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작용일 뿐입니다. 그러할 뿐입니다” 비법을 말하는 자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 13. 23:37

 

작용일 뿐입니다. 그러할 뿐입니다비법을 말하는 자들

 

 

작용일 뿐입니다. 그러할 뿐입니다.” W거사의 말입니다. 유튜브동영상으로 본 것입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놓고 있는데 그 중의 한사람입니다.

 

W거사의 동영상을 보면 교리를 공부할 필요도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러함을 알면 그뿐이라 합니다. 주로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이런 현상은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이것, 저것, 그러함 등입니다.

 

W거사 역시 대명사를 사용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무아에 대하여 단지 마음의 작용이라 합니다. 이는 행위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교학을 근거로 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 대명사로 처리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말한 것처럼 보입니다.

 

 

 

 

 

 

W거사에 따르면 모든 것이 작용이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살인도 역시 작용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로 설명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단지 작용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사람이 살인이나 살생을 하는 것도 작용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무아라 하니 살생한 행위는 있으나 작자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 외도사상 중의 하나인 칠요소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칠요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밴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다.”(S24.8,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육사외도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입니다. 칠요소설이라 하여 지, , , , , , 영혼 이렇게 일곱 가지 요소로 존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칠요소설은 절대적인 도덕부정론이라 합니다. 기본적으로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해를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밴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 문장은 죽이는 자도 없고, 죽이게 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없고, 듣게 하는 자도 없고, 알려진 자도 없고, 알리는 자도 없다. 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밴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할 뿐이다.”(614번 각주) 라 했습니다. 초불연 번역서에는 각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작용으로 만 보았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함이 없는 함으로 설명합니다. 그대로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애써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W거사는 수행하는 것이 힘만 들고 지겹다라고 합니다.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함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대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개념이고 관념이기 때문에 관념만 타파 하면, 분별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드러난 현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 대명사로 말하는 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은 교리를 배울 필요도 없고 수행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사성제나 팔정도 등 근본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관념이라 합니다. 종종 반야심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경행이나 좌선 등 사마타나 위빠사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쓸데 없는 짓이라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하에 대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깨달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법문을 듣는 형식입니다. 그들끼리 집중수행도 하고 카페와 같은 커뮤니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율보시 형식으로 돈을 모습니다. 더 나아가 수행처 건립을 위한 모연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고장난 녹음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매번 똑 같은 이야기 입니다. 언어와 문자된 개념이나 관념을 타파하라고 하면서 말로서 설명하고 책을 냅니다. 언어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면서 언어로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언젠가는 깨칠 수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과거 부처님이 수 없이 출현한 것도 정법이 변질되고 훼손되어 도중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열반 했을 때 한 나이든 수행승이 훈계하는 스승이 없어 졌다.’라고 말한 것을 마하깟사빠 존자가 들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껴 결집을 주도 했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이 변질 되어 정법이 사라질 것을 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하 깟사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하 깟싸빠]

“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계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Vin.II.285, 율장소품,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가르침과 계율이 내가 가고 난 후에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라 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담마 아닌 것(adhamma: 非法)’이 판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 오로지 작용뿐이라 하는 자들은 모두 비법을 말하는 자들입니다. 가르침을 가르침이라 말하지 않고 이것또는 이것뿐’, ‘그러한 것등 대명사로 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들입니다.  

 

 

이것 이외에 이교들이야말로

삿된 견해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은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가르침에 밝지 못하다.” (Thig.184)

 

 

2017-0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