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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7. 10:35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저의 필명은 진흙속의연꽃입니다. 지난 2000년대 인터넷시대가 본격화 되자 카페와 블로그가 매우 활성화 되었습니다. 누구나 필명으로 카페나 인터넷을 만들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때 당시 다음블로그가 인기 있었기 때문에 나도 블로그라는 걸 하나 만들어 볼까?”라며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것입니다.

 

필명 진흙속의연꽃에 대하여

 

블로그를 만들때 절차에 따라 블로그명과 필명을 지어야 합니다. 어떤 이름으로 할까 고민했습니다. 마침 인터넷에 불교명상음악이 시리즈로 있었는데 이름이 좋아 보였습니다. 곡명을 보니 대승의 바다’, ‘동방의 등불’, ‘진흙속의 연꽃’, ‘태양의 후예등 여러 곡명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지을 바에는 좀 더 독특하고 차별화 되게 짓고 싶었습니다. 블로그명을 대승의 바다로 했습니다. 2005년 당시에는 초기불교를 몰랐던 때이고 대승불교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필명입니다. 필명도 불교명상음악중에서 하나 골랐습니다. 그것이 진흙속의 연꽃입니다.

 

대승의 바다진흙속의 연꽃’, 모두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필명을 진흙속의연꽃으로 하자 어느 스님이 지적을 했습니다. ‘진흙속의 연꽃이라는 말은 부처님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수 백개의 글을 쓴 상태에서 지적받은 것입니다. 글을 쓰면 반드시 날자와 함께 서명을 합니다. 지적 받고 나니 약간 부끄러웠습니다. 단지 불교명상음악 이름이 좋아 보여서 그대로 채용한 것인데 부처님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니! 갑자기 부처님을 사칭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법명 성공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 두었습니다. 수 백 개나 되는 것을 일일이 수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정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말이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필명 진흙속의연꽃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다섯글자나 되고 더구나 중복자음이 있어서 타자 치기에도 불편하다고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줄여서 연꽃이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진흙이라고 합니다. 무어라 불러도 상관 없습니다. 한번 사용하게 되자 굳어져서 계속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터넷에 알려질 것을 예상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시절에 단지 가벼운 마음으로 남보다 독특하게 좀 튀는 이름으로 한 것이 긴 이름의 진흙속의연꽃입니다.

 

사함빠띠의 청원

 

진흙속의 연꽃과 관련된 경이 초기경전에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S6.1)’이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고민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고민은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S6.1)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세상사람들이 알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아 갈 때 이를 소멸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주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함빠띠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부처님의 고민과 주저함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함빠띠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불사의 문을 열어젖히소서!”라며 청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함빠띠의 청원입니다.

 

‘apparajakkhajātikā의 번역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함빠띠의 불사의 진리에 대한 거듭된 청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때묻지 않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때묻지 않은 자들에게 설하면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때묻지 않은 자들이란 경에서는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입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눈에 먼지가 적게 들어간 중생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또는 눈에 먼지가 적게 들어간 중생들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apparajakkhajātikā을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apparajakkhajātikā‘appa+rajakkha+jātikā의 복합어입니다. 분석하면 본래부터 때묻지 않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appa+raja+akkha+jātikā로 분석하면 눈에 티끌이 없는 자가 됩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후자를 택한 듯 합니다.

 

빅쿠보디는 관련구절에 대하여 “There are beings with little dust in their eyes who are falling away because they do not hear the Dhamma”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apparajakkhajātikā에 대하여 ‘beings with little dust in their eyes’라 했는데 이는 그들의 눈에 약간 오염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빠알리 복합어 ‘appa+raja+akkha+jātikā눈에 약간의 오염이 있는 자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빅쿠보디가 ‘with little dust in their eyes’라 번역한 것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눈에 티끌이 없는 자라 하여 오염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원문과는 맞지 않습니다.

 

전재성님은 ‘appa+rajakkha+jātikā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appa‘small; little’의 뜻이고, rajakkha‘having defilement’의 뜻이고, jātikā‘belonging to the class, clan’의 뜻이기 때문에, ‘appa+rajakkha+jātikā오염이 매우 적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전재성님이 번역한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과 일치합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진리를 세상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을지 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알리려 하는데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사함빠띠가 나타나서 알아 듣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조금 오염된 자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apparajakkhajātikā라 하여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이라 한 것입니다. 빅쿠보디도 ‘beings with little dust in their eyes’라 하여 눈에 티끌이 적은 자들이라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눈에 티끌이 없는 자라 했습니다. 이는 적절치 못한 번역으로 봅니다.

 

만약 오염이 없는 자라면 굳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모든 오염원이 소멸된 자라면 그는 이미 아라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오직 부처님만이 아라한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티끌이 없는 자, 오염이 하나도 없는 자라면 굳이 부처님의 설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각묵스님의 눈에 티끌이 없는 자라는 번역은 오역(誤譯)’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진흙속의 연꽃의 비유

 

부처님은 사함빠띠의 청원에 따라 마침내 진리를 펴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결정한 동기는 부처님이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에서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불사의 진리입니다.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에 대한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을 자비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두 깨달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말해 주어도 이해를 못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크게 웃어 버리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등으로 설명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진흙속의 연꽃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Seyyathāpi nāma uppaliniya vā paduminiya vā puṇḍarīkiniya vā appekaccāni uppalāni vā padumāni vā puṇḍarīkāni vā udake jātāni udake savaḍḍhāni udakānuggatāni anto nimuggaposīni, appekaccāni uppalāni vā padumāni vā puṇḍarīkāni vā udake jātāni udake savaḍḍhāni samodaka hitāni, appekaccāni uppalāni vā padumāni vā puṇḍarīkāni vā udake jātāni udake savaḍḍhāni udakā accuggamma hitāni [tiṭṭhanti (sī. syā. ka. pī.)] anupalittāni udakena; evameva bhagavā buddhacakkhunā loka volokento addasa satte apparajakkhe mahārajakkhe tikkhindriye mudindriye svākāre dvākāre suviññāpaye duviññāpaye, appekacce paralokavajjabhayadassāvine viharante, appekacce na paralokavajjabhayadassāvine viharante.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S6.1,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연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속에 있는 연꽃, 수면에 있는 연꽃, 물 밖의 연꽃입니다. 여기서 물을 진흙으로 보아도 됩니다. 물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udaka’입니다. 영어로는 ‘water’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도 물속에서라 했습니다. 빅쿠보디도 “in the water”라 하여 물속에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경에서는 연꽃이 놓여 있는 상태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면을 기준으로 잠겨 있는 것과 수면에 걸쳐 있는 것,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에 묻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오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을 진흙이라는 오염물질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이 물속에 있다면 많이 오염된 상태이고, 수면에 걸쳐 있다면 덜 오염된 상태이고, 수면 밖에 있다면 조금 오염된 상태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연꽃처럼 조금 오염된 자, 즉 경에서 말하는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 (apparajakkhajātikā)’일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 (apparajakkhajātikā)’입니다. 이는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연꽃과도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흙탕 밖에 있는 연꽃입니다. 그러나 진흙탕에 걸쳐 있거나 진흙탕 속에 쳐 박혀 있다면 아직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시간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수면 밖으로 나와야, 즉 오염원이 소멸되어 티끌이 거의 없게 되었을 때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진흙속의 연꽃이라는 말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경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진흙속의 연꽃이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오염이 없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청원의 경에서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 (apparajakkhajātikā)’이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있는 대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진흙속의 연꽃이 각묵스님이 번역한대로 눈에 티끌이 없는 자라면 부처님을 뜻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진흙탕 속에 핀 연꽃은 아무리 수면 밖으로 나와 있을지라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흙탕 바깥으로 나와 있는 연꽃은 부처님이 아닌 보살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에서 연꽃과 진흙탕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진흙탕에 물들지 않는 것은 사바세계에 물들지 않는 관세음의 지혜를, 연꽃이 진흙탕을 버리지 않고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사바세계를 버리지 않는 관세음의 자비를 뜻한다.”(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 137)

 

 

진흙탕은 연꽃의 뿌리라 볼 수 있습니다. 진흙탕이 없으면 연꽃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깨달은 자는 진흙탕속 같은 중생들에게서 나옵니다. 비록 중생들이 진흙탕속에 빠져 있거나 수면에 걸쳐 있긴 하지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중생의 세계를 빠져 나오면 최상의 가르침을 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오염원이 옅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본래부터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뭇삶들 (apparajakkhajātikā)’이 진리를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수면 밖으로 나와 있는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진흙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흙탕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진흙탕 밖에 나와 있는 연꽃은 일종의 보살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단계입니다. 그런 보살은 항상 중생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의 일반적인 특징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연꽃이 진흙탕속에 피어 있지만 결코 진흙탕을 버리지 않습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진흙탕속과 같은 중생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중생들과 함께 하는 삶이 보살의 삶일 것입니다. 진흙속의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한다기 보다 보살을 상징한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2017-03-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