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모든 것이 완전함에도” 무상사 대봉스님 서울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 20. 11:52

 

모든 것이 완전함에도무상사 대봉스님 서울법문

 

 

눈길을 걸으면서

 

눈이 왔습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자 세상은 눈으로 가득합니다. 가는 눈발이 몰아치는 것이 비가 오는 것 같습니다. 우산을 쓰고 학의천으로 향했습니다. 조금 걷자 추위를 견딜 수 없어서 목도리를 머리에 메고 자크를 위까지 올리니 중무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는 이미우이(Imee OoI)라따나숫따를 터치 했습니다. 일터로 가는 길에는 늘 라따나숫따노래를 듣습니다. 빠알리어로 된 17개의 게송을 음악으로 만든 것인데 13분 걸립니다. 두 번 연속해서 들으면 일터에 도착합니다.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하고 우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학의천을 걸었습니다. 어둠속에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며 발자국을 남깁니다. 게으른 자들은 그 시각에도 자고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각에 혼자서 학의천을 걸을 때 승리자가 된 듯 합니다. 차를 타고 갈 수 있음에도 굳이 걸어 가는 것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저절로 나는 것이지만, 그 생각을 사유하여 하나의 글로서 완성 했을 때 그날 해야 할 일을 다 한 듯 합니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어떤 이는 강박관념비슷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게으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씁니다. 게으른 자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기에 바쁩니다. 즐기는 것에 게으름은 없습니다. 게으른 자가 목표를 정해 놓지만,  게으른 자는 게으름을 피며 차일피일 미룹니다.   

 

수행위주의 법회모임

 

어제 저녁에는 종로에 갔었습니다. 종로 2가 조계사 인근 두산위브빌딩에 있는 열린선원입니다. 요일별로 법회나 강좌 등이 있어서 열린선원이라 합니다. 누군가 오피스텔 방을 빌어서 공유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목요일은 관음선종서울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일종의 무상사 분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임은 저녁 7시부터 입니다오진법사와 일화법사가 지도합니다. 오진법사는 폴란드인으로 숭산스님이 인가한 재가법사입니다.

 

지인의 소개로 지난해 가을 무상사 서울분원을 몇 차례 나갔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봉스님이 오신다 하길레 뵈러 갈 겸 해서 나갔습니다. 그런 대봉스님은 이번이 네 번째 입니다. 인사를 하니 이제 잘 알아 봅니다. 확실히 구면이 된 듯합니다.

 

무상사는 일반 사찰과 다른 것은 철저하게 수행위주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찰에서는 천수경 등 긴 의식과 함께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거나 관음정근 등 기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외국인 수행자위주의 무상사에서는 좌선을 하는 등 수행위주’의 불교를 합니다. 이는 백번 천번 의식을 행하는 것 보다 한번 앉아서 고요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좌선이 끝나면 공안인터뷰라 하여 법사로부터 질문에 대한 법문을 듣기도 합니다.

 

무상사는 외국인 수행도량입니다. 관음선종이라는 명칭이 말해 주듯, 선종이긴 하지만 한국불교의 선종과는 약간 다릅니다. 한국선종에서는 비구중심이지만, 관음선종에서는 출재가의 구별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실력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신적 능력입니다. 공안인터뷰를 하여 인가를 받으면 출재가 구분 없이 선원을 열어 지도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공안인터뷰를 하여 지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100명 가량 모였는데

 

무상사 서울 분원은 인가를 받은 재가법사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 19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이 서울에 올라서 법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울모임에 약 100명 가량 모였습니다. 대봉스님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알려져 있음을 말합니다.

 

 

 

 

 

열린선원 작은 오피스텔이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공간이 비좁았습니다. 신발장이 부족하여 복도에 신발이 죽 나열 되어 있습니다. 참석자 중에는 외국인들도 다수 있습니다. 이날 대봉스님의 법문은 영어로 진행 했습니다. 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법문할 수 있을 텐데 영어로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각스님은 한국말을 배워서 자유롭게 법문하기도 합니다.

 

이날 통역은 일화법사가 맡았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에 살았기 때문에 걸림이 없습니다. 대봉스님이 영어로 법문해도 곧바로 한국어로 말해 주기 때문에 알아 듣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를 곧바로 알아 듣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날 온 사람들 중에는 대체로 전문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삽사십대로서 비교적 젊은 층입니다. 이런 현상은 노보살 위주의 한국불교와 대비됩니다. 아마 수행위주의 불교에 관심을 가져서 일 것입니다.

 

 

 

 

 

 

 

대봉스님은

 

대봉스님이 법문한 것을 메모 해 두었습니다. 아마 메모한 사람은 본인 한사람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메모 하다 보면 잘 경청하게 됩니다.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 내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한 줄도 적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변이야기나 신문에서 본 이야기 등 가십이나 잡담 수준의 법문은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 준비 된 법문은 적을 것이 많습니다. 통역해 준 말을 받아 적다 보니 9페이지 되었습니다. 이는 7시부터 920분 까지 2시간 20분 동안 쉼 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봉스님 소개가 있었습니다. 대봉스님은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입니다. 숭산스님과 인연 맺은 것은 1978년의 일이라 합니다. 대봉스님은 출가 전에는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마음의 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정신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대봉스님이 출가한 것은 1984년이라 합니다. 1999년 숭산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고 하는데 인가를 받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2000년대는 숭산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계룡산 부근에 숭산국제선원을 건립했습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무상사라고도 합니다. 현재 스님은 무상사 조실로 있습니다.

 

좋은 과일을 찾을 것인가?”

 

대봉스님은 ‘2017년을 최고의 해로 만들자라는 주제로 법문을 했습니다. 먼저트럼프에 대해 얘기 했습니다. 내일이면 트럼프가 취임하는 날이라 하며 아무도 그분이 어떤 일을 할 줄 몰라요. 또 그분 자신도 어떤 일을 할지 몰라요라 했습니다. 트럼프를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올 한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재물과 사회적 지위라 합니다. 동물에게는 먹는 것, 잠자는 것, 섹스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세 가지는 인간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세 가지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더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욕락입니다. 사람들은 식욕, 수면역, 성욕, 재물욕, 명예욕으로 살아 갑니다.

 

오욕락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에 오욕락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욕락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오욕락 추구가 생노병사의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대봉스님은 좋은 과일을 찾을 것인가?”라며 법문했습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화려한 꽃은 10일 밖에 가지 않습니다. 꽃이 지면 열매가 맺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다 익으면 이제 썩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씨밖에 없습니다. 꽃도 무상한 것이고 열매도 무상한 것입니다. 오욕락에 대하여 꽃이나 열매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씨는 남아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고, 열매가 익으면 썩지만 수 많은 씨를 남깁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재생하는 것에 대하여 씨앗들이 발아 하는 과정으로도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른 원인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생의 상속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를 불일불이(不一不二 또는 不一不異)로도 설명합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전 생의 몸과 마음은 사라졌지만, 재생을 위한 정보는 재생연결식에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에 재생하는 것에 대하여 씨앗이 발아 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씨는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발아 합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A3.76)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식은 종자이고라는 말은 재생연결식이 씨앗과 같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 결과 생겨났음을 말합니다. 오욕락의 삶을 살게 된다면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함에도

 

대봉스님은 2시간 20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록 영어이긴 하지만 짧은 영어실력으로 드문드문 알아 듣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에 의지하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아 듣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통역을 잘 해 주어서 듣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법문 중에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하여 원함집착분별로 설명했습니다. 이중에 인상적인 말이 원함입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문제라 합니다. 우리는 원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육신도 원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 때문에 다 필요 없음에도 원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갖추어져 있음에도 배우자를 찾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찾고, 여자는 남자를 찾는 것입니다. 둘이 합쳐서 하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원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 아기가 자라서 또 아기를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손자가 생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이고 다 필요가 없음에도 원함으로 인하여 배우자를 찾고, 자식을 만들고, 자식이 자식을 만들어 속된말로 새끼치게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원하면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집착입니다. 그리고 존재를 생겨나게 합니다. 결국 고통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를 12연기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욕망에 대하 갈애가 생기면 그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납니다. 또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게 합니다. 그런데 존재는 생노병사를 겪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봉스님의 법문을 원함과 집착에 대한 법문을 들어 보면 십이연기를 풀어서 재미 있는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분별입니다. 원함, 집착과 함께 분별도 고통의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순간순간 알아 차려야 함을 말합니다.

 

당신은 무엇하고 있습니까?”

 

1시간 10분 가량의 법문이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이 있었습니다. 질의 응답시간 역시 1시간 10분 가량 되었습니다. 모두 합하여 2시간 20분 동안 쉼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여기 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 했습니다. 질문자중에는 외국인도 있었습니다.

 

 

 

 

 

 

 

젊은 외국인 여성은 스님에게 깨달음과 관련하여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봉스님은 “What are you doing?(당신은 무엇하고 있습니까?)”라며 역질문을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질문자는 간단한 설명을 듣고 갑자기 한발을 들어 바닥을 하고 쳤습니다. 이런 광경을 종종 봅니다. 법사로부터 역질문을 받았을 때 방바닥을 탁 친다는 것은 일종의 알았습니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역질문을 이해 했다는 것을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선종에는 할과 방이 있습니다. 고함소리와 몽둥이라는 뜻입니다. 스승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제자에게 할하고 고함질러 깨닫게 해주고, 심지어 몽둥이질로 알려 줍니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할과 방을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외국인 학자는 반문자주의반지성주의라고 약간은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을 간화선 세미나에서 본 바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하여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또 깨달음에 대하여 문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꿀맛은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듯이, 깨달음 역시 체험 해 봐야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 중의 하나는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나 문자에 메이지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개념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했을 때 깨달음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깨달음이라는 말이 있어서 깨달음이라 합니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라는 말이 있어서 나라고 합니다. 말로만 있는 것일 뿐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분별하는 모든 것은 단지 개념이고 관념에 불과함을 말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몽둥이라 머리를 한대 맞았을 때 아플 것입니다. 바로 그 아픈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다른 개념이 들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그 아픔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픔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픔은 단지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있다면 아프다라는 동사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이 세상에 대하여 명사로 설명하면 어긋난다고 합니다. 있다면 동사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방망이로 한대 맞아 아픔을 느꼈을 때 아이구 아파!”라고 알아 차렸을 때만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지만 태어남도 죽음도 없습니다. 모든 개념화 된 명사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있다면 조건 발생하여 일어 나는 행위만 있을 뿐입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를 말로 설명하지 않고 고함소리와 몽둥이로 보여 주는 것이 할과 방이라 합니다.

 

몽둥이로 맞은 자는 맞을 짓을 해서 맞은 것입니다. 깨달음이 무어냐고 분별망상 해서 알려 준 것입니다. 아픔을 느낄 때 분별망상은 사라지고 아픔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픈 것도 그때 뿐입니다. 조건이 바뀌면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따라서 할과 방을 하는 것은 분별하고 망상하는 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한 자비의 죽비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선종 법회에서 공안인터뷰 할 때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질문자가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소리나게 치는 것입니다. 이를 이제 알았습니다라 받아 들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해 했다는 액션입니다. 무상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장면입니다.

 

한국불교는 살아 있습니다

 

오랜 만에 관음선종 무상사 서울분원에 있었습니다. 비록 외국인 스님이긴 하지만, 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어 받은 선사의 영어법문이 이채롭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언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영어로 말해도 선사들이 하는 말과 조금도 다름 없습니다. 스님의 법문에는 조사스님들 이야기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숭산스님과의 일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숭산스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세계에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외국인 제자들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 제자의 제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수행위주의 선원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세포분열하듯이 자가증식하는 형국입니다.

 

해마다 안거철이 되면 수 많은 외국인들이 무상사를 찾는다고 합니다. 지인에 따르면 그들은 지식인들로서 대체로 청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는 출재가 구분 없이 수행위주의 불교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네티즌은 현각스님에게 한국불교는 죽었습니다라 했을 때, 현각스님은 자신있게 아닙니다. 무상사에 가면 한국불교는 살아 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 했을 것입니다.

 

 

2017-0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