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언하대오를 꿈꾸는 자들에게, 단멸론으로 귀결되는 가짜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8. 12:39

 

언하대오를 꿈꾸는 자들에게, 단멸론으로 귀결되는 가짜불교

 

 

가짜뉴스

 

이 글을 많이 퍼뜨려 주세요.” 종종 단체카톡방에서 보는 글입니다. 극우사이트에서 만들어진 글이 단톡방에 무차별적으로 유포 되는 형식 입니다. 대게 보수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악의적이고 왜곡된 내용이 대부분 입니다.

 

연일 JTBC에서 가짜뉴스 유통경로를 보도 하고 있습니다. 현시국과 관련하여 극보수층에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에스엔에스를 통하여 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가짜인 것도 모르고 믿는다는 것 입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사실로 믿게 됨을 말 합니다.

 

 

 

 

 

 

글을 쓰면서 늘 다시 확인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혹시 올린 글에 오류가 있는지 여러 번 살펴 보는 것 입니다. 최종적으로 다섯 번은 읽어 보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잡아 냅니다. 이유는 간단 합니다. 글에 신뢰성을 부여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일 오자와 탈자가 있다면 하찮게 볼 것입니다. 가장 염려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내용 입니다. 검색을 하여 확인 하거나 근거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만족 했을 때 글을 올립니다.

 

가짜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은 범죄행위 입니다. 그에 앞서 양심의 문제 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유포한다거나 사실을 왜곡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한번 가짜뉴스로 판명되면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글을 퍼 나른 사람역시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가면 갈수록 반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뻔뻔하게 거짓말 하는 후안무치의 사람들을 따라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보수신문의 보수논객은 자신의 칼럼에서 태극기 집회를 보면 걱정이다. 이 땅의 보수를 정말 사라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라고 썼습니다.

 

가짜불교

 

뉴스에도 가짜뉴스가 있듯이, 불교에도 가짜불교가 있습니다. 가짜불교를 말하는 자들은 양심불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낯 두껍게 거짓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짜불교를 말하는 자들은 경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논서도 믿지 않습니다. 율장은 거론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따나 마음과 뜻으로만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에 따라 언하대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짜불교를 말하는 자들에게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으로 본 것이나 귀로 들은 것 외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존합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라 합니다. 현존을 말합니다. 종종 탁자를 주먹으로 탕탕 치는 것도 소리로 드러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보고 듣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들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냄새나 맛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식하는 것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드러나 현존하는 것만이 진리라 한다면 감각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짜불교를 말하는 자들의 또 하나 특징은 윤회를 부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감각적으로 인지 되는 것만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이후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고, 죽어서 돌아 온 자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윤회는 지금 이순간 찰라생 찰라멸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를 삼세로 확장하면 삼세양중인과의 윤회가 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윤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유튜브에 이중표교수의 중론강좌가 시리즈로 올려져 있습니다. 한 강좌의 말미에 어떤 사람이 윤회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이중표 교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중론에도 이렇게 나와요. 윤회가 있다면 윤회를 벗어날 필요가 없겠죠? 윤회가 있으면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윤회를 벗어나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해요.

 

부처님께서 윤회라고 하는 것은 무얼까요? 윤회라는 말이 불경에도 분명히 나오죠? 윤회라고 번역한 말이 삼사라인데, 삼사라는 육도를 돌아다닌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은 회전한다, 윤전한다, 돈다는 뜻이에요.

 

다람쥐가 체바퀴 돌듯이 하나의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거에요. 지금 우리 중생들의 삶이라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적 구조속에서 자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 없이 반복됩니다. 반복되는 가운데 사실은 변화가 일어나요. 아까 나하고 지금 나하고는 틀리잖아요. 어제의 나하고 오늘의 나하고는 틀리잖아요. 이런 큰 변화를 시간적으로 배대 해 놓으면 마치 나란 놈이 변해서 다음 세상에 갈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고.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윤회라고 불렀다면 그걸 깨야 되겠지요.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거에요.

 

윤회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음 세상에 간다고 누가 윤회를 벗어나겠어요? 윤회가 실질적으로 있다고 한다면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를 벗어 날 수 있는 수행도 있을 수가 없겠지요? 윤회자체가 아예 없다고 한다면, 윤회를 벗어 나기 위한 수행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 불교 수행을 뭣 때문에 해야 되요? 예를 들자면 꿈속에서 여러 분들이 꿈을 꿀 때 나타나는 현상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꿈을 꿀 때만 있지. 꿈을 없다고 해 버리면 꿈을 부정하는 것이고, 꿈을 있다고 하면 꿈을 현실로서 받아 들이는 것이 되잖아요. 윤회는 꿈처럼 있는 거에요. 지금 중생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윤회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윤회속에서 빠져서 삽니다.

 

천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독교인들한테 물어 보세요. 없다고 하나. 그들은 천국을 가기 위해서 지금도 날마다 교회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없다고요? 그것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인도 당시 사람들이 윤회설에 빠져 있어요. 부처님은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많은 해악이 있다, 이것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이걸 윤회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의미에요. 그런데 둔갑해가지고 인제는 부처님이 윤회를 이야기해가지고 윤회에서 벗어나려는게 수행이다고 해버리는 거에요.

 

있다 없다는 개념이에요. 윤회라는 말이 있으니까 우리는 있다 없다 말을 하는 거에요. 부처님께서 유무중도를 말씀 하셨어요. 있냐 없냐 하면 항상 싸움만 벌어져. 그런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윤회를 벗어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금강경에 일체유위법하며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고 나오죠? 윤회가 바로 꿈 같은 거에요. 그래 꿈깨자는 이야기라니까. 불교가. 그래서 윤회가 있습니다. 어떻게 있냐? 꿈처럼.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박수)”

 

(이중표교수, 20161014 니까야로 읽는 중론1 4 2)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꿈의 비유를 들어 윤회를 설명 했습니다. 우리 들이 매일 꾸는 꿈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지만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대게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 역시 강의 말미에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라 하여 박수를 받았습니다.

 

윤회가 바로 꿈 같은 거에요

 

현실이 꿈과 같은 것이라면 현실이 꿈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윤회도 개념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윤회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윤회가 있다고 합니다. 윤회라는 말이 없다면 윤회는 없는 것이 됩니다. 마치 누군가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있는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귀신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언어는 개념화 된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는 언어적 구조속에서 자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 없이 반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이라는 말이 있어서 천국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언어로 개념화 된 것은 모두 부정됩니다.

 

모든 것을 언어적으로 개념화 된 것으로 보면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 됩니다. 물론 열반도 없습니다.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꿈만 깨면 됩니다. 현실이 꿈속 같은 것으로 보아 언어의 개념에서 해방되면 깨닫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  여몽환포영으로 시작 되는 게송을 들며 윤회가 꿈과 같은 것이라 합니다. 윤회는 꿈속에나 있는 것이라 하여 윤회가 바로 꿈 같은 거에요라 합니다. 꿈을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말장난하는가?

 

이중표교수는 윤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윤회가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매순간 찰라생찰라멸하는 현상만 있을 것입니다. 이를 삼세로 확장하면 삼세양중인과 되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천국이라는 말이 있지만 개념에 지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고 실제로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를 불교에도 적용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부정됩니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공의 논리로 부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론에 따르면 있다라고 말하면 상견에 떨어지고, ‘없다라고 말하면 단견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있다라는 말과 없다라는 말에 걸려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중표교수가 윤회라는 말이 있으니까 우리는 있다 없다 말을 하는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용수가 말하는 중도와 부처님이 말하는 중도는 다릅니다. 용수는 팔불중도라 하여 공()의 입장에서 설명했습니다. 비록 용수가 연기를 말하지만 그것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iti imasmi sati ida hoti)”라는 상호의존적 연기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상호의존적 연기 뿐만 아니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 하여 조건발생적 연기를 설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若有此卽有彼)”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라 하여 조건발생적 연기를 모두 만족합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서 중도에 대한 설명을 보면 반드시 십이연기가 뒤따릅니다. 그러나 공으로 설명되는 중도사상에서는 십이연기를 볼 수 없습니다. 있다면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것은 상견과 단견을 논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삿된 견해를 부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중도가 바로 십이연기입니다. 그래서 유무중도, 단상중도 등 모든 중도사상에서는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하여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입니다. 그러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의 중도는 단지 있음과 없음에 대한 개념 타파이고, 연기라는 것도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단멸론으로 귀결되는 가짜불교

 

불교에도 가짜불교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불교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판별해야 할까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삼법인이라는 잣대입니다.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이 실려 있으면 불교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초기경전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초기경전과 일대일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초기경전과 어긋나게 말하면 가짜입니다. 또한 초기경전에 없는 것을 말하면 역시 가짜입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가짜뉴스가 난무하여 커다란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유튜브 시대에 가짜불교가 유통되고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자로 개념화 된 것을 타파하자고 말하면서 책을 내는가 하면 입으로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동시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일체 업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업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단멸로 귀결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 하여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으로 설명했을 때, 몸과 마음 역시 상호의존적으로 연기된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감각적 인지에 따른 현상만을 말하는 현존론자들에게 있어서 무아는 단멸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기에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이를 무아로 설명합니다. 

 

상호의존적 연기 하나만 채택 했을 때 단멸론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과 물질이 상호의존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물질이 멸하면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으로 연기를 설명하면 상견이나 단견에 빠지지 않습니다.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처럼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하대오를 꿈꾸는 자들에게

 

현존을 말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단멸론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항상 언어와 문자로 된 개념을 부정하여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업도 없고, 내생도 없고, 윤회도 없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도 없는 것이 됩니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튜브에는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교수도 있고 스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경전을 볼 필요도 없고 따로 교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힘들게 다리 꼬고 앉아서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깨달을 것이라 합니다. 오늘도 그들의 입만 바라보며 언하대오를 꿈꾸는 사람들은 꿈을 깨기 바랍니다.

 

어느 보수논객은 극보수진영에서 가짜뉴스를 생산하여 유포하는 것에 대하여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태극기 집회를 보면 걱정이다. 이 땅의 보수를 정말 사라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라고 우려했습니다. 오늘날 유튜브에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역시 가짜불교를 양산해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유튜브를 보면 걱정이다.

이 땅의 불교를 정말 사라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라고.

 

 

2017-02-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