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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avijja)이란 무엇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6. 12:15

 

무명(avijja)이란 무엇인가?

 

 

 

정견(正見)이 무엇이냐

 

정견이란 무엇일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어떤 이는 한자풀이를 하여 바르게 보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정견은 다르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장선우감덕의 시나리오책 따타가타를 보면 정견에 대하여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장선우 감독이 제주에 살면서 불교공부모임에 참석했는데 어느 분이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正見)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합니다. 이에 대하여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자들이 교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을 말한다.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S45.8)라고 정형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성제가 정견이라면 사성제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 된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모두 사견인 것이다. 그럼에도 정견에 대하여 한자풀이로 단지 바른 견해라고 한다든가, 선불교식으로 본래부처인 것을 아는 것이라는 풀이는 교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이란

 

무지는 무명과 같은 말이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에 대한 무지이므로 무지의 무지가 된다. 결국 사성제를 모르는 것은 중층 무지가 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삼계를 윤회하는 두레박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는 팔정도에서 정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의 고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ā ca, bhikkhave, avijjā? Ya kho, bhikkhave, dukkhe aññāa, dukkhasamudaye aññāa, dukkhanirodhe aññāa, dukkhanirodhagāminiyā paipadāya aññāa. Aya vuccati, bhikkhave, avijjā.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Vibha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명히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 했다. 여기서 무명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아윗자(avijjā)이다. 윗자(vijjā)가 한자로 명()을 뜻하여 단지 문자적으로 밝음이라 하지만 빠알리 사전에는 ‘higher knowledge’로 되어 있다. 윗자는 언제나 아윗자에 대하여 긍정적인 뜻이다. 아윗자가 브라만이나 육사외도를 뜻한 것이라면 윗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견이기 때문에 다른 스승의 가르침은 사견이 된다. 그래서 아윗자에 대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다.

 

왜 어리석은 자라 하는가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고,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무지(aññāa)’라 한다. 빠알리어 aññāa ignorance 의 뜻으로 지혜없음을 말한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는 것은 무지이다. 정견과 사견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결국 사성제를 모르는 자를 말한다. 사성제를 모르는 자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있다는 것 조차 모른다. 그래서 단순한 무지가 아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모르는 무지에 대한 무지가 된다. 이러한 중층 구조 때문에 무명(avijj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

 

괴로움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성제를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무지에 대하여 “1)토대를 통해서, 2)대상을 통해서, 3)숨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 (56)이라 했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무지는 있는 그대로의 특징을 꿰뚫는 것을 장애하여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56번 각주) 고 했다. 이렇게 덮어 버리기 때문에 진리를 숨긴다는 것이다.

 

무명은 갈애와 더불어 삼계를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갈애가 미래의 태어남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무명은 더 근원적인 원인이 된다. 그런 무명은 다름아닌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정의된다. 이와 반대로 사성제에 대한 지혜는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 정견으로 정의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와 십이연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 각주를 보면 유신견을 무명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 했다. 왜 그럴까? 자아가 있다는 견해, 유신견은 갈애에 조건 지워진 네 가지 집착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네 가지 집착이란 무엇일까? 이는 분별의 경(S12.2)’에서 집착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 (kāmupādāna, diṭṭhupādāna, sīlabbatupādāna, attavādupādānaṃ)”(S12.2) 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 여기서 네 번째 항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 (attavādupādānaṃ)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이라 했다.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은 네 가지 집착중의 하나라고 했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이 무명으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은 잘못 되었음을 말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갈애의 경에서 무명이 이루어지면, 존재의 갈애가 이루어진다.”(A10.62)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참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귀었을 때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사견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무명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 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라는 것이다.

 

무명이 유신견 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

 

무명이 유신견 보다 더 근원적인 증거가 또 있다. 이는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로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0가지 족쇄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면 유신견은 소멸된다. 그러나 무명은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해서 모두 다 소멸되지는 않는다. 사성제를 관통해서 아라한이 되어야만 무명은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진아이니 대아이니 불성이니 일심이니 주인공이니 여래장이니 하면서 유사 자아관을 가진 자들은 무명이 다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직 유신견 혹은 취착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여 예류과도 증득하지 못한 자들이어서 범부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초불연상윳따 2 57번 각주, 각묵스님)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려면 가장 먼저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계금취견이 타파 되어야 한다. 특히 열 가지 족쇄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유신견인데 이는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는 (1)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2) 오온 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3)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4)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런데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참나, 주인공 등 유아론적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유신견 혹은 취착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여 예류과도 증득하지 못한 자들이어서 범부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잘못된 길(micchāpaipada)과 올바른 길(sammāpaipadā)

 

부처님은 십이연기 가르침에서 제자들에게 잘못된 길과 올바른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길이란 무엇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을 잘못된 길이라 한다.

 

그러면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길이란 무엇인가? 곧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남김없이 소멸하므로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없어지므로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없어지므로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없어지므로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없어지므로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없어지므로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없어지므로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없어지므로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없어지므로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없어지므로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없어지므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길이라 한다.”(S1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잘못된 길올바른 길에 대하여 십이연기로 설명했다. 여기서 잘못된 길은 ‘micchāpaipada’로서 잘못된 길이나 수단, 실천방법 등을 뜻한다. 올바른 길이라 ‘sammāpaipadā’로서 정도를 의미하며 윤회의 괴로움에서 해탈을 목표로 하는 올바른 길을 말한다. 초불연에서는 그릇된 도닦음바른 도닦음이라 번역했다.

 

서로 맞물려 있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팔정도를 말한다. 이렇게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런데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고,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는 서로 묶여져 있음을 알게 된다.

 

부처님 핵심가르침은 결국 사성제로 요약된다. 사성제를 모르면 잘못된 길이라 했다. 사성제를 모르는 무지로 인하여 사견에 빠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사성제를 알면 올바른 길로 가게 될 것이라 했다. 사성제가 정견임을 말한다.

 

선사들은 정견에 대하여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참나, 주인공 등 자아가 있다는 견해, 즉 유신견이 되기 쉽다. 그러나 존재를 윤회케 하는 열 가지 족쇄에 따르면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 보는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야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참나라는 유아론적 실체를 추구한다면 영원히 삼계를 윤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범부라 했다.

 

 

2016-08-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