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간답바(gandhabba: 乾達婆), 귀신인가 결생식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2. 15:52

 

 

간답바(gandhabba: 乾達婆), 귀신인가 결생식인가

 

 

 

초기불교에서 야차(野叉)

 

초기불교에서 야차(野叉)는 어떤 의미일까? 상윳따니까야에 야차의 모음이 있다. 이를 약카상윳따(Yakkhasayutta, S10)’라 한다. 1 12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모음에서는 다양한 부류의 야차가 등장한다. 전재성님의 야차의 모음에 대한 해제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야차는 한역에서 약카(yakkha)를 음사한 것이다. 원어 약카는 yak(빠르게 움직이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주석서에서는 yaj(헌공하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야차들은 숲이나 산록에나 버려진 동굴과 같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사는 비인간(非人間)으로 아귀보다는 약간 높은 단계의 귀신으로 인간과 건달바 사이에 존재하는 무서운 귀신들을 말한다. 유령, 도깨비, 요정, 괴물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화를 잘 내는 성격을 갖고 있지만, 제물을 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면, 자비로워져서 사람을 해치기 보다는 오히려 보호한다. 북인도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안녕을 보장받기 위해 그러한 야차를 기리고 숭배하며 탑묘를 세우기도 한다. 비록 그들은 비참하게 살지만, 깨달음의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고 길을 추구하여 정신적인 삶의 경지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경에서 실제로는 초인적이고 신적인 또는 악마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신들이나 제석천 또는 사천왕도 모두 야차로 불릴 수 있다. (MN.37).  부처님조차도 때로는 야차로 불리기도 한다. (MN.56).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여차의 모음 해제)

 

 

글에 따르면 야차는 매우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아마누사(amanusa)’라 하여 비인간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인간이 아닌 것이라면 야차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귀신이나 도깨비, 서양에서의 요정이나 괴물도 야차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Image of Yakkha

(1978., Sri Lanka lecture, Yakṣas (Buddhist Deities))

 

 

 

 

 

face of the yaka

(Thotsakhirithon(ทศคีรีธร) at Wat Phra Kaew, Bangkok)

 

 

 

やしゃ

(夜叉,야차, 온라인 게임 이미지)

 

 

 

부처님도 야차로 묘사되어

 

야차가 저급한 비인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도 야차로 묘사되어 있다. 해제글에 따르면 MN.56을 들고 있다. 찾아 보면 맛지마니까야 우빨리의 경(M56)’에 자이나교도 우빨리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에 표현되어 있다. 관련 게송을 옮겨 보면 갈애를 끊어 깨달음을 얻고/ 구름을 제거하고 오염이 없고공양 받을 만하고 영험한 분 (Tahacchidassa buddhassa vītadhūmassa anupalittassa, Āhueyyassa yakkhassa)” 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영험한 분이라고 번역한 것이 ‘yakkhassa’이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약카이고라 하여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맞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에서 ‘yakkhassa’라 한 것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의아하다고 각주를 하였다. 부처님께 찬사를 드린다고 하였는데 야차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래 그 뜻은 비인(非人)으로 신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영험한 분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1006번 각주) 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야차라고 한 것에 대하여 위력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세존께서는 약카라 불리신다.”(초불연 맛지마2 558번 각주) 라 하였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을 야차로 부른 케이스가 또 있다. 이는 두 번역서의 각주에서는 소개 되지 않은 것이다. 상윳따1권을 번역비교 하면서 보아 두었던 내용이 생각나서 찾아 보니 먹을 것의 경(S1.43)’에 실려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이렇게 게송으로 묻는다.

 

 

Annamevābhinandanti ubhaye devamānusā,
Atha ko n
āma so yakkho ya anna nābhinandatīti.

 

[하늘사람]

“모든 하늘사람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즐기지만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 (S1.43)

 

 

하늘사람은 부처님이 어떤 분 인줄 모르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그런데 그는 어떤 약카이기에라 하여 원어대로 약카라 번역하였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도깨비인가?” “어떤 괴물인가?” “어떤 물건인가?” 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어떤 야차인가?”라는 뜻으로 물어 보았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존재에 대하여 야차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믿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먹을 것이 따르네.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해야 하리.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리.”(S1.43)

 

 

대체 어떤 물건이냐?”

 

모르는 사람에 대하여 지칭할 때 대게 그 사람” 또는 그 이 한다. 좀 속되게 표현 하면 그 물건” 이라 한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야차는 여기서 다소간 낯선 사람의 이미지로 쓰였다.”(357번 각주) 라고 하였다. 주석에서는 단순하게 존재라는 의미라 하였다.

 

낯선 사람을 보았을 때 호의적이지 않다. 무관심하거나 심하면 경계한다. 관심이 있다면 다가가서 물어 볼 것이다. 더구나 일반사람 보다 특이 하게 생겼다면 더욱 더 관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을 초월해 보이는 듯한 비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말 대신에 당신은 어떤 야차입니까?”라고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에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라 하였다. 이는 그는 어떤 약카이기에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야차와 같이 낯선 자에게 우리말로 표현 한다면 대체 어떤 물건이냐?”가 될 것이다.

 

영혼(jīva)이 있어야 된다는데

 

상윳따니까야 야차의 모음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경이 인다까의 경(S10.1)’이다. 부처님이 라자가하 시의 인다까라는 야차의 처소인 인다 산봉우리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이때 야차는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다.

 

 

Rūpa na jīvanti vadanti buddhā

katha tvaya vindati'ma sarīra,
Kutassa a
ṭṭhi yakapiṇḍameti

katha tvaya sajjati gabbharasminti.

 

[인다까]

부처님들은 물질은 영혼이 아니라 하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육신을 얻는가?

뼈와 살을 이루는 덩어리는 어디서 오며

어떻게 모태에 안착하는가?”

 

(Indakasutta -인다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1, 전재성님역)

 

 

야차가 말한 것 중에 물질은 영혼이 아니라 하네라 하였다. 야차는 영혼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태에 들려면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jīva’를 말한다. 초불연에서는 생명이라 번역하여 물질은 생명이 아니라고 부처님들 말씀하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As the Buddhas say that form is not the soul”라 하여 ‘soul’이라 하였다.

 

부처님 말씀 하시기를

 

야차는 왜 이렇게 물어 보았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그는 단한번의 타격으로 자궁에서 생산된다.’라는 견해를 지닌 개체주의자였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태에 들 때 마치 작은 사람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존재는 점차적으로 성장하면서 태어난다.”라고 주장하면서 야차의 신념을 반박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게송으로 알 수 있다.

 

 

Pahama kalala hoti

kalalā hoti abbuda,
Abbud
ā jāyate pesī

pesī nibbattati ghano,
Ghan
ā pasākhā jāyanti

kesā lomā nakhā'pi ca.

 

[세존]

최초로 깔랄라가 생겨나고

깔랄라에서 압부다가 되고

압부다에서 뻬씨가 생겨나고

빼씨가 가나로 발전하고

가나에서 빠싸카가 생겨나고

머리카락과 털과 발톱이 생겨나네.

 

 

Yañcassa bhuñjate

mātā anna pānañca bhojana,
Tena so tattha y
āpeti

mātukucchigato naroti.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그의 어머니가 섭취한 것

모태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거기에 산다네.”

 

(Indakasutta -인다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은 태아가 자라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야차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아가 존재하여 커나가는 것이 아니다. , , 입 등 한꺼번에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아주 작은 형태에서부터 시작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초로 깔랄라(kalalā)가 생겨난다고 했다. 이어서 압부다(abbuda), 뻬씨(pesī),가나(ghanā), 빠싸카(pasākhā) 순으로 성장한다고 했다.

 

모태 안에 있는 것은?

 

깔랄라는 태내에서 임신 직후 1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형태가 세가닥의 양모로 이루어진 실타래 끝에 놓인 기름방울 크기라 하였다. 압부다는 임신후 2-3주를 말하는데 고기 씻은 물의 색깔이라 한다. 뻬씨는 임신후 3-4주 후를 말하고, 가나는 임신후 4-5주를 말한다. 임신후 6주 이상이 되면 빠싸까라 한다. 여기서 빠싸까단계가 되면 두 다리, 머리의 기초가 되는 다섯 돌기가 생겨난 상태를 말한다. 임신 42주가 되면 머리카락, 몸털, 손발톱이 생겨난다.

 

게송에서 모태 안에 있는 사람(mātukucchigato naro)”이라 하였다. 모태안에 있는 태아가 아니라 사람(naro: A man)’이라 한 것이다. 태내에서 머리털과 손톱 발톱이 생겨났다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뜻하는 ‘naro’라 하였을 것이다.

 

태아에 모태가 있다고 본다면 야차가 입태시에 개아의 형태로 본 것과 같다. 그러나 재생연결식 이후에 따른 태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씩 모습을 갖추어 성장한 모습이다. 마침내 42주가 되었을 때 사람의 형태를 갖춘다. 그래서 사람을 뜻하는 나로(naro)라 하였을 것이다.

 

나로와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모태에 든 존재는이라 하여 나로를 존재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person inside the mother's womb”라 하여 사람(The person)’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빠알리 사전에서 나로(naro)‘A man, Belonging to a man, human’을 뜻 한다. 나로가 명백히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태내 오위

 

야차는 개아가 존재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영혼이 있어서 몸만 바꾼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형태를 갖춘 작은 사람이 있어서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커나간다고 보았다.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야차는 모태에 든 중생이 있어서 어머니가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 그 모든 것은 하룻밤에 다 소화가 되어서 그 태아에게 거품처럼 스며드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없이 물질이 중생이라고 한다면 태아는 모태 속에서 다 녹아 없어질 것이라 보아 뼈와 살을 이루는 덩어리는 어디서 오며 어떻게 모태에 안착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깔랄라 단계에서부터 태아가 모태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를 태내 오위라 하여 깔랄라(kalalā), 압부다(abbuda), 뻬씨(pesī),가나(ghanā), 빠싸카(pasākhā)라 한다.

 

입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입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초기경전에서는 입태의 순간에 대한 기록도 실려 있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Tiṇṇa kho pana bhikkhave sannipātā gabbhassāvakkanti hoti: idha mātāpitaro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na utunī hoti, gandhabbo ca na paccupaṭṭhito hoti, neva tāva gabbhassāvakkanti hoti. Idha mātāpitaro ca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utunī hoti, gandhabbo ca na paccupaṭṭhito hoti, neva tāva gabbhassāvakkanti hoti. Yato ca kho bhikkhave mātāpitaro sannipatitā honti, mātā ca utunī hoti, gandhabbo ca paccupaṭṭhito hoti, eva tiṇṇa sannipātā gabbhassāvakkanti hoti.

 

[세존]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아직 경수가 없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더라도,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지 않으면 입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에게 경수가 있고, 태어나야 할 존재가 현존하여, 이러한 세 가지 일이 조화가 되어 입태가 이루어진다.”

 

(Mahātahāsa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입태에 대하여 부모의 결합(mātāpitaro sannipatitā), 경수(utunī), 태어나야 할 존재(gandhabba) 이렇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여기서 경수는 여자의 월경(menstruating woman)을 말한다. 태어나야 할 존재는 간답바로서 태어나야 할 존재를 말한다.

 

간답바(gandhabb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간답바에 대하여 태어나야 할 존재로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이것은 개인의 생물학적 발생에 대한 조건적-수반적인 생성의 연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번역한 간답바(gandhabba)의 한역은 건달바(乾達婆)’인데, 생명현상으로서 의식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만약에 그것이 주석가들의 의견처럼 결생식(paisandhiviññāa)을 의미한다면, 의식이 윤회의 주체라는 이론이 생기는데, 그것은 무아설과 모순되는 이론이 된다. 그래서 역자는 붓다고싸처럼(Pps.II.310), ‘태어나야 할 존재라고 번역한다.

 

(697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간답바에 대하여 태어나야 할 존재로 번역한 이유에 대하여 붓다고사의 주석에 따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간답바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MDB에서 ‘present’라 번역하였다.

 

업력에 의해서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생명체가 어떤 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암수의 결합, 두 번째로 적당한 시기, 세 번째로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건달바는 일반사람들이 이해 하듯이 미래의 부모가 성교할 때에 그들을 지켜 보고 서 있는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업의 힘에 의하여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업력에 의해서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생명은 업력으로 형성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복주석을 인용하여 업에 의해서 다음 생으로 가야만 하는 어떤 중생이 다시 태어날 때에 전생의 마지막 자와나 순간에 생긴 태어날 곳의 표상등의 대상을 원인으로 하여 다시 태어남에 직면한 것(Vin AT.ii.13)” (초불연 맛지마2 195번 각주)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정도론 복주석에 따르면 간답바에 대하여 다시 태어 나야만 하는 자라 한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간답바에 대하여 중생들은 업에 의해서 죽은 다음에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이 간답바는 간땁바 즉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195번 각주) 라 하였다.

 

간답바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사대왕천에 있는 신들이고, 두 번째는 향기가 나는 곳에 있는 신들을 뜻하고, 세 번째가 태아의 잉태와 관련이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던져져서

 

태아잉태와 관련하여 간답바는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자의 뜻이다. 업력에 의해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업력에 의해서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던져지는 것으로 묘사 하고 있다. 임종순간에 재생연결식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분명한 인간의 죽음과 재생연결의 순서를 통해서 이것을 설명해보자. 과거 생에서 자연사나 혹은 사고로 죽음에 다다른 자가 사지에 관절과 근육이 끊어지는 죽을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느낌의 비수가 습격해 옴을 견디지 못하여, 폭염아래 버려진 푸른 종려 잎처럼 몸이 점점 쇠해지고, 눈의 기능 등이 멈추고, 몸의 기능과 마노의 기능과 생명기능이 오직 심장토대에 머물 때 심장토대를 의지하여 그 순간에 아직 남아있는 알음알이가 업이나 그 업에 의해 생긴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이라 불리는 대상을 의지하여 일어난다.

 

업은 무겁거나 습관이 되었거나 임종 직전에 생각났거나 과거에 지은 것 중에서 나머지 조건을 얻은 상카라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일어날 때 갈애와 무명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에 의해서 위험이 가려진 그 대상에 갈애는 [그 알음알이를] 밀어 넣고, 함께 생긴 상카라들은 [그 알음알이를] 그곳으로 던진다.

 

그 알음알이는 흐름에 의해서 갈애에게 밀리고 상카라들에게 던져져서 이쪽 언덕의 나무에 매달려있던 줄을 의지하여 강을 건너려던 사람처럼 이전의 의지처를 버리고 업에서 생긴 다른 의지처를 잡던지 혹은 잡지 못하던지 하면서 대상 등의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63, 대림스님역)

 

 

여기서 알음알이는 식을 말한다. 초불연에서는 식을 뜻하는 원냐나를 알음알이로번역하였다. 또한 여기서 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임종순간에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죽음의 마음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새로 일어나는 마음이 이 생과 저 생을 연결하는 재생연결식이다.

 

재생연결식은 업력에 따른 것이다. 업의 힘으로 가장 무거운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 올라서 그 업이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재생연결식은 영혼이 아니다. 조건 발생한 식이다.

 

조건 발생하여 일어난 마음

 

재생연결식은 죽음의 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일어난 마음이다. 이렇게 조건지어져 발생한 마음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간답바와 같은 조건발생적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하고 있다.

 

 

단지 조건을 얻은 그 법이

다음 생으로 갈 뿐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윤회해온 것도 아니고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Vism.17.161)

 

 

 

2016-03-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