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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 불일불이법(不一不二法)과 재생연결식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9. 10:18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 불일불이법(不一不二法)과 재생연결식

 

 

 

생과 사는 둘이 아니다?

 

불일불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어로는 不一不異또는 不一不二라 한다. 해석하면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 하여 부정을 뜻하는 아니 불()’자를 쓰고 있다.

 

선사들이 말하기를 흔히 생과사는 둘이 아니다.’라거나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불일불이에서 불이(不二)에 대한 것만 언급한 것이다. 불일(不一)은 왜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불일불이에 대하여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생과 사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표현 해야 한다. 그런데 불이에 대해서만 표현 하여 생과 사는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과 사는 하나란 말인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용수의 팔불중도에서 불일불이는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의 뜻이다. 그러나 선사들이 법문할 때 불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불일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아 불이법문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의 불일불이법(不一不二法)

 

생과 사,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라고 한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생과 사, 번뇌와 보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이 몸 또한 전생의 몸과 다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네 것이 아님의 경(S12.37)’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Nāya bhikkhave, kāyo tumhāka. Nāpi aññesa. purāamida bhikkhave kamma abhisakhata abhisañcetayita vedayita daṭṭhabba.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며,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Natumhasutta-네 것이 아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몸에 대하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Nāya bhikkhave, kāyo tumhāka. Nāpi aññesa)라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현재 몸은 언제나 자기동일적인 본질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와는 다른 본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몸과 과거의 삶의 연속적인 활동의 결과로써 주어진 것이다.”(193번 각주) 라고 전재성님은 주석했다.

 

현재 이 몸과 마음은 이전 생의 몸과 마음의 연속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불일불이(不一不異)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현재의 몸과 과거의 삶의 연속적인 활동의 결과로써 주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문구로 인하여 우리 몸과 마음이 이전생과 불일불이의 관계임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불일불이와 연기법

 

부처님은 우리의 몸이 이전 생의 것과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말씀 하시면서 이를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기의 법칙을 철저하게 사유하라고 말씀 하시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S12.377) 라 하여 연기송을 말씀 하신다.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모두를 설명한 것이다.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상호의존적 연기를 말한다.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적 연기에 해당된다. 또한 연기송에서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말은 조건발생적 연기를 뜻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조건발생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발생적연기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고,…”식으로 하여 십이연기를 설하고 있다. 또한 그러나 무명이 남김 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라 하여 연기의 역관을 설명하고 있다. 연기의 역관은 연기송에서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은 불일불이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설명했다.  식과 관련하여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무엇인가의 경향을 갖는다면, 이것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S12.38) 라 했다. 여기서 의식은 업식(kammaviññāa)’을 뜻한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업식은 신체적 죽음을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의 다발을 통해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십이연기에서 식은 재생연결식으로서 식을 말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재생연결로서 식을 말씀 했다. 이는 이전생과 현생이 불일불이의 관계임을 말한다.

 

업식(kammaviññāa)

 

십이연기는 양중인과로 설명된다. 십이연기에서 식은 재생연결식이다. 이는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무엇인가에 경향을 갖는다면 의식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S12.39) 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더욱 더 구체화 된 것은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전개된다.”(S12.39) 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의식과 명색사이에 연결(sandhi)이 있다. 이것은 전생의 의식과 현세의 새로운 존재로서의 명색사이에 연결이 있다.”(202번 각주)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른바 재생연결식으로서 식, 즉 업식(業食: kammaviññāa)을 말한다.

 

재생연결식으로서의 식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S12.19)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그리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남을 말한다.

 

식과 명색과의 관계는 식연명색 또는 명색연식으로도 설명 된다. 이는 도시의 경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S12:65)라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식과 명색이 상호 번갈아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재생연결식(Paisandhiviññāa)’이라 했다.  

 

도시의 경에서는 왜 식연명색 또는 명색연식이라 하여 상호의존연기로 설명하고 있을까? 이는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슨 일까? 주석에 따르면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오고 통찰지은 대상으로부터 되돌아 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Srp.II.115) 라 설명 되어 있다.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말 어떤 뜻일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의도적 행위가 있었을 때 그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다시 태어나는 가져오는 조건발생적 식, 즉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으로서 식은 명색과 상호의존하여 발생함으로 인하여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된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에 따라 명색의 관계는 “명색연식, 식연명색, 명색연식…”라는 형태로 설명된다.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다면 식에서 그칠 것이다.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은 오온의 형성이기도 하지만 업을 지음으로 인하여 재생 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 독특하게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으로 표현 되어 있다. 경에서는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S12:65)라고 표현된다. 이때 식은 재생연결식으로서의 식을 나타낸다고 주석에서는 설명한다.

 

죽음과 재생연결

 

우리 몸과 마음은 이전 생의 몸과 마음과 불일불이의 관계이다. 이전생과 같은 것도 아니다 다른 것도 아니다. 불일불이로서 이 몸과 마음은 청정도론에서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재생연결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분명한 인간의 죽음과 재생연결의 순서를 통해서 이것을 설명해보자.

 

과거 생에서 자연사나 혹은 사고로 죽음에 다다른 자가 사지에 관절과 근육이 끊어지는 죽을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느낌의 비수가 습격해 옴을 견디지 못하여, 폭염아래 버려진 푸른 종려 잎처럼 몸이 점점 쇠해지고, 눈의 기능 등이 멈추고, 몸의 기능과 마노의 기능과 생명기능이 오직 심장토대에 머물 때 심장토대를 의지하여 그 순간에 아직 남아있는 알음알이가 업이나 그 업에 의해 생긴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이라 불리는 대상을 의지하여 일어난다.

 

업은 무겁거나 습관이 되었거나 임종 직전에 생각났거나 과거에 지은 것 중에서 나머지 조건을 얻은 상카라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일어날 때 갈애와 무명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명에 의해서 위험이 가려진 그 대상에 갈애는 [그 알음알이를] 밀어 넣고, 함께 생긴 상카라들은 [그 알음알이를] 그곳으로 던진다.

 

그 알음알이는 흐름에 의해서 갈애에게 밀리고 상카라들에게 던져져서 이쪽 언덕의 나무에 매달려있던 줄을 의지하여 강을 건너려던 사람처럼 이전의 의지처를 버리고 업에서 생긴 다른 의지처를 잡던지 혹은 잡지 못하던지 하면서 대상 등의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청정도론, 17 163, 대림스님역)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쪽 언덕으로 던져진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업력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생연결에 대하여 줄에 의지 하여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 하고 있다. 여기서 줄은 재생연결을 의미한다. 강을 건널 때 이 언덕을 버리고 저 언덕으로 건너 간다. 죽음과 태어남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여기서 먼저 것은 떨어지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고 나중 것은 다음 생의 시작을 연결하기 때문에 재생연결이라 부른다. 그것은 과거의 생으로부터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부터 업, 상카라, 기울임, 대상 등의 원인이 없이 나타난 것도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Vism17.164) 라 했다.

 

재생연결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우유와 요구르트의 관계이다. 이는 불일불이의 관계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만약 상속으로 이어질 때 절대적으로 하나라고 하면 우유로부터 커드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절대적으로 다르다면 커드는 우유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Vism17.167) 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커드는 우유를 응고시켜서 얻어지는 유제품의 일종이다라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요구르트를 말한다.

 

현생은 이전생과 불일불이의 관계이다. 이는 우유와 요구르트의 관계로 설명된다. 또 씨앗의 발아로 설명할 수 있다. 씨앗이 발아 하여 나무가 되는 과정에 대하여  상속에 있어 결과는 다른 이의 것도 아니고 다른 원인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일불이의 관계를 말한다.

 

누가 법을 보는가?

 

십이연기에서 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재생연결식은 조건발생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재생연결식으로서 식과 그 식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명색과의 상호의존관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경과 추론으로 알 수 있다.” (Vism17.202) 라 했다. 전승된 가르침과 추론으로 알 수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추론으로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을 봄으로써 보지 않은 물질도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 알 수 있다.” (Vism17.202)  라 했다.

 

마음에서 생긴 물질은 무엇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에서도 물질이 생겨난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니밋따(nimitta)’를 들 수 있다. 명상을 하다 보면 빛이 보이는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로 본다. 이처럼 마음이 만들어 낸 물질을 보듯이, 재생연결식으로 물질이 생겨남을 말한다. 그래서 붓다고사는 본 것을 통하여 보지 않은 것도 추론하여 알 수 있다.” (Vism17.202)  라고 했다.

 

회의론자들은 흔히 보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은 것, 자신의 귀로 듣지 않은 것, 자신이 경험 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음을 말한다. 또 과학적 상식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 역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않는다. 다만 믿음의 영역일 뿐이라고 취급한다. 그러나 현자들은 내세와 윤회를 확신한다. 그리고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여긴다. 왜 그럴까? 법은 현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 하여 가르침을 통찰한 현자들만이 법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법은 현자들만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진리, 중생, 재생연결, 조건 이 네 가지 법은 보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어렵다.”(Vism17.25) 라 했다. 범부들은 네 가지 법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어려움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난 다음 “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S6.1)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에는 재생연결식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범부들이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하며 왈가왈부한다. 어떤 이는 윤회는 없다고 한다. 있다면 현생에서 순간윤회라 한다. 존재하는 동안 변하는 것에 대하여 윤회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생윤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떤 이는 윤회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본다. 과연 범부들이 이런 논쟁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부처님에 따르면 법은 현자들만이 아는 것이라 했다. 재생연결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붓다고사는 네 가지 법에 대하여 보기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고 하면서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어떻게 아는가? 붓다고사에 따르면 전승된 가르침을 통달하거나 수행하여 법을 증득한자로 한정하고 있다. 삼장에 통달한 자나수행을 하여 도와 과를 증득한 현자들이 아니면 재생연결 등 네 가지 법을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연기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

 

법을 모르는 자들이 윤회와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알기 어렵고 심오한 네 가지 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면 삼장을 통달하거나 법을 증득한 자이어야 한다. 부처님이 윤회에 대하여 말씀 했다면 범부들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재생연결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여 부정한다면 범부의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재생연결식을 볼 수는 없지만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조건 발생하는 연기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빳따나라는 논장에서 표현된 것처럼 마음에서 생긴 물질처럼 업에서 생긴 물질도 식이 그 조건이라 했다. 명상을 하면 니밋따를 본다. 니밋따는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다. 마찬가지로 재생연결식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것 역시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이라는 마음이 명색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명색은 식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십이연기에서 식이 재생연결식으로 설명되면 식과 명색이 상호작용을 하여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이 된다. 그래서 오온이 형성되된다. 이는 마음에서 니밋따라는 마음의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누구나 명상을 하면 니밋따를 볼 수 있는데, 니밋따는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다.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것 역시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본다면 재생연결식이라는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명색이다. 식과 명색이 상호작용하여 오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음이 니밋따를 만들어 내듯이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재생연결식은 삼장을 통달한 자나 수행을 하여 법을 증득한 현자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불일불이는 중도사상

 

우리 몸과 마음은 이전 생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만약 이전 생과 같은 것이라면 아뜨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이전 생과 다른 것이라면 아뜨만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S12.35)라 했다.

 

부처님은 이 몸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S12.37) 라 했다. 불일불이의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은 불일불이의 관계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된다. 무엇이 재생하게 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며,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S12.37) 라 했다.

 

행위가 윤회하는 것이다. 업을 지으면 그 업력으로 윤회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업식에 따라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오온은 이전 생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한 자이고,..”(M135) 라 하여 업의 상속자라 했다. 그리고 없이 뭇삶들을 차별하고..”라 하여 지은 업대로 태어남을 말씀 했다.

 

불일불이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영원주의도 아니고 허무주의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였다. 불일불이는 중도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불일불이는 중도사상이라 볼 수 있다.

 

 

2016-10-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