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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내면으로 목욕한 자가 청정한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1. 17. 12:22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내면으로 목욕한 자가 청정한 자

 

 

 

사람들은 매일 씻고 닦는다. 아침에 세수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샤워까지 한다. 저녁에 하루 일과를 끝나면 또 씻는다. 이렇게 매일 씻을 때 거울을 바라 보게 된다. 거울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부끄러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목욕한다고 하여 마음까지 청결해질까?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우다나 결발행자의 경(Ud.9)’에 목욕하는 장면이 있다. 물을 통해서 청정해진다고 믿는 결발행자들이 있다. 그들은 추운 겨울 눈 내리는 가야나룻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었다.

 

 

Na udakena suci hoti

 bavhettha nahāyatī  jano
Yamhi saccañ-ca dhammo ca 

so sucī so ca brāhmao

 

[세존]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진실과 원리가 있다면,

청정해지니, 그가 거룩한 님이다.” (Ud.9, 전재성님역)

 

  

ganges river shower

 

 

이 게송을 보면 회개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을 듣는 것 같다.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단지 성소에 가서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또 죄를 짓는다. 돈으로 죄를 씻기도 한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어떤 죄를 저질러도 없던 것으로 되기 때문에 범죄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목욕하는 그 물로 청정해지지 않는다. (Na udakena suci hoti bavhettha nahāyatī  jano)”라 하였다.

 

목욕은 악의 근원의 반대가 아니기 때문에

 

목욕한다고 하여, 세례한다고 하여 죄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요식행위에 그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Na udakena suci hoti bavhettha nahāyatī  jano : UdA.76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물속에서 목욕하는 것처럼 물속의 잠수 등을 통해서 악에서 오는 오염을 씻어 낼 수 있다면, 어머니를 죽인 자 등의 극악한 자들도, 물고기나 거북이 황소나 물소들도 마찬가지로 청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목욕은 악의 근원의 반대(paipakkha)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둠의 반대가 빛이고 무지의 반대가 앎인 것과 같은 식으로 목욕이 악의 반대는 아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에 도달한다.

 

(285번 각주, 전재성님)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물에 의한 청정은 없다.’라고 하였다. 만일 목욕으로 모두 청정해진다면 물에서 사는 것들은 모두 해탈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목욕이 악의 반대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행(tapo)과 청정한 삶(brahmacariya)

 

물에 의해 청정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또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잘못된 길의 경(S1.58)’을 말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i su uppatho akkhāto

ki su rattindivakkhayo,
Ki
mala brahmacariyassa

ki sinānamanodakanti.

 

[하늘사람]

무엇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무엇이 밤낮으로 사라지며,

무엇이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무엇이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인가?”

 

 

rāgo uppatho akkhāto

vayo rattindivakkhayo,

Itthimala brahmacariyassa

etthāya sajjate pajā,
Tapo ca brahmacariya
ñca

ta sinānamanodakanti.

 

[세존]

탐욕이 잘못된 길이라 불리고

젊음은 밤낮으로 사라지네.

사람들이 애착하는 이성(異性)

순결한 삶의 티끌이고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S1.5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라 하였다. 고행(tapo)과 청정한 삶(brahmacariya)이 키워드이다. 청정한 삶이 목욕이라는 말은 수긍이 간다. 그런데 고행도 목욕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행에 대하여 1) 감관의 수호, 2) 두타행, 3) 정진, 4) 극단적 고행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한다. 이 중에서 극단적 고행(dukkarakārikā)은 목욕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극단적 고행은 번뇌를 제거 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단적 고행을 제외한 감관의 수호, 두타행, 정진은 목욕이라 볼 수 있다.

 

진리는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

 

목욕에 의하여 청정해진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오늘날에도 갠지스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부처님당시에도 있었다. 결발행자 등 외도 뿐만 아니라 카스트의 상층에 있었던 바라문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상윳따니까야 상가라바의 경(S7.21)’에 따르면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상에 쌍가라바라는 바라문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물속에서 청정함을 보고 물속에서 청정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물에 들어가 규칙적으로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그 쌍가라바라는 바라문을 가엾게 여겨 그가 사는 곳을 방만하시면 좋겟습니다.”라고 말한다.

 

쌍가라바 바라문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에서 청정함을 본 것이다. 물이 깨끗해 보이니 그 물에 자신의 몸을 씻으면 자신의 내면도 청정해질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제가 낮에 악한 일을 하면 그것을 저녁에 목욕으로 제거 합니다. 밤에 악한 일을 하면 그것을 아침에 목욕하여 제거합니다.”라 하였다.

 

바라문이 말한 낮이나 밤에 악한 일이란 무엇일까? 아마 직업과 관련된 것인지 모른다. 살생이나 폭력이나 음주, 매춘 등과 관련된 일일 수 있다. 과연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목욕한다고 하여 또는 기도한다고 하여 죄가 없어질까? 다시 죄를 짓는다면 효과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Dhammo rahado brāhmaa sīlatittho
An
āvilo sabbhi sata pasattho,
Yattha have vedaguno sin
ātā
Anallagatt
ā'va taranti pāranti.

 

[세존]
바라문이여, 진리는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이니

오염되지 않아 참사람에 의해 참사람에게 가려지네.

그곳에서 지혜를 성취하고자 목욕하면,

몸을 적시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S7.21, 전재성님역)

 

[세존]

바라문이여, 법은 계행이라는 여울을 가진 호수

맑고 투명하여 참된 자들이 참된 자들에게 칭송하는 것

지혜의 달인들은 거기서 목욕하여

물들지 않은 몸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가도다.” (S7.21, 각묵스님역)

 

 

첫 번째 구절에서 진리는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이는 순다리까의 경(S7.9)’에서 제사를 지낸 바라문이 바후까강 언덕에서 목욕하는 장면으로 설명된다.

 

불의 제사를 지내고 난 바라문은 강에 뛰어 들어 몸의 재와 검댕이를 씻어낸다. 그러나 부처님은 호수는 팔정도이다. 바라문이 씻는 바후까강은 너댓명이 목욕하면 검댕이로 시커멓게 되지만 팔정도의 호수에 씻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씻어도 더러워 지지 않고 오히려 맑고 투명해질 뿐이다. 그래서 진리는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Dhammo rahado sīlatittho)”라 한 것이다.

 

내면으로 목욕한 자가 진정한 수행자

 

초기경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은 죄를 목욕으로 씻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떤 바라문은 “세존이신 고따마여,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많은 사람을 해탈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사람들은 바후까 강이 많은 사람에게 공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후까 강에서 많은 사람이 악업을 씻습니다. (M7)라 하였다. 자신이 지은 죄업을 강에서 목욕하면 씻겨 내려 갈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믿음은 오늘날이라고 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세례한다고 하여 기도한다고 하여 죄업은 없어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내면의 씻음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것이 팔정도의 실천이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청정한 삶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청정한 삶(brahmacariya)은 해탈과 열반으로 이끈다. 마침내 모든 번뇌에서 벗어 났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한다. 해탈하면 그에게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생겨난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수행승을 내면의 목욕으로 청정해진 수행승이라고 부른다.(M7)

 

 

내면으로 목욕한 자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면의 목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바후까 강과 아디학까 강,

가야 강과 쑨다리까 강

싸라싸띠 강과 빠야가 강,

또한 바후마띠 강이 있네.

 

어리석은 자 항상 뛰어들어 목욕해도

언제나 검은 행위를 씻을 수 없네.

쑨다리까 강이 무슨 소용인가?

빠야가 강이, 바후까 강이 무슨 소용인가?

강들은 악업을 저지르는 자를 씻지 못하네

그 잔인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정화일이 있고

청정한 자에게는 항상 포살이 있네

마음이 청정하고 행위가 맑은 자는

항상 자신의 계행을 원만히 하네

바라문이여, 여기에 참으로 목욕하라

그러면 모든 존재들이 그대에게서 안녕을 얻으리.

 

거짓을 말하지 않고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인색하지 않으면

가야 강으로 갈 필요가 있을 것인가?

가야 강은 그대에게 우물에 지나지 않네. (M7, 전재성님역)

 

 

2015-11-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