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장은 보조자료? 빠알리삼장은 정립(鼎立)된 것
가장 안정된 자세, 정립(鼎立)
흔히 빠알리삼장이라 합니다. 삼장을 순서대로 말하면 율장(Vinaya), 경장(Nikaya), 논장(Abhidhamma)입니다. 빠알리삼장은 B.C3세기 아소까대왕 당시 완성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장은 이미 부처님 당시 체계화 되었습니다. 마치 세 개의 다리가 있는 향로가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듯이, 율장과 경장과 논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탱하는 세 개의 다리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미담마논장은 빠알리삼장을 구성하고 있는 한축입니다.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는 향로는 가장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어로 ‘정립(鼎立)’이라 말합니다. 이를 영어로 ‘a triangular position’라 하는데, 네 개의 다리보다 더 안정된 자세라 합니다. 그런데 빠알리 삼장중에 한축인 논장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빠알리삼장에서 논장을 부정하면 율장과 경장만 남습니다. 두 개의 다리로는 향로를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댓글을 받았는데
아비담마논장을 부정하는 학자와 스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블로그에서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안녕하세요?
해피법당 법우회장 꾸살로(해피투게더)라고 합니다.
저희 근본경전연구회 - 해피법당 법우님들 일부가 이 블로거 주인장께서 남기신 글에 비분강개하길래 왜 그러나 싶어서 이곳을 들러봤습니다.
"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의 토대가 되는 공부의 기준과 12연기에 대한 이곳 주인장님의 비난이 사실과 많이 달라서, 그래서 법우님들이 황당해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이군요.
부처님께서는 대화의 방법으로, 사실에 입각해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게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고, 바르고 고운 말로 쓸 것이며. 비난의 의도로 하지 말라 하셨으니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라는 무한공간에서 사실이 아니거나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입각해서 남을 비난한다면 참으로 몸쓸 악업만 쌓을 뿐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먼저 저희는 한국테라와다불교 소속입니다.
이곳 주인장이 우리 교단 소속이라면 상가에서 어떤 결정이 있었고 일부 재가자들에게 어떤 오해들이 있었는지는 잘 아실 것이지만, 이곳 주인장의 윗 글을 보아서는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에 저희 교단에 속한 분은 아닌듯 합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고 싶고, 근본경전연구회의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찾기'에 대한 궁금함이나 의문점이 있다면 언제라도 저희 법당을 방문해주시면 반갑게 맞이하고 법담을 나눌 것입니다.
해피법당은 가난하고 어려운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제작한 교재는 전국 어디서든 필요한 분이 있다면 무상으로 보내드렸으며 이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고, 법당의 재정문제등 살림살이는 전적으로 법우님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우리들은 오직 한 분의 스승이신 석가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공부하여 왔답니다.
저희가 머무는 법당이 초라하였듯이, 오늘날 한국 불교가 외도에 밀려 쇠퇴 일로에 있고 그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되어갈 것임은, 많은 어린이들이 뜻도 모른채 주말마다 교회로 발길을 향하는 것을 보면 명약관화하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나라의 불교가 외도의 가르침과 유사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일 것인데, 그럴수록 우리 불자들은 더욱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에 다가서야만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입에 칼을 물고 서로를 해코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근본경전연구회 - 해피법당은
①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직 경과 율을 기반으로 하고 논장을 보조자료로 하되 경과 율에 반하는 부분은 경과 율에 의지하며,
② 부처님께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인 논쟁거리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현실을 꿰뚫어 중(中)에 의해 법을 설하셨기에 12연기를 괴로움을 일으키며 5도 윤회하는 중생의 삶으로 풀이하고,
③ 또한 법우님들이 한푼 한푼 내시는 보시에만 의존하고, 법을 전함에 있어서 다른 어떠한 명목으로도 금품을 받지 않기에 많은 법우님들의 보시를 권장하며, 그러한 보시의 공덕이 최대화 될 수 있도록 재가자들은 해피스님께 언제나처럼 계행을 올곧게 세우고 교학과 수행에 열중하기를 강권하고 있으며, 해피스님 또한 부처님의 제자로서 어긋남이 없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며 지내고 있고, 해피법우님들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2년전부터 광주BBS불교방송과 부산BBS불교방송 등에서 정기적으로 설법을 해주실 것을 청하였고 서울BBS불교방송국 등에서도 간간히 해피스님을 소개해준 덕분에 이제 겨우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은 세간에 이름을 알리고 있으나 항상 공부하고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법우님들의 가정에 왜곡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해피투게더)
필명 해피투게더님이 남겨 놓은 글입니다. 법우님은 해피스님의 가르침에 왜곡하는 글을 쓰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새롭게 해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구업’짓는 행위라 합니다.
붓다고사 보다 더 위대한?
해피스님의 유튜브강연을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을 알리고자 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장을 인정하지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율장과 경장과 함께 세 개의 축을 이루는 논장을 부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너뜨리는 행위와 다름 없습니다. 비록 논장을 보조 자료로 활용한다고 하지만 다음과 같은 글은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은 멸희론소[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서 심(心)의 형성작용을 잘못 이해해 심(心)의 자리매김에 오류를 초래합니다. 이후 1600년 동안 심(心)은 제 자리를 잃고, 이것은 불교 교학의 오류로 나타납니다.
해피법당은 '니까야로 푸는 니까야'의 공부 기법으로 심(心)의 자리매김을 바로 잡았습니다. 1600년 지속된 마음에 대한 오해를 푼 것입니다. 이것으로 불교교학이 제 자리를 잡게될 것이고, 쉬워질 것입니다.”
(유(有)의 이해와 심(心)의 자리매김[붓다고사 스님의 오해],유튜브법문)
해피스님의 유튜브법문에 따르면 붓다고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붓다고사의 주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붓다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은 것이 해피스님이라 합니다. 해피스님은 니까야를 새롭게 해석하여 ‘삶의 메커니즘’ 또는 ‘마음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합니다.
해피스님은 붓다고사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붓다고사의 오류가 16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고 합니다. 이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인 붓다고사이래 1600년 만에 해피법당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바로 잡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해피스님은 붓다고사 보다 더 위대한 주석가가 됩니다.
선발주자를 따라잡으려면
논장을 부정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중표교수가 대표적입니다. 이중표교수는 자신의 논문과 저서, 그리고 각종 강연에서 아비담마논장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고 말하면서 ‘엉터리’ 등 심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 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 잡으려면 선발주자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예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승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부파불교시대 말기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 대승불교는 소수였습니다. 그때 당시 최대부파는 ‘설일체유부’였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따라잡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류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부의 ‘유론’을 지적하여 자신들은 ‘아공법공’이라 합니다. 공의 논리로, 공의 잣대로 유부를 논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이름 있는 자와 겨루는 것이 가장 빨리 이름을 알리는 방식입니다. 정치신인이 단번에 성장하려면 정치거물을 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물의 약점을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대승불교가 최대 세력을 형성했던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대하여 ‘아공법유’로 몰아 부치고 자신들은 ‘아공법공’이라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명성을 드날리려면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는 방법에 대한 것이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아바야 왕자의 경(M58)’에 따르면,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따뿟따는 아바야 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교사합니다.
ehi tvaṃ rājakumāra, samaṇassa gotamassa vādaṃ āropehi. Evaṃ te kalyāṇo kittisaddo ababhuggacchati abhayena rājakumārena samaṇassa gotamassa evaṃ mahiddhikassa evaṃ mahānubhāvassa vādo āropitoti.
“왕자여, 와서 수행자 고따마를 논파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아바야왕자는 수행자 고따마를 이와 같이 큰 신통력과 이와 같이 큰 능력으로 논파했다.’고 휼륭한 명성을 드날릴 것입니다.”(M58, 전재성님역)
니간타 나따뿟따는 아바야 왕자를 시켜 부처님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질문을 해서 답을 못하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바야왕자가 부처님을 꺽게 되는 것이 되어 명성을 날릴 것이라 합니다.
어떻게 교사했을까?
그렇다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떤 방법으로 교사 했을까요? 경에 따르면 두 가지 질문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합니까?”라고 질문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틀림 없이 “여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합니다.”라고 답할 것이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존자여, 여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한다면 그대와 대부분의 일반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일반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합니다.”라고 질문하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하라고 한 것은 데바닷따에 대한 부처님의 조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승단의 분열을 초래케 한 데바닷따에 대하여 조치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다, 교단분열의 대명사 데바닷따(2015-06-14)’와 ‘ “바다를 독이 든 단지로 더럽힌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과 데바닷따(2015-06-24)’라는 제목의 글을 율장에 근거하여 글을 쓴 바 있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가 교사한 것은 부처님에게 곤란한 질문을 하여 꼼짝못하게 함으로써 꺽으려 한 것입니다. 명성을 드날리기 위한 방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뿔달린 질문으로
니간타 나따뿟따는 부처님의 약점이라 볼 수 있는 데바닷따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라고 아바야왕자에게 교사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아바야 왕자에게 “그렇다면 존자여, 그대는 왜 데바닷따에 대하여 ‘데바닷따는 괴로운 곳에 있고, 데바닷따는 지옥에 있고, 데바닷따는 그 곳에서 일 겁을 머물고, 데바닷따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선언합니까? 그대의 그와 같은 말에 데바닷따는 화를 내고 불만을 터뜨립니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물었을 때 아마 부처님은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 맬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Imaṃ kho te rājakumāra, samaṇo gotamo ubhato koṭikaṃ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neva sakkhiti uggilituṃ. Neva sakkhiti ogilituṃ3. Seyyathāpi nāma purisassa ayosiṅghāṭakaṃ4 kaṇṭhe vilaggaṃ, so neva sakkuṇeyya uggilituṃ, neva sakuṇeyya ogilituṃ. Evameva kho te rājakumāra samaṇo gotamo imaṃ ubhatokoṭikaṃ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neva sakkhiti uggilituṃ, neva sakkhiti ogilitunti.
“왕자여, 그대가 이 수행자 고따마에게 두 개의 뿔이 달린 질문을 제기하면, 그는 그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의 목에 쇠고챙이가 걸리면, 그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듯이, 그대가 이 수행자 고따마에게 두 개의 뿔이 달린 질문을 제기하면, 그는 그것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것입니다.”(M58, 전재성님역)
여기서 ‘두 개의 뿔달린 질문(ubhato koṭikaṃ pañhaṃ)’이란 주석에 따르면 양극단이 있는 질문을 말합니다. 한쪽을 인정하면 한쪽을 부정해야하는 질문을 말합니다. 이렇게 양극단의 질문을 했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것입니다. (neva sakkhiti uggilituṃ, neva sakkhiti ogilitunti)”라 했습니다.
붓다고사스님이 틀렸다?
어느 시대에나 유명해지고 하는 자는 유명한 자를 꺽어야 합니다. 종종 선사들이 ‘법거량한다’고 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승부를 가리는 형식을 말합니다. 질문을 해서 상대방이 꼼짝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종종 학자나 스님이 논장을 인정치 않은 것도 논장을 밟고 넘어서야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논장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대체로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부정하기 합니다. 좋은 예가 ‘삼세양중인과’입니다. 용수의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가르침을 해석하려는 자들은 한결같이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합니다. 논장을 부정해야만 자신들의 이론이 설자리를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해피스님도 붓다고사를 극복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스님은 유튜브강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붓다고사 스님이 결정적으로 어떤 실수를 하셨느냐하면, 찟따가 수와 상을 형성하는 것이라 했어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찟따가 수와 상보다 앞에 있어야 하잖아요. 뒤에 있는 것이 앞에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조건지어지는 관계에서.”
(해피스님, 유(有)의 이해와 심(心)의 자리매김[붓다고사 스님의 오해], 유튜브동영상)
해피스님은 ‘붓다고사스님이 틀렸다.’고 했습니다. 5세기 스라랑카의 위대한 주석가를 한마디로 틀렸다고 했습니다.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는 해피법당에서 제공되고 있는 유튜브동영상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데체 무엇이 틀렸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테라와다 빅쿠(2016-12-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틀렸다는 것일까?
해피스님이 붓다고사에 대하여 비판한 것은 심이 왜 수와 상보다 앞서느냐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접촉했을 때 식(윈냐나)가 생겨나는데, 이 식은 촉, 수, 상, 취, 유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식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식이 새끼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에 따르면, 붓다고사는 심(찟따)가 수와 상보다 더 앞서는 것이라 하여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유튜브동영상에서 “상과 수가 심을 형성하는 작용이다. 요거 오랜세월을 ‘심의 작용이 상과 수다’라고 거꾸로 해석하는 것 때문에” (마음특강2015-5주차) 라 했습니다. 붓다고사 이래 논장에서 식과 수와 상과의 관계를 거꾸로 해석한 것이라 합니다.
해피스님에 따르면 기존 십이연기 해석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방식을 말합니다. 또 식이 앞서고 마음부수가 따라 가는 형태를 비판하는 것이라 봅니다. 해피스님에 따르면 마음이 선구가 아니라 합니다. 수와 상이 심(마음)을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동영상강좌를 보면 ‘내입처, 외입처, 새끼쳐진 식’으로 설명하면서, “몸통은 누적된 식이 의라는 마음의 몸통이에요”라거나 “새끼쳐진 식이 함께 하는 것으로 느낌이 온다.”라거나, “식에 바톤을 넘겨준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식이 먼저 이끄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쳐진 식이 자기활동을 통해서 몸집을 부풀렸다.”(마음특강2015-5주차, 29분52초) 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설명방식은 이중표교수의 논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해피스님은 심행이 수행과 상행보다 앞서는 것이라 설명한 붓다고사에 대하여 이를 ‘오류’라 하여 논장을 간단히 부정해 버렸습니다. 이런 태도는 이중표교수도 동일합니다. 해피스님이나 이중표 교수를 따르는 자들은 오부니까야에서 주석을 보기 보다는 오로지 본문만 읽고서 판단해야 할 듯 합니다. 주석은 단지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서 본문의 문맥 등을 파악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부족하다면 새롭게 해석한 해피스님이나 이중표교수의 가르침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빠알리삼장에서 한축을 이루는 논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입니다.
해피스님은 기존 논장의 십이연기 해석방식을 전면 부정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 방법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논장에서]거꾸로 해석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삶의 이야기를 풀어 내지 못했었죠”라 말합니다. 십이연기가 거꾸로 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설함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해피법당에서 1600년 만에 심행의 방향을 되돌렸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Papañcasūdanī, 멸희론소(滅戱論疏)
해피스님의 유튜브동영상을 들으면, 해피스님은 붓다고사 보다 더 탁월한 스님 같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논장의 부정입니다. 붓다고사가 주석한 사부니까야와 법구경, 숫따니빠따와 같은 주석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일 수 없음을 말합니다. 물론 붓다고사가 편역한 청정도론도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니까야를 니까야로 푸는’ 새로운 해석방식에 따른 ‘삶의 메커니즘’ 또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강조합니다.
해피스님는 동영상강좌에서 ‘붓다고사 스님이 결정적으로 어떤 실수를 하셨다.’라 합니다. 또 “붓다고사 스님은 멸희론소[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에서 심(心)의 형성작용을 잘못 이해해 심(心)의 자리매김에 오류를 초래합니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멸희론서란 맛지마니까야 주석서라 합니다.
멸희론소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습니다. 멸희론서는 빠알리어로 ‘Papañcasūdanī’라 하여 중부주(中部註) 또는 멸희론소(滅戱論疏)라 합니다, 우리말로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입니다. 이를 약어로 표시하면 ‘Pps’라 하는데 이는‘Papañcasūdanī’의 줄인 말입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주석을 보면 ‘Pps.III.109’와 같은 명칭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붓다고사가 주석한 맛지마니까야 주석서 3권 109페이지라는 뜻입니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의도를 간파하고
니간타 나따뿟따는 아바야 왕자를 교사하여 부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두 개의 뿔 달린 질문, 즉 양극단의 질문을 하여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질문을 함으로써 모순을 지적하고 논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바야왕자는 부처님을 찾아 가서 니간타 나따뿟따가 교사한대로 “세존이시여, 여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에는 “여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합니다.”라고 대답해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를 간파하셨는지 “왕자여,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일방적인 대답은 없습니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하자 아바야 왕자는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니간타들은 패한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니간타 나따뿟따가 교사한 내용을 부처님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이야기합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맛지마니까야 ‘아바야 왕자의 경(M58)’에서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질문에 대하여 어린 아이가 목에 가시가 걸린 비유로 설명합니다. 경에 따르면 “마침 어리고 꼼지락대는 어린아이가 아바야 왕자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바야왕자의 자식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주석도 없고 어느 번역서에서도 각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부처님 주치의가 된 ‘지바까’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장자의 품’에 의사 지바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바까의 경(M55)’입니다. 부처님 주치의 ‘지바까 꼬마라밧짜’에 대한 주석을 보면 아바야 왕자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바야 왕자가 지바까를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하고 키운 것에 대한 인연담입니다.
의사 지바까에 대한 이야기는 율장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의사 지바까(Jivaka)의 개복수술과 뇌수술(2016-09-2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기녀 살라바띠가 아이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쓰레기더미에 버렸습니다. 이를 아바야왕자가 발견하고 키운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아바야 왕자의 경에 등장하는 아이는 나중에 부처님의 주치의가 된 지바까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줄의 문장이 독립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과도 연계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시스터메틱(Syatematic)’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임일 말합니다.
아바야왕자 옆에 있는 아이는 나중에 의사가 되는 지바까임에 틀림 없습니다. 주석이나 각주에서는 일체 언급이 없지만 체계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서로 연계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지바까임에 틀림 없다고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아바아왕자는 아이를 끔찍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양극단의 질문에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상황에 대하여 아이가 목에 무언가 걸려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바야 왕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이를 위해 그것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것을 제거할 수 없으면,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오른 손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피가 나와도 그것을 제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제게는 그 아이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입니다.”(M58, 전재성님역)
아바야왕자는 목에 걸린 가시 등이 걸렸을 때 내버려 둘 수 없음을 말합니다. 아이에 대한 연민 때문에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할 것이라 합니다.
목에 가시가 걸려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하는 아이에 대한 왕자의 연민은, 부처님이 중생에 대한 연민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실이 아닌 것, 진실이 아닌 것, 유익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 대신 사실인 것, 진실인 것, 유익한 것이라면 설령 중생이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다음과 같이 법문했습니다.
1)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하지 않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2)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3)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여래는 그 말을 말해야 할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4) 여래는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도,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5)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유익하지 않은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어도 여래는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6) 여래는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을 아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 때에, 여래는 그 말을 때를 고려하여 말합니다. 왜냐하면, 왕자여, 여래는 뭇 삶에 대한 연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M5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실이고 진실이고 유익한 말만을 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 진실이 아닌 것, 유익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수레에 정통한 자가 어느 질문이든지 받으면 곧바로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어떤 질문에도 즉각적으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왕자여, 이들 왕족 출신의 학자, 바라문 출신의 학자, 장자 출신의 학자, 수행자 출신의 학자들이 질문을 준비해서 여래를 찾아 질문을 하면, 여래에게 곧바로 그 답변이 나타납니다. 왕자여, 왜냐하면, 그 법계는 여래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고, 그 법계가 충분히 알려져 있으므로, 곧바로 여래에게 그 답변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M58)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 두 개의 뿔이 달린 것 같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아바야 왕자를 교사하여 양극단의 모순되는 질문을 하여 부처님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끔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그런 질문이 사실이 아닌 것에 기반하고, 진실에 아닌 것이고, 더구나 유익하지 않은 것이라 침묵했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교사는 수포로 돌아 간 것입니다. 그대신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시실인 것, 진실인 것, 유익한 것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왜 논장을 인정하지 않을까?
유튜브동영상에는 사실이 아닌 것, 진실이 아닌 것,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넘쳐 납니다. 무엇 보다 빠알리삼장의 한 축을 이루는 논장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개의 다리로 지탱되는 향로가 다리 하나가 부러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빠알리삼장중의 한축에 해당되는 논장을 부정하는 세력은 가르침을 부정하는 세력과도 같습니다.
빠알리 논장은 율장과 경장과 함꼐 한 축을 이루어 삼장(Tipitaka)라 합니다. 그런 논장은 부처님당시부터 체계화 되었습니다. 부처님당시에 아비담마 논장이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만일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부정하는 자가 삼세양중인과를 인정한다면 모순에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자들은 기존 주석서와 주석가를 부정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아바야왕자의 경에 따르면 니간타 나따뿟따의 아바야 왕자에 대한 교사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 진실이 아닌 것,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가르침을 논파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욕망이 앞섰습니다. 부처님을 논파하면 바로 부처님 지위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논파하면 그 순간에 “훌륭한 명성을 드날릴 것입니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빠알리 삼장은 불자라면 누구나 배우고 지켜야할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은 삶의 메커니즘과 마음의 메커니즘을 훌륭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 많은 제자들이 완성해 놓은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럼에도 논장을 무시하고 삶의 메커니즘과 마음의 메커니즘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삶의 메커니즘과 마음의 메커니즘은 논장에서 이미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대한 주석가들에게 오류가 있다 하여 이를 전면부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시키는 행위는 명성을 드날리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멍에를 여읜 위없는 안온을 얻는 데 장애가 된다.”(S17.1) 라 했습니다. 빠알리 삼장중에 논장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혹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것이 아닌지 염려됩니다.
2017-03-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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