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법문, 전율의 법문, 감동의 법문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알고 나면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천상의존재들이 그렇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너무 오래 살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합니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죽음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되기 마련입니다. 천상의 존재들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 하게 될 것이고 삼계육도를 윤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르쳐 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사자의 경(Sīha sutta, S22.78)’ 입니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사자의 경을 보면 가장 인상적인 단어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라는 말입니다. 백수의 왕인 사자에 대하여 “모든 짐승들은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할 때 나열법과 점증법을 사용했습니다. 사자의 포효에 대하여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라 하여 나열 했는데 점차로 점증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사자후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Yepi te bhikkhave, devā dīghayukā vaṇṇavanto sukhabahulā uccesu vimānesu ciraṭṭhitikā, tepi tathāgatassa dhammadesanaṃ sutvā yebhuyyena bhayaṃ santāsaṃ saṃvegaṃ āpajjanti. Aniccāva kira bho mayaṃ samānā niccamhāti amaññimha, addhuvāva kira bho mayaṃ samānā dhuvambhāti amaññimha, mayaṃ'pi kira bho aniccā addhuvā asassatā sakkāyapariyāpannāti.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전재성님역)
천상의 존재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졌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천상의 존재들이 결코 영원히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물질은 이러하고 물질의 발생은 이러하고 물질의 소멸은 이러하다.”(S22.78) 하여, 오온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원리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천상의 존재들 역시 소멸되고 말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온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다면 또 다른 존재로 재생할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너무 오래 살고 너무 행복하다 보니 세상은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또한 천상의 존재들은 나라는 개체가 있어서 영원히 즐겁게 오래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면서 자아와 세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설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천상의 존재들은 쇼크 받은 듯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표현 했습니다.
왜 ‘감동’인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은 서로 다른 말입니다. 부처님이 무상과 무아의 설법을 하자 천상의 존재들이 처음에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두려움은 전율로 바뀌었습니다. 전율이라는 말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몸이 벌벌 떨림을 말합니다. 점증되고 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감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두려움에서 전율로, 전율에서 감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극적인 변화 입니다. 그렇다면 천상의 존재들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두려움에서 감동으로 바뀐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bhayaṃ santāsaṃ saṃvegaṃ āpajjanti: Srp.II.288에 따르면, 거룩한 님에게서 이러한 자각은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체험하는 ‘지혜에 의한 감동’이지만, 다른 신들은 무상을 깨닫고는 정신적 전율로서 두려움을 체험하고 강력한 통찰을 할 때에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을 체험한다. (성전협 상윳따3권 245번 각주, 전재성님)
모르면 갑갑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즐겁게 살 것 같은 천신들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극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 느낍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입니다. 설법이 진행될수록 두려움은 윤회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악처에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두려움에 몸을 떠는 전율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끝나 감에 따라 감동으로 바뀝니다.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서 벗어났을 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립 것입니다. 불사의 가르침을 알았기 때문에 감동한 것이라 봅니다.
완전히 다른 번역을 보고
천상의 존재들은 부처님의 무상과 무아에 대한 설법을 듣고 두려움과 전율에서 감동으로 극적으로 바뀝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체험하는 ‘지혜에 의한 감동’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 번역과 다릅니다. 각묵스님은 빠알리 구문 “bhayaṃ santāsaṃ saṃvegaṃ āpajjanti”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고 전율에 빠진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전재성님의 번역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와 다른 것입니다. 각묵스님은 ‘두려움’, ‘공포’, ‘전율’이라 하여 모두 두려움과 관련하여 번역했지만, 전재성님은 ‘두려움’, ‘전율’, ‘감동’이라 번역했습니다. 특히 세 번째 단어, 전율과 감동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첫 번째 빠알리어 ‘bhaya’는 ‘fear; fright’의 뜻으로 두 번역자 모두 ‘두려움’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두 번째 빠알리어 ‘santāsa’는 ‘fear; trembling; shock’의 뜻으로 전재성님은 ‘전율’로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공포’로 번역해서 모두 같은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빠알리어 ‘saṃvega’는 ‘anxiety; agitation; religious emotion’의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감동’으로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전율’로 번역하여 완전히 달리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찾아 보았습니다. 관련 구절은 “they are for the most part filled with fear, a sense of urgency, and terror,[saying]:” 입니다. 이는 “여래의 설법을 듣고서 대부분 두려움, 긴박한 느낌, 긴급함의 감정, 공포를 느낀다”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빅쿠보디는‘saṃvega’에 대하여 ‘terror’로 번역 했는데 이는 각묵스님의 번역어 ‘공포’와 일치 합니다.
빠알리어 ‘saṃvega’에 대하여
빠알리어 ‘saṃvega’에 대하여 ‘terror(공포)’의 뜻으로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두려움 뜻하는 두려움, 전율, 공포가 연달아 세 개 있는 것은 단순한 나열법으로 점증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두려움, 전율, 감동이라 번역한 것은 천상의 존재들이 설법을 듣고 심리적 상태가 변화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전에는 두려움을 느꼈으나 설법이 다 끝나자 감동의 물결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감동을 뜻하는 빠알리어 ‘saṃvega’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religious emotion’라 하여 “caused by contemplation of the miseries of this world”라고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참한 세계에 대한 관조로 인하여 야기된 종교적 감동을 말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이 두려움에서 감동으로 극적으로 변한 것은 지혜가 성숙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ñāṇabhaya)’이라 합니다. 이를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에서는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bhayatu paṭṭhāna-ñāṇa)’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청정도론 설명을 보면 “모든 상카라들의 부서짐과 사라짐과 무너짐인 소멸을 대상으로 가진 무너진에 대한 관찰”의 결과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빅쿠보디와 초불연에서는 ‘saṃvega’에 대하여 공포(horror)의 뜻으로 번역한 듯 합니다.
빠알리어 ‘saṃvega’는 공포를 뜻하는 fear나 thrill의 뜻도 있지만 ‘religious emotion(종교적 감동)’의 뜻이 더 강합니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종교적 감동의 뜻으로 사용된 경을 보면 ‘D.III,214; A.I,43; II,33, 114; S.I,197; III,85; V,130, 133; It.30; Sn.935; J.I,138’가 있습니다. 이 중에 ‘A.I,43’을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커다란 정신적 감동으로 이끈다.”(A1.597) 라 하여, ‘saṃvega’에 대하여 ‘감동’의 뜻으로 전재성님은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 대림스님은 “절박함으로 인도한다.”라 하여 ‘절박함’으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saṃvega’의 뜻은 이 세상의 불행에 대한 통찰로 야기된 정신적 감동을 뜻합니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eight objects inducing emotion: birth, old age, illness, death, misery in the apāyas, and the misery caused by saṁsāra in past, present & future stages”라 설명 되어 있습니다. 이로 본다면 ‘saṃvega’에 대하여 공포로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나열법이면서도 점증법으로, 특히 마지막 나오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시종일관 두려움, 전율, 공포로 되어 있어서 부처님의 설법이 진행됨에 따라 청중들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가르침에 대하여 오로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듯합니다.
인격적 변화가 수반되는 법문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인격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설법의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처음에는 쉬운 가르침에서부터 점차 어려운 가르침으로 나아 가듯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처음에는 윤회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을 느끼지만 개체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알게 됩니다. 그럴 경우 가르침에 공포를 느끼기 보다 환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번역했을 것입니다.
Yadā buddho abhiññāya
dhammacakkaṃ pavattayi
Sadevakassa lokassa
satthā appaṭipuggalo,
“초월적 능력을 깨달아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니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계에서
스승과 비교할 사람 없어라.
Sakkāyañca nirodhañca
sakkāyassa ca sambhavaṃ
Ariyaṃ 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개체의 소멸과
개체의 발생이 있나니,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야말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네.
Yepi dīghāyukā devā
vaṇṇavanto yasassino
Bhītā santāsamāpāduṃ
sīhassevitare migā.
장수하는 신들은
아름답고 찬양받지만
사자 앞의 짐승처럼
두려워하고 전율했네.
Avītivattā sakkāyaṃ
aniccā kira bho mayaṃ
Sutvā arahato vākyaṃ
vippamuttassa tādinoti.
이미 해탈하신 그와 같은
거룩한 님의 말을 경청하니
개체를 초월하지 못하여
무상한 것은 실로 우리네.”(S22.78, 전재성님역)
2017-02-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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