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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5. 29. 15:16

 

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밧줄에 꽁꽁묶여

 

신들의 전쟁이 있다. 삭까와 아수라와의 전쟁이다.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이야기를 보면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다. 삭까는 제석천으로서 선신이고, 아수라는 악신이다.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이야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랜 옛날에 신들과 아수라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라며 말씀 하신다.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Vepacitti)’가 있다. 베빠찟띠는 상윳따니까야 짠디마의 경(S2.9)’에서도 등장한다. 하늘 아들 짠디마가 아수라의 왕 라후에게 잡혔을 때 부처님은 놓아 줄 것을 말씀 하셨다. 이에 라후는 짠디마를 풀어 주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는 라후에게 라후여, 도대체 무엇에 놀라 짠디마를 놓아 주었는가? 그대는 두려워 하여 여기 왔으니 무엇이 무서워 서 있는가?” (S2.9) 라며 질책 하였다.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이미지이다. 신들과 아수라의 전쟁에서 아수라들이 이기면,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목을 밧줄로 꽁꽁 묶어 자신 앞으로 끌고 오라고 했다. 다섯 가지 밧줄이 있다. 두 발에 묶는 밧줄과 두 손에 묶는 밧줄, 그리고 다섯 번째로 목에 묶는 밧줄을 말한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삭까)는 평화롭고 자비로운 이미지이다. 아수라들이 전쟁을 걸어 오지만 결국 제석천이 승리하고 만다. 아수라의 제왕은 두 발과, 두 손, 목에 밧줄에 묶여 신들의 집회장으로 끌려 왔다.

 

정의롭게 지배하는 제석천

 

아수라의 제왕 베빠찟띠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밧줄에 묶여 끌려 오면서 무례한 행위를 하며 거친말을 내 뱉은 것이다. 이런 베빠찟띠의 비난과 비방에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침묵했다. 그러자 전차의 마부인 마딸리는 제석천에게 “ ‘위대한 제석천이여,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힘이 약해서 참아 내는가? 베빠찟띠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욕지거리를 왜 듣고만 있는가?”(S11.4) 라며 말했다. 강하게 다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극형에 처해야 함을 말한다. 이에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한다.

 

 

Nāha bhayā na dubbalyā

khamāmi vepacittino,
Katha
ñhi mādiso viññū

bālena paisayujeti.

 

[제석천]

나는 두려워하거나 힘이 약해,

베빠찟띠에 대하여 참는 것이 아니네.

어떻게 나와 같은 현자가

어리석은 자와 함께 하겠는가?’

 

(베빠찟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4, 전재성님역)

 

 

Indra on his mount Airavata

 

 

제석천은 부처님의 제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정의롭게 지배하고 적에 대해 인내 하고 잘못에 대해 관대하다. 현자로서 제석천은 어리석은 베빠찟띠의 무례한 행위에 대응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제석천의 측근 마딸리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힘이 곧 정의?

 

마딸리의 엄벌론은 아수라대왕의 통치이념과 같은 것이다. 마딸리의 엄벌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Bhiyyo bālā pabhijjeyyu  

no cassa paisedhako
Tasm
ā bhūsena daṇḍena

dhīro bāla nisedhayeti.

 

[마딸리]

제어 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네.’

 

(베빠찟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4, 전재성님역)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또 법과 원칙을 말하는 자들도 있다. 대게 강압적 통치를 하는 독재자들이 이에 해당된다.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로 다스려야 함을 말한다.

 여기 조폭논리가 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폭력배들의 말을 들어 보면 맞을 짓을 했다.’라고 말한다. 맞을짓을 했기 때문에 때렸다는 논리이다.

 

아수라대왕 베빠찟띠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논리이고 전형적인 조폭의 논리이다. 힘을 앞세워 힘으로 제압하였을 때 정의가 된다. 힘이 곧 정의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력한 처벌을 바라는 제석천의 측근 마딸리의 게송은 사실상 아수라대왕의 힘의 논리와 유사하다. 힘에 의한 지배와 적에 대한 복수를 선호하고 침략을 정당화 하는 힘이 곧 정의이다.’라는 윤리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가르침을 통치이념으로

 

제석천의 측근 마딸리는 강력한 처벌을 요청했다. 전쟁에 져서 포박되어 압송되어 온 아수라대왕 베빠찠띠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지 말 것을 간청한 것이다. 이에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자신의 통치이념을 말한다.

 

 

Etadeva aha maññe

bālassa paisedhana,
Para
sakupita ñatvā

yo sato upasammatīti.

 

[제석천]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함에 이르면

내가 생각하건데,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를 누르는 것이네.’

 

(베빠찟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4, 전재성님역)

 

 

신들의 제왕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석천은 확실히 다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논리,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린다는 조폭논리, 법과 질서만을 강조하는 독재자의 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현자로서 제석천은 부처님 가르침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참고 인내 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친 말을 하여 자극하여도 사띠하며 인내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함에 이르면(yo sato upasammatīti)”이라 했다.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늘 알아차리면 실수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화를 돋구며 자극하여도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면 고요함(upasammati)’에 이를 것이라 했다. 마치 자야말갈라가타에서 여인 찐짜가 자신의 배에 통나무 넣고 임신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을 때,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Katvāna  kaṭṭham-udara  iva  gabbhiniyā. Ciñcāya duṭṭha-vacana jana-kāya-majjhe. Santena  soma-vidhinā  jitavā  munindo)”라는 게송을 연상케 한다.

 

유화책을 편다면

 

상윳따니까야 베빠찟띠의 경은 제석천의 측근 마딸리와 제석천과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포박한 아수라대왕 베빠찟띠를 놓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게송과 답송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마딸리가 말한다.

 

 

Etadeva titikkhāya

vajja passāmi vāsava,
Yad
ā na maññati bālo

bhayā myāya titikkhati,
Ajjh
ārūhati dummedho

go'va bhiyyo palāyinanti.

 

 

[마딸리]

바싸바여, 인내를 닦는 데서

나는 이와 같은 허물을 본다오.

어리석은 자가 그대를 두고

그는 나를 두려워하여 인내한다.’고 생각하면,

소가 도망가는 자에게 그러하듯.

어리석은 자는 더욱 달려들 것이네.’

 

(베빠찟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4, 전재성님역)

 

 

여기서 바싸바(vāsava)는 인드라신, 즉 제석천의 별칭이다. 강력한 처벌을 바라는 마딸리는 사실상 아수라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힘이 곧 정의이듯이 법과 질서와 원칙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강력하게 다스리려 하는 독재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통치자가 유화책을 편다면 아마 어리석은 자들은 그는 나를 두려워하여 인내한다.”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포박당한 아수라대왕이 그랬다. 이에 마딸리는 엄벌에 처하자고 주장한다. 거친 행위에 대하여 인내하면 더욱 더 달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제석천 답송하기를

 

제석천의 측근 마딸리는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석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치이념으로 삼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여섯 개의 게송으로 답송한다.

 

 

1.

Kāma maññatu vā mā vā

bhayā myāya titikkhati,
Sadatthaparam
ā atthā

khantyā bhiyyo na vijjati.

 

[제석천]

나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참는다고

제 맘대로 생각하든 말든

참사람이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2.

Yo have balavā santo

dubbalassa titikkhati,
Tam
āhu parama khanti

nicca khamati dubbalo.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3.

Abalanta bala āhu

yassa bālabala bala,
Balassa dhammaguttassa

paivattā na vijjati.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

진리를 수호하는 힘 있는 자에게

대적할 사람은 없다네.

 

 

4.

Tasseva tena pāpiyo

yo kuddha paikujjhati,
Kuddha
appaikujjhanto

sagāma jeti dujjaya.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

 

 

5.

Ubhinnamattha carati

attano ca parassa ca,
Para
sakupita ñatvā

yo sato upasammati.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보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의 이익을 위한 것이네.

 

 

6.

Ubhinna tikicchantāna

attano ca parassa ca,
Jan
ā maññanti bāloti

ye dhammassa akovidāti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베빠찟띠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4, 전재성님역)

 

 

여섯 개의 게송에서 게송 4, 5, 6번은 상윳따니까야 아쑤린다까의 경(S7.3)’잘 읊어진 시에 의한 승리의 경(S11.5)’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 개의 경에서 인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인기 있는 시이기 때문 일 것이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제석천의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정반대의 번역을 볼 수 있다. 문제의 문구는 빠알리어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한 해석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라 했고, 각묵스님은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며 정반대의 번역을 했다.

 

모욕을 당하거나 거친 말을 들었을 때 참기 힘들다. 더구나 힘이 있고 권세가 있다면 더욱 더 참기 힘들다. 회사에서 사장이 분노하면 얼어 붙는다. 대통령이 격노하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힘 없는 자들의 분노는 알아 주지 않는다. 사장 앞에서, 또는 대통령 앞에서 자신을 모욕 주었다 하여 분노를 표출한다면 가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힘이 약한 자는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낼 수 없다. 힘이 있는 언제든지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그런데 힘이 있는 자들이 분노하면 분위기가 얼어 붙고 싸움이 날 수 있고, 더 나아가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를 불행으로 이끈다. 힘 있는 자의 분노는 자제되어야 한다.

 

제석천은 힘있는 자의 인내에 대하여 강조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하여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며 정반대의 번역을 했다.

 

직역하면

 

전재성님과 정반대의 번역을 한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았다.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nicca khamati dubbalo를 직역한 것이다. 냐나몰리 1962의 지적처럼 이 게송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욕이지만 힘없는 자는 당연히 힘 있는 자에 대해서 감내하고 견뎌내고 참아내고 인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아닌가 여겨진다.

 

(각묵스님, 초불연상윳따1 937번 각주)

 

 

각묵스님에 따르면 힘없는 자의 인욕을 강조했다. 힘 없는 자는 힘 있는 자에게 참고 인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했다. 이는 빠알리 원문을 직역했기 때문이라 했다.

 

각묵스님의 직역은 같은 게송의 바로 이전 구절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해서 감내하고 참는 것 그것이 최상의 인욕이라 말하나니라고 번역한 것과 모순된다. 제석천은 힘있는 자의 인욕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야망갈라가타에서도 여인 찐짜가 자신의 배에 통나무 넣고 임신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을 때,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라 하여 힘 있는 자의 인욕을 강조했다.

 

힘 없는 자의 인욕?

 

힘 없는 자의 인욕을 강조하는 사회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독재자가 법과 질서라는 명목으로 저항하는 세력을 통치하려 한다면, 힘 없는 민중들은 인내하고만 있어야 할까? 기본적으로 힘 없는 자들은 인내에 매우 익숙해 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은 참지 못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내와 인욕은 힘 있는 자들이 실현해야 할 실천덕목이라 볼 수 있다.

 

각묵스님의 각주에 따르면 힘 없는 자들의 인욕에 대하여 미얀마어 번역본을 근거로 들고 있다. “C.Rh.D KS1:285에서 ‘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라고 옮긴 것은 의미는 통할지 모르나 원문의 의미를 반대로 전달하고 있다.” (초불연상윳따1 937번 각주) 라고 설명되어 있다.

 

빅쿠보디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해당 구절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한 번역을 보니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라 되어 있다. 약자는 반드시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각묵스님의 번역은 빅쿠보디의 번역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문구에 대한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C.Rh.D takes nicca khamati dubbalo to mean that 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 (see KS 1:285), but dubbalo, as nominative, is clearly the subject of khamati, not its object. My translation conforms to ñāamoli's (in Minor Readings and Illustrator, p. 162), but was made'independently.

 

ñāamoli' s note speaks for my interpretation as well: "The rendering here ... seeks to bring out that patience is a necessity rather than a virtue in the weak, but appears as a virtue in the forbearance of the strong. The verse is a difficult one."

 

(CDB Vol1, 617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는 냐나몰리의 견해를 존종하여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음을 밝히고 있다. ‘C.Rh.D’약자는 반드시 인내하는 것(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이라 하며 ‘KS 1:285’를 보라고 했다. 여기서 ‘C.Rh.D’KS 는 무슨 뜻일까? 찾아 보니 ‘C.A.F. Rhys Davids’이고, KS‘Kinderd Sayings(상윳따니까야 영역, Rhys Davids, Woodward)’라 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에 약자가 인내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말한다.

 

냐나몰리의 글에 따르면 인내는 약자의 덕목이라기 보다 강자에 대한 자제로 나타나는 것(patience is a necessity rather than a virtue in the weak, but appears as a virtue in the forbearance of the strong.’이라 했다. 냐나몰리 뿐만 아니라 리스 데이비스, 빅쿠보디의 견해도 동일하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다.

 

직역과 문맥사이에서

 

강자자가 인내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약자가 인내해야 하는가? 빠알리어 ‘nicca khamati dubbalo’를 보면, nicca‘constantly; always’의 뜻이고, khamati ‘is patient; endures’의 뜻이고, dubbaloWeak의 뜻이다. 풀이를 해 보면 언제나 약자가 참는다.’는 뜻이 된다. 직역으로 본다면 각묵스님과 빅쿠보디의 번역 약자가 인내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빠알리어 ‘nicca khamati dubbalo’문구와 관련하여 다른 번역을 찾아 보았다. THE TIPITAKA 사이트에 따르면 “the weak one endures all the time.”라 되어 있다. 또 다른 TIPITAKA  사이트에서도 Forbears the ones who are more weak”라 되어 있어서도 원문대로 약자가 참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각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Yo have balavā santo

dubbalassa titikkhati,
Tam
āhu parama khanti

nicca khamati dubbalo.

(S11.4)

 

1.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

(S11.4, 전재성님역)

 

2.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하여

감내하고 참는 것

그것이 최상의 인욕이라 말하나니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

(S11.4, 각묵스님역)

 

3.

When a person endowed with strength

Patiently endures a weakling,

They call that the supreme patience;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

(S11.4, 빅쿠보디역)

 

4.

For surely he who, being strong,

Forbears the ones who are more weak

— Forever enduring the weak —

That is called the highest patience.

(S11.4, Andrew Olendzki)

 

5.

If a powerful one appeases and

endures for the sake of the weaker.
To that is said the highest patience,

the weak one endures all the time.

(S11.4, THE TIPITAKA)

 

 

신들이 전쟁을 했다. 아수라와 제석천의 싸움이다. 아수라가 패했다. 패한 아수라대왕은 두 발이 밧줄에 묶이고, 두 손이 밧줄에 묶이고, 목이 밧줄에 묶이어 신들의 제왕 제석천 앞에 끌려 왔다. 아수라대왕은 자신을 처벌하지 않는 제석천에게 그는 나를 두려워 인내한다.’라며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제석천은 그러든 말든 최상의 이익을 성취하려면 인내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했다. 이는 아수라와 제석천의 통치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싸움걸기를 좋아 하는 아수라는 폭력적이다.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 아수라의 세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석천은 약자의 거친 말에 사띠와 고요함으로 대응한다. 이른바 강자가 인내하는 방식이다.

 

승자로서의 제석천은 패자로서의 아수라대왕의 무례함을 처벌하여 누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라 했다. 힘 있는 자가 참는 다는 말이다. 그러나 각묵스님역과 빅쿠보디역, 그리고 두 영역에서는 공통적으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는 식으로 번역했다. 빠알리 원문을 본다면 후자가 맞다. 그러나 문맥으로 본다면 전자가 맞다.

 

전재성님의 메일을 받고

 

정반대의 번역에 대하여 전재성님에게 문의 메일을 보냈다. 문제의 문구에 대하여 이런 설명을 받았다.

 

 

모든 학자들이 저와는 반대로 번역했군요. 그런데 nicca khamati dubbalo는 싯구인데, 시형론적으로 운율에 맞게 조정된 것입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운율을 맞추기 위해 a가 생략된 것입니다. 시형론에서 부정의 접두사 a가 생략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adubbalo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운율학에 어는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메일에 따르면 시어에서 운율상의 문제로 종종 생략되는 말이 있다고도 했다. ‘nicca khamati dubbalo’에서 ‘dubbalo’가 대표적이다. 원래 ‘adubbalo’이었으나 운율상 부정접두어 ‘a’가 탈락되어 ‘dubbalo’가 되었다고 한다.

 

‘dubbalo’가 사전적 의미로 ‘Weak’의 뜻으로 약자를 의미하지만, 원래 adubbalo 약자가 아닌 자, 강자의 의미라 했다. 따라서 빠알리문구 “nicca khamati dubbalo”힘있는 자는 항상 참아낸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시형론과 복잡한 윤율학을 모르면 약자는 항상 참아낸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서양의 번역자들 역시 운율학에 대한 한계가 있어서 문맥과는 엉뚱하게 정반대로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강한 자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강한 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분노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장이 회의석상에서 분노하면 권위가 올라가는 것일까? 대통령이 격노하거나 진노하면 위계질서가 잡혀 지는 것일까? 권위는 분노에서 나오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분노하면 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4) 라 했다.

 

분노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비의 분노라 하지만 분노했다는 그 사실자체는 변함이 없다. 분노는 강한 자의 힘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힘이다. 그러나 그 분노에는 힘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의 힘은 힘없는 자의 힘이라네.”라 했다.

 

강한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로서 권위를 나타내지 않는다. 항상 사띠하고 고요함을 유지하였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힘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라 했을 것이다.

 

 

2016-05-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