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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아름다운 명상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0. 17. 15:02

 

 

숲속의 아름다운 명상자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아마 명상하는 사람일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나무꾼의 경(S7.18)’에 따르면 부처님이 꼬살라 국의 우거진 숲속에서 명상하고 있었다. 이를 바라드와자 가문의 많은 제자들이 땔감을 구하러 갔다가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바라문 제자들은 명상하는 부처님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가부좌를 한 채 몸을 곧게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며 새김을 확립하고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바라문 제자들은 부처님의 명상하는 모습에 감동 받았던지 돌아와 스승에게 아무쪼록 스승께서는 한 수행자가 우거진 숲에서 가부좌를 한 채 몸을 곧게 세우고 주의를 기울이며 새김을 확립하고 앉아 계신 것을 아셔야 합니다.”라 하였다.

 

몹시도 매혹적인 명상자

 

바라문 제자들은 왜 아무쪼록이라 하면서아셔야 합니다.”라 하였을까? 아마 그것은 명상하는 모습이 너무 거룩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바라문 스승은 제자들과 함께 우거진 숲으로 가서 명상하는 장면을 보았다. 제자들이 본 것처럼 역시 거룩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Gamhīrarūpe bahubherave vane

suñña arañña vijana vigāhiya,
aniñjam
ānena hitena vaggunā

sucārurūpa vata bhikkhu jhāyasi.

 

[바라문]

깊숙해서 많은 위험이 도사린

텅 빈 숲속에 홀로 들어

동요하지 않고 확고하고 아름답고 단정하게,

수행자여, 명상에 들었네.”(S7.18, 전재성님역)

 

 

명상하는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 하고 있다. 깊은 선정에 든 부처님의 감관이 맑아 보였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동요하지 않고 확고하고 아름답고 단정하게 aniñjamānena hitena vaggunā sucārurūpa라 하였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vaggu의 번역로서 ‘lovely; pleasant’의 뜻이다. 단아하다는 것은 sucārurūpa의 번역어로서 ‘very handsome’의 뜻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굳건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구여, 단아한 모습으로 참선을 하는 군요라 하였다.

 

바라문은 부처님이 명상에 잠긴 모습에 대하여 매우 아름답게 묘사 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명상하는 사람이다. 명상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다 사랑스럽게 미남미녀처럼 보인다. 그래서 게송에서도 매우 미남처럼 보인다(sucārurūpa)’라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sucāru‘extremely charming’의 뜻이다. 명상하는 자의 모습이 몹시도 매혹적임을 말한다.

 

숲속의 성자

 

바라문 제자들과 바라문스승은 부처님의 명상하는 모습에 반했다. 그래서 바라문 스승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Na yattha gītā na pi yattha vādita

eko araññe vanamassito muni,
Accherar
ūpa paibhāti ma ida

yadekako pītimano vane vase.

 

[바라문]

노래도 없고 음악도 없는 곳에

홀로 숲속에 사는구려. 현자여,

홀로 기꺼이 숲속에 살다니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네.” (S7.18, 전재성님역)

 

 

바라문은 홀로 숲속에 사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자여(muni)”라 하였다. 이는 첫 번째 게송에서 ‘bhikkhu’라 한 것에서 격상된 표현이다. 처음에는 걸식하는 수행자로서 보았으나 명상하는 모습을 보고서 성자(muni)’로 본 것이다. 여기서 muni‘A sage, an inspired man, a holy ascetic’의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성자로 번역하였다.

 

바라문은 부처님의 명상하는 모습을 보고서 숲속의 성자로 보았다. 그러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네(Accherarūpa)라 하였다. 바라문은 왜 이렇게 감동하였을까? 더구나 기꺼이 숲속에 살다니라며 전에 보지 못하였던 것처럼 말한다. 이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추론 할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에게 있어서 인생사주기가 지켜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숫따니빠따에 따르면 옛날의 바라문들은 현재의 바라문들과 달랐다고 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이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등장한다. 이는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옛날 바라문 즉, 정통바라문들은 인생사주기를 지켰다. 그래서 학습기와 가주기를 거쳐서 때가 되면 숲에서 살았다. 이를 임서기라 한다. 또 임서기가 지나면 떠돌아 다니는 유행자가 되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습니다.”(stn284) 라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타락하여 대부분 숲에서 살지도 않았고 유행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숲에서 명상하는 부처님을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하느님이 되려고 여기서 고행하는가?”

 

바라문 스승은 숲속에서 명상하는 부처님에 대하여 숲속의 성자로 보았다. 마치 예전의 바라문의 삶을 보는 것 같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는다.

 

 

Maññāmaha lokādhipatī sahavyata

ākakhamāno tidiva anuttara,
Kasm
ā bhava vijanamaraññamassito

tapo idha kubbasi brahmapattiyāti.

 

[바라문]

생각하건데 나는 위없는 세 하느님의 세계의

그 주제자와 하나가 되길 원하는데

왜 그대는 홀로 숲속에서 지내길 원하는가?

하느님이 되려고 여기서 고행하는가?” (S7.18, 전재성님역)

 

 

바라문은 아직까지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 못한 듯 하다. 처음에는 걸식수행자인줄 알았으나 나중에는 성자로 보았다. 그것도 범천의 세계에서 태어나길 바라며 수행하는 성자로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되려고 여기서 고행하는가? (tapo idha kubbasi brahmapattiyāti)”라 물은 것이다.

 

바라문 스승은 부처님이 범천에 태어나기 위해 고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바라문 전통에서 베다를 공부하면 범천에 태어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디가니까야 세 가지 베다의 경(D13)’에 따르면 하느님의 삶의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바라문의 실천원리를 행하면 된다고 하였다. 주로 삼베다를 학습하며 외우며 제사 지내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지 중얼 거리는 것 때문에 세 가지 명지의 소유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가지 명지는 삼베다가 아니라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끈 삼명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은 나는 하느님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로 이끄는 길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그 길을 실천하는 대로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D13) 라 하였다.

 

바라문스승은 부처님에게 나는 위없는 세 하느님의 세계의 그 주제자와 하나가 되길 원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라문은 베다를 공부하는 것이 단지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임을 말한다. 그런데 숲속에서 홀로 지내며 명상하는 부처님을 보고서 매우 한편으로 존경의 마음을 갖고 또 한편으로 의문이 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세계에 태어나려는가?’라며 묻는 것이다.

 

세 하느님의 세계와 범천의 세상

 

바라문의 게송에서 두 가지 번역차이를 발견하였디. 그것은 ‘tidivaKasmā’에 대한 번역이다.

 

빠알리어 ‘tidiv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세 하느님의 세계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범천의 세상이라 하였다. 범천이라는 의미는 같지만 숫자가 다르다. 왜 이와 같이 달리 번역하였을까?

 

전재성님은 ‘tidiva에 대한 각주에서 범천세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세계는 범중천-범보천-대범천의 세 부류의 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1651번 각주)라 하였다. 여기서 범천세계를 말한다라는 말은 주석을 인용한 것이다. 뒤에 범중천-범보천-대범천의 세 부류의 신들이라 한 것은 빠알리어 ‘tidiva에서 셋 을 뜻하는 ti’가 들어 가서 일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범천은 색계초선천을 의미하는데 이는 범중천-범보천-대범천이다. 그래서 세 하느님의 세계라 한 것이다.

 

각묵스님은 “ ‘tidiva에 대하여 세상의 주인은 범천을 뜻한다.”(SA.i.265)라며 주석을 근거로 하였다. 이어서 범천의 세상은 ti-diva anuttara(위 없는 세 가지 천상)’을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범천의 세상라고만 하였는데 셋을 뜻하는 ‘ti’에 대한 번역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보디는 ‘tidiva에 대하여 ‘triple heaven’이라 번역하였다. 직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tidiva은 어떤 뜻일까? 빠알리어 tidiva‘the celestial abode’ 또는 ‘A name given to Tāvatimsa의 뜻이다. 천상이라는 뜻과 삼십삼천이라는 두 개의 뜻이 있다. 그러나 게송에 따르면 바라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범천임에 틀림 없다.

 

범천은 세 종류가 있다. 이는 셋을 뜻하는 ‘ti’로 알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색계초선천인 범중천-범보천-대범천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셋의 의미를 살린 전재성님과 빅쿠보디는 직역한 것이고, 각묵스님은 주석에 근거하여 의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느 판본을 따르느냐에 따라

 

또 하나 차이나는 번역이 Kasmā’에 대한 것이다. 이 단어가 들어간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라 하였고, 각묵스님은 그래서라 하였다. 이런 차이는 번역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Kasmā’가 들어간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대는 홀로 숲속에서 지내길 원하는가?”라며 의문문으로 번역하였으나, 각묵스님은 그래서 당신은 이 쓸쓸한 밀림 의지하여 범천이 되기 위하여 고행합니다.”라며 평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래서 Be, Se, Ee1Kasmā(무엇 때문에)로 읽지 않고, SS, Ee2Tasmā로 읽어서 옮긴 것이다. 문맥상 더 적절하다고 판단해서이다.

 

(초불연 상윳따1 727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에 따르면 미얀마본(Be)이나 스리랑카본(Se)이나 PTS 1884년본(Ee1)을 따르지 않고, 싱할리필사본(SS) PTS 1998년본(Ee2)본을 따랐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라는 뜻의 Kasmā’ 대신에 그래서의 의미가 있는 Tasmā’를 적용했다고 하였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빅쿠보디의 CDB를 찾아 보니 관련문구는 Therefore you resort to the desolate forest”라 되어 있다. 여기서 ThereforeTasmā’의 뜻이다. 이는 각묵스님의 번역과 일치한다. 더구나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tasma found in some and adopted by Ee2 rather than as a question signalled by kasma, the reading in Be, Se, and Eel.” (CDB, 476번 각주) 라 하였다. 이는 초불연 각주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무지와 갈애가 소멸 되었을 때

 

부처님이 단지 범천에 태어나기 위하여 수행하였을까? 부처님은 바라문의 게송에 다음과 같이 답송하였다.

 

 

Yā kāci kakhā abhinandanā vā

anekadhātusu puthū sadāsitā,
A
ññā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1 samūlikā.

 

[세존]

사람에게 소망이나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여러 대상에 항상 집착 되어 있네.

무지의 뿌리에서 생겨난 갈망들,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뿌리째 제거 되었네.

 

 

Svāha akakho asito anūpayo

sabbesu dhammesu visuddhadassano,
Pappuyya sambodhimanuttara
siva

jhāyāmaha brāhmaa2 raho vīsāradoti.

 

소망도 없고 갈망도 없고 집착도 없으니,

모든 존재에게 청정한 시선을 보내네,

위없는 깨달음의 지복을 얻으니,

바라문이여 나는 두려움 없이 홀로 선정에 드네.” (S7.1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무지와 갈망이 제거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때 무지와 갈망은 윤회의 원인이 된다.

 

십이연기에서 무명과 갈애를 윤회의 원인이라 보고 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과거생에 무지 하였기 때문이고, 지금 여기서 갈애를 일으키면 미래생에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명에 덮힌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S15.1)  라 하였다.

 

무지와 갈애가 소멸 되었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따라서 명상하여 범천의 세상에 태어날 일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바라문과 바라문제자들에게 게송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예쁘게 생긴 사람을 말할 것이다. 미스코리아 또는 미스월드 정도 되어야 예쁘고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것은 천상녀이다.

 

천상녀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는 난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 난다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 하였다. 그러나 석가족 여인 자나빠다깔리야니를 잊을 수 없었다. 우다나에 따르면 반쯤 빗어 올린 머리카락을 하고 빨리 돌아 오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난다의 괴로움을 풀어 주기 위하여 천상녀를 보여 주었다. 이에 난다는 싸끼야 족의 여인 자나빠다깔리야니는 이 오백명의 구족천녀에 견주자면, 예를 들어 코와 귀가 잘린 불구의 원숭이와 같아,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고 일부에도 미치지 못하고,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여 비교할 수 없습니다.”(Ud.2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천상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천상녀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것은 명상하는 사람이다. 천상녀가 아무리 아름답기로 욕망에 지배 받는 다면 빛 바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하여 감관이 맑고 얼굴이 깨끗하다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언젠가 명상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스님이 산중 계곡 바위 위에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인데 자연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볼 수 있다.

 

 

 

 

 

 

 

2015-10-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