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의 초월을 위하여
눈에 보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기 때문에 귀로 듣습니다. 빠알리 니까야 번역서가 있기에 경전을 봅니다. 그것도 두 종류의 번역이 있기에 비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상카다마경(Saṅkhadhamasutta, S42.8)’에서 양번역서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판본에 따라 차이가
상카다마경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소라고동 소리의 경’이라 했고, 각묵스님은 ‘소라고둥 불기 경’이라 했습니다. 부처님과 촌장이 죄업에 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의 도입부에서 번역차이가 보입니다. 전재성님은 촌장에 대하여 “그 때 촌장 아씨반다까뿟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라 했습니다. 각묵스님은 “그때 니간타의 제자인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이 세존께 다가갔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니간타의 제자’라는 말이 차이가 납니다.
각묵스님은 촌장이 ‘니간타의 제자’라 했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에는 니간타의 제자라는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빠알리원문을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Atha kho asibandhakaputto gāmaṇi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라 되어 있습니다. 빠알리 원문에 촌장이 ‘니간타의 제자’라는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Then Asibandhakaputta the headman, a lay disciple of the niganthas”라 되어 있습니다. 번역해 보면 “니간타의 재가제자인 지도자 아시반다까뿟따는”가 됩니다. 빅쿠보디는 촌장에 대하여 ‘니간타의 재가제자(a lay disciple of the niganthas)’ 라 했습니다. 각묵스님의 번역과 일치 합니다.
니간타라는 말은 빠알리 원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빅쿠보디역에 니간타와 관련하여 각주가 있습니다. 찾아 보니 “The Jains. on Niganfha Nataputta, see 41:8”(CDB Vol.II, 343번 각주)라 되어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niganthas’에 대하여 자이나교도라 했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해서는 S41.8을 찾아 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습니다. PCED194에 실려 있는 빠알리원문에는 “Atha kho asibandhakaputto gāmaṇi nigaṇṭhasāvak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라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nigaṇṭhasāvako’라 하여 니간타 제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Tipitaka 사이트에는 니간타라는 말이 없지만, PCED194에는 니간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Tipitaka 사이트에는 PTS본이 실려 있습니다. PCED194에 실려 있는 내용은 PTS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누구나 살생하면 지옥에 간다?
부처님은 촌장에게 니간타가 어떻게 가르침을 설하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촌장은“세존이시여, 니간타 나타뿟따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누구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면 모두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진다…(yo koci pāṇamatipāteti sabbo so āpāyiko nerayiko)”라며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에 대하여 말합니다. 공통적으로 ‘누구나(sabba)’라는 말이 들어 갑니다. 촌장은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 진다.”라는 니간타의 말을 전하면서, 누구나 예외 없이 살생하면 지옥에 떨어짐을 말합니다.
속담에 “예외 없는 법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외가 있음을 말합니다. 니간타는 오계를 어기면 누구나 예외 없이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촌장의 말대로 살생하면 누구나 지옥에 간다면 누구나 다 지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벌레 하나 죽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 세상 살면서 거짓말 한번 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Yaṃ bahulaṃ yaṃ bahulañca gāmaṇi viharati tena tena niyyatīti evaṃ sante na koci āpāyiko nerayiko bhavissati yathā nigaṇṭhassa nātaputtassa vacanaṃ.
“촌장이여,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려진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니간타 나타뿟따의 말처럼 나쁜 곳, 지옥으로 갈 수 없습니다.”(S4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누구나 살생해도 지옥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나’라는 말에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맛지마니까야 ‘디가나카의 경(M74)’에서 외도의 말을 역이용하여 논파하는 것과 같습니다.
긴소톱을 가진 외도 디가나카가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 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는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그대의 이러한 견해, 바로 그러한 견해는 최소한 그대가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M74) 라며 논파 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라는 말에 모순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이나교도인 촌장은 스승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말한대로 “누구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면 모두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말을 믿은 것입니다. 이런 말은 논리에 헛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려진다.”라 하여 지옥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악업을 반복해서 지으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살생을 했더라도 선업을 반복해서 지으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라는 말에 어폐가 있고 또한 반복해서 많이 짓는다는 말에 탈출구가 있습니다.
두 번역에서 차이가
두 번역에서 차이가 나는 곳이 있습니다. 빠알리 문구 “Yaṃ bahulaṃ yaṃ bahulaṃ viharati tena tena niyyatīti”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에 이끌려려진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각묵스님은 “그가 많이 머무는 그대로 그는 [다음 생으로] 인도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과 ‘많이 머무는 그대로’입니다.
빅쿠보디는 “One is led on [to rebirth] by the manner in which one usually dwells.”라 했습니다. 번역하면 “한사람이 머무는 방식에 따라 [재생으로] 으로 이끌어 진다.”가 됩니다. 대괄호를 사용하여 ‘[to rebirth]’라 한 것은, 각묵스님이 역시 대괄호를 사용하여 ‘[다음 생으로]’라 한 것은 동일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빅쿠보디가 ‘One’이라 한 것에 대하여 ‘그’라 했습니다. 전재성님은 ‘누구나’라 했습니다.
경에서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 보면 ‘sabba’의 뜻을 가진 ‘누구나’라는 말이 맞습니다. 경에서 외도 스승 니간타는 ‘누구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면 지옥에 떨어진다.’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라 하여 ‘누구나’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생명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라고 번역 해 놓고는 이어 받는 문구에서 “그가 많이 머무는”이라 하여 ‘그’라고 했으나 매칭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무엇이든지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살생도 반복하면 살생업이 됩니다.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반복해서 짓는 것에 대하여 “Yaṃ bahulaṃ yaṃ bahulaṃ viharati”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이라 했고, 각묵스님은 “그가 많이 머무는 그대로”라 하여 전혀 다른 말처럼 번역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빠알리어 viharati의 번역에 대한 차이 입니다.
빠알리어 viharati는 ‘lives; abides; dwells’의 뜻으로 ‘머물다’의 의미입니다. 빅쿠보디는 직역하여 머물다는 뜻으로 ‘dwells’라 번역했습니다. 각묵스님 역시 머물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행위에 대한 반복을 ‘머물다’라고 번역한 것은 전체적인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산다’는 뜻의 lives가 적합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이라 하여 ‘삶을 살다’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는 말입니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업을 짓게 됩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은 일을 밥먹듯이 하는 자는 그에 대한 죄업은 쌓여 갈 것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에서는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22.100) 라 했습니다.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diṭṭi)
부처님은 촌장의 말에 역설적으로 답했습니다. 말의 모순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외 없이 ‘모두’를 뜻하는 ‘누구나(sabba)’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촌장에게 “어떤 사람이 밤이나 낮이나 때때로나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든가 생명을 해치지 않든가 어느 것이 더 많겠습니까?”라며 물어 봅니다. 당연히 생명을 해치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니간타 나타뿟따의 말은 모순이 됩니다.
어부는 물고기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합니다. 농부가 농사지을 때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누구나 살생을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지옥에 간다면 이 세상에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지옥에 갈 사람은 한사람도 없게 됩니다.
부처님은 니간타 나타뿟따의 밀에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diṭṭi)’입니다.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금계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촌장은 니간타 나타뿟따의 말을 맹신하여 계금취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죄의식에 대하여
니간타 나타뿟따는 누구라도 살생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작은 벌레 하나 죽여 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 세상에 거짓 말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 있어서 살생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고, 거짓말 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도둑질과 음행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니간타 나타뿟따의 ‘누구나’라는 말에 묶여서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yo koci pāṇamatipāteti sabbo so āpāyiko nerayikoti. Atthi kho pana mayā pāṇo atipātito ahampi āpāyiko nerayikoti diṭṭhiṃ paṭilabhati. Taṃ gāmaṇi vācaṃ appahāya taṃ cittaṃ appahāya taṃ diṭṭhiṃ appaṭinissajjitvā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나의 스승은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누구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면 모두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진다.’그러나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인 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괴로운 곳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품습니다. 촌장이여, 그는 그 말을 버리지 못하고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옥에 떨어집니다.”(S4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죄의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벌레 하나를 죽였다고 하여 죄책감을 가지는 자가 있습니다. 살생하면 지옥에 간다는 스승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자가 벌레를 밟아 죽였을 때 ‘나는 괴로운 곳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고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 할수록 어떻게 될까요? 결국 그 반복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정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상이한 번역
두 번역에 차이 나는 곳이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그는 그 말을 버리지 못하고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옥에 떨어집니다.”라 했습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만일 그가 이런 견해를 제거하지 않고 이런 마음을 제거하지 않고 이런 견해를 포기하지 않고 죽으면, 마치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차이는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입니다.
빅쿠보디는 “If he does not abandon that assertion and that state of mind, and if he does not relinquish that view, then according to his deserts he will be, as it were, dropped off in he11.”라고 번역했습니다. 차이 나는 번역문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에 해당되는 말은 ‘as it were’입니다.
관련된 빠알리구문은 “Taṃ gāmaṇi vācaṃ appahāya taṃ cittaṃ appahāya taṃ diṭṭhiṃ appaṭinissajjitvā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입니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에 해당되는 말이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입니다. 전재성님은 “그대로 지옥에 떨어집니다.”라 했습니다. 문제의 빠알리어는 yathābhataṃ입니다.
yathābhataṃ는 yathā(As, like)+bhata(brought up)의 복합어입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이 문구에 대하여 각주에서 “ ‘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마치 지옥지기들이 [죄지은 자를] 인도해 와서 지옥에 가두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의미로 알아야 한다.”(초불연 상윳따 4권 496번 각주) 라고 주석을 인용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빅쿠보디의 각주는 어떤 것일까요?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athābhataṃ(Ee: yathā 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The idiom is obscure and the rendering here conjectural.The phrase also occurs at MN I71,31, rendered at MLDB p. 167: "then as [surely as if he had been] carried off and put there he will wind up in hell." This rendering, which follows Ps
II 32 (yathā nirayapālehi ābharitvā niraye ṭhapito), is problematic, for yathābhataṃ is an indeclinable with an adverbal function, not a substantive set in apposition to the subject. The function of evam. too, is obscure. See the inconclusive discussion in PED, s.v. yathā.
(CDB, Vol.II.344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각주를 보면 초불연 496번 각주와 내용이 같습니다. 특히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에 대하여, “then as [surely as if he had been] carried off and put there he will wind up in hell”이라 해서 초불연 각주 에서“누가 그를 데려가서 놓는 것처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라 한 것이 일치합니다.
빠알리어 yathābhataṃ에 대하여 문자적으로 ‘가져온 것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마치 누가 그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이라 하여 주석적 번역을 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은 “그대로”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as it were”로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일치합니다.
왜 후회하는가
벌레 한마리 죽여도 살생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승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면 정말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 세상에 출현한 부처님들은 ‘벌레를 죽이면 누구나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말씀을 한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출현했던 부처님들은 한결같이 “그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비난하고 힐책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라 했습니다. 살생하면 누구나 지옥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외도의 스승은 살생하면, 거짓말하면 누구나 지옥에 갈 것이라 했습니다. 그 ‘누구나’라는 말에 걸려서 지옥에 갈 죄의식을 갖고 산다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잘못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Bhagavā kho anekapariyāyena pāṇātipātaṃ garahati vigarahati pāṇātipātā viramathāti cāha: atthi kho pana mayā pāṇo atipātito yāvatako vā tāvatako vā; yo kho pana mayā pāṇo atipātito yāvatako vā tāvatako vā, taṃ na suṭṭhu taṃ na sādhu. Ahañceva kho pana tappaccayā vippaṭisārī assaṃ na me taṃ pāpakaṃ kammaṃ akataṃ bhavissatīti, so iti paṭisaṅkhāya taṃ ceva pāṇātipātaṃ pajahati, āyatiñca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evametassa pāpassa kammassa pahānaṃ hoti, evametassa pāpassa kammassa samatikkamo hoti.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여러 가지 방편으로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비난하고 힐책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이러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인 적이 있다. 그것은 잘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때문에 ‘나에게 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뉘우치고 있다.’이처럼 생각하여 그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미래에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그만둡니다. 이와 같이 그는 사악한 일을 뛰어 넘었습니다.”(S42.8, 전재성님역)
누구나 생명을 죽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거짓말 한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의식에 사로 잡혀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긴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부처님은 ‘참회’를 말씀 했습니다. 설령 벌레 한마리라도 죽였다면 잘못한 것이고 옳은 일이 아님을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와 관련된 빠알리문구는 “Ahañceva kho pana tappaccayā vippaṭisārī assaṃ na me taṃ pāpakaṃ kammaṃ akataṃ bhavissatīti” 입니다. 전재성님은 “그래서 나는 그 때문에 ‘나에게 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뉘우치고 있다.’”라 번역했습니다. 각묵스님은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있지만 그러한 나쁜 업은 짓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But though I feel regret over this, that evil deed of mine
cannot be undone.”이라 번역했습니다. 번역하면 “비록 내가 그 행위에 대하여 후회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나의 사악한 행위가 행해지지 않을 수 없다”가 됩니다. 각묵스님 번역과 구조가 유사합니다.
벌레를 죽인 자는 “내가 벌레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는 행위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행위를 하고 후회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도 후회의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하여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Na taṃ kammaṃ kataṃ sadhu yaṃ katvā anutappati yassa assumukho rodaṃ vipākaṃ paṭisevati)”(Dhp.67) 라 했습니다.
행하고 난 뒤에 후회한다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벌레 죽이는 살생을 했다면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미래에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그만둡니다.”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살생한 것 보다 살생하지 않은 일이 훨씬 더 만을 때, 거짓말 하는 것 보다 거짓말 하지 않은 삶을 살 때 이전에 행했던 것은 매우 작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그는 사악한 일을 뛰어 넘었습니다. (evametassa pāpassa kammassa samatikkamo hoti)”라 했습니다. 여기서 ‘samatikkama’는 ‘passing beyond; overcoming’의 뜻으로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죄의식의 초월을 위하여
사람들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하여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아주 작은 잘못임에도 평생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죄를 초월할 수 있을까요?
초기경전에 소금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A3.99) 라고 묻습니다. 소금덩이라는 죄악을 넓디 넓은 갠지스강에 던져 버리면 짠 맛이 전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면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갠지스강물 같은 공덕을 쌓는다면 모든 죄는 씻겨 나갈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자비의 가르침을 설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반복해서 닦아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전에 지은 죄업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계행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는 오계를 어기지 않는 삶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소라고동 소리의 경(S42.8)’에서는 사무량심을 닦을 것을 말합니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과 함께 하는 마음을 우주 가득히 채웠을 때 더 이상 욕계의 오염된 마음이 발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악한 일을 초월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촌장이여, 그 고귀한 제자는, 탐욕을 떠나고 성냄을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서,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 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 전재성님역)
2017-02-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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