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풀니스와 마음챙김, 사띠(sati) 번역어에 대한 재검토를
영어에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마음챙김이라 합니다. 영어 마인드풀(mindful)에 대하여는 “염두에 두는” 또는 “유념하는”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인드풀니스는 ‘유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조어 마음챙김의 유래
사띠에 대하여 여러가지 번역어가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 간행된 아비담마길라잡이에 따르면 “마음챙김은 (사)고요한소리에서 정착시킨 술이다.”(아비담마길라잡이 1권 225쪽)이라 했습니다. 고요한소리가 1987년 창립되었으니 30년이 채 안된 술어입니다. 새로 만든 신조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챙김은 새로 만든 신조어입니다. 신조어와 관련하여 김재성님은 이렇게 만든 과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조어(造語)는 1988년에 고요한소리에서 출판된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피야다시 스님 지음/ 정원 김재성 옮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이 책을 번역한 필자는 팔정도의 정념(正念, samma-sati)과 그에 대한 영역 right mindfulness를 옮기면서 활성스님과 번역어 선정문제로 고민하였다. 활성스님께서 참선에서 ‘화두를 챙기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정념(正念)을 ‘올바른 마음 챙김’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셨고 필자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기억한다.
sati라는 초기경전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초기불교에서 ‘마음’을 가져오고, 참선의 화두를 드는 정신이 배어있는 말인 ‘챙김’을 결합시켜 새로운 조어(造語)를 만든 것이다. ‘마음챙김’은 초기불교와 선불교의 정신을 함께 접목시킨 신조어이다. 이후, 필자와 고요한소리에서는 사띠와 그 번역어인 mindfulness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마음챙김’을 사용해왔다. (김재성, “마음챙김은 사띠의 적절한 번역어” , 법보신문 2009년 12월 10일)
신조어 마음챙김은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불교의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마음을 가져오고 화두챙김에서 챙김을 가져와서 결합시킨 것이 마음챙김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띠라는 빠알리어에는 마음이라는 말도 없고 챙김이라는 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챙김은 국적불명으로 사띠의 의미와 전혀 맞지 않는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빠알리사전을 보면
초불연에서는 사띠(sati)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 하여 전번역서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초불연 아비담마길라잡이에 따르면 빠알리어 사띠에 대하여 “초기경에 의하면 sati는 마노(mano,意)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아비담마길라잡이 1권 225쪽)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사띠라는 말에는 어원적으로 마음을 뜻하는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사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Sati
,(f.) [Vedic smṛti: see etym. under sarati2]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 D.I,180; II,292; Miln.77--80;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conscience, self-consciousness D.I,19; III,31, 49, 213, 230, 270 sq.; A.I,95; Dhs.14; Nd1 7; Tikp 61; VbhA.91; DhsA.121; Miln.37; upaṭṭhitā sati presence of mind D.III,252, 282, 287; S.II,231; A.II,6, 218; III,199; IV,232; It.120;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āpetuṁ to surround oneself with watchfulness of mind M.III,89; Vin.I,24, satiṁ paccupaṭṭhāpetuṁ to preserve self-possession J.I,112; IV,215; kāyagatā sati intentness of mind on the body, realization of the impermanency of all things M.III,89; A.I,43; S.I,188; Miln.248; 336; muṭṭhasati forgetful, careless D.III,252, 282; maraṇasati mindfulness as to death A.IV,317 sq.; J.IV,216; SnA 54; PvA.61, 66. asati not thinking of, forgetfulness DhsA.241; Instr. asatiyā through forgetfulness, without thinking of it, not intentionally Vin.II,2892. sati (sammā°) is one of the constituents of the 8--fold Ariyan Path (e g. A.III,141 sq.; VbhA.120): see magga 2.
(Sati, 빠알리사전 PCED194)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사띠의 뜻은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입니다. 기억이 제1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sati
:f. [Sk. smṛti<sarati ②] 念, 憶念, 記憶, 正念. -asammuṭṭha 明確不忘の念. -ākāra 念の行相. -indriya 念根. -uppāda 念の生起. -cariyā 念行. -paṭṭhāna 念処, 念住. -vinaya 憶念毘尼. -vepulla 念広大. -saṃvara 念律儀. -sampajañña 念正知, 正念正知. -sambojjhaṅga 念等覚支. -sammosa, -sammoha 念忘失, 忘念, 失念.。
빠알리-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사띠는 기억입니다. 영어의 memory와 같은 뜻입니다. 그 어디에도 초불연에서 말하는 ‘마노(mano,意)’와 관계되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화두챙김에서 따 왔다는 챙김이라는 의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새김, 기억과 사유의 일치점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어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의 일치점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적 근거로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된다.”(S45.3)라는 문구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사유해야 함을 말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사띠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기억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띠가 산스크리트어 스므르띠(sk. Smrti)의 빠알리어 형태로 원천적으로 기억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초불연에서 사띠에 대하여 “초기경에 의하면 sati는 마노(mano,意)와 깊은 관계가 있다.”라고 말한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띠라는 말에는 마음과 관련된 어떤 어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사띠가 마음(mano,意)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니까야 각권 용어설명에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싸띠,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해제)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사띠라는 말에는 마음이라는 뜻이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챙김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사띠의 가장 첫번째 뜻이 기억(memory)임에도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에는 기억이라는 뜻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재성박사는 사띠라는 말에 대하여 새김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하는 일치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칠각지에서 염각지를 설명하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 것입니다. 또 전재성박사는 사띠를 새김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이란 의미도 갖고 있으므로 그 둘 다 의미를 지닌 우리말을 찾던 역자는 ‘새김’이란 가장 적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라고 설명했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현재 사띠번역어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대세인듯 합니다. 1987년 고요한소리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이 널리 확산된 듯 합니다. 또 한국불교 승가에서 사띠라는 말을 마응챙김으로 사용한 것도 원인이 있을 듯합니다. 선가의 화두챙김에서 챙김이라는 말을 따와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을 때 익숙한 용어이어서일 것입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승가에서는 거의 대부분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듯합니다. 스님들이 경전을 독송할 때 주로 초불연 번역서에 의지하는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초불연에서 번역된 술어 ‘잡도리하다’ ‘머문다’ ‘공부짓는다’라는 말 등과 함께 어색합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습니다. 사띠라는 말의 제1의가 기억(memory)임에도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에는 기억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띠라는 말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없음에도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있어야 할 기억은 빠져 있고 없어도 되는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소리에서 처음사용하고, 초불연에서 확산하고 있는 사띠번역어 마음챙김은 뜻이 불분명한 국적불명의 번역어라 볼 수 있습니다.
왜 기억이라고 번역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기억하고 사유해야 합니다. 만일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고 더구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엉뚱한 소리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위없는 진리를 언어로써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는 정등각자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만일 연각불이라면 법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마삼붓다, 즉 정등각자이기 때문에 깨달은 진리를 언어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경이나 게송, 응송 등 구분교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이 이에 해당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심오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법을 설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법을 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정등각자는 언어로써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했습니다. 깨닫기 어려운 법을 근기에 맞추어 설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전승되어 온 빠알리 경전입니다.
전승되어온 가르침은 팔만사천법문이라 하여 매우 방대합니다. 내용도 심오할 뿐만 아니라 평생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들은 것을 기억하여 후대에 전승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것을 잘 듣고 기억했다가, 조용한 곳에서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실천해서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올라간 것입니다. 만일 후대에 언어로써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다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이것”
경전을 무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전승되어온 빠알리경전을 믿지 못하겠다고도 말합니다. 심지어 편집되었다든가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부처님은 자신이 설한 것도 믿지 말라고 했다’는 등 근거 없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경전을 무시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소위 자칭타칭 도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책상을 탕탕치면서 “이것이라니까. 이것뿐이거든”라 합니다. 말로 설명을 못하니 소리를 들려 주면서 “이것이야, 이것”라 합니다. 마치 꿀먹은 벙어리가 맛을 설명할 수 없어서 몸짓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타령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책상을 주먹으로 탕탕치거나 종소리를 들려 주며 “이것뿐이거든, 이것이야”라 합니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특징으로 하는 선가에서는 ‘할’이나 ‘방’을 사용합니다. 깨달은 것을 언어로써 설명을 하지 못하니 고함소리를 지르거나 방망이를 사용하여 가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보기어렵고 심오한 진리를 언어로써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법을 펼칠 수 있는 정등각자와 깨달았어도 법을 설할 수 없는 연각불과 다른 점입니다.
삼마사띠는 바른기억(right memory)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전승된 방대한 가르침을 접하면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잘 들어서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여 전승한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하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설령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잘못 이해하면 역시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들은 것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띠의 제1의미는 기억입니다. 단지 마음챙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팔정도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특별하게 ‘삼마사띠(sammāsati)’라 합니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영어로는 분명히 ‘right memory’라 되어 있습니다. ‘바른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전재성박사는 ‘올바른 새김’이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바른 마음챙김’이라 번역했습니다.
삼마사띠가 바른기억임에 틀림 없습니다. 한자어로는 정념(正念)이라 합니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념은 사념처에 대한 것입니다. 사념처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에 대한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염처경이나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념처의 내용을 보면 모두 기억해야만 하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입니다.
신념처에 대하여 부처님은 32가지 부정상과 10가지 시체에 대한 관찰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수념처에 대해서는 세 가지 느낌에 하여, 심념처에 대해서는 오장애와 여섯감역에 대하여, 법념처에서는 오온과 칠각지와 사성제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기억해 놓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교학을 알지 못하면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념처에 언급된 가르침은 부처님이 설한 중요한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억하고 외우고 있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팔정도에서는 삼마사띠에 대한 설명으로서 사념처가 개략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염처경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부정관, 오장애, 오온, 칠각지, 사성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한번 듣고 흘려 버리면 실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강합니다.
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는가?
기억을 해도 바른 기억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삼마사띠라 한 것은 바르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기억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만일 제자가 가르침을 듣고서도 기억해 놓지 않는다면 외도사상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새김의 토대의 모음(S47)’에서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세존께서는 저에게 간략히 가르침을 설해주십시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간략히 가르침을 설해주십시오. 저는 분명히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의 뜻을 알고자 하며 저는 분명히 세존께 가르침을 계승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S47.3, 전재성님역)
제자는 청법하고 있습니다. 법은 청해야 설하기 때문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하면 피곤해 할 것입니다. 길거리 전도사들이 아무에게나 붙잡고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는 부처님에게 공손하게 법을 설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제자는 부처님에 청법을 합니다. 이는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으면, 그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라 했습니다. 반드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에게만 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청법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이여, 그대가 청정한 계행과 올바른 견해를 얻으면, 수행승이여, 그대는 계행을 의지하고 계행을 기반으로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지닌 세 가지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 (S47.3, 전재성님역)
부처님으 올바른 견해를 강조했습니다. 올바른 견해는 삼마딧티(sammādiṭṭhi)로서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정견이 있으면 사견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정견이라 한 것은 사견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올바른 것이지만 외도의 가르침은 빗나간 견해임을 말합니다.
정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견을 얻으면 사념처를 수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정념이 되어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팔정도는 모두 바름을 뜻하는 삼마가 붙습니다. 삼마딧티는 정견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뜻합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모두 사견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삼마사띠는 ‘바른기억(right memory)’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른기억이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만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흘려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사견을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정견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띠 번역어에 대한 재검토를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억하고 외우고 있지 않으면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만일 전승된 부처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가르침에 대하여 무지한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자칭타칭 도인이라 하지만 부처님가르침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할 때 “이것뿐이야, 이것뿐이거든”라며 책상을 탕탕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언어로써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법을 펼칠 수 있는 정등각자의 말을 잘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한 제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기억을 뜻하는 ‘새김’이 타당합니다. 삼마사띠라 했을 때 영어로 right memory라 하듯이, 정념의 번역어는 기억의 뜻이 실려 있는 ‘올바른 새김’이 타당합니다.
잘못 사용된 용어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1987년 고요한소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던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빠알리경전 용어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용어 어디에도 기억을 뜻하는 우리말의 뜻이 없을 뿐더러, 그 어디에도 마음을 뜻하는 빠알리어 뜻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개발된 명상수행법 MBSR에서는 Mindfulnes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MBSR에서는 그 어디에도 부처님 가르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명상기법만을 가져다가 심리치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마인드풀니니스를 마음챙김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에는 기억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는 뜻의 사띠와 맞지 않는 용어입니다.
마음챙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영어 마인드풀니스에서 마음과 화두챙김에서 챙김을 결합하여 만든 국적불명의 신조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사띠의 번역어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2017-05-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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