도 안된 타종교를 얕잡아 보기도 한다. 또 불교교리가 우수한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은 타종교의 재정에 대하여 부러워 하였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참 교회 의 재정들이 너무나 부러울 지경입니다. 그들 신자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참여가 너무나 부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스님들은 한편으로 불교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면서 또 한편으로 재정적으로 부러워 한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에 해당될 것이다. 이를 정형구에 대입해 보면 내가 명세기 최고의 교리를 가진 1700년 역사의 스님인데 절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타종교인은 헌금도 열심히 하는데 우리 절은 그렇지 않다. 이름만 스님이지 교리가 우수하면 뭐한가? 1700년 역사가 무슨 필요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면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이 생겨 났다고 볼 수 있다.

 

표로 정리하면

 

아홉 가지 자만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o

아홉 가지 자만

 

출신성분

족쇄

1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 출가자)

(재산),

출가자(계행,두타행)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짐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짐

2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1) ‘나는 다른 왕들과 차이가 있는가’()

 

2)‘나는 다른 수행승과 차이가 있는가.’(출가자)

(재산), 출가자(계행,두타행)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3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1)‘나는 왕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무슨 왕인가.’ ()

 

2)‘나는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라고 불리는데, 이득과 존경이 없는 내가 다른 무슨 설법사, 다문자, 대장로인가.’ (출가자)

, 출가자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4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나와 같은 다른 왕신이 있는가.’

대신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5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나와 같은 다른 왕신들과 차이가 있는가.’

대신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짐

6

동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나는 대신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을 뿐 내가 대신인가.’

대신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7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교만

나와 같은 다른 노예가 있는가? 다른 자들은 태어날 수 없다. 잉태 되었기 때문에 노예이다. 그러나 나는 혈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우월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하다.’

부모 중 한쪽이 노예인 경우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8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는 교만

나는 다른 노예와 차이가 있는가?’

부모가 모두 노예인 경우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짐

9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는 교만

나는 태생에 의해서 노예상태이다. 그러나 나에게 부모의 노예의 지위는 없다. 내가 왜 노예라고 불리는가.’

부모가 모두 노예인 경우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짐

 

 

 

교만 또는 자만, 아만, 거만은 아라한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부수어진다.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지는 것은 (6)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7)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8) conceit (māna, q.v.), (9) restlessness (uddhacca, q.v.), (10) ignorance (avijjā, q.v.)이다. 이렇게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이 자만이다. 그렇다면 자만은 어떻게 부수어질까?

 

비누 냄새마저 없애려면

 

상윳따니까야에 케마까의 경(S22:89)이 있다. 경에 따르면 훈습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세탁의 비유로 알 수 있다. 비누로 빨래를 하였을 때 때는 벗겨질지 모르지만 비누냄새는 남아 있다. 비누 냄새마저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케마까]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

 

(Khemaka sutta-케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9, 전재성님역)

 

 

‘냄새가 밴다’는 훈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리 옷을 깨끗이 빨아도 비누 냄새 등이 남아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냄새를 제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향기가 밴 상자(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를 언급하였다. 향기가 밴 상자안에 세탁물을 넣으면 비누 냄새 등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향기가 밴 상자(gandhaparibhāvite karaṇḍake)’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번뇌를 부순 자가 가진 계행의 향기와 비교된다.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은 흙 묻은 옷과 같다. 세 가지 특징(삼법인)에 대한 명상은 그것을 씻는 세 가지 세척제와 같다.

 

돌아 오지 않는 님(불환자)의 정신은 이 세 가지 세척제로 세탁을 한 것과 같다.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길의 지혜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 있는 상자와 같다. 길을 통한 모든 번뇌의 파괴는 옷이 향기 상자에 넣어진 뒤에 세척제의 남은 냄새가 모두 제거 되는 것과 같다.” (Srp.II. 317) 라고 설명되어 있다.

 

주석에 따르면 냄새가 배어 있는 옷은 배우지 못한 범부의 정신상태와 같은 것이라 한다. 탐욕, 성냄 등 온갖 오염원으로 가득찬 범부의 옷을 세탁하려면 불환자의 정신으로 세탁해야 함을 말한다. 불환자가 되면 다섯 가지 거친 결박은 제거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진치 삼독중에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제거 된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자만’ 등 다섯 가지 미세한 마음의 오염원이 그것이다. 이런 오염원은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 경에서 빨래를 마친 옷에서 나는 비누냄새 마저 없애기 위하여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 이야기릏 하였다.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에 빨래한 옷을 넣으면 비누 냄새도 잡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때 향기가 배어 있는 상자가 아라한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자만 등 미세한 오염원이 남김 없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2015-10-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