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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 일체지자 부처님의 즉문즉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19. 12:19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일체지자 부처님의 즉문즉설

 

 

 

스님의 즉문즉설

 

요즘 즉문즉설(卽問卽說)’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유명하다. 즉석에서 질문하고 즉석에서 답변하는 형식을 말한다. 내용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 주로 가족간의 갈등에 대한 것이 많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유명해서일까 S스님 역시 유튜브에서 대활약을 하고 있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내용 역시 매우 다양하다. 불교관련이야기에서부터 인생상담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배우자와 성관계 기준까지 이야기 한다.

 

스님들의 즉문즉설을 보면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다. S스님의 경우 질문을 받으면 주로 칠판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치 사전에 질문을 입수하여 이에 대한 대비를 하여 강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천 회가 넘어간다. 한 회에 약 10분 가량 소요된다. 최근에 올려진 유튜브동영상을 보았더니 유튜브구독자 여러분 이제 스님에게 직접질문하세요. 공개방송을 진행합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초대장을 작성해서 신청해 주십시오. 현장에서 추첨을 통해 질문자로 선정됩니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진짜즉문즉설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연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지역에서 법륜스님의 강연을 들었다. 이를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2010년의 안양강연 인간한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이해가 안되죠?" 법륜스님의 양투어(2010-05-01)’ 2012년 안양강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과 무유정법(無有定法)(2012-11-30)’ 2013년 안양강연 “남의 인생에 개입하지 말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안양아트센터(2013-11-14)’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법륜스님은 우리나라 즉문즉설 일인자라 볼 수 있다. 어느 질문이든지 막힘이 없다. 불교적으로 해법을 제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대승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초기경전 입장에서 본다면 동의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식이 아닌 진정한 즉문즉설이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현장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즉문즉설의 원조는 부처님이라는 사실이다. 언제 어느 때 어느 질문을 받아도 척척 답변하는 모습이 초기경전에 기록 되어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알라와까의 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Na khvāha ta āvuso passāmi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yo me citta vā khipeyya hadaya vā phāleyya pādesu vā gahetvā pāragagāya khipeyya. Api ca tva āvuso puccha yadākakhasīti.

 

도반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나의 마음을 돌게 만들거나 나의 심장을 찢어버리거나 나의 발을 잡고 강가 강 저 너머로 던질만한 자를 결코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

 

(알라와까 경, 상윳따니까야 S10.12, 각묵스님역)

 

 

1 12개의 경으로 되어 있는 야차의 모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경이디. 이 경은 숫따니빠따에서 알라와까의 경(S1.10)’이라 하여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일체지자(sabbaññū)로서 부처님만이

 

번역비교에서 각묵스님의 번역을 먼저 언급한 것은 각주때문이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라는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는 것은 그에게 일체지자의 권유로 권유한 것이다(sabbaññū-pavāraa pavāresi). 이런 권유는 벽지불이나 상수제자나 큰 제자들은 갖추지 못한다. 오직 일체지자인 부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SA.i.327)

 

(초불연 상윳따1 910번 각주, 각묵스님)

 

 

무엇이든지 물어보라는 말은 오직 일체지자인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 한다. 오늘날 유튜브에서 무엇이든지 물어 보라고 말하며 가르침과 관련이 없는 말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즉문즉설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지를 가진 부처님만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 (Api ca tva āvuso puccha yadākakhasīti)”라고 말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미리 준비해 놓은 질문을 보면

 

알라와까는 매우 심오한 질문을 한다. 그것은 즉석에서 생각해낸 즉문이 아니다. 미리 준비된 것이다. 어떤 내용일까? 부처님을 나가라’ ‘들어와라라며 무려 세 번이나 골탕먹인 알라와까의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Ki sūdha vitta purisassa seṭṭha

ki su suciṇṇa sukhamāvahāti,
Ki
su have sādutara rasāna

katha jivī jīvitamāhu seṭṭhanti?

 

[알라바까]

세상에서 사람의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이고,

무엇을 잘 닦아 안락을 가져오나?

무엇이 참으로 가장 감미로운 맛이며,

어떠한 삶이 최상의 삶이라 일컬어지는가?”

 

(Āavakasutta-알라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12, 전재성님역)

 

 

아챠 알라와까는 매우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야차가 즉석에서 질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경의 인연담을 보면 야차 알라와까의 부모는 깟싸빠 붓다로부터 이 경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을 배워서 알라와까가 어렸을 때 가르쳐주었으나 알라와까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것들을 황금색 잎에 붉은 글씨로 기록해 그들의 궁전에 두었는데, 나중에 알라와까는 그것을 발견하였고, 이 경에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2014번 각주) 라 되어 있다.

 

야차 알라와까는 부모가 기록해 놓은 질문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약카는 그의 부모로부터 들었던 8가지 질문을 드렸고 세존께서는 모두 답하셨다. 이러한 아라한과를 정점으로 하는 가르침을 담은 게송이 끝나자 약카는 예류과에 확립되었다.”(912번 각주) 라 되어 있다.  빅쿠보디의 CDB에서는 This completes the eight questions that the yakkha had learnt from his parents. When the Buddha finished speaking, bringing his verse to a climax in arahantship, the yakkha was established in the fruit of stream-entry.” (598번 각주)라 되어 있다.

 

부처님이 답송하기를

 

야차 알라와까는 부모로부터 내려온 질문지를 꺼내 물었다. 즉문이 아니라 준비된 질문인 것이다. 부처님은 준비된 질문에 대하여 즉설로 답하였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Saddhīdha vitta purisassa seṭṭha

dhammo suciṇṇo sukhamāvahāti,
Sacca
have sādutara rasāna

paññājīvi jīvitamāhu seṭṭhanti.

 

[세존]

믿음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 잘 닦아 안락을 얻으며

진리가 참으로 가장 감미로운 맛이고

지혜로운 삶이 최상의 삶이라 일컬어지네.”

 

(Āavakasutta-알라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0.12, 전재성님역)

 

 

 

Buddha

 

 

이 게송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자세하게 각주 하였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게송은 믿음이 인간의 으뜸 가는 재화이며/ 법을 잘 닦아야 행복 가져오느니라./ 진리가 참으로 가장 뛰어난 맛이며/ 통찰지로 살아야 으뜸가는 삶이라 부르노라.”라 되어 있다.

  

믿음(Saddha), 가르침(dhamm), 진리(Sacca), 지혜(paññā)에 대하여

 

부처님은 야차 알라와까의 준비된 첫 번째 질문 으뜸 가는 재산에 대하여 믿음(Saddha)이라 했다. 이어서 두 번째 질문 행복에 대하여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여 가르침(dhamm)이라 했다. 세 번째 질문 가장 뛰어난 맛에 대하여 진리가 가장 뛰어난 맛이라 하여 진리(Sacca)라 했다. 네 번째 질문 최상의 삶에 대하여 지혜로운 삶이라 하여 지혜(paññā)를 강조했다.

 

이렇게 본다면 키워드는 믿음(Saddha), 가르침(dhamm) , 진리(Sacca), 지혜(paññā)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한 설명을 초불연 각주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빅쿠보디의 각주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믿음(Saddha)에 대하여

 

Faith is a man's best treasure because it brings mundane and supramundane happiness as its result; it alleviates the suffering of birth and aging; it allays poverty with respect to excellent qualities; and it is the means of obtaining the gems of the enlightenment factors, etc. (빅쿠보디)

 

“ ‘믿음이 인간의 으뜸 가는 재화이며에 대하여   믿음이 으뜸 가는 재화라는 것은 믿음은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인 행복을 가져다주고 태어나고 늙는 괴로움을 완화시켜 주며 깨달음의 구성요소라는 보배를 얻는 수단등이 되기 때문이다. (각묵스님)

 

2) 가르침(dhamm)에 대하여

 

Dhamma

here is the ten wholesome qualities, or giving, virtue, and meditation. This brings human happiness, celestial happiness, and in the end the happiness of Nibbana. (빅쿠보디)

 

여기서 법(dhamma)이란 열 가지 유익한 법[십선법], 혹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말한다. (복주석서는 후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SAT.i.281)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은 이법을 닦으면 인간의 행복(manussa sukha=금생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dibba-sukha=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행복(nibbana sukha=궁극적인 행복)을 가져 온다는 뜻이다. (각묵스님)

 

3) 진리(Sacca)에 대하여

 

By truth

here truthful speech is intended, with Nibbana as the ultimate truth (paramatthasacca) and truth as abstinence (from falsehood; viratisacca) comprised within that. Of the various kinds of tastes, truth is really the sweetest of tastes, truth alone is the sweetest (Sādutara). Or it is the best(Sādhutara), the supreme, the highest. For such tastes as that of roots, etc., nourish only the body and bring a defiled happiness, but the taste of truth nourishes the mind with serenity and insight and brings an undefiled happiness. (빅쿠보디)

 

진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궁극적 진리(승의제, paramattha-sacca)인 열반과 [거짓말을] 멀리 여읜 진리(virati-sacca)를 포함한 바른 말로서의 진리(vaca-sacca)를 뜻한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맛(Sādutara rasana)이라고 한 것은, 보통 음식의 맛은 오염된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진리의 맛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등으로 마음을 고양시켜 오염되지 않은(asmakilesika)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각묵스님)

 

4) 지혜(paññā)에 대하여

 

One living by wisdom (paññājīvi jīvitam): A householder lives by wisdom when he works at an honourable occupation, goes for refuge, gives alms, observes the precepts, and fulfils the Uposatha duties, etc. one gone forth as a monk lives by wisdom when he undertakes pure virtue and the superior practices beginning with purification of mind. (빅쿠보디)

 

통찰지를 [구족하여] 살아야 으뜸가는 삶(paññājīvi jīvitam seṭṭham)’이라고 했다. 재가자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삼귀의를 하고 보시와 공양을 하고 계를 구족하고 포살을 실천하는 재가의 도닦음을 실천한다. 출가자는 이를 넘어서서 후회하지 않음을 행하는 계행이라 불리고 마음을 청정하게 함등으로 구분되는 출자가의 도닦음을 닦아서 통찰지를 갖추어서 삶을 영위한다. 이런 뜻을 알아야 한다.”(SA.i.328-330) (각묵스님)

 

 

빅쿠보디의 각주와 각묵스님의 각주를 비교해 보았다. 거의 같은 내용이다. 주석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문서답, 역질문, 할과 방도 아닌

 

알라와까와 부처님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대화를 보면 부처님은 친절하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선종에서 스승들이 제자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것이다.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 중에 공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양무제가 짐이 평생 절을 짓고 보시공양하였는데 공덕이 있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달마대사는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매몰차게 대답하였다.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학인 마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이 베풀었다. 정의롭게 구한 재물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학인마가는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내가 이렇게 주고 이와 같이 바친다면 얼마나 많은 공덕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답하였을까?

 

부처님은 “바라문 학인이여, 그대가 참으로 나누어주고 그와 같이 바친다면, 많은 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여, 누구든지 참으로 주는 시주이거나, 관대하여 구하는 바에 응하며, 법에 따라 재산을 얻어 그 재산으로 하여금 한 사람 내지 백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은 많은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 (Sn3.5) 라고 말씀하셨다. 공덕 지은 행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많은 공덕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선가에서 제자가 진리가 무엇입니까?” 또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고 스승에게 물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선어록에 따르면 차나 한잔 마시게와 같은 동문서답이 되기 쉽다.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라든가 깨달음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역질문을 당하기 쉽다. 심하면 고함소리()이나 몽둥이질()을 하기도 한다.

 

선가에서는 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일까? 이는 너와 나를 분별하는 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분별하여 망상짓는 것에 대하여 동문서답함으로써, 역질문함으로써, 심하게는 고함과 방망이질로 알려 주려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제자를 깨우치기 위한 자비의 방편일지 보지만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반문자적이고 반지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할이나 방, 역질문, 동문서답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외도나 야차 등 초월적 존재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야차의 준비된 질문에 대하여 즉석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그것도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게 말씀 하셨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즉문즉설의 원조라 볼 수 있다.

 

 

2016-03-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