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총무원장직선제 공청회를 보고
글을 쓸 때는
글을 쓸 때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을 쓰는 것입니다. 그날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쓰는 것입니다. 만일 글에서 느낌이 빠져 버린 다면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마치 논문 읽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 개입 되지 않았을 때 개성의 소멸입니다.
법문이나 논문이 아닌 블로거의 글에는 그 사람만의 개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었을 때 공감할 것입니다. 느낀 것이라 하여 모두 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날 가장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것이 대상이 됩니다. 마치 임종을 앞두고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중업(重業)이 대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임종순간에 가장 무거운 업이 다음생을 결정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과보를 맺는 우선순위에 따른 네 가지 업이 있다고 하여 1)무거운 업(garuka-kamma), 2)습관적으로 지은 업(āciṇṇa-kamma), 3)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nna-kamma), 4)이미 지은 업(kaṭattā-kamma)순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루 일상에서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나 가장 강렬한 기억이 글쓰기의 대상이 됩니다.
시민청에 갔는데
2월 28일 서울시청 ‘시민청’에 갔습니다. 총무원장직선제 관련 공청회가 있는 날입니다. 모든 것이 민주화 되는 시대에 유독 한국불교에서만 민주화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뜻 있는 스님들과 재가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는 날입니다. 평일 그것도 오후 점심 바로 이후에 열리는 날입니다. 그래서일까 재가자들 보다는 스님들이 더 많습니다.
공청회는 시민청 지하 2층에 있는 ‘태평홀’에서 열렸습니다. 태평홀 바로 옆이 ‘바스락홀’입니다. 작년 6월 바스락홀에서 직선제토론회가 열린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르침과 계율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부대중이 직선제를 바라는 이유(2016-06-15)’라는 제목으로 참관기를 올린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만에 공청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식명칭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직선제 실현을 위한 공청회’입니다.
태극기 혐오증을 유발하는가?
평일날 시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월급생활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인사업자이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공청회가 오후 1시에 열리기 때문에 명학역에서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 내렸습니다. 시청 광장에는 텐트가 쳐져 있고 태극기가 이곳 저곳에서 펄럭입니다. 특이하게도 성조기도 보입니다. 그리고 붉은 색의 국방부를 상징하는 깃발도 보입니다. 아마 태극기집회측 사람들 같습니다.
태극기가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3.1절을 앞두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태극기가 탄핵반대 집회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태극기 혐오증’이라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국기를 시위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생한 것입니다.
일등으로 도착하여
시청부근에서 식사를 간단히 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30분전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 대한불교청년회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전준호님이 참여불교재가연대 회원들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거들어 주었습니다. 모금함이 있어서 모금통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일등’으로 도착한 것입니다.
태평홀 문앞에서 서 있을 때 허정스님이 도착했습니다. 선일스님과 도정스님과 함께 왔습니다. 선일스님은 작년 9월 뵙고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때 당시 허정스님과 함께 전국을 일주하며 이사찰 저사찰 다니고. 또 스님들을 만나며 유행을 하던 때 이었습니다.
허정스님과 선일스님이 서울에 왔을 때 조계사 극락전에서 서울에 사는 천장사신도들과 함께 만났습니다. 그때 김종연님도 함께 했습니다. 이에 대한 소감문을 어떻게 해야 기복을 극복할 수 있을까?(2016-09-0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을 초면이라 합니다. 그러나 두 번 째 보았을 때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됩니다. 자주 보는 사람을 구면이라 하지만 사실상 두 번째 만남부터 구면이 됩니다. 그래서 첫인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청회에서 구면들이 많습니다. 선일스님도 그 중의 한분입니다.
도정스님을 아는 체하고
글만 쓰다가 재가활동을 한지 이제 만 2년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활동한적이 없기 때문에 재가활동가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토론회나 공청회 등을 참여하고 부터는 안면을 많이 익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블로그를 알고 있고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글을 매게로 하여 대화를 하면 술술 풀려 가는 듯 합니다. 그런 분들 중의 하나가 도정스님입니다.
도정스님을 만났습니다.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여 마치 장군처럼 보입니다.허정스님과 함께 왔습니다. 스님의 명성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봉주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스님의 법문을 인터넷에서 듣고 글을 쓴 바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체 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친절하게 응대해 줍니다.
스님과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정봉주의 사과에 대하여 약간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정봉주가 팟캐스트 방송할 때 발언이 문제 된 바 있습니다. 조계종에서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이에 정봉주는 적당히 타협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도정스님은 징계 당하여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은 현재 제주도 서귀포 남원읍에 작은 토굴 ‘남선사’에 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오면 찾아 오라고 합니다. 스님에게 음악씨디 2종세트를 드렸습니다.
금강경을 알리는 사람
입구에 서 있으니 스님들과 재가활동가들이 속속 도착합니다. 그 중에는 금강경을 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든이 된 어느 노법사입니다. 노법사에 따르면 조계종에서 배포한 금강경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40년 실참수행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금강경을 다시 해석했다고 하는데 책을 보여 줍니다. 책에는 ‘참 내 뜻으로 만나보는 내 마음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금강경입니다. 또 책 겉 표지에는 ‘조계종 표준 금강경 주석본의 그릇됨을 바로잡음’이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노법사의 법명은 ‘무진’입니다. 고려선원 무진법사라 합니다. 무진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든이 된 노법사는 “금강경의 낙점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공사상’이나 ‘무아상을 말한 것같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노법사는 ‘여시관’이라 했습니다. 금강경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에서 ‘불취어상 여여부동 응작여시관’에서 ‘여시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사띠(sati)가 생각났습니다.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흔히 부처님 팔만사천법문을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 ‘심(心)’자라 합니다. 이를 대승에서는 ‘일체유심조’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이와 다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팔만사천법문을 축약하면 ‘37조도품’이라 하고, 조도품을 축약하면 ‘팔정도’라 하고, 팔정도를 축약하면 ‘계정혜삼학’이라 하고, 삼학을 축약하면 ‘사띠(sati)’라 합니다. 대승에서는 마음 심자 하나로 포커스가 모아지지만 테라와다에서는 ‘알아차림(sati)’ 하나에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림’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은 사띠 하나로 축약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thorough attention’ 또는 ‘wise consideration’이라 하는데 전재성박사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기울임’이라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마나시까라’는 ‘주의 기울임’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 기울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도둑이 도둑질 하기 위해 주의기울인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기울임입니다. 이를 ‘아요니소마나시까라(ayoniso manasikāra)’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치에 맞는 주의기울임,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는 무엇일까요?
이치에 맞는 주의기울임, 요니소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무상, 고, 무아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니소마나시까라에 대해서는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여기고, 괴로운 것을 괴롭다고 여기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없다고 여기고, 부정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Mrp.I.31) 라고 합니다. 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기울임, 아요니소마나시까라에 대해서는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고,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여기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부정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Mrp.I.31) 라고 설명합니다. 전도된 인식을 말합니다.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하여 상, 락, 아, 정으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은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니소마나시까라, 즉 진정한 사띠라 볼 수 있습니다.
노법사는 자신이 해석한 금강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제지 당했습니다. 공청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자신의 책을 선전하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법사가 말하는 금강경 낙점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육조사 현웅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1시가 되자 태평홀 문이 열렸습니다. 스님들과 재가활동가들이 속속 도착합니다. 내부 개조 작업이 있었습니다. 불교닷컴 이석만 대표가 자리를 디귿(ㄷ)자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자리배치가 거의 끝날 때 ‘현웅스님’을 보았습니다.
현웅스님은 인터넷 유뷰브로 매주 접하고 있습니다. 육조사에서는 스님의 일요법문을 매주 유튜브에 싣고 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여러 차례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조계종 소속이 아닌 스님은 비교적 자유롭게 말을 합니다. 스님의 젊은 시절 수행이야기를 들으면 한국불교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유명스님들의 과거 행적에 대하여 몰랐던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도 듣습니다. 이런 이유로 스님의 법문을 즐겨 듣습니다.
스님은 작년 ‘마지’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단지 유튜브법문 잘 듣고 인사만 했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 일요법회에서 “누군가 유튜브법문 잘 듣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스님 법문특징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 가장 기억나는 것을 법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번 공청회에서 느낀 것에 대하여 이번 육조사 일요법회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현웅스님에게 음악씨디 2종 세트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음악을 좋하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 하는 스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것도 법문에서 말할 듯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법문에서 “오늘 이야기 하실꺼죠?”라며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작년 마지에서 ‘쓰리테너 콘서트’이야기를 했습니다. 쓰리테너 콘서트에 참석하여 윤회가 환망공상이라고? 강병균교수의 신종단멸론(2016-10-03)’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때 당시 스님은 재가활동가들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법문했습니다. 이에 재가활동가들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스님은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법에 비추어 말 했을 뿐이라 합니다. 이번 공청회를 듣고 이번주 육조사 일요법문에서 스님이 어떻게 말할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재가자들 보다 스님이 더 많은
공청회는 오후 2시가 되어서 시작 되었습니다. 디귿자 모양으로 재배치된 자리에는 재가자들 보다 스님들이 더 많습니다. 세어 보니 16명 가량 됩니다. 대구 등 먼지역에서 일부로 오신 스님들도 많습니다. 제도권 밖에서 처음 열린 공청회에 용기 있게 참석해 주신 스님들입니다.
직선제는 원래 34대 총무원장 선거 당시 공약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슬그머니 없던 일로 된 것입니다. 종회에서는 염화미소법이라 하여 간선제를 보완한 시스템을 내 놓았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미소법을 밀어 부치려는 듯 작년 3월에 사부대중100인 대중공사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직선제가 60% 이상 다수였습니다.
기득권층에서는 직선제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갖 부정적 요인만 열거하면서 무력화 작업을 시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직선제 열망을 꺽기 어려웠던지 종회에서는 직선특위를 만들어 논의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직선특위에서 권위 있는 기관에 맡겨 설문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스님들의 81%가 직선제 찬성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고무받은 사부대중 100인 공사 멤버들은 공청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공청회는 철저하게 제도권 밖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총무원장 직선제를 열망하는 뜻있는 스님들과 재가의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소위 해종언론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불교언론사들과 야당지 성격이 짙은 언론사들이 가세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소위 제도권 언론이라는 불교신문과 법보신문 기자들은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오신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눈물겹도록 반갑습니다.”
토론자는 네 명입니다. 순서에 따라 박병기교수, 옥복연님, 허정스님, 법응스님입니다. 사회는 김형남변호사가 보았습니다. 먼저 이 모임을 주도하다시피 하고 있는 허정스님은 기조발언에서 “오늘 오신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눈물겹도록 반갑습니다.”라 했습니다. 종단에 바른 소리 했다하여 천장사 주지연임을 거부당하고 미얀마 등지로 떠돌아 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된 스님의 감격에 찬 말입니다.
박병기교수는 교육학 학자로서 윤리적 측면에서 현 상황을 고찰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성직자의 인기는 꼴찌라 합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치인보다 더 신뢰가 낮은 직종이 성직자라 합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 보다 못한 것이 성직자라 합니다. 이런 현상은 불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 합니다.
문중을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고 떼거리로 이득을 취하는 한국불교에서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된다면 한국불교는 추락이 가속화 될 것입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어서 올해 처음으로 제도권 밖에서 사부대중이 모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이른바 샤이혁신세력을 적극적인 직선제의 장으로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가 관건”이라 했습니다.
옥복연님은 비구와 비구니의 성차별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30년 전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30년 전 육문스님과 함께 비구니 성차별에 대하여 논의 했으나 현재 관철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투표권이 대표적입니다. 현재 비구니 스님은 종회의원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투표권이 확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김기한 화백이 만든 유튜브 동영상에는 “비구니 스님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합니다”로 시작합니다.
토론의 달인이 되려면
토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공감하면서 또 한편으로 저 자리에 앉기 까지 과정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회자나 토론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울만치 배웠고 알만큼 아는 자들, 그리고 지위가 있는 자들이 앉는 자리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토론에 능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토론에는 능하지만 웅변을 잘 할 수 없고, 웅변은 잘 하지만 글을 잘 쓸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뛰어난 팔방미인이라면 금상첨화 일 것입니다.
아직까지 토론대회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토론자로서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습니다. 토론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토론으로 단련 된 사람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것이라 봅니다. 마치 영어 잘하는 사람이 외국인을 만났을 때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일 것입니다.
토론을 잘하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토론을 해 본 적이 없지만 글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아마 매일 11년간 써서 습관이 되어서일 것입니다. 토론자들도 수 많은 토론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토론의 달인이 된 듯합니다. 객석에서 지켜 보면서 토론자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그들은 토론의 전문가들이라 여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토론을 잘 할 수 있을까?
토론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토론은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그사람이 지혜 있는지 알려면 토론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토론 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의미 있는 말이나 심오한 말은 경험과 체험에서 우러나옵니다. 사유의 영역을 뛰어 넘지 못하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자만이 자신의 체험을 말로써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논의 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 (A4.192)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갑니다. 때로 자신의 감이 맞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단견, 편견, 오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오래 지켜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계행이 바른지, 그 사람이 정직한지, 그 사람이 견고한지,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는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토론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초기경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토론의 달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토론했을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 대화법에 대하여(2016-08-1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토론을 해 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지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지만으로 대통령을 뽑았을 때 모두가 불행해지듯이 토론하는 것을 보고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토론에는 토론하기에 부적합자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고는 옳고 그름에 입각하지 못하고, 취지에 입각하지 못하고, 알려진 발언에 입각하지 못하고, 절차에 입각하지 못하면,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A3.67)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 토론부적합자에 대하여 말씀 했습니다. 이 중에 네 번째 절차에 입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식사할 때와 같이 적당하지 않은 시간에 진지한 질문을 하거나, 토론의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이다.” (Mrp.II.309-310) 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자입니다.
토론의 달인이 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불교토론에서는 가르침을 많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아는데 있어서 학위나 지위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토론의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많이 알면 알수록 달인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 진실만을 이야기할 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때 토론의 달인이 될 것입니다.
연탄재와 눈사람굴리기
제도권 밖에서 처음으로 열린 직선제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의식있는 용감한 스님들이 다수 참석했습니다. 공청회가 열리는 도중에 108스님과 108재가자 명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청회가 끝나기도 전에 각각 108명을 채운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늘어나서 현재 직선제에 동참하는 스님서명발기인은 116명이고 재가서명발기은 140명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대박입니다.
어떤 이는 스님 100명만 모이면 시선을 주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스님 1000명이 모이면 어떨까요? 아마 한국불교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도권 밖 직선제 공청회에 공감하는 스님서명자가 당초 목표로 삼았던 108명을 넘어 116명인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 불어 나고 있습니다. 어느 스님 말하기를 양 손에 두 분 스님 모셔 오면 백명이 삼백명이 되고, 또 모셔온 스님 두 분이 양손에 모셔오면 삼백명이 구백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천명 채우기는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눈사람 굴리기 같습니다.
눈사람을 만들 때 방법이 있습니다. 불과 삼사십년전 연탄을 땠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산동네와 달동네에서는 연탄재를 활용하여 미끄러움을 방지했습니다. 그런데 연탄재는 눈사람을 만드는데 있어서 ‘코어(Core)’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연탄재 하나를 굴리면 자꾸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공청회에서 발기인에 포함된 스님들과 재가자들은 마치 연탄재와 같이 직선제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코어역할을 할 것입니다.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연탄재로 눈사람을 만들 때 작은 연탄재를 굴리면 자꾸 커집니다. 2월 28일 서울시청에 있는 시민청 지하2층 태평홀에서는 의미 있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앞으로 한국불교를 바꿀 수 있는 모임이 태동된 것입니다. 116명의 용기있는 스님들과 140명에 달하는 재가활동가들이 모여서 연탄재와 같은 코어 역할을 했을 때 스스로 굴로 갈 것입니다. 굴러가면 굴러 갈수록 커질 것이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처님이 처음으로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와 같은 것입니다.
가르침의 바퀴는 오직 앞으로만 굴러갈 뿐입니다. 옆으로 갈수도 없고 후진도 안되는 전진만 있는 가르침의 수레바퀴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쎌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 M92)
2017-03-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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